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응봉(蒼鷹峰) 끝자락에 개암정(開巖亭)을 중창(重創)하다!
낙동강 상류 상주보가 호수를 이룬 승경(勝景) 창응봉(蒼鷹峰) 자락 낙강 변에 “개암정”(開巖亭: 상주시 중동면 회상리 산12-5)이 세 번째 다시 세워졌네요. 본래 이 亭은 충청도 관찰사(觀察使)와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개암 김우굉(開巖 金宇宏:1524~1590)이 세운 것으로 임란시 전소(全燒)되고, 1780년에 중건(立齋 鄭宗魯 重建記)하였으나 이마저도 잇따른 병화에 소실되고 말았지요.
선생의 본관은 義城, 호는 開巖, 자는 敬夫이며, 七峰 김희삼의 2남으로 성주 사월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부인은 남양 홍씨(南陽洪氏)로 찰방(察訪) 홍윤최(洪胤崔)의 딸입니다. 자식은 2남 1녀를 두었으며, 개암공파(開巖公派)의 파조이시며, 검간(黔澗) 조정(趙靖)은 개암公의 이질(姨姪)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65년 경상도 유생을 대표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중 보우(普雨)의 주살을 상소하였으며, 1566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선생은 문집을 남겼는데 6대손 김경렴이 1729년 산일(散佚)되고 남은 시문을 수집, 편차하여 행장과 연보 등 부록을 증보하여, 1772년에 목판으로 간행 하였으며 4권으로 구성 되어 있는데 바로 개암집(開巖集)이지요.
선생의 「開巖亭」 詩를 보면 《山本白頭出 江分文莊來 走流多屈曲 凝峙幾縈廻 臺政鰲跌伏 岩眞龍口開 主人晩卜築 恐被白鷗咍 (산은 백두에 근본해 나고, 강은 문장에서 나누어 온다. 빨리 흘러 굴곡이 많은데, 얽힌 때에 몇 번이나 둘렀던고. 대는 정히 새우가 엎드렸으며, 바위는 참용이 입을 벌였다. 주인이 늦게 집을 찾으니, 백구의 웃음을 입을까 두려워하네)》라는 詩를 이곳에서 지었다고 한다.
이 후 선생의 유택은 회상리 응동(鷹洞:산12-5)에 소재하고 있는데, 이곳과는 지척의 거리이다. 선생은 속수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이 후 선생의 후손들은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바래미)로 이거하여 개암종가(開巖宗家)를 이루며 세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개암선생 "언문시비(2010. 7.17)"가 봉화의 개암종택(경북도 기념물 제138호)에 서 있는데, 이곳에 가면 선생의 언문 詩를 접 할 수 있다. 당초 개암 12곡(曲)으로 전하나, 현재는 8곡(曲)만 수집되어 있다 한다. 창작시기는 1585~1587년(상주개호에 머문 시기)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 중에 "開巖" 한 곡을 소개하면 「묻노라 버리바회야 얻디하여 버럿다. 만경창파수(萬頃滄波水)를 다마시랴 버러다 우리도 인간번복(人間翻復)을 몬내 우서버런노라」이다. 이외에도 옥주봉(玉柱峯), 구암(龜巖), 조기(釣磯), 허주(虛舟), 귀래(歸來), 방우(訪友), 삼정암(三呈巖) 등이 전하는데, 특히 삼정암은 중동 개암下 백사장 가운데 있으니, 옥주봉과 강을 사이에 두고 상대하여 서 있고 전설에 ′모래가 이 바위를 묻으면 풍년이 들고 못 묻으면 흉년이 든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담수(湛水)로 인하여 그 모습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다행히 상주 경천대 맞은편인 옛 자리 가까이에 상주시에서 낙동강 전망대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는 개암정을 다시 세워 옛 정취를 느낄 수가 있는데, 정면3칸, 측면2칸, 화강석 장주 초석에 원기둥, 이익공에 겹처마, 팔작와가 지붕(10.29평)으로 2015년을 며칠 앞두고 완공했습니다.
정면을 보면 호수 강 건너로 사벌의 매악산(梅岳山)과 마리산(馬里山)이 보이고, 왼쪽으로는 금산이, 그 옆에 경천대의 옥주봉(玉柱峰)이, 저 멀리에 은척의 남산(南山)이, 오른쪽으로 큰 물줄기를 이룬 낙동강이 곧장 달려오는데 그 물길 끝자락에 영순의 비봉산(飛鳳山:219m)이, 그 오른편에 풍양의 와룡산(臥龍山)이 조망되는 명승지(名勝地)로 낙동강 탐방객과 자전거 동호인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을 것이다(참고: 상산지). 뉴스상주('16.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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