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북상주)

[스크랩] 두 곳(상주,문경)에 효녀각(孝女閣)이 서다.

장안봉(微山) 2016. 8. 3. 22:26

          조선의사(朝鮮義士) 김일(金鎰)의 여식으로

                                           효심(孝心)의 표상(表象)!

 

상주시 낙동면의 향토문화재자료인 “효녀각”입니다. 내곡리 265번지로 면도 변 산자락에 위치하여,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후세들로 하여금 효(孝)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이 각(閣)은 임란시 중앙군과 최초로 교전한 상주북천전투에서 순절한 조선의사 김일 따님의 효성을 기리기 위한 각(閣)입니다.

상산지 효행편에 「金氏 鎰之女年十七父事於壬亂與家奴乘夜赴戰亡處翻攷積尸三日得父尸負出蒿葬竪白碑事聞 旌閭 김씨 일지녀년십칠부사어임란여가노승야부전망처번고적시삼일득부시부출호장수백비사문 정려」라 적고 있지요. 1592년 4월 임진왜란으로 상주성이 함락되자 김 일은 향리의 병졸 5백여 명을 모아 북계(北溪:북천)전쟁터에서 있는 힘을 다해 싸우다가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효녀김씨(孝女金氏: 丁丑1577년~丙戌1646年)는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상주 북천전투(北川)에서 왜병과 싸워 장렬(壯烈)히 순절(殉節)한 김일(金鎰)의사(義士)와 어머니 인동장씨(仁同張氏)의 무남독녀로 본관은 상산(商山)이시다. 당시 17세의 소녀로 부친의 비보(悲報)를 전해 듣고 시종(侍)을 데리고 시신(屍身)을 찾아 나섰는데, 낮에는 왜병의 눈을 피해 시신 옆에 몸을 숨기고 밤에는 등불을 들고 부친의 시신을 3일(日) 3야(夜)만에 찾아내자 졸지에 적병들이 뛰어들어 어머님을 위협했다. 어머니는 준엄한 말로 적병들을 꾸짖었지만은 어머니 마져 죽음을 당하고 순간 고아가 되고 말았다. 아버지의 시신을 가노(家奴) 영환의 등에 업혀 밤길 30리를 걸어서 고향인 상주 낙동면 화산(洛東面 花山)의 웃중리 청룡산에 고장(藁葬)하고 백비(白碑)를 세웠다고 한다.

 

이때 효녀 김씨는 이 백비에 “후세에 반드시 글을 쓰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정조 기축년(正祖 己丑年)에 상주에 사는 유학 안광리(幼學 安光履) 等이 필로(蹕路: 임금이 행차하는 길)에 진언하니 이에 正祖 17年(1793年)에 부친 김일(父親 金鎰) 의사(義士)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증직(贈職)되고 상주 충의단(忠義壇)에 입향(入享)되었으며, 효성이 탁연(卓然)한 효녀 상산김씨는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 하여 나라에서 우승지(右承旨) 홍인호(洪仁浩)를 보내 백원거천(白原巨川)에 정려(旌閭)를 내리고 효녀각을 건립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효녀는 당초 부모님의 묘소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눈물로 세월을 보내면서 시묘 삼 년의 효심을 스스로 자청하였으나 여자의 시묘는 예법에 없다하여 집안 어른들의 만류로 좌절되고, 3년 상을 지난 후 순천인(順天人) 김광윤(金光潤 字 孚, 夢仙亭)에게 출가하여 말하기를 아버지의 대의충정은 맑은 하늘을 찌르고 우주에 닿았지만 불행하게도 아버지의 뒤를 이를 후손이 없으니 망극한 일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 후 효녀는 감역공(監役公) 김광윤(金光潤 字 孚, 夢仙亭)과의 사이에 錫後, 謙後 두 형제를 두어 가문을 번창시켰다고 한다, 이에 시집의 감역공의 후손들이 집성촌 반곡리(문경시 산양면 반곡리) 마을 입구에 효녀각(孝女閣)을 건립하여 오늘날 까지 유사(有司)를 두어 자랑스럽게 관리해오고 있다.

이로 인하여 효녀 상산김씨는 상주(친정)와 문경(시집), 두 곳에 똑같이 「효녀각」이라는 편액을 걸고 젊은이들의 표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문경시 산양면)

 

(상주시 낙동면)

출처 : 강희종 명산 풍수지리 연구소
글쓴이 : 재너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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