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여 년 전에 그림으로 그려진 백화산(白華山:933m)
백두대간이 상주의 최고봉인 속리산 천왕봉(天王峰:1,058m)을 솟구치고 자세를 가다듬어 형제봉(兄弟峰)을 빗고, 다시 비재에서 심호흡을 한 뒤 또 한 봉우리를 들어 올리니 화령 뒤의 봉황산(鳳凰山:740.8m)이다.
백두대간이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살림을 내니 이름 하여 우리는 화령지맥(팔음지맥)이라 부른다. 비산비야(非山非野)하며 화령들을 지나 천택산(天澤山:683.2m)을 들어 올리고, 이어서 남으로 팔음산(八音山:762.3m)을 낳는다.
이어 남동쪽으로 틀어 나비재를 지나 서쪽으로 드디어 큰 산군을 형성 하는데 그 중심이 상주의 자랑, 호국의 성지 백화산으로 상주의 모동·모서면과 영동의 황간면에 걸쳐 있으며, 이어 커다란 배가 하늘을 떠가는 모양의 주행봉(860m)으로 낮아져 초강에 그 맥을 가라 앉힌다.
향지인 상산지에서는 『중모현(中牟縣) 서방(西方)에 있으니 주(州)와의 거리 77리(里)이다. 기괴(奇怪)한 봉만(峰巒)이 우뚝 우뚝 솟아올라 절승(絶勝)을 형용(形容)하기 어려우며 산 아래 대천(大川)이 산을 구비 돌아 南으로 사담(沙潭)에 이르니 넓어지면 담동(潭洞:못과 굴)이 되고 흩어지면 필련(匹練:폭포)과 같으며 계상(溪峠)에는 초벽(峭壁)이 삭립(削立)하고 벽간(壁間)에는 노송(老松)과 기화(奇花)가 많이 있어 일대장관(一代壯觀)이다』라 적고 있다.
백화산은 일찍이 신라 이래 국방의 요새(要塞)로서 태종 무열왕이 백제를 공격하기 위하여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하여 서기 660년 6월21일 이후 백화산 금돌성(지방문화재자료 제131호)에 한 달 이상을 지휘한 곳 이어서 지금도 대궐터가 남아있다.
이러한 연유로 상주의 금돌성은 보은의 삼년산성과 문경의 고모산성을 좌우에 거느리고 사묵을 통일한 성지인 것이다. 고려 때는 몽고군을 격퇴한 승첩지로서 서기 1254년 차라대가 이 성을 공격하자 황령사 스님 홍지(洪之)가 관,민,병을 지휘하여 이곳에서 적을 맞아 금돌성 남쪽의 석천계곡으로 밀어 넣어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다는 저승골의 유래를 낳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하였는데, 1593년 월간이전· 창석 이준 선생이 고모담(鋯鉧潭)의 향병소(鄕兵所)에서 머물고 있을 때 갑자기 왜적이 쳐들어와 창석 선생은 곽난으로 거의 거동이 어려웠으나 형이 동생을 업고 백화산 정상으로 피해 목숨을 건진 사실이 있었다.
이후 창석 선생이 1604년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이 되어 명(明)에 갔을 때 그들에게 피난 사실을 얘기하니 감동하여 화공을 시켜 그림을 그리게 하니 바로 “형제급난도(兄弟急難圖:지방유형문화재 제217호)이다. 비록 화공이 직접 보고 그린 그림은 아닐지라도 400여 년 전에 그려진 최초의 백화산의 그림 일 것이다.
백화산 건너편 만경산 헌수봉 자락 아래 상주의 사액서원중의 하나인 “옥동서원(玉洞書院:지방문화재기념물제52호)”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는 본래 백화산 자락 아래 신덕리로 1580년 방촌선생의 후손들이 백옥영당(白玉影堂)을 건립하고 춘·추로 제사를 지냈는데 이 영당이 옥동서원의 전신이다.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전국 47개 서원중의 하나이다.
이 산에는 그밖에도 많은 유적이 존재하는데 대궐터와 사시사철 물길이 끊어지지 않는 봉황산에서 발원한 석천(石川)이 흐르면서 신라의 악사 임천석(林千石)이 두 임금을 모시지 않겠다며 뛰어내려 자살한 임천석대(일명: 상산의 탄금대)와 저승골, 사담(沙潭), 세심석(洗心石), 난가벽(欄柯壁), 구수천7탄(灘), 백옥정과 예전에는 많은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보현사와 황간쪽에 반야사가 있다.
지역에서는 나라사랑과 애향사랑에 가득 찬 “백화산을 사랑하는 모임”을 만들어 아름다운 산 가꾸기를 직접 실천하고 호국의 길 조성과 항몽대첩비 건립, 백화산 정상의 한성봉(漢城峰)이름찾기, 백화산을 알리는 축제등 정말로 크고 작은 일들을 소리 없이 실행하고 있어 향토 사랑의 귀감이 되고 있다. 2014. 8. 5에는 “백화산역사 문화융성 위원회”를 창립하여 더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는 실정으로 지역민의 백화산에 대한 사랑의 열기는 정말로 대단하다 할 것이다.
이러하듯 지역에서 백화산을 사랑하는 의지가 남다르지만 상주의 백화산이 영동의 백화산으로 알려지고 있어 우리는 백화산 제대로 알리기에 정열을 쏟아야 할 것이다. 지역의 중모중고등· 중모초등· 모서중· 모서초등학교의 교가(校歌)에서도 백화산의 정기와 얼을 쉽게 접할 수가 있으며,
경부고속국도 및 상주~청원간 고속도로와 남북을 잇는 3호· 25호 국도 4차선등 사통팔달 뚫린 교통여건에 힘입어 주말에는 외지에서 관광차 몇 대씩이 백화산에 매료되어 다녀간다. 상주가 웅주였었던 고려 이전까지만 해도 이 산이 상산의 진산 이었던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우리 지역이 포도의 고장이라 진입로변과 등산로, 먹거리촌등에 예쁜 옷을 입혀 청정한 상주의 이미지와 볼거리를 지속적으로 가꾸고 살려야 하며, 또한 상주인 누구나 백화산에 오르면 『상주 알리미』가 되도록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백화산 정상 한성봉
금돌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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