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短歌(단가)
함평(2) 천지(咸平天地) 늙은 몸이 광주(光州)(3) 고향을 보려 하고 제주어선(濟州漁船)(4) 빌어 타고 해남(海南)으로(5) 건너갈제 흥양(興陽)에 돋은 해는 보성(寶性)에(6) 비쳐있고, 고산(高山)의 아침 안개 영암(靈岩)을(7) 둘러있다.
태인(泰人) 하신(8) 우리 성군(聖君) 예악(禮樂)을 장흥(長興)하니 삼태육경(三台六卿)의(9) 순천심(順天心)이요 방백수령(方伯守令)의(10) 진안군(鎭安郡)이라.(11)
고창성(高창城)에(12) 홀로 앉아 나주 풍경(羅州風景)(13)바라보니 만장운봉(萬丈雲峰)은 높이 솟아 충충한 익산(益山)이요(14), 백리담양(百里潭陽)(15) 흐르는 물은 굽이굽이 만경(萬頃)인데(16) 용담(龍潭)의 맑은 물은 이 아니 용안처(龍安處)며 능주(綾州)의 붉은 꽃은 곳곳마다 금산(錦山)인가.
남원(南原)에(17) 봄이 들어 각색 화초무장(武將)하니 나무나무 임실(任實)이요(18) 가지가지 옥과(玉果)로다. 풍속은 화순(和順)이요(19)
인심은 함열(咸悅)인데 이초(異草)는 무주(茂朱)하고(20) 서기(瑞氣)는 영광(靈光)이라.(21)
창평(昌平)한 좋은 세상(世上) 무안(務安)을(22) 일삼으니 사농공상(士農工商)(23) 낙안(樂安)이요 부자형제 동복(同福)이라. 강진(康津)의(24) 상고선(商賈船)은 진도(珍島)로(25) 건너갈 제 금구(金溝)의 금(金)을 일어 쌓아노니 김제(金堤)로다.(26)
농사하는 옥구(27)백성(沃溝百姓) 임피사의(臨陂사衣) 둘러입고 정읍(井邑)의(28) 정전법(井田法)은(29) 납세인심(納稅人心) 순창(淳昌)이요(30)
고부청청양류색(古阜靑靑楊柳色)은 광양(31) 춘색(光陽春色)이 새로왔다.
곡성(谷城)의(32) 숨은 선비 구례(求禮)도(33) 하려니와 홍덕(興德)을 일삼으니 부안(扶安)(34) 제가(齊家)이 아니냐.
태인(泰仁)·고창(高창)·순천(順天)·진안(鎭安)·운봉(雲峰)·익산(益山)·담양(潭陽)·
만경(萬頃)·용담(龍潭)·용안(龍安)·능주(綾州)·금산(錦山)·남원(南原)·임실(任實)·
옥과(玉果)·화순(和順)·무장(茂長)·함열(咸悅)·무주(茂朱)·영광(靈光)·창평(昌平)·
무안(務安)·낙안(樂安)·동복(同福)·강진(康津)·진도(珍島)·금구(金溝)·김제(金提)·
임피(臨陂)·정읍(井邑)·순창(淳昌)·광양(光陽)·곡성(谷城)·구례(求禮)·흥덕(興德)·
부안(扶安)·법성(法聖)·전주(全州)·장성(長城)·장수(長水)·여산(礪山)·남원(南原) 등
각 고을을 풍경이나 사적(史蹟)을 들추어 문장으로 멋지게 엮은 노래로 퍽 재미있다.
(2) 咸平 全羅南道 서부에 위치한 郡. 원래의 咸豊 牟平을 합친 것임. 咸豊縣은 百濟의 屈門縣인데 新羅때 咸豊으로 고치고 高麗初에 靈光에 예속됨. 牟平縣은 百濟의 多只縣인데 新羅때 多岐로 고치고 高麗때 牟平으로 고쳐서 靈光에 예속됨. 朝鮮 3代 太宗9년(1409년)에 咸豊 牟平 두縣의 이름을 합해 咸平으로 고쳐 오늘에 이름. 명승 고적으로는 龍華寺·箕山潁水 躍馬嶝 酒浦해수욕장등이 있음.
(3)光州 全羅南道 중앙부에 위치한 市로서 도청소재지. 1896년 13道로 개편할 때 도청소재지가 되고 1949년 7월 4일에 地方自治團體령 공포에 따라 市로 승격됨. 古來로 百濟의 武珍州, 新羅의 武州, 甄萱의 後百濟의 도읍지로서 全州와 더불어 湖南의 政治 軍事의 중심지이다. 명승고적으로는 無等山·今勿梯池·光州城·石屎亭·喜慶樓· 開龍寺·元曉寺·證心寺등이 있음.
(4)濟州漁船 濟州는 원래 全羅南道에 예속되었던 관계로 濟州의 고기잡이배를 넣은 것이다.
(5)海南 全羅南道의 남서부에 위치하는 한 郡. 원래 百濟의 塞琴縣인데 新羅때 浸溟 으로, 高麗때 海南으로 고쳐서 靈岩郡에 예속시킴. 조선시대에는 水軍全羅左水營을 두 어 남쪽 해상방비의 要地로 삼았으며 1895년에 郡이 됨. 명승고적으로는 達磨山·碧波津 於蘭津 李舞臣大捷괴 採石江·白房山등이 있음.
(6)寶城 全羅南道의 중남부에 자리잡은 한 郡. 원래 伏忽군인데 新羅 35代 景德王 때 寶城郡으로 고침. 1914년 長興郡의 會泉·態峙 두 面을 합쳤음. 栗浦 關防 劍嚴등 의 명승고적이 있음.
(7)靈岩 全羅南道 남서부에 위치한 한 郡. 東南郡界에 月出山(808m)이 솟아 그 줄기가 東半部에 중첩해서 병陵을 이루고 특히 榮山江 유역에는 상당히 넓은 低地가 있음. 바다에 임한 지대는 대체로 傾斜地耕地로서 이용, 동북으로 흐르는 長成川, 서쪽에 犢川 和所川 동북쪽에 龍頭川 북쪽에 新元津등의 하천은 灌漑의 利는 없으나 舟運에는 小流이므로 부적당함. 원래 百濟의 月奈郡 新羅때 靈岩郡으로 개명. 993년 朗州 安南 都護府 1018년 다시 靈岩郡. 12906∼15년 인접의 郡과 面의 廢合이 있었음. 명승고적 으로는 道岬寺·鳩林·會社亭등이 있다.
(8)泰仁 全羅北道에 있는 지명. 百濟때 大尸山郡이며 新羅 때는 太山 또는 武城이라 하다가 朝鮮 太宗때에 泰仁이라 改稱하였다. 또 君王의 聖德을 지명과 합하여 말함. 龍藏寺·慕忠祠등의 고적이 있음.
(9)三台六卿 三政丞 六判書
(10)方伯守令 方伯은 監司 守令은 郡守와 縣令을 말함.
(11)鎭安 전라북도의 동부에 위치한 郡. 원래 百濟의 難珍阿縣인데 新羅 35代 景德王때 鎭安縣으로 고치고 朝鮮朝 3代 太宗때에는 縣監을 두었다가 1895년에 郡이 됨.
1914년에 龍潭郡의 일부를 합했음. 명승고적으로는 馬耳山·金塘寺·龍潭耶馬溪·天皇寺· 甑淵등이 있음.
(12)高敞 全羅北道 西南端에 위치한 한 郡. 원래 百濟의 毛良夫里縣이었는데 1906 년에 郡으로 되고 1914년 茂長郡일부와 興德郡의 일부를 병합함. 명승고적으로는 해 수욕장과 아率山이 있고 興德堤 神雲寺·文징寺등이 있음.
(13)羅州 全羅南道 중앙부에 위치한 郡. 원래 百濟의 發羅郡인데, 新羅때 錦山郡, 후에 高麗때에는 羅州등으로 되었다가 朝鮮朝 世祖때에는 鎭을 두어 관할했음. 錦城山城· 多寶寺등의 명승고적이 많음.
(14)益山 全羅北道의 한 郡. 이 道의 북쪽에 있음. 본래 馬韓의 영토였으며 百濟의 시조 溫祚王때에 金馬渚라 하였고 新羅 神文王때에 金馬郡으로 高麗때에는 全州에 예속되었고 28代 忠惠王5년(1343년)에는 益州로 고쳤다가 朝鮮朝3代 太宗14년에는 이 이름으로고쳤음. 명승고적으로는 雙陵 箕準城址·石橋洞·將軍峯이 있음.
(15)潭陽 全羅南道 북부에 위치한 한 郡. 원래는 百濟의 秋子兮郡. 高麗 成宗14년 (995년)에 潭州都團練使를 두었다가 潭陽으로 고치고 羅州에 예속시킴. 開仙寺址·金 城山址·龍淵·龍興寺·石燈·石刀·官防堤등 명승고적이 많음.
(16)萬頃 全羅北道 金堤郡 萬頃里의 옛 이름. 원래 百濟의 豆乃山縣인데, 朝鮮朝 26 代 高宗32년(1895년) 郡이 되었다가 1914년에 金堤와 합했음.
(17)南原 全羅北道 東南端에 위치한 한 郡. 百濟 때 古龍郡, 新羅 景德王때에는 南原 小京, 朝鮮朝 太宗14년(1413)에는 都護府, 世祖때에 鎭을 두는 한편 1都護府·1郡·9 縣이 있었음. 1895년 南原府로 했다가 이듬해 南原郡이 됨. 春香祠·實相寺·烏鵲橋·南原城址·廣寒樓·源川포布등의 명승고적이 많음.
(18)任實 全羅北道의 남동에 위치한 郡. 百濟때부터 任實郡으로 新羅에서도 같은 이름으로 불렸으며 高麗때에 南原府에 딸렸다가 1895년 郡으로 되어 오늘에 이름. 명 승고적으로는 新興寺·四仙臺·光明燈·元寂寺·靈驚山·白蓮寺등이 있음.
(19)和順 全羅南道의 중앙에 위치한 한 郡. 원래 和順·綾州·同福의 3郡을 합친것임. 和順은 百濟의 仍利阿縣인데, 新羅때 汝湄로 고치고, 高麗 때에 和順으로 고치면서 羅州 에 예속됨. 朝鮮朝에 여러 차례 변현을 거쳐 1895년에 郡이 되고 1914년에는 綾州·同福의 兩郡을 합침. 명승고적으로는 無等山·多塔峯·寶山赤壁·金驚山城등이 있음.
(20)茂朱 全羅北道 東北端에 위치한 한 郡. 원래의 茂豊·朱溪 두 縣을 합친 것인데 朝鮮朝3代 太宗 14년91414년)에 茂朱라 고쳐 縣監을 두었다가 26代 高宗 32년 (1895) 郡으로 됨. 德裕山·塞風樓·高境寺·佛頭寺·九天洞등 명승고적이 있음.
(21)靈光 全羅南道의 北西端에 위치한 한 郡. 원래 百濟의 武尸伊郡이었으나, 高麗에 와서 靈光으로 고치고 현재까지 君名이 존속하고 있음. 명승고적으로는 佛甲寺·海佛庵 餞日庵·佛影臺·修道庵·隱仙庵·靈光八怪이 있음.
(22)務安 全羅南道 서남부에 위치한 郡. 원래 百濟의 勿奈兮郡인데 신라35代 景德王때 務安郡으로 고쳤음. 그후 변천을 거쳐 朝鮮朝26代 高宗32년(1895)에 郡이 되었다가 한일합방후 木浦에 예속되어 1914년 木浦·智島郡의 일부를 합쳐 새로이 郡을 설치하였음. 黑山島·烽臺山·遊山亭·鼎足浦등 명승고적이 많음.
(23)士農工商 선비·농부·工匠·상인 등 모든 계급의 백성을 이르는 말. 봉건시대의 계급관념을 차례대로 이르는 말.
(24)康津 全羅南道 남서해안에 위치한 한 郡. 본래의 道康縣과 耽津縣을 1417년에 합쳐 康津으로 고치고 1985년에 郡으로 승격 1914년에 加牛島를 합침. 특히 古今島의 경치가 좋으며 천연기념물로 大口面의 개팽나무 兵營面의 개비나무가 있음.
(25)珍島 全羅南道 南西端 서해상에 위치한 한 郡. 가장 큰 珍島와 그 부근 島嶼有人島 49개, 無人島88개로 구성된. 百濟때의 因珍島部인데 新羅 35代 景德王때 珍島郡 으로 고쳐 茂安郡 연현이 되었다가 朝鮮朝 26代 高宗32년(1895)에 郡이 됨. 1914년 都草面을 務安郡에 편입시킴. 명승고적으로는 鳴梁海峽·鴨鷗亭·竹林寺·碧波亭·僞王城 金甲鎭·雙溪寺·尖祭峯烽燧臺등이 있음. 특히 진돗개가 유명함.
(26)金堤 全羅北道 서쪽 끝에 위치한 한 郡. 金堤는 본디 百濟의 壁骨郡이었는데, 신라때 金堤로 바뀌었고 1914년에는 金溝와 萬頃을 합쳤음. 명승고적으로는 金山寺·萬 頃平野·石蓮臺·碧骨堤·七星閣·石鏡등이 있음.
(27)沃溝 全羅北道의 北西端에 위치한 郡. 沃溝는 百濟의 馬西良縣으로 新羅때 沃溝라 고치고 高麗때 臨陂郡에 예속되었다가 1895년에 郡이 되고 1914년에는 臨陂와합침. 명승고적으로는 古郡山島·仙遊島등이 있음.
(28)井邑 全羅北道의 남서부에 자리잡은 한 郡. 百濟때의 井村縣인데, 新羅 35代 경덕왕때 井邑縣으로 고치고 朝鮮朝에는 縣監을 두었다가 高宗32년(1895년) 郡이 됨.
1914년 泰仁·古卓 두 郡을 일부 병합하여 井邑郡으로 됨. 東學革命의 先驅者인 全琫準이 東學徒를 모아 斗升山위에 烽火를 올려 봉기한 곳이 바로 이곳임. 명승고적으로 는 宋尤庵의 節義를 傳하는 遺墟碑·披香亭·內藏山·斗升山·笠岩山城址·民樂亭·洛城亭 龍藏寺·靈隱寺등이 있다.
(29)井田法 중국 殷·周 때에 田野]를 농민에 분배하되 井字모양으로 구획하여 1井을 8家가 각각 1區 百畝씩 私有로 하고 그 중앙에 있는 百畝는 公田으로하여 8家가 公田 百畝를 공동 경작하여 國稅로 바치는 法.
(30)淳昌 全羅北道의 最南端에 위치한 한 郡. 원래 百濟의 道實郡이던 것을 高麗 27 代 忠소王1년(1314)에 郡으로 승격. 명승고적으로는 적성진 경천 대모산성 귀래정등 이 있음.
(31)光陽 全羅南道 동부에 위치한 한 郡. 원래 百濟의 馬老縣이었는데, 高麗때 光陽으로고쳐 監務를 두었다가 朝鮮朝 26代 高宗32년(1895)郡으로됨. 명승고적으로는 白雲山과 龍門瀑布·中興山城의 三層石塔·閑麗水道 등임.
(32)谷城 全羅南道 동북부에 위치한 郡. 원래 百濟의 欲乃郡인데, 新羅35代 景德王이 谷城으로 고치고, 高麗初에 昇平郡에 딸렸다가 朝鮮朝 26代 高宗32년(1895) 郡으로 승격. 觀音寺·金銅觀世音苦薩坐像등의 고적이 있음.
(33)求禮 全羅南道 북동부에 위치한 郡. 원래 百濟의 仇次禮縣인데, 新羅 35代 景德王때 求禮로 고쳐져서 谷城郡 領縣이 되도 高麗初에는 南原府에 딸렸다가 朝鮮朝 에 縣이 됨. 명승고적으로는 華嚴寺·泉隱寺·鰲山寺·龍虎寺·老姑壇등이 있으며 천연기념물로는 華嚴寺의 올벚나무·원달리의 山葉萸가 있음.
(34) 扶安 全羅北道의 남서쪽에 위치한 한 郡. 朝鮮朝 3代 太宗16년(1416년)에 원래의 扶寧縣과 保安縣과 합쳐 扶安으로 고침. 26代 高宗32년(1895)에 郡으로 승격하 는 한편 1908년에 古阜郡의 白山面·巨麻面·德林面을 합침. 頓地·開巖寺·樓雲庵·來蘇 寺·直沼瀑布·月明庵·實相寺·彩石江등의 명승고적이 많음.
(35)法聖 法聖布. 全羅南道 靈光郡 북서해안에 있는 浦口. 灣內의 갯펄을 간척하여 논과 監田으로 이용되며 특히 조기가 많이 남.
(36)全州 全羅北道의 도청소재지인 市. 원래 百濟의 完山으로 百濟가 新羅에게 멸망 한 뒤 35대 景德王 16년(757)에 全州로 고침. 19895년 郡이 되고 1935년 府로 승격 되었다가 1949년 시로 됨. 古色이 짙은 교육도시로서 完州郡에 둘러 싸여있고 萬頃江의 상류인 全州川 연안에 자리잡아 북서쪽으로는 內浦平野로 향하고 남동쪽으로는 병 陵과 험한 산으로 둘러싸였음.朝鮮朝 發祥의 故地로서 慶基殿·梧木臺·寒碧樓·德津池· 南固山城址등이 있음.
(37)長城 全羅南道의 北端에 위치한 한 郡. 본래는 百濟의 古尸伊縣이던 것을 高麗 初에 長城郡으로 고침. 朝鮮朝 17代 孝宗6년(1655) 府로 승격. 高宗32년(1895)郡이 됨. 명승고적으로는 內藏山·白羊寺·笠巖山城·筆巖書院등이 있음.
(38)長水 全羅北道의 동부에 위치한 한 郡. 원래 百濟의 右坪縣인데, 新羅 85代 景德王때 高澤縣으로 되었다가 高麗初에 長水縣이라 고치고, 朝鮮朝 26代 高宗 32년 (1895)에 郡이 됨. 명승고적으로는 白雲山·雲岾山·釋天寺·墮淚碑·論介碑·龍湫·戀思樓·白華山·水分峴 따위가 있음.
이 <편시춘(片時春)>은 가장 성창되는 단가 중의 하나다. 전에는 사설(辭說)이 분명치 않고 오자(誤字)와 낙서(落書)가 많아서 부르면서도 무슨 뜻인지 몰랐으나 가사를 정리하여 올바르게 고쳐놓았다.
(2) 百川東到海 何時復西歸 온갖 냇물은 모두 동쪽 바다로 쏟는 듯이 흘러가니 언제 나 다시 서쪽으로 돌아오랴 하는 말로서 唐詩의 한 句節이다.
(3) 牛山 중국 山東省 臨淄縣 남쪽에 있음. 齊 景公이 놀던 곳. <晏子春秋> 「齊景公 遊於牛山 北臨其國城而流涕」
(4)齊景公의 눈물 이름은 杵臼 , 景은 諡號. 姜太公의 후손.
齊 景公이 일찍이 牛山에 올라지는 해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여 「세월이 빠름이여 어찌 인생으로 하여금 죽음의 길을 재촉하는고」한즉 從者 3명 중 2명은 따라 울었으나 오직 晏子만은 웃으며 하는 말이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는 것은 天理의 定則이온데, 역리를 하려 함은 不仁한 처사이며 불인한 임금을 따라 아첨하는 신하들이 운다는 것이 어찌 우습지 않으리요」하였다 함.
(5)汾水秋風曲 漢 武帝가 汾水에서 뱃놀이하면서 지은 가사인 <秋風辭>를 秋風曲이라고도 함.
<休齊> 云 「時變而爲騷 騷變而爲辭 皆可歌也 漢武帝 因祀后土於汾陰 作秋風辭一章 風三易韻 其節短 其聲哀」<秋風辭> 「秋風起兮 白雲飛 草木黃落兮 雁南歸 蘭有秀兮 菊有芳 懷佳人兮 不能忘 泛數船兮 濟汾河 橫中流兮 揚小波 簫鼓鳴兮 發棹歌 歡極樂兮 哀情多 小壯幾時兮 奈老何」
(6)五陵金市 五陵은 漢 高祖 이하 五帝의 무덤이 長安에 있으므로 五陵이라 함. 즉 長陵(高帝) 安陵(惠帝). 陽陵(景帝). 茂陵(武帝) 平陵(昭帝), 金市는 金陵市를 말함
(7)銀鞍白馬 鞍裝을 銀으로 장식한 흰말.
李白 詩 <少年行> 「五陵少年金市東 銀鞍白馬度春風 洛花踏盡遊何處 笑入胡姬酒肆中」
(8)曲終人不見 數峯靑 사람의 자취는 보이지않고 두 산봉우리만 푸르다는 뜻.
唐 錢起 詩 「曲終人不見 江上數峯靑」
(9) 瀟湘古蹟 瀟湘八景을 말함.
즉 瀟湘夜雨·洞庭秋月·遠浦歸帆·平沙落雁·漁村落照· 江天暮雪·山市晴嵐·寒寺晩鍾.
(10)濁浪이 排공 탁한 물결이 공중에 솟아 오른다는 말.
(11)洞庭湖 湖南省內에 있는 호수의 이름. 杜甫 詩 「昔聞洞庭水 今上岳陽樓」
(12)湘山祠 湖西省 岳陽縣 西南 洞庭湖중에 있으며 舜의 二妃 娥皇·女英을 모신 祠堂. 湘山을 일명 君山이라 함. <水經註> 「是山 湘君之所遊處 故曰 湘君 舜 二妃也 君山 有湘妃廟」
(13)劉伶 字는 伯倫. 晋나라 沛國人. 벼슬은 建威將軍. 竹林七賢 중의 한사람.
늘 술을 사랑하여 <酒德頌>을 짓고 언제나 하인에게 삽을 메고 따라다니게 하고 「언제 어 느 곳에서 죽을 지 모르니 죽는 곳에 파묻기 위함이라」하였다. 즉 「荷揷隨之」
원문(轅門)에 월흑(月黑)하니 수운(愁雲)이 적막(寂寞)하다. 초패왕(楚覇王)은 초(楚)를 장차 잃단 말가.
역발산(力拔山)도 쓸데없고 기개세(氣蓋世)도 할일 없다.
칼 짚고 일어나니 사면(四面)이 초가(楚歌)로다.
우혜우혜(虞兮虞兮) 내약하(奈若何)오. 낸들 너를 어이하리, 삼보(三步)에 주저(躊躇)하고 오보(五步)에 체읍(涕泣)하니 삼군(三軍)이 흩어지고 마음이 산란(散亂)하다.
평생(平生)에 원(願)하기를 금고(金鼓)를울리면서 강동(江東)으로 가쟀더니 불의에 패망하니 어찌 낯을 들고 부모님을 다시 뵈며 초강백성(楚江百姓) 어이보리.
백대 영웅 호걸(百代英雄豪傑)들아, 초한승부(楚漢勝負)들어보소.
절인지용(絶人之勇) 부질없고 순민심(順民心)이 으뜸이라.
한패공(漢沛公)의(1) 백만대병 구리산하(九里山下)(2) 십면매복(十面埋伏) 대진(大陳)을 둘러치고 초패왕(楚覇王)을(3) 잡으렬 제, 천하 병마 도원수(都元帥)는 걸식표모(乞食漂母) 한신(韓信)이라(4),
대장단(大將壇) 높이 올라 천하 제후 호령할 제 형양성고(滎陽成皐)(5) 험한 길과 팽성도(彭城道)(6) 오백리에 거리거리 복병이요, 두루두루 매복(埋伏)이라.
모계(謀計) 많은 이좌거(李左車)는(7) 초패왕(楚覇王)을 유인(誘引)하고 산(算) 잘 놓는 장자방(張子房)은(8) 계명산(鷄鳴山)(9) 추야월(秋夜月)에 옥통소(玉洞簫)를 슬피 불어 팔천 제자(八千弟子)흩을 적에 그 노래에 하였으되, 구추삼경(九秋三更) 깊은 밤에 하늘이 높고 달이 밝다.
청천(靑天)에 울고 가는 저 기러기객의 수심(愁心)을 돋우는 듯, 변방만리(邊方萬里) 사지(死地)중에 정벌(정伐)하는 저 군사야, 너의 패왕(覇王) 세곤(勢困)하여 전쟁하면 죽을테라
철갑(鐵甲)을 굳이 입고 날랜 칼에 빼어드니 천금같이 중한 몸이 전장검혼(戰場劍魂)이 되겠구나.
호생오사(好生惡死)하는 마음 사람마다 있건마는 너희들은 어찌하여 죽기를 저리 즐기느냐.
너의 당상(堂上) 학발양친(鶴髮兩親) 어느 누구라 위로하며
홍안처자(紅顔妻子)들은 한산낙엽(寒山落葉) 찬 바람에 새옷 지어 넣어두고
오늘이나 소식올까 내일이나 편지 올까, 옥같이 고운 얼굴 망부(望夫)하는 깊은 간장(肝臟) 썩은 눈물 밤낮으로 흘리면서 이마위에 손을 얹고 나가던 길 바라보며 망부석(望夫石)이 되단 말가.
남산하(南山下)의 좋은 밭은 어느 장부 갈아주며, 태호정(太湖亭) 빚은 술은 뉘로하여 맛을 보리.
어린 자식 철없이 젖 달라 짖어울고 철 안 자식 애비 불러 밤낮없이 슬피우니 어미 간장 다 녹는다.
우리 낭군 떠날 적에 중문(中門)에서 손을 잡고 눈물짓고 이른 말이
청춘홍안(靑春紅顔)두고 가니 명년 구월 돌아오마. 금석(金石)같이 맺은 언약 방촌간(方寸間)에 깊이 새겨 잊지마자 했건마는 원앙금(鴛鴦衿) 앵무침(鸚鵡枕)에 전전반측(輾轉反側) 생각할 제
팔년풍진(八年風塵) 다 지나고 죽었는가 살았는가 적막사창(寂寞紗窓) 빈 방(房)안에 너의 부모 장탄식(長歎息)을 뉘로 하여 위로(慰勞)하리.
부모같이 중한이는 천지간(天地間)에 없건마는 낭군(郞君) 그려 설운마음 차마 진정(眞情) 못할지라,
오작교상(烏鵲橋上) 견우직녀(牽牛織女) 일년 일도(一年一度) 보건마는 우리는 무슨 죄(罪)로 좋은 연분(緣分) 그리는고 초진중(楚陳中)에 저대토록 있었느냐.
천명귀어(天命歸於) 한왕(漢王)하니 가련(可憐)하다, 초패왕(楚覇王)은 어디로 가단말가.
팔년 풍진 대공업(大功業)이 속절(俗節)없이 되리로다.
<초한가>는 서도창(西道唱)에서 자세하게 해설했으므로 세부적인 것은 그곳의 해설을 참조하기 바란다.
(2) 九里山 중국 江蘇省 銅山縣北 五里에 있는 산 이름. 九疑山이라 한다. 劉邦과 項羽가 싸우던 곳이라 전함.
(3) 楚覇王 項羽를 말함. 이름은 籍. 江東人. 힘이 능히 山을 뽑을 만하였다 함.秦나라를 멸한 뒤에 國名을 楚라한고 자칭 覇王이라함.
(4) 乞食漂母 韓信 韓信은 漢나라 功臣. 進陰人. 劉邦을 도와 項羽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하여 進陰候에 封함을 받음. 젊을 때 가난하여 城下에서 낚시질을 할 때 飢饉이 심함을 보고 漂母가 밥을 주었더니 韓信이 「뒷날 두터이 갚으리라」한즉, 漂母가 말하기를 「내가 王孫을 사랑하여 밥을 준 것이지 어찌 갚기를 바라리요」하였다. 그뒤 에 韓信이 齊王이 되어 千金으로 漂母에게 당시의 은혜를 갚았다고함. <史記> 「韓信至國召所從食漂母 暘千金」
(5) 滎陽成皐 중국 河南省에 있는 지명. 漢沛公이 項羽에게 大敗한 곳.
(6) 彭城 江蘇省 銅山縣에 있는 지명.
(7) 李左車 처음에 趙나라에 봉사하여 廣武君을 封하였고 그 뒤에 趙가 망한 다음 韓信을 보좌하여 項羽를 垓下로 유인하여 大破하였다함.
(8) 張子房 성은 張, 이름은 良, 字는 子房. 韓人. 韓이 秦에게 망한뒤 韓을 위해 원수를 갚고자 滄海力士를 구하여 博浪沙中에서 始皇의 수레를 鐵槌로 저격하였으나 실패 하였고 뒤에는 漢沛公을 도와 楚覇王을 멸하고 漢의 開國功臣이 되어 留候를 封하였음.
(9) 鷄鳴山 江蘇省에 있는 산 이름. 일명 鷄龍山이라고도 함.
(10) 太湖亭 江蘇省 浙江省 兩省 사이에 있는 太瑚上의 정자. 水石이 절승하여 천연의 畵幅과 같은 名亭.
강상에 둥둥 떴는 배 풍월 실러 가는 밴가. 동강칠리탄(桐江七里灘) 엄자릉(嚴子陵)의(1) 낚싯밴가.
십리장강벽파상(十里長江碧波上) 왕래하던 거래선(去來船) 야박진회근주가(夜泊秦淮近酒家) 술 사 싣고 가는 밴가. 오호상연월야(五湖上烟月夜)(2) 범상공(范相公)(3) 가는 밴가.
이배 저배 다 버리고 한송정(寒松亭)(4) 들어가 길고 긴 솔을 배어 조그마하게 배무어 타고 술렁술렁 배 띄어라.
강릉(江陵) 경포대(鏡浦臺)로 달맞이 가자.
대인난(待人難) 대인난은 촉도지난(蜀道之難)이(5) 대인난이요 출문망(出門望) 출문망은 월상오동(月上梧桐) 상상지(上上枝)라. 자라 등에 달을 실어 우리 고향을 어서 가세.
그 달을 다 지나고 오월 단오일(端午日)은(6) 천중지가절(天中之佳節)이요 일지지(日遲遲) 창외(窓外)라.
창창(蒼蒼)한 수풀 속에 백설(百舌)이(7) 자랐구나.시재시재(時哉時哉)(8) 성언(聖言)이요 산양자치(山梁雌雉)(8) 나는구나.
광풍제월(光風霽月)(9) 넓은 천지 연비어약(鳶飛魚躍)(10) 노는구나.
백구(白鷗)야, 날지마라. 너 잡을 내 아니다.
성산(聖山)이 버리시니 너를 좇아 예 왔노라.
강상(江上)에 터를 닦아 구목위소(構木爲巢)한(11) 연후에 나물먹고 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었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넉넉할까.
일촌간장(一寸肝腸) 맺힌 설움 부모님 생각뿐이로다.
옥창앵도(玉窓櫻桃)(12) 붉었으니 원정부지(怨征夫之) 이별이라
송백수양(松栢垂楊) 푸른 가지 높다랗게 그네 매고 綠衣紅裳 미인들은 오락가락 추천(鞦韆)을 하는데 우리 벗님은 어디를 가고 단오 시절(端午時節)을 모르는가. 거드렁거리고 지내 보자.
<달거리>의 5월 단오 대목을 그대로 옮긴 것이 특징이다.
(2) 五湖上烟月夜 <丈夫恨> 註 (21)참조.
(3) 范相公 <丈夫恨> 註 (22) 참조.
(4) 寒松亭 옛날 江陵에 있는 정자인데, 그 둘레에는 소나무가 울창하였고, 鏡浦臺와 거리가 가깝다. <高麗史樂志> 寒松亭歌에「世傳比歌 書於琴底 流至江南 江南人 未解基詞 光宗朝 國人張普公奉仕江南 問之普公 作詩解之曰 月白寒松夜 波安鏡浦秋 哀鳴來又去 有信一鷗」
(5) 蜀道之難 蜀. 즉, 泗川省으로 통하는 험난할 길이란 뜻으로, 人情과 世路의 어려움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6) 端牛 <달거리> 註 (9)참조.
(7) 百舌 <달거리> 註 (10)참조.
(8) 時哉時哉 山梁雌雉 <달거리> 註 (11)참조.
(9) 光風霽月 <달거리> 註 (12)참조.
(10) 鳶飛魚躍 <달거리> 註 (13)참조.
(11) 構木爲巢 나무로 얽어 집을 짓는다는 말. 上古때 有巢氏가 처음으로 집을 지어 백성에게 거처하는 법을 가르쳤다 함.<史要>「構木爲巢 食木實」
(12) 玉窓櫻桃 <달거리> 註 (14)참조.
(13) 鞦韆추천 <달거리> 註 (15)참조.
대장부(大丈夫) 공성신퇴지후(功成身退之後)로 할 일이 바이없어 죽장망혜(竹杖芒鞋)로 풍월(風月)찾아 대관강산(大觀江山)하여 보세.
봉래산(蓬萊山)(1) 가자 한들 약수(弱水)가(2) 둘러 있고 곤륜산(崑崙山)(3) 바라보니 낙포운(洛浦雲)이(4) 멀었구나. 위으로 천상선경(天上仙境) 앙망불급(仰望不及) 무가내하(無可奈何), 인간의 만고경치(萬古景致) 차례차례 찾아갈 제 봉황대(鳳凰臺)에(5) 봉(鳳)이 갔으니 강 물결만 흘러 있고 황학루(黃鶴樓)에(6) 학(鶴)이 없으니 백운(白雲)만 유유(悠悠)하다.
등왕각(滕王閣)(7) 비 갠후에 하목(霞鶩)이 날단 말가.
관와궁중 미록유(館娃宮中麋鹿遊)요(8) 월왕대(鉞王臺)에 자고(자고)로구나(9).
멱라수(汨羅水)(10) 건너갈제 굴삼려(屈三閭)를(11) 조상(吊喪)하고 절강(浙江)의(12) 급한 조수(潮水) 서산사(西山寺) 처량하다.
이적선(李謫仙)의 기경(騎鯨)후에(13) 채석강(采石江)이(14) 임자없고, 소동파(蘇東坡)(15) 임술(壬戌)놀음 적벽강(赤壁江)만(16) 남았구나.
일락장사(日落長沙) 추색원(秋色遠) 가태부(賈太傅)의(17) 설움이요
풍엽적화(楓葉荻花) 심양강(潯陽江)의(18) 백향산(白香山)(19) 어디 갔나.
파릉(20) 승상중(巴陵勝狀中)의 동정호(洞庭湖)(21) 제일(第一)이라.
악양루(岳陽樓) 올라앉아 팔경(八景)을 둘러보니 소소(簫簫)한 밤비 소리 반죽(班竹)이(22) 다 젖는다.
아롱아롱 피 흔적이 새 눈물로 뿌리는 듯 칠백리 넓은 물에 추월(秋月)이 돋아오니
부광(浮光)은 약금(躍金)이요 정영(靜影)은 침벽(沈壁)이라.
적막(寂寞)한 황릉묘(黃陵廟)에(23) 이십오현(二十五鉉) 타는 소리
창오산(蒼悟山)이 무너질 듯 상강수(湘江水)가(24) 끊어질 듯.
평사(平沙)의 저 기러기 청원(淸怨)을 못 이겨서 뚜루룩끼룩 소리하고 등한(等閑)히 날아간다.
원포귀범(遠浦歸帆) 상고선(商賈船)은 구름 밖에 지나가고 연사(烟寺)의 모종(暮鍾) 소리 바람결에 오는구나. 산시청람(山市晴嵐) 잠깐보니 오고 가는 사람들이 어촌낙조(漁村落照) 유교변(柳橋邊)에 완보(緩步)로 내려와서 전당강(錢塘江)(25)에 배를 타고 유미강(幽湄崗)에 올라앉아
금릉(26) 물색(金陵物色)구경하고 오월강산(吳越江山) 다 본 후에
동해(東海)를 건너보니 아동방(我東方) 금수강산(錦繡江山) 동금강(東金剛) 서구월(西九月) 남지리(南智異) 북향산(北香山) 가야산(伽倻山) 속리산(俗籬山)과 백운산(白雲山) 상상봉(上上峯)을 편답(遍踏)하고 돌아와서 삼각산(三角山) 올라서니 금부용(金芙蓉)(27) 만장봉(萬丈峰)은 서색(瑞色)은 반공(蟠空)이라
남산송백(南山松栢) 울울창창(鬱鬱蒼蒼) 한강유수(漢江流水) 호호양양(浩浩洋洋) 춘대일월(春臺日月)(28) 태평기상(太平氣像) 만만세지(萬萬世之) 금탕(금탕)이라.
아마도 우리 인심 강구요(康衢謠) 격양가(擊壤歌)로(29) 성세태평(聖世太平) 즐겨보세.
이 <풍월강산(風月江山)>은 일명 <대관강산(大觀江山)>이라 하기도 한다. <풍월강산>은 <강상풍월(江山風月)>과 말이 비슷하여 혼동하기 쉬우므로 <대관강산>이라 한 것 같다.
(2) 弱水 전설에 나오는 옛날 中國에 있었던 仙境의 江. 물의 淨力이 약하여 기러기털처럼 가벼운 물건도 가라앉는다 함. <十 州記>「鳳麟州四面 弱水繞之 鴻毛不浮 不可越也」
(3) 崑崙山 중국의 傳說에 나오는 神聖한 山. 中國 서쪽에 있다고 함. 처음에는 하늘에 이르는 높은 산, 또는 아름다운 玉이 나는 산이라 알려졌으나 戰國時代 말기부터는 西王母가 살며, 不死의 물이 흐르는 神仙境이라고 믿어졌음. 현재의 崑崙山은 西藏 新疆省界에 있음.
(4) 洛浦雲 洛浦는 洛水를 말함. 즉 洛水濱의 구름. 唐 宋之問 時「綠水泰京道 靑雲洛水橋」<張衛賦>「召洛浦之宓妃」
(5) 鳳凰臺 중국 湖南省에 있는 名臺. 唐 李白 <登金陵鳳凰臺時>로, 原文은 다음과 같다.
봉황대상봉황유(鳳凰臺上鳳凰遊)러니 봉거대공강자류(鳳去臺空江自流)라
오궁화초매유경(吳宮花草埋幽逕)이요 진대의관성고구(晋代衣冠成古邱)라
삼산반락청천외(三山半落靑天外)어늘 이수중분백로주(二水中分白鷺州)로다
총위부운능폐일(總爲孚雲能蔽日)하니 장안불견사인수(長安不見使人愁)라
鳳凰臺 위에 鳳凰이 놀았다 하거니와, 鳳凰은 가고 臺만 비었는데, 그 아래로 강물만 흘러간다.
吳官 화초도 오솔길에 묻히고, 晋代 衣冠들도 언덕 위에 무덤을 이루었거니.
三山은 靑天 밖으로 반만 걸려 있고, 二水의 중간 갈림에 있는 것을 白鷺州란다.
이제 모든 것은 孚雲이 해를 가렸으며, 長安은 보이지 않고 나로 하여금 客愁만 깊게 하는구나.
唐 玄宗때 大文章 李太白이 玄宗의 물리침을 입어 客遊 도중 武昌에 가서 黃鶴樓에 올라 崔顥의 時에 감탄하여 붓을 내던지고, 다시 金陵에 놀면서 鳳凰臺에 올라 이 시를 짓고 黃鶴樓 시에 比擬했다 함. 懷古·旅情을 術懷하고 君側에 간사한 신하가 있음을 慨嘆한 시다.
金陵은 江蘇省의 南京·六朝 宋의 王의이란 사람이 여기에 鳳凰이 떼지어 모인 것을 보고 臺를 지었다 한다. 鳳凰은 百鳥의 왕. 聖天子에 治世에 나타난다고 하는 瑞鳥이다.
이 시는 먼저 약 500년 지난 일을 추억한 것이고, 三山半落은 直景을 그리고 끝 귀절의 나라를 근심하는 것으로 구름을 奸臣 에 비유하여 지은 명작이다.
(6) 黃鶴樓 湖北省 武昌縣에 있는 名樓로 初唐 시인 崔顥의 시다. 原文은 다음과 같다.
昔人已乘黃鶴去, 此地空餘黃鶴樓。
黃鶴一去不復返, 白雲千載空悠悠。
晴川歷歷漢陽樹, 芳草萋萋鸚鵡洲。
日暮鄉關何處是, 煙波江上使人愁。
석인(昔人)이 이승황학거(已乘黃鶴去)하니 차지(此地)에 공여황학루(空餘黃鶴樓)로다
황학(黃鶴)이 일거불부반(一去不復返)하니 백운천재공유유(白雲千載空悠悠)라
청천(晴天)은 역력한양수(歷歷漢陽樹)어늘 방초처처앵무주(芳草萋萋鸚鵡州)로다
일모향관(日暮鄕關)이 하처시(何處是)런고 연파강상(煙波江上)에 사인수(使人愁)로다
옛 사람이 이미 黃鶴을 타고 가 버렸다고 하는데, 지금은 부질없이 黃鶴樓라는 이름만 남아서 지난날의 전설을 이어갈 뿐이다.
黃鶴은 한번 가서 다시 돌아오지를 않고, 다만 白雲이 천년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유유히 흐르고 있을 따름이다.
맑게 겐 저쪽에는 漢陽 街路樹木이 하나 뚜렷이 보이고 아름다운 풀이 무성한 저곳은 옛날 後漢의 名士 禰衡이 죽음을 당한 곳으로, 그 사람의 <鸚鵡賦>라는 시의 제목을 따서 이름을 鸚鵡州라고 하는 곳이다.
해저무는 하늘의 그 어디쯤이 나의 고향인가를 바라고 있노라니,
저녁 안개가 波動하는 江上의 風越는 길손의 마음을 시름 속으로 끌어넣는다.
黃鶴樓는 武昌府城의 西南隅, 黃鶴磯上에 있으며, 揚子江에 임하였다. 蜀의 費褘가 仙人이 되어서 黃鶴을 타고 여기에 쉬어 갔다 하므로, 이런 이름이 유래된 것이다.<寰宇記>
혹은 酒店 辛氏라는 사람에게 온 한 선생이 술 값 때문에 벽에다 鶴을 그렸다. 뒤에 그 벽에 그려진 黃鶴이 날아가 버렸으므로, 辛氏는 樓를 세우고 黃鶴樓라 하였다.<武昌誌> 또는 仙人이 子安이 黃鶴을 타고 여기를 지났다 한다. <薺諧誌>
李太白은 이 시를 보고 크게 감복하여 자기는 이 樓의 시를 짓진 않았으나, 여기에 匹敵할만한 七律을 지을 작정으로<登金 陵鳳凰臺> 詩를 지었다.
<黃鶴樓>는 최초의 2句에 전설에 仙人에 대한 憧憬을 浮彫하고, 3·4句에는 그것이 다만 인간의 헛된 동경에 지나지 않음을 一片의 白雲에 비유하여 표현하고, 一轉하여 맑게 겐 내와 勝景을 묘사하여 鸚鵡州에 얽힌 이衡의 죽음을 애도하였으며, 끝으로 저물어 가는 蒼茫한 江의 경정을 들어서 길손의 시름을 述懷하였다. 懷古·寫景·望鄕을 주로 해서 변화있는 餘情이 풍부하게 있는 시다.
(7) 滕王閣 滕王閣은 江西省 南昌府의 名勝樓閣이요, 滕王閣詩는 王勃의 시다.
이 등王閣序에 대하여 설명하면, 우선 이 문장에는 재미있는 逸話가 있다.
唐나라 高祖 李淵의 아들 元罌의 江西省 南昌縣의 洪州刺使로 있을 때 이 殿閣을 지었는데, 그때 元罌은 滕王에 封爵되었으므로 滕王閣이라 이름을 지은 것이다. 그 뒤 唐나라 高宗 成亭二年에 閣佰嶼가 洪州守護가 되었을 때 滕王閣을 修繕하고, 9월 9일에 크게 貧客을 모아 宴會를 베풀었다.
閣佰嶼는 미리 그의 사위 吳子章에게 序文을 짓게 하여 놓고 當日 宴席에서 사위 자랑을 하려고 하였다. 마침내 그날이 되어 貧客이 모였으므로 伯嶼는 紙筆을 내어 滕王閣 서문을 지으라고 座中의 貧客들에게 청하니, 누구도 快히 이를 지어내는 자가 없었다. 伯嶼의 계획은 생각대로 되어 갔다. 이때 王勃은 그의 아버지 王福時의 任所인 交趾에 가려고 長安에서 떠났다가 마침 이날 등王閣 잔치에 참석하게 되었다.
王勃은 座中貧客들 중에서 가장 年少한 자였다. 伯嶼가 낸 紙筆이 王勃의 손에 들어왔을 때 王勃은 이를 받아서 조금도 주저하는 기색이 없이 붓을 들었다. 伯嶼는 王勃이 어떤 글을 짓나 하고 手下의 관리를 시켜 문장이 작성되는 대로 보고케 하였다.
마침내「落霞興孤鶩薺飛 秋水共長天一色」이란 句에 이르러, 伯嶼는 책상을 치며 감탄하고, 이를 칭찬하여 천재라 하였으니, 그 전편을 이루도록 歡樂의 宴席을 끝내었다는 것이다.
<滕王閣序>는 다음과 같다.
등왕고각(滕王高閣) 이 임강저(臨江渚)하여 패옥명란파가무(佩玉鳴鸞罷歌舞)라
화동조비남포운(畵棟朝飛南浦雲)이요 주렴모권서산우(珠簾暮捲西山雨)라
한운담영일유유(閑雲潭影日悠悠)하니 물환성이도기추(物換星而度幾秋)아 移
각중제자금하재(閣中帝子今何在)오 함외장강공자류(檻外長江空自流)라
勝王이 세운 高閣은 지금도 長江 기슭에 우뚝 서 있는데
佩玉 鳴鸞의 行次와 어여쁜 妓女들의 노래와 춤은 그치고 말았다.
다만 아침이면 丹靑한 기둥에 南浦의 구름이 흘러와서 머물다 가고
저녁이면 珠簾밖에 西山의 비가 저녁놀을 띠고 흩뿌려지는 것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무심한 구름과 못들의 그림자는 날과 함께 유유히 옛날의 모습 그대로인데
滕王이 이 殿閣을 세운 이래 世事는 바뀌고 세월은 흘러 몇 春秋가 지나갔는가
滕閣의 주인 滕王은 지금 어느 곳에 있는지 알 길이 없고
다만 난간 밖에 長江의 물만이 오늘도 옛 모습 그대로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王勃은 나이 29세에 南海를 건너가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8) 館娃宮中麋鹿遊 館娃宮은 蘇州에 있음. 西施가 있던 곳이므로 吳人들이 미녀를 娃라 부른다. 宮이 폐허가 되어 사슴들만 뛰논다는 회고의 뜻.
<蘇臺竹技曲>「館娃宮中塵鹿遊 西施去泛五湖丹 香魂玉骨歸何處 不及眞娘葬虎丘」 관와궁에 사슴만 놀고, 西施 떠난 五湖에 배 뛰우네. 향혼 옥골은 어디로 갔는가. 진랑이 호구에 묻힌 것에는 미치지 못하리.
(9) 越王臺의 자고 越王臺는 浙江省에 있는 越王 句踐이 지은 臺. 그 臺에 자고만 날아든다는 말이니, 회고의 뜻. 唐時「傷心欲聞前朝事 惟有江流去不回 日暮東風春草綠 자고飛上越王臺」
(10) 汨羅水 湖南省에 있는 水名. 屈原이 빠져 죽은 곳.
(11) 屈三閭 이름은 平, 字는 原. 楚의 왕족으로 屈·蔿·景 3王族을 맡아보는 三閭大夫가 되었다가 小人의 讒訴로 추방되어 <離騷經>과 <漁父辭>를 짓고 5월 5일 汨羅水에 빠져 죽었음.
(12) 浙江 浙江省에 있는 江名.
(13) 李謫仙의 騎鯨 이름은 白, 字는 太白. 號는 靑蓮居士. 唐 玄宗때의 大時人. 謫仙은 天上에서 죄를 짓고 인간으로 귀양 왔다는 뜻인데, 賀李眞이 白의 仙風道骨이 謫仙人이었다고 말하였다.
騎鯨은 李白의 死去를 말함이니, 물에 빠져 죽은 것을 고래를 타고 神仙이 되어 갔다고 하는 것임. <秦少游>「李白騎鯨飛上天 江南風月閑多年」
(14) 采石江 安徵省에 있는 江名. 李白이 놀던 곳이며, 강위 靑山이란 산에 李白의 무덤이 있음. 또 宋의 虞允文이 金軍을 이곳에서 쳐부수었음.
(15) 蘇東坡 이름은 軾, 字는 子膽, 號는 東坡, 諡는 文忠. 宋 哲宗 때 益州에서 낳으며, 詩文으로 유명하고 經史에 博通하며 韓退之 이후 문장대가의 일인자임. <東坡全集> 150卷이 있으며, 특히 前後 <赤壁賦>는 널리 알려져 있음.
(16) 赤壁江 黃岡縣城 밖에 있으며, 赤鼻磯라고도 함. 蘇軾이 이곳에서 뱃놀이하면서 周瑜가 싸운 곳이라 잘못 생각하고 前後 <赤壁賦>를 지었음.
(17) 賈太傳 이름은 誼. 洛陽人. 漢 文帝 때 博士로부터 1년동안에 승급하여 벼슬이 太中大夫에 이름. 뒤에 降職하여 長沙王 太博가 되었다가 다시 梁王太博가 되어 治安策을 文帝에게 올렸음.
(18) 심陽江 중국 江西省 九江顯北에 있는 江名. 白樂天이 귀양갔던 곳임.
(19) 白香山 이름은 居易, 字는 藥天, 號는 香山居士. 太原人으로 晩唐 시인. 貞元때 進士로서 벼슬이 刑部尙書에 이름. 저서에는<白氏長慶集> 75卷이 있고, 특히 <長恨歌> <琵琶行>은 세상에 널리 전해진 유명한 詩篇이다.
(20) 巴陵 顯名. 淸代에 湖南省 岳州府. 현 湖南省 岳陽縣內에 속함.
(21) 洞庭湖 湖南省內에 있는 湖水名. 杜甫 詩「昔聞洞庭水 今上岳陽樓」
(22) 斑竹 斑點이 있는 대. 舜이 南巡狩하다가 蒼梧에서 죽으니 그 二妃 娥皇·女英이 슬퍼 울어 뿌린 눈물이 湘竹에 떨어져 斑點의 대가 되었다함. 李白 詩「蒼梧山崩湘水絶 竹上之淚乃可滅」
(23) 黃陵廟 瀟湘江邊에 있는 舜妃인 娥皇·女英을 모신 詞堂.
(24) 湘江 廣西省에서 발하여 洞庭湖로 흘러드는 江名.
(25) 錢塘江 浙江省에 있는 浙江의 下流.
(26) 金陵 江蘇省에 있는 縣名. 지금의 南京.
(27) 金芙蓉 <鎭國名山> 註 (2) 참조.
(28) 春臺日月 春景이 融和하여 臺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마음이 넓고 快暢하다는 뜻인데, 이 말은 盛世에 비유한 것.
(29) 康衢謠 擊壤歌 康衢는 번화한 거리. 堯임금이 臺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마음이 넓고 快暢하다는 뜻인데, 이 말을 盛世에 비유한 것. 擊壤歌는 농부가 태평을 노래하는 것. <十八史略> 「堯乃徵服 遊於康衢 有老人 含哺鼓腹 擊壤而 歌曰 日出而作 日入而食 耕田而食 鑿井而飮帝力何有於我哉」
역려(逆旅)(1) 천지간(天地間)의 과객(過客) 인생들아 백년이 그 얼마냐.
대몽(大夢)을(2) 뉘라 깰고. 만고역대(萬古歷代) 제왕(帝王) 성인(聖人) 군자(君子) 충신(忠臣) 열사(烈士)들아
영웅(英雄) 호걸(豪傑) 문장(文章) 재사(才士) 신선(神仙) 금불(金佛) 은처사(隱處士)며
협객(俠客) 변사(辯士) 부가옹(富家翁)과 공자(公子) 왕손(王孫) 미인(美人)들을 역력히 헤어 보니
한단일몽(邯鄲一夢)이 덧없구나.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씨(人皇氏)가 만팔천세(萬八千歲) 사다 하되 그 뉘라 보았으며
시획팔괘(始劃八卦) 복희씨(伏羲氏)도 여천동로(與天同老) 못하였고
치우(蚩尤) 잡던 헌원씨(軒轅氏)도 정호비룡(鼎湖飛龍) 속절없고,
상백초(嘗百草) 신농씨(神農氏)도 불사약(不死藥)을 못 먹었고,
요순(堯舜) 우탕(禹湯) 문무(文武) 주공(周公) 공맹(孔孟) 안증(顔曾) 정주자(程朱子)는 도덕(道德)이 관천(貫天)하여 만고성현(萬古聖賢) 일렀건만 미미한 인생들이 그 어이 알아보리.
강태공(姜太公) 황석공(黃石公)과 사마양저(司馬穰저) 손빈오기(孫빈吳起) 전필승(戰必勝) 공필취(攻必取)는 만고명장(萬古名將) 일렀건만 한번 죽음 못 면하고
멱라수(汨羅水) 맑은 물은 굴삼려(屈三閭)의 충혼(忠魂)이요 상강수(湘江水) 성긴 비는 오자서(伍子胥)의 정령(精靈)이라
채미(採薇)하던 백이숙제(伯夷叔齊) 천추명절(千秋名節) 일렀건만 수양산(首陽山)에 아사(餓死)하고
말 잘하는 소진(蘇秦) 장의(張儀) 열국제왕(列國諸王) 다달래도 염라왕은 못 달래어
춘풍세우(春風細雨) 두견성(杜鵑聲)에 슬픈 혼백뿐이로다.
맹상군(孟嘗君)의 계명구도(鷄鳴狗盜) 신릉군(信陵君)의 절부구조(竊符救趙) 만고 호걸 일렀건만
한산세우(寒山細雨) 미초중(薇草中)에 일부토(一부土)만 처량하다.
통일 천하 진시황(秦始皇)은 아방궁(阿房宮)을 높이 짓고 만리장성 쌓은 후에 육국제후(六國諸侯) 조공 받고 삼천 궁녀 시위할 제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인을 삼신산(三神山) 불로초(不老草)를 구하려고 보낸 후에 소식조차 돈절(頓絶)하고 사구평대(砂丘平臺) 저문 날에 여산황초(驪山荒草)뿐이로다.
역발산(力拔山) 초패왕(楚覇王)은 시불리혜(時不利兮) 추불서(騅不逝)라 우미인(虞美人)의 손목잡고 눈물 뿌려 이별할 제 오강(烏江) 풍랑 중에 칠십삼전(七十三戰) 가소롭다.
동남제풍(東南祭風) 목우유마(木牛流馬) 상통천문(上通天文) 하달지리(下達地理) 전무후무(前無後無) 제갈공명(諸葛孔明) 난세간웅(亂世奸雄) 위왕조조(魏王曹操) 모연추초(暮烟秋草) 처량하고
사마천(司馬遷) 한퇴지(韓退之)와 이태백(李太白) 두목지(杜牧之)는 시부(詩賦) 중의 문장이요,
월서시(越西施) 왕소군(王昭君) 우미인은 만고 절색 일렀으되 황량고총(荒凉孤塚)이 되어 있고
팔백장수(八百長壽) 팽조수(彭祖壽)며 삼천갑자(三千甲子) 동방삭(東方朔)도 차일시(此一時) 피일시(彼一時)라 안기생(安期生) 적송자(赤松子)는 동해상(東海上)의 신선(神仙)이라 일렀으되 말만 듣고 보든 못하였다.
아서라 풍백(風伯)에 붙인 몸이 아니 놀고 무엇하리.
<역대가>와 <불수빈>에서 설명하였으므로 해설을 생략한다.
(2) 大夢 哲人의 꿈이라는 뜻. 諸葛亮 詩「草堂春睡足 窓外日遲遲 大夢誰先覺 平生我自知」
※ 이하는 <歷代歌> <夢遊歌> <不須嚬>에 상세히 註解했기로 생략함.
동군(東君)이(1) 유정(有情)하여 춘풍이 화창하니 청명가절(淸明佳節)이 아니냐. 경치도 가려(佳麗)하다.
만첩산중(萬疊山中)은 취병(翠屛)을 둘렀는 듯 백화(白花)는 만발하여 광휘(光輝)도 찬란하다.
채필(彩筆)을 높이 들어 명화(名畵)를 그렸는 듯 층암절벽은 무심히도 개봉(開峯)이라
만산홍록(滿山紅綠)은 춘색(春色)을 띠어 있고 임하(林下)에 우는 새는 왕손(王孫)이 느끼는 듯 물색(物色)이 처연(悽然)하다.
창랑수(滄浪水) 맑은 곳에 꽃 그림자 구름 멘 듯 연년춘초(年年春草) 설워함이 많고 많다.
광풍(狂風)은 처처(凄凄)하여 낙하(落花)를 재촉는 듯 떨어지거니 피거니 난만(爛漫)코 어지럽다.
이화(梨花)는 눈날리듯 화엽(花葉)이 분분하여 어언간에 중춘색(仲春色)이로구나.
요요(2)삼색도(3)(夭夭三色桃)는 언제 왔다 돌아가나 춘풍도리(春風桃李)를 훌훌히 보낸 후에 화하승경(華夏勝景)을 목단(牧丹)으로 벗을 삼아 녹림(綠林)이 의의(依依)한데 화왕(花王)벗을 자랑한다.
천리향풍(千里香風) 애애(靄靄)하여(4) 화지(花枝)에 둘러 있고 앵가(鶯歌)는 영영(영영)하여 태평곡(太平曲)을 아뢰는 듯 쌍봉(雙蜂)은 노래하고 호접(蝴蝶)은 춤을 춘다.
무신(舞身)은 편편(翩翩)하여 향풍(香風)에 나부끼고 무가(舞歌)는 열열(咽咽)하여 화림(花林)에 얽혔에라.
옥계(玉階)의 해당화는 조로(朝露)를 머금어서 자약(自若)히 피었구나
부성(富盛)한 작약꽃은 향기를 자랑하고 향기는 울울(鬱鬱)하여 반공(半空)에 가득하다.
황앵(黃鶯)은 환우(喚友)하며 화초간(花草間)에 왕래하고
양류(楊柳)는 청청(靑靑)하여 바람을 못 이기어 유서(柳絮)를(5) 흩날린다.
연(蓮) 캐는 아희들아 창랑수(滄浪水) 맑은 곳에 부용일지(芙蓉一枝) 꺾어 내니 일진청풍(一陣淸風) 홍백(紅白)이 분명하다.
녹파(綠波)를 의지하여 옥배(玉盃)를 어루만져 연엽주(蓮葉酒) 마신 후에 채련곡(採蓮曲) 읊으면서 귀거래사(歸去來辭) 생각하니 전원 어디메뇨.
동리국화(東籬菊花) 찾아볼까. 금풍(金風)이 소소(蕭蕭)하여 국화 난개(爛開)하니 은일처사(隱逸處士) 높은 절개 고연(高然)히 보았에라. 추천낙월(秋天落月)에 강풍(江風)은 처처(凄凄)하고 만산홍엽(滿山紅葉)은 금수장(錦繡帳)을 이루었는데 죽은 듯 잠을 이뤄 매죽(梅竹)을 꿈에 보니 엊그제 붉은 단풍 오륙일 설상(雪霜)위에 매화 향기 아름답다.
창창(蒼蒼) 송죽(松竹)은 납설(臘雪)을(6) 띠어 있고 의의녹주(依依綠竹)은 설상(雪霜)을 멸시하여
열사(烈士)의 후신(後身)인가 절개도 견고하고 적설(積雪)을 쓸고 취죽(翠竹)을 어루만져 세월이 신속함을 장탄(長歎)하고 물색(物色)의 변태(變態)함은 창연(愴然)이라
외외(巍巍)한(7)암석하(岩石下)에 설풍(雪風)이 처량(悽凉)한데 옥수주렴(玉樹珠簾) 처처(處處)에 걸렸으니 소담한 설경(雪景) 중에 매향(梅香)이 무르녹고 열렬한풍(烈烈寒風)에 홍안성(鴻雁聲)이 처량하다.
어느덧 설경(雪景)을 지났구나 동풍(東風)이 담탕(淡蕩)하니 삼춘가절(三春佳節) 다시 온다. 허후 세상사 헛되도다. 인생이 부득항소년(不得恒少年)이니 아니 놀고 무엇하리.
(2) 夭夭 ㉠나이가 젊고 용모가 아름답다. ㉡ 얼굴 표정이 부드럽다. ㉢가냘프고 아름답다.
(3) 三色桃 색색의 복숭아꽃.
(4) 靄靄 안개가 아지랑이 같은 것이 많이 끼어있는 모양.
(5) 柳絮 버들강아지.
(6) 臘雪 납일에 내리는 눈.
(7) 巍巍 ㉠ 뛰어나게 높고 우뚝 솟은 모양. 巍외·巍然 ㉡ 격이 높고 뛰어남.
광활남북(廣闊南北) 좋은 천지 금수강산이 좋을씨고, 좋은 줄은 알지마는 생각사록 걱정이라
걱정 끝에 한숨나고 한숨 끝에 말 못하니 유구무언(有口無言)
황천(黃泉)이(1) 멀다해도 이수분야(二水分野)가 거기 있고
청춘은 어디 가고 백발이 어찌 왔나
곱던 형용 추악하여 우주 과객(宇宙過客) 그릇되네.
원수로다 원수로다 한 손에는 망치 들고 한 손에 철퇴 들고 밀고 치고 격투를 하여도 무정 세월은 하는 수 없네.
검던 머리는 희어지고 이 조차 낙치(落齒)되어 음식 먹는 거동 보면 아래턱이 코를 차니 불성모양(不成貌樣) 참혹(慘酷)하다.
썼던 갓 벗으니 종일(終日) 수심(愁心) 분기(憤起)하고 행보조차 줄어지니 남은 것이 지팡이라
십리길이 백리되고 백리길이 천리되고 강상풍경(江上風景) 직하(直下)할 제 좌이대사(坐而待死) 뿐이로다(2). 거름 걷는 거동 보면 우렁 찍는 황새로다.
안이라고 들어가면 내외간에 별일 없고 사사(事事)에 무용처(無用處)라
밖으로 나가면 아희들게 훈장질, 쓸데없는 바둑판은 손때만 남는구나.
나를 보러온 소년들은 무슨 일이 조급한지 잠시 조심 바이 없네
동지장야(冬至長夜) 긴긴 밤에 홀로 누워 생각하니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쓸데없는 헛 국량(局量)만 한량없이 드는구나.
만권서(萬卷書)를 모아 가지고 하나님전 등장(登狀)가세.
무슨 연유로 등장가리 늙은 인간 쉬 죽지 말고 젊은 청춘 너무 늙지 말라고 그 말 연유(緣由)로 등장 가자.
세월아 가지 말아라. 아까운 청춘이 다 늙는다.
아서라 풍백(風伯)에 붙인 몸이니 풍월(風月)이나 하면서 지내보세.
청춘은 어느덧 가고 백발이 찾아오니 하느님전 등장(登狀)을 간다고 억지 소리를 터무니없이 한다.
이것으로 단가는 전부 끝을 맺는다.
(2) 坐而待死 가만히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처지가 몹시 궁박하여 어찌할 대책도 강구할 길이 없어 될 대로 돼라는 태도로 기다림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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