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스크랩] 산수화로 배우는 풍경사진 ①②③④ / 주기중 기자

장안봉(微山) 2016. 6. 4. 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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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화로 배우는 풍경사진①]

마음의 근육에서 힘을 빼라


설 익은 듯한 자유로운 경지 … 단순화하는 뺄셈의 추상성



▎‘선(線)과 선(禪)’ 2014.



골프 레슨을 받다 보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어깨 힘 빼라’입니다. 전성기 때의 어니 엘스나 박세리의 스윙을 보면 참 부드럽습니다.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간 것 같지만 거리도 많이 나갑니다. 정확성도 뛰어납니다. 공이 자석처럼 착착 달라붙듯이 깃대 근처에 떨어집니다.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어렵습니다. 정확하게 맞추고, 세게 치려고 긴장하면 어깨에 힘이 들어갑니다. 근육이 경직돼서 스윙이 뻣뻣해지고 뒤 땅을 치거나 빗맞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골프는 “힘 빼는 데 3년이 걸린다”고 말합니다. 주말 골퍼에게는 힘 빼고 부드럽게 스윙하는 것이 평생의 숙제입니다. 어디 골프만 그럴까요. 우리네 삶도, 예술도 그렇습니다.


근육의 힘을 뺀다는 것은 결국 마음을 다루는 데서 비롯됩니다. 긴장하지 말고 평상심을 유지해야 합니다. 너무 잘 하려고 조바심을 갖다보면 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무슨 일이든 편안한 마음으로 즐기면서 해야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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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벗고, 다리를 뻗고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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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반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장자(莊子)의 ‘전자방(田子方)편’에 나오는 말로 ‘옷을 벗고, 다리를 뻗고 앉는다’는 뜻입니다.

중국 전국시대 때 송의 원군(元君)은 예술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화공을 초청해 그림을 그리게 했습니다. 다들 일찍 와서 무릎을 꿇고 앉아 먹을 갈고 있었습니다. 그 때 늦게 온 화공 하나가 원군에게 잠시 허리를 숙인 뒤 거침없이 방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방약무인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원군이 사람을 시켜 그가 뭘 하고 있는지 보게 했더니 “옷을 벗고 다리를 뻗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원군은 무릎을 치며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화공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해의반박은 자연을 따르고 세속적인 속박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유교가 ‘치자(治者) 철학’이라면, 도가사상은 예술가의 철학입니다.

동양의 시(詩)·서(書)·화(畵)의 세계에서 해의반박은 예술가가 지녀야 할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잡았습니다.


해의반박의 경지가 가장 잘 나타나는 분야가 산수화입니다. 호방하고 자유로운 붓질에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가 사상이 잘 드러납니다. 애써 꾸미지 않지만 사실적이고, 수묵화에서도 색이 느껴지고, 여백조차 사유의 공간이 됩니다. 소박하고, 단순하면서도 대자연의 숭고한 아름다움이 녹아 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화가는 대개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치며 성장합니다.

첫째는 사람이나 사물의 형상을 정교하게 묘사하는 것입니다. 동양미술에서는 이를 형사(形似)라고 합니다. 그 다음은 대상 자체에 담겨 있는 고유의 정신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신사(神似) 또는 전신(傳神)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대상에 화가 자신의 뜻을 부치고(寓意·우의), 정을 펴내는(抒情·서정) 것입니다.

그리고 표현 기법에서는 처음에는 정교하고 현란한 것으로 시작해 경지에 오르면 오를수록 평이하고 담박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는 서양화에서 말하는 구상과 추상의 개념과도 비슷합니다.


동양화 이론에서는 이를 ‘熟(숙)’과 ‘生(생)’으로 표현합니다. ‘熟(숙)’이란 ‘익을 숙’자 입니다. 오랫동안 기본기를 닦아서 형사(形似)가 일정 경지에 오른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生(생)’이라는 한자의 개념이 재미있습니다. 나쁘게 말하면 ‘날 것’ 또는 ‘설익었다’는 뜻인데 이를 그림의 최상위 개념으로 둔 것입니다. 동양철학과 동양미학의 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른바 마음의 근육, 감성의 근육에서 힘을 뺀 자유로운 경지를 말합니다.


비슷한 말로 ‘대교약졸(大巧若拙)’이 있습니다. ‘큰 기교는 서툰 것처럼 보인다’는 뜻입니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나온 말입니다. 졸(拙)은 역설적으로 사용된 말입니다. 정말 좋은 그림은 마치 아이들이 그린 것처럼 ‘설 익은 듯한’ 구석이 있다는 뜻입니다.

추사의 세한도를 자세히 들여다 봅시다. 소나무 밑에 있는 집을 자세히 보면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듯 서툴게 보입니다. 그렇지만 세한도를 보면서 집을 잘못 그렸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 여기서 사진 얘기로 넘어가 볼까요. ‘사진은 덧셈으로 시작해서 뺄셈으로 끝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덧셈이란 사진을 찍을 때 가급적 많은 요소를 넣고 그 인과관계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와 달리 뺄셈은 화면을 단순화시켜 추상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덧셈이 ‘숙(熟)’이라면 뺄셈은 ‘생(生)’의 개념과 비슷합니다. 좋은 구도는 사진을 이루는 모든 요소가 하나로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뺄셈의 사진은 압축되고 정제된 어느 한 부분을 포착해 전체를 짐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때 감상자는 이미지에 살을 붙여가며 보이지 않는 장면까지 보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감상의 희열을 맛보게 됩니다.


풍경사진을 찍을 때는 풍경에 압도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덧셈의 사진에 머물게 됩니다. 이것저것 다 넣다 보면 구도의 틀이 무너집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라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전체도 보고, 부분도 봐야 합니다. 풍경에서 느끼는 개인적인 감흥을 형용사 한 마디로 정리하거나 연상되는 뭔가를 떠올려 보는 것이 좋습니다. 덧셈에서 뺄셈으로, 추상성이 강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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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자가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상상하게 만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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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가을, 전북 임실 국사봉에 올랐습니다. 옥정호에서 피어 오른 물안개가 산을 타고 넘습니다. 물안개는 운해가 돼 바람에 따라 움직이며 아찔한 풍경을 연출해 냅니다. 숨이 멎을 듯한 아름다운 풍광이 넓은 지역에 걸쳐 펼쳐졌습니다. 어느 한 장면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렌즈의 화각이 자꾸만 넓어졌습니다. 잠시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 다시 풍경을 살폈습니다. 일정한 농담의 차이로 첩첩이 이어지는 능선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산수화에서나 볼 듯한 아스라한 풍경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선(禪)’의 깊이감이 느껴졌습니다.

망원렌즈로 갈아 끼우고 셔터를 눌렀습니다. 모노톤의 사진이 수묵화 분위기가 납니다. 이 사진은 우리의 수묵화가 얼마나 사실적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사진에 ‘선(線)’과 ‘선(禪)’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산수화로 배우는 풍경사진②]

사람 대하듯 자연 대하라


철학 부재로 ‘그 나물의 그 밥’ 양산... 철리적 자연관 기반돼야


Incubator of Nature, 2016, 선재도.



대한민국이 사진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DSLR카메라 보급률이 세계 1위입니다. 풍경사진에 대한 열기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른바 ‘국민 포인트’라 불리는 관광지를 가면 삼각대를 받쳐 놓고 사진을 찍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주말이면 사진 동호인들이 ‘출사’라는 이름으로 삼삼오오 모여 밤을 달려 사진을 찍으러 갑니다. 규모가 큰 그룹은 관광버스까지 동원합니다.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나는 이를 산수화의 전통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영국의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에는 ‘밈(meme)’이라는 용어가 등장합니다.

생물학적 유전자인 ‘진(gene)’의 대조적인 개념으로 ‘문화적인 유전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예술, 철학, 종교, 사회적 관습 등도 모방과 흉내를 통해 복제되며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는 이론입니다.


급속한 서구화로 산수화의 전통이 단절되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나 조상들의 자연을 사랑하는 정신만큼은 ‘밈’이라는 유전자를 통해 전달됐고, 이것이 풍경사진 열풍에 한몫했다고 생각합니다.


동양에서의 자연은 숭배의 대상이자, 속세를 떠나 귀의하고 싶은 이상향 같은 곳입니다.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에도 담겨있듯이 자연은 철학적 성찰의 대상입니다. 세상 사는 지혜를 가르쳐 주는 스승이기도 합니다. 철리적 자연관은 예술에도 반영됐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산수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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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방방곡곡에서 풍경사진 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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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송나라 때 화가이자 비평가인 곽희가 쓴 [임천고치(林泉高致)]에는 동양의 자연관이 잘 드러납니다. 임천고치는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 ‘산수화의 교과서’입니다.


‘산림과 정원에 거처하면서 자신의 천품을 수양하는 것은 누구든지 원하는 바이고, 샘물과 바위에서 노래하며 자유로이 거니는 것은 누구든지 즐기고 싶은 바일 것이다. …(중략).

속세의 풍진사에 구속받는 것은 인정상 누구든지 언제나 싫어하는 바이고, 안개 피어오르고 구름 감도는 절경 속에서의 신선이나, 성인은 인정상 누구든지 동경하는 바이나 그들을 만나 볼 수 없는 형편이다.’


산수화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한국에서는 세계적인 풍경사진가가 나오지 않을까요. 나는 이를 정체성의 혼란과 철학의 부재에서 답을 찾습니다. 우리 사진계의 현실을 들여다볼까요.

카메라가 급속하게 보급됐습니다. 너도 나도 카메라들 들고 산으로, 바다로 갑니다.

철학의 부재는 ‘그 나물의 그 밥’을 양산합니다. 누가 더 화려한가, 누가 더 아름다운가에만 집착합니다. 내공을 키울 생각은 않고 ‘날씨’라는 운칠기삼에 승부하려 듭니다.

프로들은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기세에 밀려 외국으로 나갑니다. 아프리카의 사바나, 아마존의 원주민, 미국의 캐년, 히말라야의 오지로 향합니다. 아마추어의 풍경 사진을 ‘판박이 사진’이라고 비난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내셔널지오그래픽 류의 사진을 흉내 내기에 급급합니다.


서양의 철학은 과학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합니다. 앤셀 아담스로 대표되는 미국 풍경사진의 전통은 서부 개척과 관련이 있습니다. 19세기 후반 서부 개척 시절 지질 조사를 위해 촬영했던 사진들이 ‘랜드스케이프(Landscape)’라 불리는 풍경사진의 원조가 됐습니다. 미국의 풍경 사진은 신비하고 경이로운 대자연의 아름다움 자체에 방점을 둡니다.


산수화는 분명 우리 것입니다. 그러나 사진은 서구에서 들어왔습니다. 역사도 100년 남짓, 아주 짧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의 풍경사진가들은 종종 정체성의 혼란을 보여줍니다. 미국식 풍경사진에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갓 쓰고 양복입은 격’이랄까요. 풍경사진이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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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쓰고 양복입은 격’으로 어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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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케냐라는 세계적인 풍경사진가가 있습니다. 영국 출신이지만 유럽보다 한국, 중국, 일본에서 팬층이 두텁습니다. 그의 장노출 사진은 때로 먹물 번짐 효과를 내기도 합니다.

케냐는 한때 불교의 선(禪) 사상에 심취했다고 합니다. 케냐의 사진은 산수화를 닮았습니다. A4용지 만한 사진 한 장이 수백 만원에 팔립니다. ‘호랑이 없는 골에 여우가 왕노릇’ 하는 격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서양의 사진가는 동양 문화를 배우려고 애쓰는데, 한국 사진가들은 거꾸로 서양의 사진을 흉내냅니다. 2011년 한국을 방문한 케냐는 ‘철학자의 나무’라는 타이틀의 전시를 열었습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존재의 위엄, 희망, 철학적인 감정 등을 저는 나무에서 봅니다

…(중략)…

늙은 나무는 사진을 찍고 나중에 다시 가보면 베어지고 없어집니다. 이렇게 세월의 흐름을 따라 계속 변화하고, 통제나 예측이 불가능한 삶을 산다는 점에서 나무는 사람이나 인생을 닮았죠.

또 나는 어떤 대상을 찍을 때 마치 친구를 사귀는 것처럼, 그곳을 여러 번 찾아가고 자주 만나고 점점 더 깊이 알아가면서 그 과정들을 사진에 담아내려 합니다.”


나무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는 케냐의 자연관은 곽희의 산수화 이론과도 통합니다. ‘봄 산은 담박하고 온화하여 웃는 듯하고, 여름산은 싱싱하고 푸르러 물에 젖은 듯 촉촉하고, 가을산은 밝고 깨끗하여 단장한 듯하고, 겨울산은 처량하고 쓸쓸하여 자고 있는 듯하다.’ 산이 웃고, 화장하고, 잠을 잡니다. 그는 산을 사람 대하듯 그렸습니다. 풍경사진의 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산수화로 배우는 풍경사진③]

소양·연구·체험의 삼박자 갖춰라


철학·문학·과학 등 인문학적 기반 필요... 발로 찍고, 땀으로 완성


다락논, 2015.



중국에서 시와 그림의 역사를 논할 때 ‘시는 당(唐)에서 끝나고, 그림은 송(宋)에서 완성된다’는 말을 합니다. 당나라 때는 이백(701년~762), 두보(712년~770), 왕유(699년 추정~759) 같은 걸출한 시인이 등장했습니다. 송대에 들어 그림은 절정을 맞습니다. 이성(919년~967 추정)과 범관(990년 추정~1027 추정), 곽희(1020년 추정~1090 추정)가 중국 회화사에 일획을 긋습니다.

곽희는 화론인 [임천고치(林泉高致)]를 저술하고 북방계 산수화 이론을 완성합니다. 임천고치는 중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산수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산수화의 교과서’입니다. 소식(소동파, 1036년~1101)으로 대표되는 문인화가 탄생한 것도 이 시기입니다. 송은 중국 예술사에서 문예부흥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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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속에는 만권의 책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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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 시기에는 화가들의 수양이 강조됐습니다. 붓질의 기교뿐만 아니라 이론적인 배경과 경험을 중시했으며 이를 회화비평과 창작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분위기로 인해 산수화·화조화·인물화 등 그림이 꽃을 피웠습니다.

남송의 비평가인 조희곡은 자신이 쓴 ‘고화변(古畵辯)’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슴속에는 만권의 책이 있고, 눈 앞으로는 진기한 명적(名迹)을 실컷 보며, 또한 수레바퀴 자국과 말 발자국이 천하의 반은 되어야만 바야흐로 붓을 댈 수 있다.’


여기서 ‘만권의 책’은 인문학적인 소양을 말합니다. ‘진기한 명적’을 실컷 본다는 것은 예술 전통에 대한 연구를 강조한 말입니다. 또 ‘수레바퀴 자국과 말 발자국’은 그림을 그리기 위한 노력과 체험이 밑바탕 돼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디 그림에만 해당되는 말일까요. 예술가라면 누구나 가슴에 새겨야 할 명언입니다.


진경산수의 대가 겸재 정선은 위 세 가지를 몸소 실천한 화가로 생각됩니다. 그는 화원화가가 아닌 양반 출신입니다. 당시 쟁쟁한 문인 그룹을 이끌고 있던 안동 김씨 가문의 창협·창흡 형제와 교류하며 학식을 쌓았습니다. 절친인 시인 이병연과 시화상간(詩畵相看)을 하면서 한층 더 성숙한 붓질을 선보였습니다.

또 중국의 산수화 이론을 섭렵하고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새로운 화법을 창안했습니다. 금강산과 관동팔경 등 전국의 이름난 명승지를 누비고 다니며 실제 눈으로 본 우리나라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겸재는 생전에 금강산을 세 번이나 올랐습니다. 겸재의 금강산 작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겨우 세 번?”이라고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강산을 간다는 것을 요즘 기준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교통이 불편하고 등산로가 정비되지 않은 시절입니다. 조선시대 때 금강산을 오른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해 봅니다. 호랑이 같은 맹수가 사람을 물어가던 시대입니다. 곳곳에서 산적이 출몰하기도 합니다. 깊은 산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위험을 각오해야 합니다. 칼 잘 쓰고, 활 잘 쏘는 호위무사가 동행해야 합니다. 험한 산길을 안내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산에서 먹고, 자는데 필요한 음식과 침구 등을 져 날라야 하는 노복도 있어야 합니다. 아마도 수십 명이 동원됐을 겁니다. 짐을 지고 험한 산길을 오르는 나귀도 필요할 것입니다. 요즘 기준으로 치면 히말라야 등정쯤 되지 않을까요.

세도가의 양반이 아니면 금강산행은 꿈꾸기 어려운 일입니다. 다행히 겸재는 영조의 후원과 함께 세도가였던 안동김씨 가문의 지원을 받아 금강산에 세 번이나 오를 수 있었습니다.


겸재의 금강산 그림은 사실적이면서도 예술성이 높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부감으로 그려진 ‘풍악내산총람’은 마치 지도를 그리듯 그림 속에 명승지 이름을 써 넣기도 했습니다. 몇 해 전 독일의 과학자들이 최신 장비를 동원해 겸재 정선이 어느 지점에서 금강산을 그렸는지 조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지점은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조선시대 산수화 아름다운 필묵의 정신사, 고연희, 돌베개, 2011).

겸재는 자신이 실제 경험했던 금강산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재 조합해 하늘에서 내려다보듯이 정교하게 그렸습니다. 그가 험한 산길을 얼마나 누비고 다녔을지 가히 짐작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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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더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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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대목에서 ‘사진은 발로 찍는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당시에 카메라가 있었다면 겸재는 위대한 사진가가 되지 않았을까요. 사진은 시간과 공간의 전략적 선택으로 이루어집니다.

시간은 사진을 찍는 시점을 뜻하며, 공간은 사진의 대상이 됩니다. 이때 시간은 빛을 의미합니다. 빛에 따라 공간은 달리 보입니다. 아침 빛이 다르고, 저녁 빛이 다릅니다. 날씨에 따라, 계절에 따라 시간은 공간을 얼마든지 다른 모습으로 바꿔 놓을 수 있습니다.


울주에서 찍은 다락논 사진입니다. 막 모심기가 끝난 시점입니다. 해가 뜨자 논에 고인 물에 노을빛이 반사됩니다. 판화의 질감과 비슷한 빛과 어둠의 강한 대비가 인상적입니다. 산을 깎으며 논밭을 일군 농민들의 피땀이 서려있는 듯 합니다. 논에 고인 무채색의 물과 초록의 모가 아침 빛을 받아 전혀 다른 형태와 질감을 만들어 냅니다. 시간이, 빛이 공간의 형상을 바꿔 놓은 것입니다.


시간과 맞물려 돌아가는 공간의 선택도 치밀한 계산이 필요합니다. 사진은 프레임의 예술입니다. 프레임의 안과 밖, 즉 공간의 취사선택도 전략적이어야 합니다. 온전하게 숲을 보여줄 수도 있고, 나무를 보고 숲을 미루어 짐작하게 하는 상징적인 기법도 있습니다.

사진에서 시간과 공간은 무한한 조합을 만들어 냅니다. 사진 작품은 그 과정에서 탄생합니다. 같은 대상이라도 시간을 달리하며 수십, 수백 번 찍어 봐야 합니다. 조희곡의 말처럼 사진가의 ‘발자국이 천하의 반’이 되어야 카메라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풍경사진은 발로 찍고, 땀으로 완성됩니다.


철학·문학·과학·수학 등 인문학적인 소양을 갖추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진은 보는 것이 반입니다. 어떤 대상을 본다는 것은 존재론적인 탐구이자 자기 성찰입니다. 아는 만큼 더 보입니다. 특히 현대사진은 시대정신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접근하기조차 어렵습니다. 또 문학과 미술과 음악 등 예술작품을 꾸준히 접해야 합니다. 그 감동으로 가슴이 흥건히 젖어 있어야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기능적인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줍니다. 사진으로 이르는 길은 사진 밖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산수화로 배우는 풍경사진④]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


사진과 시의 창작 과정 닮아... 옛 선비의 ‘시화상간(詩畵相看)’ 배울 만


▎[사진1] ‘상고대’ 2015.



산수화가 발달한 중국과 한국에서는 예로부터 좋은 그림을 보면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찬사를 보냅니다. 그림을 보고 느낀 감상을 시로 써서 그림의 여백이나 별지에 부치기도 합니다. 이를 제화시라고 합니다.

조선 초의 시인이자 학자인 성간(成侃)은 강희안의 그림을 보고 ‘시는 소리 있는 그림이요, 그림은 소리 없는 시이니, 예로부터 시와 그림은 일치되어 있어서, 그 경중을 조그만 차이로도 가를 수 없네(詩爲有聲畵 畵乃無聲詩 古來詩畵爲一致輕重未可分毫釐)’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그린 것으로 유명한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에는 신숙주를 비롯해 무려 23명의 제화시와 찬문이 별지로 붙어있습니다. 안평대군이 당대 최고의 문사들과 함께 그림을 감상하고 제화시를 쓰게 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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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는 시적 감성 키우고 시인은 이미지 문법 익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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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부화(孵化)’ 2014.



겸재 정선은 그의 절친이자 당대 최고의 시인 이병연과 ‘시화상간(詩畵相看)’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시와 그림을 바꿔 보며 감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화가는 시적 감성을 키우고, 시인은 이미지의 문법을 익히는 것입니다. 겸재는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시화상간을 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동양에서는 시와 그림을 동일시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이는 송나라의 시인이자 화가인 소식의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라는 말에서 비롯됐습니다. 소식이 당나라의 시인이자 화가인 왕유의 시와 그림을 감상하며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말한 데서 유래합니다. 이 말은 문인화가 산수화의 한 장르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합니다.


문인화는 서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장르입니다. 지금도 이 전통이 남아 있습니다. 시와 그림, 시와 사진을 엮어서 ‘시화집’으로 책을 냅니다. 또 잡지를 보면 앞 부분에 ‘포토포엠’이라던가 ‘시가 있는 풍경’ 같이 서로 감성이 통하는 시와 사진을 짝지어 연재하기도 합니다.


시사지 월간중앙에도 시와 사진을 엮은 ‘포토포엠’이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시인에게 사진을 보여 주고 시를 쓰게 하는 방식입니다. 지난 2월 시인 이원규에게 필자가 찍은 덕유산 상고대 사진을 보냈습니다[사진1]. 추사의 [세한도]를 오마주한 작품입니다. 고사목에 핀 하얀 서리꽃에서 선비의 꼿꼿한 절개가 느껴지는 사진입니다. 그는 상고대를 ‘정신의 흰 뼈’ ‘영혼의 희디 흰 밥’으로 표현했습니다. 참 멋드러진 표현입니다. 현대판 ‘시화상간’이 아닐까요.


사진은 시와 그림의 중간쯤 되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을 미술의 한 분야로 취급하지만 창작 과정을 보면 시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좋은 시는 압축되고 정제된 언어로 감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시를 읽으면 시가 묘사하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영화 [동주]가 개봉돼 잔잔한 감동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의 시 ‘자화상’의 한 구절을 옮겨 볼까요.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우물 속에는 바람이 없습니다. 잔잔한 물은 거울이 돼 하늘을 비춥니다. 달이 있고, 구름이 흐릅니다. 그리고 우물을 들여다 보는 자신의 모습이 보입니다. 시를 읽으면 우물을 들여다보며 고뇌하는 시인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이는 거울이나 물그림자 등 ‘반영’을 소재로 즐겨 다루는 사진의 형식과 많이 닮았습니다.


어떤 대상을 존재론적으로,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묘사하는 방식도 서로 비슷합니다. 다음은 김춘수의 시 ‘꽃’의 일부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수분과 섬유질, 그리고 색소로 이루어진 ‘물질(몸짓)’이 시인과의 교감을 통해 구체적인 형태의 ‘꽃’으로 다가옵니다. 사진의 정신 역시 피사체와의 대화이자 교감입니다. 이를 통해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마음을 담습니다. 사진도 시 ‘꽃’과 같이 피사체에 자기만의 이름을 붙여주는 작업입니다.


무엇보다도 시와 사진을 가깝게 연결시키는 것은 수사법입니다. 사진은 대상을 보고 느끼는 연상작용을 통해 의미구조를 만들어 냅니다. 예를 들면 푸른 하늘을 나는 ‘새’를 보고 ‘자유’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장미’를 보고 ‘유혹’을 느끼거나 하는 겁니다. 자유나 유혹은 원관념 새와 장미가 불러온 마음의 상 즉 ‘심상’입니다. 그리고 비교되는 두 대상의 개념이 서로 거리가 멀수록 비유법이 신선해집니다. 문학에서는 이를 직유법·은유법·의인법·제유법 등으로 표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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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시의 창작 과정 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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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표현형식 역시도 연상작용과 비슷합니다. 이미지의 비유를 통해 이야기를 담고, 메시지를 전합니다. 감상자들은 한꺼풀 가려진 이미지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상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진 속에 숨겨진 비유의 뜻을 풀게 되면 희열을 느낍니다.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비유가 풍부한 시를 많이 읽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경북 예천에서 회룡포가 내려다 보이는 산정에 올랐습니다. 신새벽입니다. 마을을 감아 도는 곡성천에서 물안개가 피어올라 구름바다가 됐습니다. 운해를 뚫고 나온 가로등 불빛이 마치 알의 형상을 닮았습니다 [사진2]. 나는 이 사진에 ‘부화(孵化)’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자연은 거대한 인큐베이터입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들을 넉넉하게 품습니다



- 주기중 기자


중앙시사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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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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