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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이 알 품는듯한 지형은 천하제일 '명당'
[이종호의 과학유산답사기 제3부]<14-1>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달실마을(국내 명승 60호)
의성에서 산운마을의 정취를 맛보며 차를 몰아 경상북도 봉화읍 유곡리에 자리 잡은 달실마을로 향한다. 달실이란 이름이 다소 이상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겠지만 이 마을은 우리나라 4대 명당 중의 하나로 알려진 곳이다. ‘택리지’의 이중환은 달실마을을 포함해 안동 내앞마을과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을 삼남의 4대 명당으로 꼽았다.
달실마을이 4대 명당으로 알려진 것은 특이한 지형 때문이다. 이 마을은 동북에 있는 문수산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그 줄기에서 서남으로 뻗어 내려온 백설령(白雪嶺)이 있다. 백설령은 암탉이 알을 품은 듯한 형세로 5시 방향(간좌곤향·艮座坤向)으로 마을을 내려다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안산인 옥적봉은 수탉이 활개 치는 형상을 하고 있다.
마을 서쪽의 백설령을 ‘자계(암탉)’, 동쪽의 옥적봉을 ‘웅계(수탉)’로 보면 달실마을의 지세는 수탉과 암탉이 서로 마주보고 사랑을 나누며 알을 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명당이 된다. 닭이 알을 품은 형태는 자손이 번창하는 동시에 재산도 크게 늘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달실은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형 전통마을의 모습이다. 뒷산을 배경으로 촌락이 구성돼 있고, 그 앞에 논이 있으며 다시 그 앞에는 작은 개천이 흐르는 포근한 모습을 띤다.
●상서로운 ‘닭’ 관련된 마을 많아
유곡리의 달실마을 외에도 이런 명당이 많은데, 이들도 대체로 ‘닭’ 자가 들어간 이름을 가졌다. 충북 청원군 현도면 달계리 ‘달개(닭애)’, 전북 장수군 계내면 삼봉리와 전남 담양군 창평면 오강리 등에 있는 ‘달구명당(닭의 명당)’, 고창군 상하면 하장리와 고창군 무장면 덕림리 ‘닭메(계산)’, 정읍시 웅동면 상산리 ‘닭매미’ 등 모두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지형이 금계포란형을 갖춘 땅에 마을을 만들었다.
닭과 관련된 땅이름을 가진 곳은 어디나 좋은 터로 여겨졌다. 닭은 12간지의 동물 중 유일하게 날개를 가졌으며 상서로운 동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또 닭울음은 ‘밝음(광명)’을 가져다 준다고 믿었다. 국어사전을 보면 ‘달구리’라는 낱말 풀이로 ‘이른 새벽에 닭이 울 무렵’을 뜻한다. 그러므로 ‘닭울이>달굴이>달구리’ 즉 닭이 운다는 뜻에서 이 말이 나왔다. 땅이름에 한자의 ‘계(鷄)’자를 많이 붙였는데 이 이름도 ‘닭우리’를 그 바탕으로 한다.
전북 장수읍 용계리는 닭울음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로 유명하다.
조선 태조인 이성계가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운봉 인월역에서 장병을 주둔하고 신호로 삼고 있는 첫닭이 울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날 한밤중에 닭이 울었다. 잠에서 깬 이성계는 이왕 일어난 김에 장병을 깨워 출발했고, 전북 남원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격파했다. 이 승리는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세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성계는 한밤중에 울어준 닭 덕분에 승리했다는 뜻에서 ‘용계(龍鷄)’라 하고, 이 마을 이름을 ‘용계리’라 했다. 이곳에는 이성계의 황산대첩 유적이 있다.
‘닭실’이냐 ‘달실’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달실마을 입구와 입구에 세워진 비석. 원래 ‘달실마을‘이었으나 ‘닭‘을 뜻한다고 해서 ‘닭실마을‘로 표기됐다. 현재 원래 이름을 되찾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이종호 제공
닭이 알을 품은 지형에 집을 짓거나 마을을 이루면 자손이 번성하고 재산이 크게 늘어나며 동시에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들이 많이 배출된다는 게 옛 사람들의 믿음이다. 이를 증명하는 곳이 바로 달실마을이다.
현재 달실마을의 공식명칭은 ‘닭실마을’이다. 마을의 입구에 있는 표지석에도 닭실마을로 적혀있다. 그런데 이곳에서 ‘닭실’이 아니라 ‘달실’로 적는 데는 이유가 있다.
충제선생박물관의 권용철 학예담당은 원래 마을 이름은 경상도 말로 ‘닭실’ 대신 ‘달실’이었는데 정부에서 표준 국어인 닭으로 표기할 것을 권유해 닭실로 바꿨다고 한다. 그러나 달실마을이 국내 ‘명승 60호’로 지정되고, 전통 이름을 찾자는 운동이 일어나면서 다시 달실로 변경하는 운동을 전개 중이다. 이 글에서는 마을에서 원하는 이름인 달실로 표기한다.
●경북 최북단의 오지, 봉화… 도 닦는 ‘단골 장소’
봉화는 경상북도의 최북단에 자리 잡은 오지지만 옛 선인들이 수도와 정진의 장으로 삼은 곳이다. 대표적인 장소가 선비들의 수도장인 청량산(870m)이다. 퇴계 이황은 당호를 ‘청량산인’이라 지어 ‘청량산사람’임을 스스로 인정했다. 뛰어난 문장가이던 최치원도 젊은 시절 청량산에서 학문을 닦아 그의 이름을 딴 ‘치원암’도 있다.
청량산에는 신라의 명필 김생이 10년 묵으면서 글씨공부를 했다는 ‘김생굴’도 있다. 여기에는 김생이 명필이 된 전설이 전해진다. 김생이 9년간 수도하고 하산하려는데, 한 여인이 나타나 자신의 길쌈 솜씨와 겨뤄보자고 제안했다. 두 사람은 어두운 굴 안에서 각자 글을 쓰고 베를 짰다. 그런데 김생의 글씨는 들쭉날쭉했지만 여인의 베는 올 하나 어긋남 없이 완벽했다. 이 사건으로 김생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1년을 더 공부해 마침내 명필이 됐다는 것이다.
봉화산에 있는 산에 많은 사람들이 몰린 것은 은둔의 장소로 적합한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봉화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달실마을도 과거에 오지 중의 오지였음은 물론이다.
●‘충절의 마을’… 일제, 氣 끊으려 철도 건설
나지막한 산과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인 이곳은 충(忠)사상이 지배하던 곳이기도 하다. 평소에는 농사를 근본으로 해 학문에 힘쓰다가도 나라가 위태로워지면 목숨을 다해 나라를 지키던 사람들이 살아온 장소라 ‘충절의 마을’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일설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때도 이 마을 사람들이 강직하고 독립을 위해 온몸을 투신하자, 일제가 마을의 기를 끊기 위해 닭의 목에 해당하는 부분을 뚝 잘라 국도와 철도를 놓았다고 한다. 조용한 마을에 갑자기 기차 소리가 나게 된 이유다.
정치탄압 모두 겪은 선비 키운 마을
봉화군청에서 동북으로 5리 지점에 위치한 달실마을은 조선조 초기의 파란만장한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달실마을의 입향조는 본관 안동인 충재 권벌(權橃, 1478~1548)이다. 권벌은 연산 2년(1496)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2년(1507) 문과에 급제했다. 42세 때인 중종14년(1519) 2월에 예조참판이 됐으나 사화가 일어날 조짐을 보고 외직을 자청해 삼척부사가 됐다. 하지만 그해 11월 그가 우려했던 기묘사화의 피바람에 끝내 휘말려 파직·낙향했다.
권벌은 또 중종 초년(1516)에 조광조와 김정국 등 기호사림파 중심으로 추진한 개혁정치에 영남 사림파의 한 사람으로 적극 가담했다. 그런데 이것이 빌미가 돼 파직 당하고 안동에 돌아갔다가 다음해인 1520년 달실마을에 정착한다. 그의 나이 43살 때의 일이다.
이 때의 일을 달실마을의 ‘황토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남곤과 심정의 무리가 갖은 모략으로 사화(무오사화)를 일으키기 위해. (중략) 한 시대의 어진 선비들을 체포해 파면시켰는데 선생(권벌)도 파면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낙향한 권벌은 달실마을에서 후진을 양성하다가 중종 28년(1533)에 복직돼 우찬성(右贊成)까지 올랐으나 1545년 을사사화로 다시 파직됐다. 명종 2년(1547)에 ‘양재억 벽사사건’에 연루돼 전라도 구례를 거쳐 평안도 삭주로 유배된 이듬해인 1548년 71세의 나이로 압록강가의 신의주 부근 삭주에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달실마을로 운구돼 장례가 치러졌고 사후에 관작이 회복됨은 물론 영의정에 추증돼 선조21년(1588) 삼계서원(三溪書院)에 배향됐다. 삼계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8년(1871)훼철됐다가 1960년 복원돼 봉화를 대표하는 중심서원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권벌은 이현보, 손중돈, 이언적, 이황 등과 교유한 정통 관리이자 선비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지켜봤고 삼척부사로 있으면서 기묘사화를, 재상의 위치에서 을사사화를 몸소 겪었다. 조선의 최대 정치탄압이라 볼 수 있는 4대 사화를 모두 겪은 것이다.
이런 사화를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고, 더 안전하고 오래 거주할 수 있는 터전을 조성했는데 바로 이것이 달실마을 같은 훌륭한 마을의 단초가 됐다. 화를 피해 낙향했는데 더 좋은 공간을 꾸렸다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실질적 입향조’이자 ‘안동권씨 중시조’인 충재 권벌
충재는 슬하에 4남 1녀를 뒀고, 과거에 급제한 1507년부터 1518년까지 일기를 써서 남겼는데, 이것이 보물 제261호인 ‘충재일기’다.
그런데 정확하게 따지면 달실마을 입향조는 권벌이 아니라 권벌의 5대 조상이다. 그러나 권벌이 들어온 이후 마을이 번성하기 시작해 그를 입향조로 인식했다는 게 한국관광공사 자료에 나온 내용이다. 그 덕분에 본래 차남이었으나 형에게 자손이 없어 종가를 이은 권벌이 안동권씨를 다시 일으켜 세운 중시조가 됐다.
안동권씨는 신라말기 호족이었던 태사공(太史公) 김행(金幸)에서 시작된다. 김행은 본래 경주김씨였는데, 신라말기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큰 공을 세웠다. 이에 왕건은 “행(幸)은 기미에 밝고 권도에 능하다”라며 권이라는 성을 내렸다. 또 그의 고향인 경북 고창을 안동부로 승격시키고 식읍을 줬다.
이렇게 시작된 안동권씨는 조선조에 들어와 상신(相臣) 8명, 경신(卿臣) 70명, 문형(文衡) 3명, 봉군(封君) 70명, 공신(功臣) 88명, 시호(諡號) 61명을 배출하고 문과급제 359명을 내는 명문거족으로 이름을 떨친다.
●100가구 중 97가구가 모두 ‘안동권씨’
권벌이 봉화군(당시는 안동시) 유곡리를 터로 삼은 이유는 이곳이 산도 깊고 물도 맑은 명당인데다 그의 어머니 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알려진다.
우리나라 전통마을은 동성으로 구성된 씨족마을이 대부분이지만 달실마을은 이 부분이 더 강조됐다. 현재 주민은 100여 가구 400여 명인데 권씨가 아닌 타성이 3가구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는 남다른 폐쇄성이 느껴지는데, 이는 그만큼 달실마을이 씨족마을로서의 위상을 지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초승달 같은 대문을 들어가보니…
달실마을의 중심인 ‘충재종택‘의 모습. 대지가 2000평이 될 정도로 대단히 양반가의 전현적인 건물이다. 이종호 제공
달실마을의 봉화 청암정(靑巖亭)과 석천계곡(石泉溪谷)은 국내 명승 60호로 지정됐는데, 마을의 중심은 ‘충재종택’이다.
이 집은 대지가 2000평 정도로 대단히 큰 양반가의 전형적인 건물이다. 솟을대문의 모습이 특이한데 문의 위아래가 초승달처럼 휘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런 월문(月門)은 국내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다. 문지방의 우아한 곡선이 솟을대문의 권위를 부드럽게 해 준다.
솟을대문을 거쳐 안으로 들어가면 ‘ㅁ’자형 본채 전면에 사랑채가 보인다. 사랑채가 안채를 가로막고 사대부의 집다운 위용을 자랑한다. 대문간이 사랑채 중앙에 있는 대청과 일직선상에 놓여 있는데 이는 앞쪽에 있는 남산을 향한 시선이 중시됐다는 걸 보여준다.
조선은 유교를 국시로 삼았으므로 가장 중시한 게 사당(가묘)이다. 충재종택에서는 이러한 사당의 면모를 정확하게 볼 수 있다.
충재종택 경내에는 충재 선생의 불천위 위패를 모시는 ‘대묘’와 불천위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는데 500년이 가깝도록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 사당이 특이한 것은 단청이 칠해져있다는 점이다. 민가에 단청은 금기시하는 것 중의 하나인데 다른 건물도 아닌 사당에 단청을 칠했다는 점에서 안동권씨의 위엄을 엿볼 수 있다. 이 집뿐 아니라 일부 명성 있는 가문에서도 단청을 사용했다.
충재종택 사당은 충재 선생의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500년이 가깝도록 제사를 지내고 있다. 단청이 칠해져있다는 게 특이하다. 이종호 제공
●경회루보다 아름답구나
달실마을이 돋보이는 것은 ‘청암정’과 ‘석천정사’라는 두 정자 때문이기도 하다. 두 정자의 성격은 완연히 다르지만 건축과 자연의 아름다운 조화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같다. 이들 정자를 보기 위해서라도 달실마을에 한 번 답사할 가치가 있다.
충재종택 바로 옆에 있는 청암정은 마을 역사 500년과 함께하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자 중 하나다. 일부 학자들은 경복궁의 경회루보다 주위가 더 아름답다고도 말하기도 한다.
거북이 모양의 바위 위에 세운 ‘T’자형 정자인 청암정은 북서쪽만 폐쇄하고 나머지 세 면은 개방된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규모는 9칸이며 바닥에는 모두 마루가 깔렸는데 50여 명은 충분히 올라갈 만큼 크다. 바위 주변에는 거북이가 좋아하는 물을 담기 위해 인공연못을 조성했는데, 처음에는 거북이를 연상시켜 ‘구암정(龜岩亭)’이라 불렸는데, 이후에는 충재의 큰아들 권동보의 호를 따서 청암정으로 바뀌었다.
원래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있었기 때문에 연못을 팠는데, 그 덕분에 이곳은 인근자연과 인공이 결합한 바위섬이 됐다. 사화 때문에 낙향한 충재 선생은 연못 밖에서 정자로 가는 다리를 건넘으로써 속세와 결별할 수 있는 신선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실천했는지도 모른다.
충재종택 바로 옆에 있는 청암정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자 중 하나로 거북이 모양의 바위 위에 세운 ‘T’자형으로 세웠다. 이종호 제공
청암정을 지을 있었다는 흥미로운 일화도 있다. 청암정의 안쪽 방에 온돌을 만들고 불을 때자 밑에 있는 거북바위가 울었다는 것. 이곳을 지나던 고승이 이 장면을 보고 ‘거북이 등이 뜨거워서 그러므로 불을 피워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자 온돌을 제거했다고 한다.
흔히 아름다운 자연물 위에 인공물을 건축할 경우, 자연물이 인공물에 가려져 그 아름다움을 잃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청암정은 그 반대로 자연물과 인공물이 조화를 이뤄 일찍부터 명사들의 찬사가 이어졌다. 명종 20년(1565) 이곳에서 멀지 않은 도산서당에 기거하던 퇴계는 청암정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하여 시를 짓기도 했다. 다음은 퇴계가 청암정을 주제로 읊은 시이다.
‘충제공께서는 예전부터 깊은 뜻을 품었으나,
끊임없던 화와 복은 순간의 번개와 같이 공허하구나.
지금껏 정자는 기이한 암석 위에 있고
의구한 연꽃은 오래된 연못 속에 있구나.
눈에 가득한 구름에서 본래의 즐거움을 품고
뜰 한쪽에서 자라는 난에서 남겨진 풍취를 보네.
못난 나는 공을 거두어줌에 힘입었는데
늙은 몸으로 읊은 시는 그 뜻을 다하지 못하는구나.’
‘청암정(靑巖亭)’이라고 쓴 현판은 남명 조식의 글씨이며, 서까래 안쪽에 ‘청암수석(靑巖水石)’이란 전서(篆書)로 글씨는 1682년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이 썼다. 허목은 88세의 나이로 천수를 다하고 죽었는데 이 편액이 미수의 마지막 작품이다.
특히 청암정은 주춧돌과 기둥 길이를 달리 조정하는 등 자연미를 그대로 살려 옛사람들의 미적 감각을 엿볼 수 있어 많은 드라마와 영화 속에 등장한다. MBC의 ‘동이’, SBS의 ‘바람의 화원’, 영화 ‘스캔들’, ‘음란서생’ 등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조망권 다툼은 그만…앞집이 뒷집을 가리지 않는다
달실마을도 다른 전통마을처럼 뒤로 갈수록 높아지는 지형히다. 길에 있는 담장이 직각을 이루며 갈라져 산기슭을 향해 뻗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종호 제공
전통마을이 대체로 그렇듯 마을 공간 뒤로 갈수록 지형이 올라간다. 집이 모두 합해 30여 호에 지나지 않으므로 마을이 다소 작게 느껴지지만 흙길로 걸어가는 정취가 남다르다. 남동-북서 방향으로 곧게 뻗은 안길에서 샛길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직각을 이루며 갈라져 산기슭을 향해 짧게 뻗어 있다. 마을은 작아도 샛길이 모두 다섯 갈래로 등고선과 직각을 이루므로 경사가 다소 급하다.
샛길 중 가운데 길이 가장 긴데 그것은 백설령과 중구대 사이의 매우 깊은 계곡을 따라 조성됐기 때문이다. 샛길의 동쪽을 따라 권석주 가옥과 권석오 가옥의 담이 이어지는데, 두 집 간의 경사가 상당해 앞집의 담이 뒷집의 시선을 가리지 않는다.
국내에서 인근 집과의 알력이 벌어지는 큰 원인 중의 하나가 조망권인데 달실마을에서는 그럴 염려가 없다. 권세기 가옥이나 권승호 가옥의 경우 앞에 있는 사랑채와 뒤에 있는 안채도 서로 일조를 방해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열했다. 한필원 교수는 “예외는 있으나 ‘ㄱ’자 집들이 한결같이 남동쪽을 향해 입을 벌리고 북서쪽을 등졌는데 바로 이것이 달실마을 살림채에서 조망과 일조의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한 비결”이라고 지적했다. 달실마을이 갖고 있는 의미를 천천히 새겨가며 과학유산답사를 100배 만끽하기 바란다.
●기암괴석, 금강송, 내성천 있는 아름다운 계곡
마을 앞에 위치한 석천계곡은 전설이 담긴 기암괴석과 금강소나무 숲 사이로 내성천의 물줄기가 흐르는 곳이며 명승 60호가 된 근본 이유다. 석천정사는 물론 바로 옆에 있는 삼계서원(三溪書院) 또한 건축미가 뛰어나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여름철이면 시원한 소나무 숲과 바위계곡에 흐르는 계곡물을 찾아오는 피서객이 끊이지 않지만 일찍부터 보호구역으로 지정돼 훼손되지 않고 과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석천계곡은 일제강점기 때 새로운 길이 세워지기 전의 달실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였다.
마을 서쪽 끝에 위치한 ‘추원재(경상북도 유형문화재 343호)’는 선영의 묘소를 돌보고 제사를 지내던 달실마을의 종묘와 같은 곳이다. 2층의 누각이 포함된 ‘口’자 형태의 추원재는 100명 정도의 인원이 올라갈 수 있을 정도의 규모다. 강의실로도 적격이며 다섯 가족 정도가 숙박하는 것도 가능하다.
추원재 입구에 둘레 4m, 높이 24m가 되는 노송이 있는데 현재는 고사목이 됐다. 이 옆에 둘레 4m, 높이 10m 정도 되는 대형 버드나무가 소나무와 쌍벽을 이루며 자라고 있다.
마을 서쪽 끝에 위치한 ‘추원재‘의 모습. 이곳은 선영의 묘소를 돌보고 제사를 지내던 달실마을의 종묘와 같은 곳이다. 이종호 제공
추원재 뒤로 KBS(한국방송공사)가 제작한 어린이 대상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후토스(Hutos)’의 세트장도 있다. 이 프로그램은 주인공 아라, 모야, 조아, 나도, 시로의 모험과 우정을 담은 이야기다. 세트장이 항상 개방돼 있어 아이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500년 간 내려온 ‘전통한과’… 귀한 보물 있는 ‘충재선생 유물관’
달실마을은 전통한과로도 유명하다. 권벌의 제사에 올리기 위해 만든 이 한과는 500여 년이 넘는 동안 옛 방식을 고집하며 그 맛을 지켰다.
까다롭기로 유명했던 양반 마을의 제사를 준비하며 권씨 집안 며느리들은 손에서 손으로 음식 솜씨를 전해 왔다. 지금도 권씨 집안 며느리들은 매일 한 자리에 모여 옛날 방식 그대로 산자 강정, 약과 등을 만든다. 주문은 많이 들어오지만 전통 방식만 고집해 이를 모두 소화하지 못한다고 한다.
충재종택 옆에 충재선생 유물관이 있다. 작은 박물관이지만 보물 261호인 ‘충재일기’ 6책, 보물262호인 ‘근사록’ 4책, 보물 896호인 ‘우향계축’ 등 전적류 15종 184책, 보물 901호인 ‘연산군일기세초지도’ 등 고문서 15종 274점, 보물 902호인 ‘퇴계선생서’등 유묵 8종 14점 등 문화재가 482점, 기타 유물 등 총 5000여점에 이르는 유물이 전시돼 있다는 점이 놀랍다.
이들은 마을 형성과 함께 자연스레 축적돼 종가에 전해오던 것이다. 전시 중인 일반 동산 문화재도 대부분 종가에 전해오던 것이다. 박물관 자체는 정부에서 지원해 건설했지만 이후 달실마을에서 운영비를 부담하는데 작은 마을에서 이들 경비를 부담한다는 것도 대단하다.
달실마을이 있는 봉화는 볼거리와 먹거리가 풍성하다. 금강송인 춘양목의 고장으로 불릴 만큼 소나무가 많은 봉화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 소나무 반출 금지의 경고문도 볼 수 있다. 청량산 청량사, 서동리삼층석탑과 ‘조선왕조실록’을 관리하던 각화사, 지림사 등도 지근에 있다.
송림이 많아 솔향 짙은 송이 버섯도 유명하다. 봉화는 강원도 양양과 더불어 송이 산지로도 유명하다.
참고문헌 :
『우리 옛 건축과 서양 건축의 만남』, 임석재, 대원사, 1999
『미수 허목선생 소전』, 양태진, 미수연구회, 2004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배우리, 이가서, 2006
『충절세향 닭실』, 충제선생박물관, 2007
『대한민국 베스트 여행지』, 백남천, 나무생각, 2008
『한국의 전통마을을 찾아서』, 한필원, 휴머니스트, 2011
『한옥마을』, 신광철, 한문화사, 2011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정여창 고택)」, 다천당, 2007.03.03
「한옥에서의 하루」, 한국관광공사, 2012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콤비 건물」, 구본준, 한겨레, 2012.07.06
이종호 한국과학저술인협회 부회장/과학저술가
이종호 박사(사진)는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 대학교에서 공학박사를 받았다. 해외 유치 과학자로 귀국해 한국과학기술연구소,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등에서 근무했으며 현재 한국과학저술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하며 과학저술가로 활동중이다.
저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과학이 있는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노벨상이 만든 세상’ ‘로봇, 인간을 꿈꾸다’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등 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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