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고장의 선사(善士)!
후계(后溪) 김범(金範)의 정려각(旌閭閣)
이 閣은 상주시 가장동(오갈미)275-1에 소재하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기와지붕으로 1633년(숭정6년) 10월에 처음 세워졌습니다. 김범(1512~1566)은 본관은 상산(商山), 자는 덕용(德容), 호는 후계(后溪)·동계(桐溪)이며, 부제학 상직(尙直)의 5대 孫으로 유교를 실천궁행한 상주를 대표하는 선비로, 향풍쇄신에 앞장섰던 분으로 알려지고 있지요.
【정원에 전교하였다. "옥과 현감(玉果縣監) 김범(金範) 『김범은 상주인(尙州人)이다.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시골에서 가난하게 살면서도 기쁜 듯 처신하였고 상대를 온화하게 대하며 규각을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늙은이나 젊은이 할 것 없이 모두에게 환심을 샀다. 한 고장의 선사(善士)였다』 이 죽었다 한다. 내가 슬프고 측은하게 여기니, 그에게 초자(超資)하여 벼슬을 추증하고 특별히 부제(賻祭)를 내리라...(丙申/傳于政院曰: "聞玉果縣監金範死。 『範, 尙州人也。 屢擧不第, 窮居村巷, 處之怡然。 和以接物, 不露圭角, 人無老少, 皆得歡心, 特一鄕之善士也』 予用哀惻。 其超贈爵, 別賜賻祭....)】이 글은 명종실록 33권, 명종 21년 12월 10일 병신 1번째 기사의 한 구절입니다.
선생은 어릴 때부터 詩를 잘 지었으며, 기해년 향시에 으뜸을 차지하였고, 1540년 진사시에 장원을 하였는데, 이 때 시험관인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선생은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으로 한 시대를 저울질 할 인물로 평가하였다고 전한다. 명종이 전국에 숨어있는 어진 선비를 찾아 불러올리니, 남명 조식(南冥 曺植)·일재 이항(一齋 李恒)·대곡 성운(大谷 成運)·석봉 한수(石峯 韓脩)·동강 남언경(東岡 南彦經) 등이 선생과 함께 육조(六條:經明·行修·純正·勤謹·老成·溫和)를 갖춘 경명행수(經明行修)로 뽑히게 되었습니다.
선생은 남명 조식과 함께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고금의 치란(治亂)과 세도(世道)의 청탁,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과 학문을 하는 방법, 가언(嘉言)과 선정(善政)에 대해 듣고 싶다. 숨김없이 모두 말하라」라는 명(命)에 따라 학문과 정치에 관하여 진언을 올리기도 하였으며, 평생을 징사(徵士)로 살려고 하였으나, 명종은 관등(官等)을 뛰어 넘어 옥과(玉果:전북 곡성군)현감을 제수하여, 그곳에서 정사를 돌보다가 1566.11 현지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55세 이다.
상주목사 신잠을 도와 각 고을의 서당 건립에 동참 하였으며, 도곡서당에서 후학에 힘쓰기도 하여 상주의 흥학(興學)에 많은 노력을 하신분이다. 부모에 대한 효심도 남달라 상산지 "효행"편에는 【진사이다. 사친에 효성이 출천하여 몸소 음식이나 약을 달이고 삶고 찌고 하였고, 노복들에게 시키지 안 했으며, 시질에는 상분하고 산제를 지내며 정성을 다하니, 산노루가 스스로 들어오는 이적이 있었다. 인조 때 조정에서 정려가 명하여 졌다(金 範徵士事親至孝躬執烹飪不委諸僕侍疾甞糞及祭山山獐自來其感物如此 仁廟朝事 聞旌閭)】라 적고 있는데, 1635년(인조13년)에 효자로 정려를 받았다.
이 후 선생은 상산김문에서는 유일하게 불천지위를 받은 분으로, 옥성서원에 배향(配享)하였습니다. 묘소는 정려각 맞은편 산록에 숙인 창녕 조씨(淑人 昌寧 曺氏)와 쌍분(雙墳)입니다. 후손 언경(彦慶)이 편집하고, 상렬(相烈)이 간행(1934년)한 후계집(后溪集)이 전합니다. 선생의 아들 사담 홍민(沙潭 弘敏)은 청주목사를 지내셨고, 임란시 충보군의 대장으로, 둘째인 성극당 홍미(省克堂 弘微)는 이조참의로 임란시 형을 도와 의병활동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담은 문경시 산북면의 근암서원에, 성극당은 상주의 봉산서원에 배향되어 있어, 이들 3부자는 효자로, 문장가로, 충절로서 향토를 빛낸 인물이며, 3부자가 각기 다른 서원에 배향된 사실도 실로 드문 일이라 할 것이다(참고: 상산지, 상주 유학사상 존재의의). 뉴스상주(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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