뿐만 아니라 태안사에서는 전각의 동선을 따라서 곳곳에 비보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도선국사의 풍수는 이곳 태안사에서 스승인 혜철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5, 순천 향림사
순천 비봉산에 자리한 절로 도선국사가 세웠다고 전해진다. 광해군 때 이수광의 글에 의하면 산세의 맥을 진압하기 위해 순천 군민들이 공동으로 재력을 모아 중창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산줄기가 마치 화살촉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이러한 殺氣를 누르기 위해서는 절을 짓고 鐵佛을 안치해 세력을 약화시키고 끝을 무디게 완화시키는 壓勝의 방법이 효과적이었을 것이다.이상을 보면 결함이 있는 땅에 다양한 방법으로 비보를 했지만 몇몇은 결국 폐사되고 말았는데, 이점을 비보의 한계로 보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비보를 했기 때문에 그나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인지의 여부는 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4], 백계산 寺址와 부도 탑 1, 동백나무숲 도선의 부도와 고개 하나 사이로 이웃하고 있는 절터의 지형지세를 살펴 볼 것 같으면, 소쿠리와 같이 오목한 형태로서 국이 다소 협소하다. 순천대 발굴조사팀은 그곳이 玉龍寺址라고 말하고 있으나, 다른 반론에 의하면 그곳은 옥룡사가 아니고 운암사 터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관계로 이하 절의 명칭을 생략한 체 절터라 호칭하겠다.

이곳은 정남향의 지세에 오목한 절터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담장을 치듯 동백나무가 에워싸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도선국사가 지세를 보완하기 위한 목적으로 심은 것이라 말하지만, 그 진위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숲은 누군가가 절터를 비보하기 위한 목적이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이곳 절터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 좌청룡의 끊어질 듯 가냘픔과 水口處의 急落인데, 동백나무는 허약한 두 곳 A B에 집중적으로 군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곳에 동백나무 숲이 없었다면 수구가 휑하니 열린 모습일 것이고, 개미허리 같이 가느다란 청룡의 고개 마루는 더욱 부실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미시적 관점으로 보면 절터는 근본적 결함이 있는 땅으로 썩 좋은 터라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허약한 두 곳을 동백나무로 울창하게 보완한 덕분에 불리함을 상당부분 극복할 수 있었음도 부인할수 없다
2, 도선의 유언 四衆號泣 如慕如凝 遂遷坐 入塔于寺之北岡 遵遺命也 (사중들이 목 놓아 슬피 울고 사모함이 넋이 나간 듯하였으며, 마침내 앉아 열반하신 것을 옮겨 절의 북쪽 언덕에 탑을 세웠으니, 유언을 따른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도선국사의 비가 1910년대 까지도 있었는데, 그 후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도선국사의 부도와 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 파괴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숨겨진 것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일합방 직후 전국각지에서 일인들에 의해 부도 탑 약탈이 극심하였다는 보고서가 있는바, 神僧으로 불렸던 도선의 부도 또한 일본으로 밀반출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997년 비석거리라 불리는 그곳에서 순천대의 발굴조사가 있었는데, 두 개의 비와 탑이 있었음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부도지 밑 석관에서 도선국사로 추정된다는 유골이 발견된 것이다. 그 유골이 도선국사인지 아닌지는 일단 차치하고, 도선의 부도는 이곳에 있었음이 틀림없다.

3, 眞爽塏之壤也 비문에 보면 도선국사 부도의 위치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趺石峻整 階基堅完 實可以傳千祀萬祀 而不傾圮者矣 其堂直寺之東北二百步許 眞爽塏之壤也 (받침돌을 반듯하고 튼튼한 돌로 하였고 계단의 기초도 견고하게 하였으니 실로 천만년이 지나도 기울거나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그 堂直을 절의 동북 200보 지점에 두었다 참으로 헌칠한 곳이다)
爽塏 : 위치가 높아서 앞을 내다보기에 썩 좋은 곳
실제로 그곳은 산 중턱에 있어 전망이 좋은 곳이며, 주변에는 동백나무가 울창하게 군락을 이루고 있다. 발굴이 되기 전에는 개인 소유로 어느 가문의 묘소가 있었는데, 아마도 도선의 부도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명당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위 문장을 해석한 여러 문헌을 보면 ‘명당이다’ ‘헌칠하다’ ‘헌걸차다’ ‘부도의 위치가 陰宅의 조건에 부합된다’ 등등 일관되게 좋은 의미로들 해석을 하고 있다. 아마 도선국사가 풍수의 비조라는 선입견이 부도 터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할 수 뿐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음택의 동기감응논리로 보면 출가한 스님에게 명당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러한 표현들은 오히려 도선이 자신의 죽은 육신에 집착하는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으므로 신중할 필요가있다.
4, 부도와 現 운암사의 관계 사진을 보면 도선의 부도가 현재의 운암사를 비보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운암사는 최근에 지어진 것이다. 도선께서 운암사를 창건했다는 기록은 분명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아직까지 파악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 지어진 것과 관계없이 도선의 부도가 실제로 운암사를 비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가정 하에 살펴보겠다.


그림에서 보듯이 이곳 운암사는 산의 등이고 골짜기이며, 수구가 넓게 열린 지형이다비보라 함은 수혜대상이 최소한의 기본적 요건을 갖춤으로서 이로움을 얻을 만한 위치에 있어야하는데, 이곳의 입지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역부족인 지형이다. 최근에 절을 지을 때 그러한 문제점을 알기 때문에 절의 입구에 연못을 파고 흙을 높게 쌓아 백호를 조성했다. 그러나 비보만으로 모든 땅이 개과천선하지는 않을 것이다. 도선의 부도는 이곳 운암사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음이다.
5, 정리 이제까지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자. 1, 도선께서는 비보풍수를 강조하였다. 2, 도선은 열반하면서 자신의 부도 터를 지정하였고 3, 제자들은 도선이 정한 그 땅에 부도를 세웠다. 4, 그 후 통진대사도 스승의 곁에 자리했다. 5, 도선의 부도와 현재의 운암사는 특별한 관계가 아니었다. 6, 그렇다면 도선께서는 굳이 이곳에 자신의 유택을 지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5], 맺음말 1, 부도 입지의 지형조건 앞에서 보았듯이 많은 사람들이 부도의 위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인문학자들의 정성적 평가와는 달리 풍수인의 定量的 시각으로 보면 도선의 부도는 산의 등(背)이고 급한 경사면이며 움푹 파인 과협처에 자리하고 있다. 이점은 풍수공부를 조금만 했다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매우 기초적인 것인데, 한마디로 풍수에서는 최악의 땅이다. 자연조건이 이처럼 열악하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 지점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보면 부도가 있는 지점은 백계산 전체 중에서 가장 취약한 지점임을 알 수 있다. 바람은 좁은 곳을 통과할수록 유동속도가 빨라지게 되면서 차츰 주변의 지형을 손상시키는데, 이것을 풍수에서는 八曜風 殺風 溪谷風 陰風 疾風 등으로 부른다. 두 고승의 부도는 정확히 그 바람의 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생시에는 그토록 산천순역의 형세를 강조하였건만, 스스로가 원해 전혀 상반되고 모순된 최악의 땅을 취한것이다. 眞爽塏之壤也,(참으로 헌칠하다)라는 말은 형식적인 修辭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런데 위 사진을 보면 도선께서는 어째서 그 넓은 산 중에서 가장 위태롭고 비루한 땅에 자신의 육신을 묻어 달라고 하였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도선의 부도가 있는 지점은 절의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아킬레스건 같은 곳이다. 마치 톡 치면 끊어질 듯한 조마조마한 곳이니, 도선께서는 절을 보호하기 위해 가장 취약한 지점에 죽은 육신조차 헌신한 것이다. 죽어서까지 절을 지키겠다는 분명한 목적임을 알 수 있다. 학계에서는 도선께서 비보풍수를 주장했다고 말하지만, 그가 생전에 실제로 행했다는 비보의 흔적은 공식적으로 어디서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도선께서 그토록 산천을 어루만져 치유하고자 했던 1000년 전 비보의 현장을 비로소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다. 이곳이 바로 도선의 裨補인 것이다.
한편 이곳까지의 산줄기 흐름을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산경표에 의하면 호남정맥의 장엄한 산줄기가 마지막으로 힘을 멈춘 곳이 이곳 백계산이며, 특히 절터는 겹겹이 둘러싸인 중심점에 위치 하고 있다. 근시안적 안목으로는 결함이 있었지만, 하늘 높은 곳에서 보니 예사롭게 넘길 땅이 아니다.


여기서 동리산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리산은 도선이 태안사에서 혜철국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선문에 입문한 곳으로 젊은 시절 그의 사상적 기반을 다진 곳이며, 백계산은 옥룡사를 중건하고 운암사를 창건하여 독자적인 옥룡산문을 개창한 곳이다. 그러므로 동리산은 줄기에 해당되고 백계산은 열매에 해당되니, 산맥의 흐름이 도선의 수행여정과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이곳 백계산 혈처는 자신이 꿈꾸던 이상세계에 대한 염원과 의지가 고스란히 투영되었을 것이라 보아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도선께서는 백계산이 작은 허물 때문에 상처받는 것을 우려해서 자신의 죽은 육신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2, 도선의 구세도인과 대통합 사상 그렇다면 이번에는 도선은 죽어서까지 이 작은 절을 그토록 처절하게 지키고자 했던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玉龍의 뜻을 알기에는 첩첩산중이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본인의 억측임을 전제로 추리해 보겠다.
첫째는 道詵 불교의 密敎的 성향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밀교란 어떠한 儀式과 행위 경전의 독송이나 주문 등으로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으로서 나라의안녕과 개인의 행복을 기원하는 것이다. 실제로 연등회나 팔관회와 같은 밀교적 의식은 태조왕건의 훈요십조에 포함될 정도의 강한 메시지로 고려왕실을 이끌고 있다.

비보사탑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흠결이 있고 부족한 땅일지라도 用處에 맞게 땅을 다스리면 국가와 백성이 태평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 밀교적 擇地觀이다. 이때 밀교에서는 의식을 행하는 장소를 매우 중요시하는데, 여러 불보살과 신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을 택해야 자신의 염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아무 곳에서나 의식을 행하지 않고 아무 땅에서나 수행하지 않으며, 의미 없이 비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선의 부도에는 밀교적 성향의 특별한 목적의식이 있는 것이다.
둘째는 당시의 혼탁한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도선은 1000년을 이어온 신라가 분열되고 백성은 전쟁에 휘말려 신음하자 지리산 異人이 가르쳐 준 山川形勢之法으로 나라를 구하고 사람을 제도하는 대보살의 道를 구현하고자 한다. 그에 따라 도선은 救世度人의 일환으로 왕건을 선택하고 돕게 되는데, 이러한 도선의 적극적 행보는 비문 뿐 아니라 태안사 사적기와 동국여지승람에도 기술되어 있다.

따라서 당시의 시대적 요구와 도선의 염원은 전쟁의 종식과 삼한의 통일이 당면 과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도선의 救世度人 계획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열반하게 된다. 그래서 도선께서는 자신이 미처 이루지 못한 전쟁의 종식과 삼한 통합에 대한 염원을 부도에 담아 백계혈을 비보하여 이상세계를 완성시키고자하는 것이다. 백계혈은 자신이 이루고자했던 이상세계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비록 육신은 죽었지만 혼백은 옥룡이 되어서 자신의 꿈을 실현하고자 함이니, 마치 문무대왕(626-681)이 동해바다의 용이 되어 왜구를 물리치고자 했던 숭고한 愛國爲民의 정신과 같은 것이다. 그 비장하고 결연함 때문인지 도선이 열반한 40년 후 그가 선택한 왕건에 의해 마침내 전쟁의 종식과 삼한통일을 이룰 수가 있었다. 도선이 꿈꾸던 백계혈의 이상세계가 결실을 맺은 것이다.

도선은 산속에서 시대를 관조하기보다는 현실참여에 적극적인 개혁가였으며, 우리의 山河와 민중을 함께 보듬은 위대한 풍수인 이었다. 그런데 작금의 시대도 당시와 못지않다. 남북은 분단되고 동서는 분열되었으며 종교간 갈등으로 당시의 혼탁한 상황과 흡사하니, 도선의 대통합을 위한 거룩한 비보사상은 이 시점 새롭게 재조명되어야 한다. 한편 우리 풍수인들은 救世度人을 실현한 도선의 비보풍수에 자긍심을 갖고 더욱 연구 계승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박혜범, 동리산사문비보, 박이정, 2009년 최원석, 도선풍수의 본질에 관한 몇 가지 논고, 응용지리17호 76p, 1994년 정영호, 흥법사지 석물 실측 및 지표조사보고서, 원주시, 2000년 김두규, 우리땅 우리풍수, 동학사,1998년 황수영, 옥룡사 도선국사비, 선각국사 도선의 신연구351p, 영암군, 1988 최인선,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도선의 부도전지와 석관, 한국문화사학회, 1997 장준식, 중원지방의 석조부도, 한국향토사연구회제1집, 1989 최창조 조인철, EBS풍수기행 비보사찰 회암사, 2007 최병헌, 옥룡사 도선국사비, 선각국사 도선의 신연구353P 영암군, 1988 김동규驛, 인자수지, 명문당, 1992
|
|
momo [2009-10-05 17:24:42] |
한양대 학술토론때 처음뵈었는데 확실한 주장과 명쾌한 설명이 인상이 깊었습니다.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 합니다.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
| |
|
안종선 [2009-12-07 09:41:15] |
왜 석관을 사용했는지 안타깝습니다. 석관은 물을 부르는데, 속성적으로 물과도 가깝다고 봅니다. 아울러 알려지기를 석관을 쓰면 찬 기운이 유골에 미치며 물을 부르는 속성이 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왕릉을 공부하다 보면세조가 내공에 돌곽을 쓰지 말고 회곽을 축조하여 ㅏㄴ소하게 하라고 햇다 하는데, 병풍석과 돌널곽을 없애는 것으로 왕릉축조에 6000명이 들던 것이 3000명으로 줄었다 합니다. 이미 조선시대 이전에 회곽이 존재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 당시, 즉, 옥룡자께서 돌아가실 때는 회곽이 없었는지 궁금하군요. 만약 회곽을 이용했다면 물의 침습이 적었을 것이고 혹 침습이 있었다 해도 물빠짐이 낳았을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
| |
|
안종선 [2009-12-07 09:42:42] |
이날, 서일대학 사회교육원 풍수지리과 학인들이 많이 참가할 생각이었지만 부득이하게 소수만 참가하여 경청을 하였지요. 저도 가지 못했습니다. 다음 기회에는 참가할 생각입니다. |
| |
|
차칸칭구 [2011-12-09 14:28:16] |
지선생님 원광대 2학년 류병렬입니다 공부잘했읍니다 그리고 조인철 교수님관 같이 진행하는 풍수답사 선생님 강의 잘 듣고 잇읍니다 |
| |
| 이 글은 2009년 8월 22일 (토요일) 한양대학교 풍수대토론회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당시 제한된 시간 때문에 발표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포함되었습니다.
[1], 千年을 물에 잠긴 유골 1, 아! 禪師시여 1997년 순천대 박물관팀에 의해 광양 백계산 기슭에서 도선국사로 추정된다는 1000년 전의 유골이 고스란히 발견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유골은 훼손된 부도 탑 아래 땅속에서 발견된 것으로 망자의 육신을 가매장해서 1차로 장사지내고 몇년 후 다시 육탈된 뼈만을 가지런히 추려 관속에 묻은 형태였다. 이와 같은 방법을 2차장 또는 세골장이라 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유골이 물에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는 점이다.


풍수에서 가장 꺼리는 것이 묘지 속에 물이 차는 것인데, 풍수의 비조로 추앙받는 도선국사께서 물에 잠겨 있는 상황은 마치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사람들은 “천하의 도선도 별수 없구나. 제 몸 하나 간수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풍수가 뭐 말라비틀어진 풍수냐”하는 비아냥거림에는 풍수를 공부한다는사실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 발표를 위해 자료를 준비하던 중 순천대 발굴조사팀의 기록을 보면 석관에 물이 찰 수뿐이 없는 구조적 결함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발굴 팀에 의하면 빗물이 삼투압 현상으로 석관 속에 스며들은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유골이 발견된 지점의 표층조사를 보면 위 그림과 같이 애초부터 매우 크게 土壙을 조성했으며, 또 좌우측면은 계단식으로 파고 들어감을 볼 수 있다. 땅은 한번 파이게 되면 生土에 비해 密度가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당연히 빗물의 침투가 따르게 된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회다짐을 완벽하게 하거나 혹은 봉분을 크고 넓게 해서 빗물의 유입을 차단해야 했는데, 이곳은 돌 틈 사이의 공간에 점토를 채우고 흙을 덮어 작은 부도만 세웠을 뿐이다. 이와 같은 구조에서 빗물의 침투는 당연히 수반될 수뿐이 없다.
2, 석곽조성의 미스테리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은 어째서 육탈된 뼈만 묻는데, 그토록 넓은 공간이 필요했던 것인지 미스테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예를 들어 보면 강원도 원주 지정면에 흥법사라는 고찰에서 진공대사(869-940)의 부도와 석관이 발견되었는데, 그 석관의 크기가 94×48×48로 위의 석관과 거의 비슷하다. 1929년 일본인 사학자 小川敬吉(오가와 케이끼찌)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도굴당한 부도 탑의 아래에 흙구덩이가 생겼으며, 그 속에 석관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만약 구덩이 속에 이곳과 같은 석곽이 견고하게 조성되었다면 구덩이라는 표현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 조사와 표현이 있었을 것이다. 진공대사는 태조왕건의 왕사였기에 그의 비문까지 왕건이 직접 쓸 정도로 임금과 각별하였지만, 광양의 석곽처럼 유별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곳 광양의 석곽은 최초에는 또 다른 목적에 의해 넓게 팠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편 발굴 전 이곳에는 도선과 그의 제자 통진대사의 부도 두개가 있었으나, 모두 없어져 어느 곳이 도선국사이고 어느 곳이 통진대사인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도선은 입적 후의 기록이 상세하지 않고 다만 유언에 따라 앉아서 열반하신 것을 옮겨 탑을 세웠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며, 반면 도선의 수제자였던 통진대사의 경우는 입적하자 임시로 가매장하여 육탈시킨후 2년 뒤 왕명에 의해 다시 석곽을 조성하고 부도 탑을 세웠다는 상세한 기록이 비문에 있다.
翌日 奉遷神坐於白鷄山龕 權施石戶封閉 (다음날 신좌를 백계산 감실에 옮기고 임시로 돌을 가져다 입구를 막았다) 故追諡洞眞大師 塔號寶雲 仍令國工 攻石封層塚 (시호를 통진대사라 하고 탑호를 보운이라 하였으며, 나라의 석공에게 명하여 돌을 다듬고 흙을 쌓아 層塚하였다) 越二年 門人等 開龕都形面如生 (2년이 지나서 문인들이 감실을 열어보니 형체가 살아계실 때와 같았다) 乃號奉色身 竪塔于白鷄山東之雲巖崗 遵顧命 (이에 울며 색신을 봉안하여 백계산 동쪽 운암 언덕에 탑을 세웠으니, 임금의 명에 따른 것이다)
즉 발견된 유골의 2차葬 과정과 일치하는데, 그렇다면 이번에 발견된 유골은 도선국사가 아니라 통진대사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이것이 도선의 유골이라면 왕명으로 작업했던 통진대사의 유골까지 이곳 어디에서 발견되었어야 한다.
3, 壙中에 물의 침입을 막는 방법 1000년 전 공들여 작업한 곳인데도 불구하고 물이 가득 찼듯이 요즈음의 엉성한 묘지 작업에는 물이 차는경우가 비일비재하다.
穴吉葬凶 與棄尸同 (혈이 길하지만 장사법이 흉하면 시신을 버리는 것과 같다)
無氣之死土禍輕而 葬乖於法者禍尤甚 (氣가 없어 죽은 땅은 禍가 가볍지만, 장사법이 어긋나게 되면 禍가 더욱 심하다)

땅속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안이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혹시라도 조상의 묘를 쓰고자 한다면 다음과 같은 사항을 유념해야 한다. 이것은 풍수 이론이나 지역, 혹은 관습에 관계없이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첫째 광중의 깊이는 일정한 기준이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땅속은 겨울에 2尺 정도 까지 언다는 것을 감안하면 최소한 4~5尺 정도는 파는 것이 좋다. 둘째 장비의 사용을 제한적으로 해서 광중을 팔 때는 수작업으로 정교하게 조성할 것. 이때 고전적인 葬事法인 석회를 이용하여 내광을 조성하면 더욱 좋다. 이 방법으로 묘를 쓴 곳은 지리적 요건에 관계없이 백골의 상태가 좋은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셋째 하관을 한 후에는 반드시 달구질을 철저히 할 것. 가끔 지방에 따라 횡대를 쓰지 않고 흙을 채우는 곳도 있는데, 횡대가 없으면 달구질 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석회가 빗물과 반응하여 망자의 시신을 미이라처럼 고형화 시키게 된다. 넷째 봉분의 크기는 높이 하기보다는 하부 면적을 넓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가급적 둘레석의 설치를 금할 것.
[2], 史料에 나오는 도선의 풍수 1, 訓要十條 (943년?) 훈요십조는 태조 왕건이 죽기 전 943년에 박술희에게 전한 말로 알려지고 있지만, 이것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은 1010년 이후이다. 그래서 훈요십조 전체가 당시에 정치적 의도로 조작된 것이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치적 의도와는 관계없이 도선의 사후 그의 풍수사상을 엿볼 수 있는 최초의 글이다.
유훈의 2조에는 諸寺院 皆道詵推占山水順逆以開創 道詵云 吾所占定外 妄加創造則損薄也 德祚業不永... 모든 사원은 도선이 산수의 순역을 추점하여 개창한 것이다. 도선이 말하기를 “내가 점정한 외에 함부로 더창건하면 지덕을 손박하게 하여 왕업이 길지 못할 것이다”라고 적혀있다. 사원의 난립을 억제하겠다는 목적이겠지만, 산천의 무분별한 훼손을 걱정하면서 땅을 살아있는 有機體로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碑文 (白鷄山玉龍寺贈諡先覺國師碑銘) 1150년 최유청撰, 1172년 立碑 이 비문은 도선의 사후 252년이 지난 후에야 왕명에 의해 만들어진다. 비문에서는 도참과 풍수가 뒤섞여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도참과 풍수는 다른 것이므로 엄연한 구분이 있어야 하겠다. 풍수지리는 자연지리적 요소를 해석하는 형이하학이라면, 도참은 미래에 대한 靈的인 예언으로 형이상학 이라 할 수 있다.
(1), 도참 가, 집을 고치면 2년 후에 귀한 아들을 낳는다. 나, 행적은 마치 장자방이 神으로부터 글을 받은 것과 같고, 다, 寶誌大師가 앞으로 닥칠 일을 예언함과 같으며, 라, 일행선사가 정통한 貴術에 짝이 된다. 마, 蓍草로 점치지 않아도 미리 아는 것이 무궁하였다.
(2), 풍수 가, 智異山異人... 此亦大菩薩 救世度人之法也....聚沙爲山川順逆之勢示 師自是豁然 益硏陰陽五行之術 雖金壇玉笈 幽邃之訣 皆卽在胸次 智異山異人이 도선에게 세상을 구제하고 인간을 제도하는 법으로서, 모래를 쌓아 산천순역 의 형세를 알려주었다. 그로부터 대사가 환하게 깨닳아 음양오행의 술법을 더욱 연구하여 금단옥급의 비결까지 모 두 마음속에 새겨두었다. 나, 師過其門曰 此地當出王者 但經始者未 諳耳適有靑衣聞之入白 世祖遽出迎入 啓其謨改營之 대사가 그 문 앞을 지나다 말하기를 “이 땅은 의당 왕이 태어날 땅인데, 이 집을 짓는 사람만 알지 못하는 구나”라고 하였다. 마침 하인이 이 말을 듣고 세조에게 알리니 세조가 황급히 나가 영접하여 그가 시키는 대로 고쳐 짓게 하였다. 다, 師所傳陰陽說數篇 世多有 後之言地理者 皆宗焉 대사가 전한 음양설은 세상에 많이 있어, 후일 지리를 말하는 자들은 모두 대사를 근본으로 하였다.

도선이 지리산에서 풍수를 배울 시기에 당나라에는 일행선사(683~727), 양균송(834~906), 복응천(?) 등의 풍수인이 활동한 시기였다. 특히 일행선사는 당나라 현종이 錦囊經이라며 매우 소중히 했던 곽박의 장경에 주석을 달기도 하였다. 따라서 당시 당나라에서 성행하던 형세위주의 풍수조류에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모래를 쌓아 가르쳤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패철에 상당부분 의존하는 理氣法은 모래로서 설명할 성질이 아니므로, 山川順逆之勢란 形勢法이 틀림없다 하겠다. 일설에는 도선께서 일행선사에게 풍수를 배웠다고 하지만, 위 표에서 보듯이 일행과 도선은 시기적으로 많은 차이가 나기 때문에 사실과 다름을 알 수 있다. 다만 일행선사로 부터 이어온 風水類派였을 개연성은 있다.
(3), 眞正法眼 先學無學 眞空不空 眞正法案 四壁六通 (먼저 배움은 배움이 아니고 참으로 공한 것은 공이 아니니, 진정 법안으로 사벽육통하였다) 도선국사는 법안의 경지로서 두루두루 통하여 모르는 것이 없다는 매우 극진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은 풍수를 凡眼, 法眼, 道眼, 神眼의 4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범안은 평범한 안목이고, 법안은 원칙과 규범에 의해 산천을 해석하는 수준을 말하며, 도안은 개안의 단계로 인간으로서 최고의 경지를 뜻한다고 분류하였다. 신안은 초법적인 단계이니 인간의 능력 밖이라 한다. 하지만 요즈음 풍수계는 스스로를 도안이요 신안이라 칭하는 부류가 적지 않은데, 위 글이 시사하는 바가 많다 하겠다. 또 비문에 나오는 내용처럼 도선의 흉내를 내고자 풍수와 도참을 연관시켜서 길흉화복을 즐겨 말하는 경향이 다분히 있는데, 옛말에 “지리학의 응험여부는 오로지 자연에 맡길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도선처럼 개안의 경지가 아니라면 차분히 땅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능력을 키움이 우선일 것이니, 좀 더 진지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3, 宏演의 高麗國師道詵傳 , 白雲山 內院寺 事迹記 굉연은 고려말의 승려로서 나옹선사(1320-1376)의 제자이며 무학대사(1327-1405)와 함께 수행한 승려이다. 그가 지은 高麗國師道詵傳에 보면 일행선사가 도선에게 고려의 산수도를 그리게 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이 만약 병이 들어 위급할 경우 곧장 혈맥을 찾아 침을 놓거나 뜸을 뜨면 곧 병이 낳는 것과 마찬가지로, 산천의 병도 역시 그러하니 이제 내가 점을 찍은 곳에 절을 짓거나 불상을 세우거나 탑을 세우거나 부도를 세우면 이것은 사람이 침을 놓거나 뜸을 뜨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름하여 비보라 한다. 어찌 병이 낳지 않겠는가.. 물론 이것은 일행과 도선의 연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신빙성은 없으나 비보의 원리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1706년에 쓰여 진 白雲山 內院寺 事迹記 에서는 비보의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결함이 있는 땅은 절을 지어 보완하고 기세가 과도한 곳은 불상으로 누르며, 달아나는 곳 은 탑을 세움으로서 머무르게 하고 등진 땅은 당간으로서 불러들이며, 해치려 드는 것은 방지하고 다투는 것은 금지시키며, 좋은 것은 북돋아 키우고 길한 것은 선양한다.” 비보의 원리와 방법에 대해 기술한 것으로 의미가 있다 하겠다.
[3], 裨補寺塔의 사례 도선풍수의 특징은 한마디로 비보풍수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많은 논문과 저서가 경쟁적으로 이를 말하고 있으니, 더 이상의 특별한 언급은 하지 않겠다. 다만 비보에 관한 몇 가지 사례를 살펴봄으로서 이해를 돕고자 한다.
1, 회암사

회암사지의 맨 위 북동쪽 계곡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부도 탑이 놓여 져 있다. 탑의 크기와 형식을 보면 어느 큰 스님의 부도 탑으로 짐작되는데, 학계에서는 국보급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곳은 절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취약한 지점에 해당된다. 급류가 쏟아지게 되면 중요 전각들이 훼손될 수 있는 곳인데, 계곡물이 흐르는 밑으로 배수로를 설치하고 계류위에 부도를 앉혔다. 어느 고승의 부도인지는 몰라도 오로지 회암사를 수해로부터 방비하기 위한 비보책으로 자리하였음이 의심의 여지가 없다.
2, 가야사

현재는 남연군 묘소가 자리하고 있지만,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 위해 불을 지르기 전에는 가야사라는 오래된 절이 있던 곳이다. 이곳의 좌측은 깊은 계곡이 날카롭게 찢어져 있다. 마치 예리한 칼날 같은 모습으로 불길할 뿐 아니라, 直射直衝하는 골바람이 형성되어서 가야사의 옆구리를 찌르는 형상이다. 이 허결함을 보완하고자 미륵불을 계곡의 한가운데 세웠다. 그러나 작은 몸집으로 오랜 세월 홀로 바람을 상대한 탓인지, 초췌한 모습을 하고 있다. 미륵불의 헌신적 희생에도 불구하고 가야사는 불타 없어지고, 그곳에 묘를 쓴 대원군의 조선 또한 망하고 말았다. 이 대목은 추후에 자세히 논할 것이다.
3, 선암사 降仙樓와 昇仙橋

선암사를 좌우로 감싸 흐르는 두 줄기의 물이 합수되어 빠져 나가는 지점에 강선루와 승선교가 있는데, 급한 물살을 제어하기 위한 전형적인 비보이다.
水口之砂最關利害 水口間大橋林木佛舍神廟亦關禍福 (수수사는 이해에 가장 밀접한 것이니 물가에 큰 다리나 나무 佛舍나 神廟 등도 화복과 밀접하다.)
4, 태안사 凌波閣 곡성 태안사는 도선국사가 스승인 혜철을 만나 깨달음을 얻는 곳으로 도선의 사상적 뿌리가 되는 매우 중요한 곳이다.

능파각이란 태안사 입구 계곡에 설치된 누각 모양으로 된 다리의 이름인데, 거친 계류를 진압한다는 뜻이다. 고려 초 937년 광자대사가 중창할 당시에는 薦福樓라 하였다. 복을 천거한다는 뜻이니, 명칭만으로도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선암사 강선루와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계곡 건너로 이동해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음에도 다리를 설치한 것은 급한 계류가 흐르는 수구처를 긴밀하게 하여 水氣의 누출을 막고자 했던 다분히 의도적으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태안사 대웅전 좌측에는 도선의 스승인 혜철의 부도가 있는데, 역시 절의 입장에서 가장 취약한 골바람이 부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앞에서 보았던 회암사의 이름 모를 부도처럼 자신의 도량을 외풍으로부터 지키고자하는 비장함이니, 혜철선사도 비보풍수를 알고 있었음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