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시

(52) 500여년 만에 복원된 생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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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500여년 만에 복원된 생사당
번호55작성일2015.12.24조회수933
작성자김광희
첨부파일파일받기 크기변환_20151218생사당.jpg
  • 500여년 만에 복원(復元)된 우재생사당(愚齋生祀堂)

    사당(祠堂)이나 사우(祠宇)는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셔 놓은 집을 말하는데 반하여, 생사당(生祠堂)은 감사, 수령 등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그를 생전부터 봉사하는 사당으로 그리 흔치않은 것이다.
    조선왕조실록과 고문서에는 12명 정도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중의
    하나인 「우재 생사당(愚齋 生祀堂)」이 상주시 사벌면 삼덕리 산13-2번지에서 복원 준공(2015.12.18)되어 아주 보기 드문 곳이 되었다.

    주민들이 화상(畵像)을 걸어두고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 손중돈(孫仲暾)선생의 휘(諱)는 중돈(仲暾), 字는 태발(泰發), 姓은 孫씨, 본관은 慶州이고, 호는 우재(愚齋)선생이시다. 27세에 문과급제 하여 양산군수, 김해부사, 상주목사, 경상·전라·충청·함경 4도의 관찰사, 대사헌, 이조판서, 좌참찬, 우참찬을 지내셨다.
    우재선생(1463~1529)은 1506~1509년에 상주목사를 지내셨는데, 그 때가 중종의 원년이라 그간 연산군의 학정(虐政)으로 관가는 질서가 없고, 백성은 떠도는 사람이 많았다 한다. 선생이 도임하여 선정(善政)을 베풀어 정사가 통하고, 백성들이 화합하게 되고 온 고을이 안정 되었다 한다.

    선생의 임기가 만료되어 떠나려하자 백성들이 상소를 올려 유임(留任)을 청하니 조정에서 포상을 내리고 계급을 특진시켜 유임케 하였는데, 그때 마침 상주지방에 흉년이 들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단밀현은 낙동강가라 전 지역이 침수가 되어 아사지경에 놓이게 되자, 선생은 사재를 털어 경주와 김해에서 곡식을 배로 운반하여 생명을 구제하였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傳于吏曹曰: “尙州牧使孫仲暾、勤謹奉公, 惠及於民, 政績卓異, 其特加一資。”【仲暾, 鷄林君昭之子也。 歷任梁山、金海, 皆有治聲。 至是以治效聞, 其父昭曾爲守令, 以治行第一, 爲世所稱, 子能繼之, 可謂無忝矣。 暾常曰: “吾父廉介, 吾所不及。“치적이 뛰어난 상주 목사 손중돈에게 가자하라고 전교하다”
    【중돈은 계림군(鷄林君) 손소(孫昭)의 아들로 양산(梁山)·김해(金海)을 역임하여 모두 치적의 명성이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 치효(治效)가 들리게 된 것이다. 그 아버지 소(昭)가 일찍이 수령이 되어 치행(治行)이 으뜸이었으므로 세상의 칭찬을 받았는데, 아들로서 능히 계승을 하였으니,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았다고 하겠다. 항상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의 청렴하고 개결함은 나로서는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중종 7권, 4년(1509 기사 / 명 정덕(正德) 4년) 2월 7일(기사) 2번째기사) 라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우승지로 승차되어 떠나자 상주의 주민들이 생명의 은인이라며 은혜에 보답하고자, 은택을 가장 많이 입은 단밀현에 사당을 세워 화상을 걸어두고 제사를 지냈으니 바로 "生祠堂"이다.

    그 후 생사당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1635년에 사서 전식, 창석 이준 선생 등의 주선으로 다시 세우고 제사를 모셨으며, 1645년에 우복 정경세가 생사당을 고쳐 경현사(景賢祠)를 세우고, 退齋 申佑선생과 함께 봉향하게 되었다.
    1703년에 다시 속수서원으로 승원 하여 開巖 金宇宏, 黔澗 趙靖, 그 후 可畦 趙翊선생을 추향하여 모시니, 생사당의 본뜻은 없어지고 말았으나 이 생사당은 속수서원의 효시(嚆矢)이다.

    근자에 와서 상주와 의성의 유지들이 ‘은혜를 보답하는 고귀한 정신이 담긴 곳’으로, 특별한 문화재감이라 하여 “생사당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상주박물관 옆에 다시 세우고 고유제를 올린 것이다. 堂은 정면3칸, 측면1칸으로 목조와가 맞배지붕으로 당호는 "愚齋生祠堂"으로 걸었다.
    바로 인접한 박물관 내에 1545년 5월에 세워진 상주의 最古 선정비인 손중돈, 권기의 비가 서 있으며,
    손 목사의 비문은
    「孫公諱仲暾歲丙寅來牧是邦承昏亂政煩之餘躬節儉鎭靜之治弊衿民安農桑盡業秩未滿擢爲治平陞堂上階赴 召尙去人惜其去也願侍而不得立堂以生祠之 祠在 丹密縣」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