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들에게 전하는 아버지의 목소리:
조선시대 <戒子>類 考察
이 은 영*
< 차 례 >
1. 머리말
2. <계자>류의 존재 양상
3. <계자>류에 나타난 아버지의 목소리
3.1. 금기와 훈계의 목소리
3.2. 소통과 공감의 목소리
4. 遺誡, 아버지의 마지막 목소리
5. <계자>류의 성격과 의미
6. 맺음말
1. 머리말
본 논의는 조선시대 문집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남긴 글이 상당히 많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쓴 글은 행장과 편지글 등을 제외하고는 쉽사리 찾아볼 수 없는데 비해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글은 詩를 포함해서 ‘戒--’ ‘訓--’ ‘示--’ 등의 제목을 표방하여 나타나는 詩文이 심심찮게 발견된다. 이러한 종류의 글을 <계자>류로 범칭한다면 그 성격은 한마디로 자식에게 바라는 바를 전달하고 실천을 당부하는 글로 요약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유형의 글은 딸에게 주는 <戒女>류와는 다른 양상을 가지고 있다. <계녀>류가 규범서류의 글로서 유교적 가치와 규범을 교육하고 내면화시키기 위한 목적이 강하다면1) <계자>류는 교육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획일적, 규범적인 성격은 훨씬 약화되어 있다. 『소학』『삼강행실도』 등의 교육서, 문중 단위에서 지어졌던 가훈서와도 구별된다.
가르친다는 목적의식을 내포하고 있고 아들에 대한 당부가 가문을 지키고 이어가기 위한 가족 구성원 및 후손들에 대한 당부와 일정 부분 상통하기는 하지만 <계자>류는 아버지와 아들의 일대일 관계라는 보다 중요한 관계 영역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2) 여기가 바로 문학에서 주목해 보아야 하는 지점이라고 생각된다.
본고는 조선시대 문집에 나타나는 <계자>류의 글을 통해 당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조명하고 그 글의 성격을 분석하여 이들이 당시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대상 자료는 표면과 이면에 ‘아버지’ ‘아들’ ‘가르침’ 세 개의 키워드를 포함하면서 ‘계자’를 전편의 주제의식으로 하고 있는 글이다.3)
1) 계녀문류의 글로 대표적인 것은 송시열의 「계녀서」일 것이다. 장녀가 출가할 때 써준 글로, 여자로서의 마음가짐과 몸가짐, 언어, 시집가서 지켜야할 여러가지 규범에 관한 내용을 꼼꼼히 적고 있다. 최석정의 「戒女箴」, 안정복의 「警女兒」, 박윤원의 「女誡」, 홍원섭의 「續書女四書後戒女兒」 등도 글의 전편이 아내로, 며느리로, 어머니로 지켜야할 도리에 대한 권계로 이루어져 있다.
아버지가 딸에게 건네는 글이지만 실상 사사로운 감정은 드러나지 않으며 여성 교육을 위해 만들어진 여훈서 또는 부훈서의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2) 교육교재나 가훈서와 계자문의 경계가 모호한 경우도 있다. 윤선도가 아들에게 보내 경계한 「寄大兒書」가 충헌공 가훈 이라는 독자적 가훈서로 편찬되었고. 유희춘이 지은 「정훈」 내편은 본인의 당부에 의해 집안 아이들의 초학 교재로 활용되었다. 『격몽요결』 과 『성학집요』 등의 교재가 윤형로의 『가훈』 강덕후의 『우곡선생훈자격언』 등의 가훈서 편찬에 영향을 주었다는 보고도 있다. (정무곤, 「조선시대 가훈서와 교재의 상호영향연구」, 교육철학 41, 2008, pp.251-269).
3) 편지글은 그 성격이 분명하지 않은 이상 제외하기로 한다. 편지는 아들의 교육 매체로 가장 많이 활용되던 것이 분명하지만 계자를 목적으로 하기 보다는 일상적 소식을 나누는 가운데 계자의 내용이 부수적으로 들어간 경우가 많고 무엇보다 양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 이화여대
2. <계자>류의 존재 양상
『안씨가훈』을 지은 안지추는 서문에서 자신의 성장 과정과 삶에서 겪었던 시행착오를 고백하면서 그것이 자손들에게 감계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책을 쓰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계자>류 역시 『안씨가훈』을 비록하여 아들을 위해 경계의 글을 남겼던 주희와 소강절 ․ 제갈량 ․ 한유 ․ 두보․ 도연명 등
옛 선현들의 선례를 본받아 지어졌다.4)
<계자>류의 문체는 詩 ․ 箴 ․ 說 ․ 書 ․ 文 등 다양하다. 그러나 시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잡저’에 속해 있고 문집에 따라서는 家誡 ․ 家訓 ․ 遺敎 ․ 庭訓 등으로 분류 항목을 따로 설정한 경우도 있다.
논자가 수집하여 고찰의 대상으로 삼은 자료는 모두 63편이다.(자료목록 참조) 이 가운데 선초의 작품은 이직 ․ 신숙주 ․ 최항 등이 지은 5편으로, 이른바 현달한 가문을 중심으로 가득찬 복을 경계하라는 식의 내용이 주종을 이룬다. 대체로 시 형식이어서 훈계의 내용 또한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경향이 있다. 아직 <계자>류의 글이 보편화되지 않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4) <계자>류의 글에서 언급되고 있는 선현들의 작품은 주희의 「與長子受之」, 소옹의 「誡子吟」, 제갈량의 「誡子書」, 도연명의 「與子儼等疏」, 한유의 「符讀書城南」, 「示兒」, 두보의 「熟食日示宗文宗武」, 「又示兩兒」 등이다.
<계자>류의 글이 급격히 늘어나는 것은 16세기 후반~17세기이다. 이 시기에 오면 편폭이 길어지면서 내용이 구체화되고, 현달한 집안 뿐 아니라 쇠락하거나 위기에 놓인 집안, 좋고 나쁘고 급박하고 특수한 여러 가지 조건에서 아들에게 주는 글이 지어진다.
이 시기에 <계자>류가 급격히 늘어나는 배경에 대해서는 몇 가지 추정이 가능하다. 우선 이 시기는 성리학에 대한 학문적 이해가 심화되고 이를 생활에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이 본격화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오면 정치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확보한 사림들이 주축이 되어 『소학』 ․ 『삼강행실도』 ․ 『이륜행실도』 등의 윤리서를 통해 유교적 생활 규범을 보급하고 『사례홀기』 ․ 『예』변 ․『의례문답』 과 같은 예서를 통해 주자가계를 뿌리내리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당시 상제례의 내용을 담은 遺誡가 늘어나게 되는 것 역시 주자가례와 속례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고 경제적 사정과 예법에 맞는 의례를 실천하고자 했던 이시기 사대부들의 의식과 맞물려 있다고 생각된다.
또 이 시기는 성리학적 지배체제가 자리 잡히면서 家의 변화가 시작된 때이기도 하다. 族契나 族規를 마련하고 족보와 가훈서를 간행하며 문중서원을 건립하는 등 종법적 질서를 바탕으로 문중 단위의 사업이 진행되고, 이러한 시대 변화 속에서 가의 위상을 높이려는 가문과 몰락 직전의 집안을 건사하거나 높아진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려는 집안이 나타나는 가운데 가훈서가 등장하게 된다.5)
<계자>류의 양적 증가 역시 유교적 생활규범과 의례를 ‘나’부터 ‘내 자식’부터 ‘우리 집안’부터 실천하고자 했던 이시기 사대부들의 동향과 무관하지 않다.
5) 정무곤, 「17세기 가훈서를 통해 본 가의 교육적 역할」, 교육철학 제40집 164쪽.
무엇보다 이 시기는 사림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면서 학맥과 붕당을 형성하고, 붕당 간 이해관계와 신념이 당쟁으로 나타나던 시기이다. 자신과 함께 자식이 희생될 지 모르고 언제 가문이 몰락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들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고 당부해야 한다는 의식은 거의 본능에 가까웠으리라고 짐작된다. 집안의 광영을 드러내는 글보다 낙향이나 귀양 등으로 현실정치에서 멀어진 상태, 또는 죽음을 앞두고 쓴 글이 늘어나는 것 또한 이시기의 사회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戒子>류 目錄
3. <계자>류에 나타난 아버지의 목소리
3.1. 금기와 훈계의 목소리
『문장변체』에 의하면 ‘訓’이란 ‘가르쳐서 순종하도록 하는 글’6)이고 ‘誡(戒)’란 ‘경계하고 조심하게 하는 글’7)이다. 이끌어야 할 대상과 목표가 분명하고 행동으로 이어지기를 촉구하는, 다소 강제성을 띤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점 때문에 <계자>류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문장 형태는 마땅히 해야할 일, 조심해야 할 일, 해서는 안될 일 들을 “-하지마라” “-해라”와 같은 구문으로 중첩한 명령형 문장, 또는 “첫째, 둘째, 셋째” 등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몇 가지 항목으로 나열하여 기술한 항목형 문장이다.
6) 賀復徵, 『文章辨體』 , 「訓」, “訓之爲言 順也 敎訓之 以使人順從也”
7) 앞 책, 「誡」, “誡者 警勅之辭”
"...
침묵 지켜 남의 단점 조롱 말고 守默勿嘲人短劣
겸손하여 제 재능을 자랑하지 말라 撝謙莫詑己才能
높은 자리에 있을 땐 조심하기만 생각하고 居高唯念小心翼
험한 곳을 만나면 오직 뽐내지 말 것을 생각해야 하나니 遇險但思攘臂仍
청렴하고 정직하면 훗날 좋은 명예 거두고 淸直他時收令譽
공손하고 부지런하면 무슨 환난 염려하리 恪勤何任患難勝
내 말을 웃어넘기지 말고 순종하여라 我言維服勿爲笑
자식된 직분으로 어찌 복응치 않으랴 子職當爲盍服膺...8)"
8) 최항, 『太虛亭詩集』 , 「戒二子詩」
"첫째 과거를 경계하라. 과거란 입신하는 첫걸음이다. 한번이라도 여기서 사사로움을 면치 못한다면 만사가 모두 바르지 않게 된다. 이렇게 시작한다면 비록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명성과 하늘에 닿을만한 사업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향상이 될 수 있겠는가?
....
둘째 붕당을 경계하라. 옛날 붕당에는 사특한 것과 바른 것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군자는 구차하게 붕당의 지목을 피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그렇지가 않다. 문호를 갈라 나눈 것이 마치 춘추 시대에 의로운 전쟁은 없이 득실만 걱정하다가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것과 다를게 없다.9)"
9) 오광운, 『藥山漫稿』 , 「訓子」,
“其一曰戒科擧。科擧者。拔身第一步也。一於此而不免私邪。萬事皆不正矣。以此啓軔。雖有驚世之聲名。軒天之事業。何足息黥而補刖哉...。
其二曰戒朋黨。古者朋黨。有邪有正。故君子者不苟避朋黨之目。今世則不然。分門割戶者。如春秋無義戰。其患得患失。忘君負國一也。環顧一世。無一片乾凈土”
앞의 예문은 최항이 두 아들에게 준 「戒二子」라는 시이고 뒤의 예문은 오광운이, 살면서 경계해야 할 내용을 적어 아들에게 준 「訓子」라는 글이다.
최항은 이 시에서 ‘뜻과 절개를 세우고’ ‘연못처럼 맑은 마음을 지니라’고 하는 원론적 당부 외에 ‘술에 미혹되지 말고’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며’ ‘말조심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녀’ ‘화를 부르지 말라’는 등의 당부를 하였고, 오광운 또한 ‘과거’와 ‘붕당’ 이외에도 ‘進取’ ‘사치’ ‘교만’ ‘청탁’, ‘헐뜯는 의논’ 등 7가지를 경계하라고 하였다. 비교적 간략한 문장으로 되어 있으나 어조는 단호하고 훈계는 엄중하다.
최항은 “내 말을 웃어넘기지 말고 순종하라. 자식의 직분으로 어찌 복응하지 않으랴?”라는 일침을 놓고 “이 시를 종신토록 외우라”10)는 주문을 덧붙였다.
오광운 역시 글의 말미에서 “이 일곱 조목 중에서 한 가지만 빠져도 작게는 집안이 쇠하고 크게는 망할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느나?”고 하면서 “전전긍긍하는 마음으로 지켜 혹여 실추시켜 선조에게 죄를 짓는 일이 없도록 하라”11)고 엄중히 경고를 하였다.
10) 최항, 앞글, “聞詩汝更終身誦。言志吾徒信手憑.”
11) 오광운, 앞글, “凡此七條。一有闕焉。小則以衰。大則以亡。可不懼哉... 戰戰兢兢。守此七條。無或墜霣。以開罪於祖先可也。”
<계자>의 글이 엄격하고 규범적인 이유는 아버지의 주장이 독단적 견해이기 보다는 대대로 내려오는 遺訓이거나 나아가서는 성현의 가르침과 상통하기 때문이다. 그 내용이 경전이나 윤리서의 가르침과 상당 부분 일치하는 것도 아버지의 가르침이 유가의 보편적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말해준다.
"제2 욕심을 막음
선친의 성품은 조용하고 차분해서 젊어서부터 노년에 이를 때까지 음탕한 음악을 듣지 않으셨고, 여색을 매우 멀리하여 일찍이 음란하고 문란한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다.
분수 밖의 재물 보기를 흙덩이같이 하셨고, 일체의 번화한 세상맛에 대해서도 담담하니 좋아하신 것이 없었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재물과 여색과 가무와 유희를 탐하면 끝내 그릇된 사람이 되나니 너희들은 마땅히 깊이 경계하라.
후한의 盧植은 馬融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창기가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는데도 노식은 마융을 모시고 지내는 여러해 동안 한번도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마융이 이 때문에 그를 공경하였으니, 너희들도 마땅히 이것을 본받도록 하라.”라고 하셨다.12)"
12) 유희춘, 眉巖先生集 , 「庭訓 十訓」 “窒慾第二.
先君性恬虛安靜。自少至老。不廳鄭衛之音。深遠女色。而未嘗言及於淫媟。
分外之財。視如土塊。於一切䌓華世味。淡然無所好。
嘗曰。殉乎貨色歌舞嬉游。卒爲非人。汝宜深戒之。
後漢盧植。師事馬融。女娼歌舞於前。植侍講積年。未嘗轉眄。
融以是敬之。汝宜法之。”
"명도 정 선생은 타고남이 이미 남다르고 바른 길로 교육을 받아서 관대하면서도 절제함이 있고, 온화하면서도 가볍게 흐르지 않았다.
사물을 대할 때의 그 기색을 살펴보면 봄날의 따듯함과 같고, 그 말씀을 듣고 있으면 마치 때맞춰 내리는 단비처럼 촉촉하였다.
행동을 할 때는 안으로 敬을 위주로 하면서 어짊을 실천하였으며 사람들을 가르치면 사람들이 쉽게 따르고 사람들에게 성을 내어도 사람들은 원망함이 없었다.
현명하거나 우매하거나 착하거나 악한 사람 모두 그 마음을 얻어 종일 기뻐하며 성내거나 괴로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13)"
13) 이항복, 漢陰先生文稿 , 「訓諸子帖」,
“明道程先生。姿稟旣異。充養有道。寬而有制。和而不流。
視其色接物也。如陽春之溫。聽其言入人也。如時雨之潤。
其行已。內主於敬。而行之以恕。敎人而人易從。怒人而人不怨。
賢愚善惡咸得其心。終日怡悅。未嘗見忿厲之容。”
위의 글은 유희춘이 아들을 통해 집안의 가훈으로 삼으라고 지어준 「십훈」이고 아래 글은 이덕형은 임진왜란이 한창일 당시 명나라 유정의 빈접사로 군중에 있으면서 아들들에게 남겼다고 하는 「訓諸子帖」이란 글이다.
“고아로 일찍 가르침을 잃어 항상 어버이를 여읜 슬픔을 품고 살았고 또 불초하여 세상에 부모를 드러내지 못했으니 지금 적어두지 않으면 다 없어질까 염려되어 삼가 피눈물을 흘리며 기록한다”14)는 「십훈」은 전편이 아버지의 평소 언행을 아들이 소개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아이들이 이 언행을 보고 양심을 감발하기를 바라는”15)마음에서 지었다는 「훈제자첩」 역시 주렴계 ․ 정명도 ․ 정이천 ․ 소강절 등 송나라 명신들의 언행을 요약한 내용이다.
아들이자 저자인 유희춘은 전달자 역할만을 할 뿐 내용에 전혀 개입하지 않고 본인의 목소리 역시 넣지 않는다. ‘아버지’의 언행이 그대로 ‘내’가 본받아야할 언행이고 ‘자식’이 배워야할 교훈이되며 나아가 ‘후대의 자손’들이 대대로 본받고 따라야할 ‘가훈’이 되는 셈이다.
이덕형의 경우에도 제술자인 아버지의 목소리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글을 두고 허목은 “옛 성현들을 사표로 한 군자의 가르침”16)이라고 했고 안정복 또한 “자손들에게 공명을 세우기를 당부하는 것이 보통 부형의 모습인데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닦고 학문에 힘쓰면서 집을 다스리는 일을 간곡히 부탁하였으니 본말과 선후의 도리를 대단히 잘 살핀 것이다.”17)라고 추앙하였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집안 어른의 목소리이자 성현의 목소리로 나타날 때 아들에게는 가문을 수호하고 유가의 가르침을 완수할 준엄한 책무가 부과된다.
14) 유희춘, 앞글, “孤早失敎訓。常抱終天之慟。又不肖無以顯父母於世。今不記載。恐至湮没。謹泣血而記得居家篤行十條”
15) 이항복, 앞글, “偶閱宋時諸老先生言行錄。拈出其中切要者。書送。願兒輩。常目在之。以感發其良心。”
16) 허목, 記言 , 「漢陰相國訓子孫書跋」, “又其傳家遺訓。不但躬行雅謹而已。必以古聖賢爲師。君子之敎。固不越乎禮樂之本如是。皆可法也。”
17) 안정복, 順菴先生文集 , 「題漢陰李文翼公訓子孫書後」, “自常人視之。則當國家有事之時。父兄之望於子弟者。必以功名相期。而公獨眷眷於治心修身勤學理家之節。其審於本末先後之義大矣。”
"善人 君子가 되기를 기약하여 마땅히 세상에서 善人 名士로 일컬어지는 사람의 언어와 예절, 의관, 행동거지를 사모한다.
나라에 있어서는 영준한 이들과 널리 사귀며 글을 논하고 강학하고 잡기로 내달리지 않는다.
입신양명하여 부모를 현달케하고 가문을 영광되게 한다.
수신하는 것은 공자 안자 증자 자사와 같이 하고 사업은 고요 기 이윤 여상과 같이 한다.”18)"
18) 황섬, 息庵先生文集 , 「誡示子孫書」,
“期作善人君子。當慕世所稱善人名士者 言語揖讓衣冠動止。
於國則廣交英俊。論文講學。毋馳雜歧。
立身掦名。以顯父母。以榮門戶。
修身則孔顔曾思。事業則臯夔伊呂。”
黃暹이 「誡示子孫書」에서 자손을 세 가지 부류로 나누면서 최상의 자손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한 내용이다. 그 다음 부류의 자손으로 ‘보통의 성실한 선비’를 상정하고 있는 것19)과 비교해 볼 때 본인의 자손에게는 공자 안자 증자 자사의 인품과 고요, 기, 이윤, 여상의 능력에 준하는 상당히 높은 도덕성과 학문적 성취를 주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 그 다음 부류에 해당하는 자손은
“어버이에게 효도를 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붕우와 신의를 지키고 법을 두려워하고 몸을 공경히 한다. 가묘를 삼가 지키고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지내며 남들과 쟁송을 하지 않으며 선대의 사업을 바꾸지 않는다. 향리 종족에 죄를 짓지 않고 그 자식을 부지런히 가르친다. 노복을 잘 막아 다스리되 관대함과 엄격함으로 서로 보완한다.
[其次曰 孝親敬長。信於朋友。畏法敬身。謹守家廟。盡誠祭祀。不爭訟於人。不變更先業。毋得罪於鄕里宗族。勤敎其子。撫禦奴僕。寬猛相濟]”이다.
다음 예문 또한 계자의 목적과 내용이 일상생활을 넘어 보다 높은 경지를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군자의 배움은 마음을 보존하는 것보다 절실한 것이 없고 마음을 보존하는 방법은 敬을 지니는 것보다 절실한 것이 없다.
경은 한 마음의 주재이니 動靜에 통하고 本末을 갖추고 있다.
... 하늘과 땅 사이의 온갖 사물은 모두 군자의 도이고 이 도는 내 한 마음에 바탕을 둔다. 그러므로 내 마음의 작용을 성찰하여 어그러짐이 없게 하고 내 마음을 본체를 存養하여 치우침이 없게 해야 할지니 그렇게 되면 천지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길러진다.
... 인욕이 깨끗이 없어지면 천기가 온전해진다.
... 이른바 氣質之性이라는 것은 본연에서 얻은 이치가 形氣 가운데 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상생활 마땅히 행해야 하는 것 사이에 강함과 부드러움, 둔함과 예리함이 형기에 따라 각기 나타난다.
사람의 어질고 어리석음과 사물의 선하고 악함도 바로 이 기질이 부리는 바 아님이 없으니 ‘성품은 서로 비슷하다’는 것이 이것이다.20)"
20) 유계, 市南先生別集 , 「家訓」,
“君子之學。莫切於存心。存心之道。莫切於居敬。
敬爲一心之主。通動靜該本末也。
...天地之間。事事物物。皆是君子之道。是道也。本吾一心。故省察吾心之用而無所乖戾。存養吾心之體而無所偏倚。則天地位萬物育。
...人慾淨盡。天理渾全。
...所謂氣質性者。本然所得之理。墮在形氣中。故日用當行之間。剛柔鈍銳隨形各殊。
人之賢愚。物之善惡。莫非那氣質所使。性相近者此也。
유계가 아들 命胤을 통해 남긴 <家訓>이라는 글이다. 전편이 마음을 보존하는 것의 중요성과 보존하는 방법으로서의 敬에 대한 설명으로 일관되어 있다.
‘본체와 작용’, ‘천리와 인욕’ ‘본연지성과 기질지성’, ‘理와 氣’ 등 성리학적인 개념이 총 동원되고 있어 심오한 철학적 내용을 담은 글과 별반 다르지 않다. 즉 아버지가 <계자>를 통해 아들에게 궁극적으로 바란 것은 선비의 기본적 덕목은 물론 학문적 깊이를 갖추고, 철저한 수양을 통해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 이른바 현인 군자로 표상되는 이상적 유자였다.
3.2. 소통과 공감의 목소리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아버지가 성현 또는 가장의 목소리로 아들에게 이상적 유자, 훌륭한 자손의 역할을 강조할 때 계자의 공적 규범적 성격이 강화된다. 명령조의 어투, 항목형 서술 방식으로 전달되는 내용은 메시지를 선명하면서도 강력하게 주지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독특한 방식으로 글을 전개하고 있는 <계자>류 가운데는 아버지의 또 다른 목소리를 포함하고 있는 글이 많다.
"나는 너희가 일찍 어미를 잃은 것을 가련히 여기고 게다가 너희의 타고난 기질이 잔약한 것이 안쓰러워 너희가 하는대로 내버려두고 구속하지 않았다. 진실로 한 때 어미소가 송아지 핥아주듯 하는 사랑이었다.
그런데 그 폐단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자애로운 어미가 자식을 망친다는 말이 바로 이를 두고 한말이구나. 너희를 그르친 것이 바로 나인데 또 누구를 탓하겠느냐?
.... 무지한 백성들도 차마 하지 못하는 일을 너희가 하고 있으니 그러고도 너희 마음에 편하다는 말이냐?
한 번 잘못을 하고 또 다시 할 수 있단 말이냐?
어찌 자주 그런 짓을 하면서 거리낌이 없단 말이냐?
저 야만적으로 살면서 문자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기생들과 어울려 취하기만 하는 자들은 진실로 죄줄 것도 없다.
너희는 옛글을 읽고 儒冠을 썼으면서도 인의예지의 성품을 포기하고 무지하여 망령된 짓을 하는 잘못을 스스로 용납하였으니 너희가 군자다운 선비가 되는 것은 바랄 수도 없겠고 행동을 삼가는 선비 또한 될 수가 없겠
구나. 산 사람은 비난하고 저승의 귀신은 나무랄 것이니 장차 면할 곳이 없겠다.21)"
21) 송순, 면앙정집 , 「訓子」,
“吾憐汝曹早失所恃。且愍汝曹之稟生孱弱。任汝所爲。不加拘束。固一時舐犢之愛也。
其流之弊至此。慈母有敗子。此之謂也 而誤却汝者我也。又誰咎也。
...至無知之邱氓。彼猖被不解文字。飮徒能醉紅裙者。固不足誅。
汝曹則讀古書戴儒冠。而抛棄仁義禮智之性。自納於無知妄作之孼。汝爲君子儒。非所可望。而謹勑之士。亦不得爲也耶。明之人非。
송순이 아들들에게 써 준 「訓子」이다.
글에 의하면 아들은 당시 또래들과 술자리를 벌이며 노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미 여러번 그랬던 전력이 있었던 데다가 천재지변이 연속적으로 일어나 온 나라가 근심에 빠져 있던 상황에서 또 술잔치를 벌일 계획을
꾸미고 있던 터였다. 이 소리를 듣고 몹시 화가 난 아버지는 “일찍 어미를 잃은 것이 불쌍하고 기질이 잔약한 것이 안쓰러워 마음대로 자라도록 내버려둔” 자신을 질책한다.
그리고 “무지한 백성조차 차마 못하는 일을 하고”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면서도 거리낌이 없는” 아들에게 “군자다운 선비가 되는 것은 바랄 수도 없고 행동을 삼가는 선비가 될 수 없다.” “산 사람은 비난하고 저승 귀신도 나무랄 것이니 장차 면할 곳이 없겠다”라는 극언을 서슴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능히 끊어버리지 못해 내 마음을 아프게 하니 불효가 크다.”고 하면서 불효자로 낙인을 찍고 “서경은 아들로 인해 조금도 근심하지 않았는데 그 아들에 견주면 어떻겠느냐”22) 고 하며 남의 아들과 비교하여 부끄러움을 유발하기도 한다. 아버지를 분노케 한 원인은 “옛글을 읽고 유관을 쓴” 이른바 선비라는 놈이 인의예지의 성품을 포기하고 망령된 짓을 했다는 데 있었다.
22) 송순, 앞글, “不能斷棄。使我心惻。不孝爲大。比比徐卿百不憂之二兒。何如也。”
윤기의 다음 글도 비슷한 의도를 보여주는 글이다.
"이것은 모두 나의 참람하고 망녕된 말이어서 상자 속에 감추어 둔 지 오래되었다.
이제 딸아이가 언문으로 번역해 달라고 청하기에 다시 꺼내서 보니, 나도 모르게 슬픈 마음이 이는구나.
옛날 거백옥은 ‘나이 50에 49세의 잘못을 알았다.’라고 하였는데, 이제 나는 나이가 75세가 되어 74세의 잘못을 알았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은가.
내가 전에는 고인들이 자손을 훈계하면 자손이 그 말을 준수하는 것만 보았기에, 말을 하지 않을지언정 말을 하면 자손들이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다.
그리하여 일마다 경계를 남겨 자손들이 스스로 체득할 수 있도록 하면서, 간혹 가까운 비유를 취해다 감동을 주기도 하고 간혹 절박한 말로 분격시키기도 하여 약간이나마 효험이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고금이 매우 다르고 풍습이 점차 변해서 훈계가 베풀 곳이 없고 준수할 사람이 없어 단지 시끄러운 소리로 들릴 뿐이다.
마치 귀머거리가 큰소리로 말해도 다른 사람들은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하는 줄 모르고, 병자가 몸에 절박한 말을 해도 옆사람이 예삿말로 여기는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참으로 몹시도 꽉 막히고 어둑한 사람이라 할 만하다.
지금에서야 취한 자가 갑자기 정신이 들고 꿈을 꾸던 자가 홀연 깨난 것과 같아서, 드디어 모두 불에 태우고 싶어졌으나,또 남들이 미쳤다고 할까 두려워 우선 꾹 참고 글 뒤에 쓰니,이는 대개 후회를 기록하는 것이다.
아! 모두 그만두어야겠구나.23)"
23) 윤기, 無名子集 , 「書庭誥家禁勸學遺戒等文後」,
“此皆吾僭妄之言也。藏之篋笥久矣。
今因兒女之請諺譯重閱之。不覺戚戚於心。
昔蘧伯玉行年五十。而知四十九年之非。今吾行年七十有五。而知七十四年之非。寧不愧乎。
蓋吾前此。只見古人訓戒子孫。子孫遵守其言。以爲有不言。言則安有子孫而聽我藐藐乎。
遂乃隨事寓警。俾自體念。或爲近取之譬以感動之。或爲迫切之言以憤激之。庶幾有一分之效。
而殊不知古今之逈異。風習之漸變。訓戒之無所施。遵守之無其人。徒聒聒焉。
如聾者之大聲以言。而不知他人之謂不足答。病者之語其切己。而不知傍人之以爲譫語。
眞可謂固滯昏昧之甚者也。
今而後如醉者之頓醒。夢者之忽悟。遂欲盡火之。而又恐人之以爲狂也。聊且隱忍而書諸後。蓋志悔也。
嗟乎嗟乎。已而已而。”
윤기는 앞서 자신이 갑자기 죽거나 병들어 말할 수 없을 때를 대비해 장남에게 남긴 「遺戒」를 비롯하여 「庭誥」 「家禁」 「勸學文」 등 자손들에게 남기는 많은 글을 지었다.
「書庭誥家禁勸學遺戒等文後」라는 제목의 이 글은 앞서 지은 글 뒤에 붙인 글이다. 이 글을 지은 동기로 아버지는 “고인들이 자손을 위해 훈계하면 당연히 자손들이 그 말을 준수했기 때문에 우리 자손도 그렇게 따를 줄
알았다. 그래서 비유를 통해 감동을 주고 절박한 말로 분격시키면서 약간이나마 효험이 있기를 바란 것이었는데 고금이 다르고 풍속이 변해 자신의 훈계가 그저 시끄러운 소리 정도 밖에 되지 못함을 뒤늦게 깨달았다”라고 말한다. “갑자기 정신이 들어 모두 불에 태우고 싶어졌으나 남들이 미쳤다고 할까봐 꾹 참고 후회스러운 심정까지 뒤에 남긴다”는 것이 이 글의 요지이다.
근엄하고 비장하게 쓴 앞의 훈계의 글들이 일순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게 되는 대목이다. <정고> 등의 글을 쓴 시점에서 이 글을 쓰게 된 시점까지 아들들이 아버지를 실망시키거나 우려를 자아냈던 사건이 있었던 것을 추정하기 어렵지 않다. 상당히 감정이 격앙된 상태에서 이 글이 씌어졌다는 것과 아들에게 전달할지를 두고 고민이 있었으리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끝내 이글은 문집에 실렸고 아버지의 격앙된 마음까지 아들에게 전해졌다.
이 두 글에서 아버지는 감정을 절제하고 좋은 말을 전하는 근엄한 아버지이기 보다는 노골적으로 화를 내고 호되게 야단을 치는 인간적 아버지로 등장한다.
송순은 “주공은 안일에 빠지고 놀고 사냥하는 음탕함을 경계하였고 공자는 도덕과 인의의 가르침을 내렸다.”24)라고 하여 자신의 훈계가 성현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함을 애써 강조하고 있지만 이들 글에서 간취되는 아버지의 모습은 근엄한 아버지-순종적인 아들의 전형적 부자관계 구도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상과 현실의 미세한 균열이 포착되는 지점이면서 아들에게 다가가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일률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측면이기도 하다.
성현의 가르침대로, 예법대로 살고자 하는 아버지와, 일탈을 꾀하고 아버지 뜻에 맞지 않는 삶을 사는 아들간의 갈등은 계자문 뿐 아니라 부자가 주고받은 서신 등에서 자주볼 수 있다.25)
그런 면에서 아들에게 훈계를 내리는 아버지 역시 그 아버지께 걱정을 끼쳐 드렸던 자식이었다는 고백은 따로 주목해 볼 필요가있다.
24) 송순, 앞글, “周公戒于觀于逸于遊于田之淫。孔子有於道於德於仁於藝之訓。吾亦云云。”
25) 아버지가 준 편지 가운데 명편을 엮은 이장우, 전일주(역), 『퇴계 이황 아들에게 편지를 쓰다』 , 『연암서가』, 2008, 정민 박동욱(편역), 『아버지의 편지』 ,김영사, 2008 참조.
"나이 14세에 두타산 중대사에 올라가 宋史를 읽다가 개연히 스스로 분하게 여겨 萬言書를 지어 바치려 했으나 선부군이 경계해서 중지했다. 늙은 중 하나가 있어 계율 지키기를 자못 엄하게 하고 말하는 것이 도리가 있으므로 또 그를 좋아하여 그것에 참례하려고도 하였다.
... 생각하건대 사람이 천지간에 나서 임금과 부모가 있으므로 벼리를 삼는 것인데, 부모는 이미 돌아가셨고 제사도 또한 예를 갖추지 못하니, 북쪽을 향하여 쳐다보면 눈물이 흥건히 흐른다.
또 신하가 되어서는 잘한 일이 없어 죄가 쌓이고 쌓여 헐뜯기고 욕을 먹는 것이 만 가지나 되건만, 오히려 능히 입을 벌려 먹을 것을 기다리고 사람을 향해서 말하고 웃으니, 어찌 완고하고 추한 물건이 아니겠느냐.
... 내 자손을 위한 글을 해진 상자 속에 넣어 두었으니, 때때로 꺼내 보고 오늘날의 나의 정경을 상상해 보는 것은 괜찮지만 다시 세상 사람에게 전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니, 비웃음을 살까 두렵기 때문이다.26)"
26) 이자, 『陰崖先生集』 , 「自敍」,
“年十四。上頭陀山中臺寺。讀宋史。慨然自憤。作萬言書。欲自獻。先府君戒止之。有一老宿。持戒頗嚴。發言有道理。又喜之。欲參焉.
..又念人生天壤間。有君親以爲綱。親旣無及矣。享祀亦不備禮。北向瞻盱。橫涕闌干。
又爲臣無狀。罪釁交積。詆訶萬端。尙能張口待哺。向人言笑。豈非頑然一醜物乎...。
爲吾子孫者。藏諸弊篋中。時閱而想見此日之景境。可也。更不得傳與時人。恐其嗤點也。”
李耔가 「自敍」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다. 젊을 때의 의기로 만언서를 지어 바치려 했으나 아버지의 만류로 중지했던 일을 비롯하여 한 때 불도에 빠졌던 일, 벼슬살이 하면서 술을 먹고 몸을 더럽히며 행실을 함부로 하였던 일, 반대 세력에 배척을 받고 낙향해 살면서 술에 빠져 10여일씩 일어나지 않고 양치질 빗질도 않으며 손톱에 때가 끼게 살았던 일 등, 젊은 날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돌아가신 부모님께 예를 갖춰 제사도 드리기 못하고 신하가 되어 죄만 쌓고 살면서 입을 벌려 먹을 것이나 기다리고, 사람들을 만나 말하고 웃고 있는 추한 자신을 자조적으로 기록한 글이다.
언뜻 보면 넋두리 같지만 이 글은 가정 ․ 목은의 후손으로, 40여년 조정에 있으면서 청렴하고 삼가는 것으로
이름이 나고 검칙하는 것으로 자제들을 가르쳤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여, 자신이 자손을 위한 글을 지어 상자 속에 넣어 두었다는 말로 끝을 맺고 있어 계자의 글을 짓게 된 동기를 서술한 서문을 겸하고 있다. 자식에게 당부하는 글을 해진 상자 속에 넣어둔 이유는 간명하다. 자식에게 보여주어 가끔씩 아버지를 생각하고 경계를 삼도록 하는 재료는 될지언정 남이 보도록 드러내 놓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강희맹도 아들 구손을 위해 지은 「訓子五說」에서, 글을 짓게 된동기와 관련하여 아버지와 얽힌 이야기를 풀어 놓고 있다. 학문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노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아들과 그런 아들을 떠나보내기 안쓰러워 끼고만 있으려고 하는 양모 사이에서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해라”라고 했던 아버지, 음덕으로 관직에 진출할 기회가 왔을 때 “출세보다는 학문에 뜻을 두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유도한 아버지, 여자를 탐하는 것이 선비들에게 얼마나 해로운지를 예화를 통해 알려준 아버지의 모습이 길을 찾지 못하고 흔들리는 아들의 모습과 중첩 되면서 아들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역할을 한다.
강희맹은 “직접보고 마음속으로 경계하고 반성한” 내용을 적으면서 “아버지의 품행도 바르지 않다”고 하거나 “후일 나도 아버지처럼 될 것이다”라고 말하지 말기를 당부하였다.
“내가 고인의 조박을 말하면 너는 그 속의 정수를 취하고 내가 고인의 皮毛를 말하면 너는 그 정수를 취하라”27)는 것인데, 이는 곧 생각이 덜 미치고 실수를 하는 아버지의 젊은 날 모습에서 아들이 자연스럽게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27) 강희맹, 私淑齋集 , 「訓子五說」,
“凡此數事。皆余耳所親聞。心所警省也。
...毋曰夫子之未出正也。毋曰他年當及爾也。吾誦古人之糟粕。汝啜其精。吾陳古人之皮毛。汝採其髓。”
아버지 자신의 과거 경험에서 단서를 삼아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이러한 경우, 아버지의 고백은 아들과 소통의 길을 터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때 ‘나를 본받지 말라.’는 당부는 아버지의 삶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는 아들에게는 역설적 메시지로 전해지기도 한다.
"나는 부모님이 일찍 세상을 뜨셨는데 배움은 정밀하지 않으면서 나아가기를 구했고 덕이 서지 않았는데 행하려고 하였다.
바람 먼지 자욱하고 해와 달이 빛을 잃어 위로는 임금을 요순같은 성군으로 인도하지 못했고, 아래로는 나 자신을 고요나 기와 같은 어진 신하의 반열에 두지 못했다.
그러다가 맹수의 어금니와 살모사의 독이 좌우에서 달려들어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어둠 속에 내팽겨친 것이 심하였고 후회함이 오래 되었으니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이는 내 자신에게 경계하고 너희에게 소망하는 것이니 밖에서 이른 것으로 영화로 삼으려 하지 말아라.
이제 형장의 칼날이 문앞에 이른 것을 보고 종이를 빌려 간신히 쓴다.28)"
28) 한충, 『松齋先生文集』 , 「戒子書」,
“余則早忝不幸。學未精而求進。德未立而欲行。
風埃汩汩。日失月亡。上未能導其君於堯舜。下未能置其身於皐夔。
獍牙虺毒。左侵右觸。致有此境。
昏棄之甚。悔懊之久。尙何足言乎。
是余懲於己。望於汝。不欲以自外至者爲吾榮也。
見今鋒鏑臨門。借紙艱草。”
한충이 죽음을 앞두고 아들에게 준 <戒子書>이다. 한충은 기묘사화 때 조광조와 교유하였다고 하여 사형을 언도받았다가 유배형으로 감형된 바 있는데 이 글 역시 이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형장의 칼날이 문 앞에 이른 것을 보고 종이를 빌려 간신히 적었다”는 이 글에서 아버지는 담담하게 부귀와 영화, 벼슬과 녹봉 등 몸 밖의 것을 좇지 말고 마음을 바로 하라고 당부한다.
그리고 “임금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고 조정에서 배척을 받아 결국 사지로 떠나야 하는 처지”가 된 후회와 미안함을 피력한다. 한없이 낮은 자세와 겸손한 말로 마지막 순간까지 아들을 걱정하며 건네는 ‘경계’와 ‘소망’의 목소리에서 과연 아들이 경계하고 소망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말로 하는 훈계나 명령조의 지시가 아니라 아버지가 자세를 낮추고 진심을 드러내며 아들에게 다가가는 마음일 때 戒子의 메시지는 소통의 언어로 바뀌고 강제적 훈계는 자발적인 감화로 바뀐다.
4. 遺誡, 아버지의 마지막 목소리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계자>류의 글은 자손들을 바르게 가르치고자 하는 교육적 의미와 바르게 자란 자손들을 통해 한 가문을 보다 확고하게 지켜내고자 하는 가문 의식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글이다.
비슷한 성장 과정을 겪고 정치적 사회적으로 같은 처지에 놓인 아들에 대한 염려와 기대, 애틋한 마음과 미안함 등 복잡한 속내를 진솔하게 드러낸 글이기도 하다. 그러나 <계자>가 단순히 아버지의 일방적 훈계나 넋두리에 그치지 않고 부자지간의 소통과 공감을 이끌어내고 나아가 아들의 실천을 유도할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아버지 자신이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진지한 성찰을 거쳐 솔선수범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있다.
"나는 지금 풍병으로 사지를 쓰지 못하고 있으니 이치로 보아 오래 살 것 같지 않다. 다만 단정히 앉아 섭양이나 하면서 해치는 것만 없다면 혹 조금의 세월은 지연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천하의 일이란 미리 정해 놓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내가 이제 그 점을 말해 주마.
古禮에 잘못 난리 통에 죽은 사람은 조상의 선산에다 묻지 못한다 했으니 제 몸을 삼가지 않았다고 해서다.
荀子는 따로 죄인들에게 사용하는 喪禮를 두었는데 욕됨을 보여 경계하도록 함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죽는다면 이곳에다 묻어두고 나라에서 죄명을 씻어 줄 때를 기다렸다가 그때 가서 反葬해야 된다. 너희가 禮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나의 유언을 어기려고 한다면 어떻게 孝라고 하겠느냐?
어쩌다 다행히 은혜를 입어 뼈라도 선산에 돌아가 묻힐 수 있다면 그 죽음이야 슬펐어도 그 반장은 영화로운 것이 아니겠느냐?29)"
29) 정약용, 與猶堂全書 , 「示學淵家誡」,
“吾今風痺癱瘓。理不能久視。唯端居攝養。無所戕賊。或者少延日月。
然天下之事。莫如蚤定。吾今言之。
古禮死於兵者。不入兆域。爲其不愼身也。
荀子別有罪人之喪禮。示辱以戒之也。
吾若畢命於此地。便當埋之此地。待國家滌其罪名。方可反葬。汝等不達禮意。欲違其治命。豈孝也哉。
如或幸而蒙恩。得以歸骨故山。其死也哀。其反也榮。”
정약용이 장남 학연에게 준 「家誡」이다. 자녀 교육에 힘써야 할 시기를 유배지에서 보내야 했던 정약용은 아들들과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소통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정약용은 편지와 별도로 「가계」라는 글을 통해 아들들에게 당부를 하였다.30)
이 글은 언제 유배 상태에서 풀려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병까지 심해지자 죽음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다. 아버지는 자신이 죽고 나서 장례를 치룰 아들에게 “古禮”를 끌어와 원칙을 주지시킨다.
제 몸을 삼가지 않고 죽었으니 선산에 묻힐 수 없고, 죄인에게는 별도의 상례를 적용해야 하니 죄명이 씻기기까지는 반장하지 말고 우선 여기에 묻으라는 것이다. 혹여 아버지에게 후장을 해드리고 싶은 욕심이 ‘禮’와 ‘孝’ 모두를 어길까 염려해서 단단히 일러두는 말이다.
이 시기 사대부들은 자신의 사후, 자손들에 의해 치루어질 상장례에 대해 민감한 관심을 갖고 장례의 절차, 방식, 사용할 기물, 택묘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유계를 남겼다. 이는 주자가례가 완전히 정착되지 못하고 고례와 속례를 둘러싼 논란이 여전하던 시기31), 아버지 자신이 기준을 정하고 기준에 대한 합리적 근거를 제시하며 강한 실천 의지를 보임으로써 적어도 가문 내에서는 더 이상의 논란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상장례를 언급한 유계 어느 하나도 ‘잘 갖추어진 장례’를 언급하는 경우는 없다.
30) 정약용이 아들들에게 준 「가계 는 1808년(순조8), 1810년(순조10) 두 해에 걸쳐 지어졌다.
31) 17.8세기 주자가례의 실천양상에 관해서는 이혜순(외), 『조선중기 예학사상과 일상 문화 - 주자가례를 중심으로 -』 , 이대출판부, 2008 참조.
"나로 말하면 이 세상에서 살면서 聲名이 너무 외람되기만 하였으니, 묘소의 한 조각 돌에 의지해서 뒷날 중하게 여김을 받으려고 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그러니 그저 혼석의 앞면에다 ‘澤堂墓’라고 세 글자만 깊이 파 넣으면 충분하다고 하겠다.32)"
32) 이식, 『澤堂先生別集』 , 「石物遺戒」, “如吾在世。聲名太濫。終不可藉荒原片石爲重於後。只於魂石面。深刻澤堂墓三字足矣”
"명정이나 제주와 표각에는 다만 ‘영추로 치사하였다’라고만 쓰지 ‘議政’ 두자는 절대로 쓰지 말라.
내 경우 스스로 공무를 집행하지도 않았으니 어찌 함부로 의정이라 일컫겠는가.
大匡이나 崇資 같은 호칭도 진실로 모두 쓰지 않았으면 한다. 실상과 맞지 않기 때문에 못하게 하는 것이다. .... 후세에 보일만한 공업도 없이 남들이 넘치게 기리기를 바라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다.
하물며 지위가 이에 이르고서도 터럭만큼도 보답하지 못한 경우야 말해 무엇 하겠느냐? 더욱 스스로 낮추어 부끄러운 마음을 품는 것이 마땅하다.33)"
33) 유척기, 『知守齋集』 , 「遺戒」,
“銘旌題主表刻。只書領樞致仕。而議政二字。决不宜書。
...吾之議政。旣不敢自居以行公。亦何安冒稱乎。
大匡崇資誠欲倂不書。而恐近打乖故已之。
...無功業可以示後。求人溢譽已可恥。
况致位至此。了無毫分報效。尤宜自貶以志愧。”
이식과 유척기가 죽음 이후를 당부하며 남긴 遺誡이다. 이식은 평소에 주자가례에 뿌리를 두고 시의를 참작하여 만든 집안의 예법을 「가계」라는 글을 통해 마련해 두었고, 죽음에 임박해서는 장례 규정을 소상히 적은 「유계」를 남겼다. 유척기 또한 검소하게 장례를 치루라는 것과 주자가례를 따르고 속례나 불사, 미신을 배격하라는 것, 그리고 무리하게 만장이나 비명을 청하면서 헛된 명예를 구하지 말라는 것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장문의 유계를 남겼다.
특히 이들은 분수에 맞지 않는 헛된 명성이 전해질 것에 대해 몹시 우려하였다. 만장과 비문,34) 심지어는 시호까지 거부하면서35) 한사코 큰 호칭과 칭송을 불편해했던 것은 높은 지위를 가지고도 걸맞는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검소하게 장례를 지룰 것을 당부하였던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은 입던 옷으로 몸이나 겨우 두를 정도로만 염습을 하라고 하였고 관은 얇은 판목으로, 곽은 만들지 말라고 하였다. 석회를 쌓지 말고 석물을 세우지 말라고 하였고 유과를 높이 쌓거나 채화를 쓰는 것도 금지하였다. 집안의 형편을 고려한 것일 뿐 아니라 “임금께 죄를 얻어 선대에 누를 끼쳤”고 36) “망령되이 시정을 논하다 군부에 죄를 얻었”37)기 때문에 호사스러운 장례를 지룰 자격이 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이유였다.
즉 “대부가 자기의 직분을 유기했을 경우 죽어 사의 예로 장사지낸다”는 예기의 말을 실천하는 의미를 겸하
고 있었다.38) 박세당이 “고례에 없고” “안장하기 전에는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이 하고 안장한 뒤에는 죽은 것으로 대하는 법이니 3년 동안 상식하는 것을 금지하라”39)고 한 것이나, 김수항이 “우리 집안의 상제례는 고례에 어긋난 것이 자못 많다”고 말하고 선대적부터 내려오는 것이라 하더라도 “고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면
후손이 잘 헤아려 고쳐야 한다”40)고 소신을 굽히지 않은 것도,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 또한 예와 분수에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했던 이 시기 아버지들의 철두철미한 의식을 보여주는 측면이다.
이 지점에서 ‘가문을 영광되이 하라’ ‘집안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라’고 했던 많은 계자문의 내용을 상기하게 된다. 그들이 말한 명성은 벼슬이 높아지거나 가문이 현달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손들이 예법을 지키며 참다운 유자로 사는 것을 의미했다.
34) 만장과 비문을 청하지 말라는 당부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잘 알려진 일화로 이황은 유계를 통해 “비석을 세우지 말고 다만 조그만 돌을 쓰되, 그 앞면에는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쓰고, 그 뒷면에는 오직 고향과 世系, 志行과 출처의 대강만을 가례 에 말한 대로 간략히 쓰라.”라고 하였다.
“이런 일을 만일 다른 사람에게 부탁한다면, 친구 기고봉 같은 이는 필시 사실에도 없는 일을 늘어놓아 세상의 비웃음을 살 것[命兄子甯。書遺戒...勿用碑石。只以小石書其前面云。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其後略敍 鄕里世系志行出處。如家禮中所云。此事若托他人製述。相知如奇高峯。必張皇無實之事。以取笑於世。]”이라는 것이다. 유성룡도 “나는 세상에 공덕이 없었느니 죽으면 마땅히 검소하게 장사 지내라. 남에게 청해서 비명을 짓지 말고 만장도 스스로 만들어서 보내 준 것만 쓰도록 하라.[命兄子裿書遺戒。其略曰...吾無功德於世。死當薄葬。勿請人爲碑銘。挽亦自爲而送者用之]”라는 유계를 남겼다. 『퇴계선생집』 「언행록 고종기」, 『西厓先生年集』 「年譜」 참조.
35) 시호에 대한 언급은 유척기를 포함, 장유, 谿谷先生漫筆 , 「李元翼在世時預撰墓碑吳允謙臨終遺命勿立碑」(“李相在世時。屬李埈叔平預撰墓碑。蓋不欲其溢美。而李作稱道甚盛。吳相臨終。遺命勿立碑。勿請諡。”)과 李敏求, 東州先生文集 , 「刑曹判書吉川君權公神道碑銘」(“遺誡諸孫。以生不能裨國。死無請諡重吾累”) 등에서 볼 수 있다.
36) 김수항, 文谷集 , 「遺戒」 “余之無狀。固不及先祖萬一。而況今得罪君父。忝累先德。尤不可自同無故之人。喪祭凡事。務從儉約。毋得少有踰濫。以遵余此志。”
37) 조경, 龍洲先生遺稿 , 「大司諫八松尹公墓碣銘」, “命子操筆作遺誡曰。汝父妄論時政。得罪君父。死後棺用薄板無槨。葬勿卜新阡。勿立石物。只樹短表”
38) 이식, 澤堂先生別集 , 「澤癯居士自敍」, “遺戒子弟。喪制一從儉約。勿築灰樹石。非直欲稱貧力。禮謂大夫廢其事。死葬以士禮。斯亦自貶之意也。”
39) 박세당, 西溪先生集 , 「年譜」, “遺書戒子孫...其喪祭條略曰人死而三年上食非禮。古則無此。嘗聞先輩好禮之家深覺其不安。能從古禮者亦有一二。今獨不可以知所擇乎。”
40) 김수항, 文谷集 , 「遺戒」, “吾家喪祭之禮。有違於古禮者頗多。先祖考每以先世行之旣久。難於率意釐改爲敎。而亦嘗有其中不可不改者。則後孫可以量度而改之之敎矣。凡事久則當變。不可一向膠守。”
5. 계자류의 성격과 의미
택당 이식의 다음 언급은 조선시대 부자관계의 거리와 밀도를 측정하는데 하나의 단서를 제공해 준다.
"우리들이 비록 골육으로 맺어진 관계라 하더라도, 사실은 난세를 함께 헤쳐 나가는 붕우와 같은 사이이다.
지난 세월 동안 허다하게 시고 쓴 맛을 실컷 맛보면서 산골에서 함께 살아왔는데, 반생 동안 해 온 그 공부로 말하면 또 군자가 되기 위한 길을 걸어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41)"
41) 이식, 澤堂先生別集 , 「寄冕鄭別坐同看」.
“吾儕雖聯骨肉。實則亂世同歸之友朋也。已往許多喫盡酸苦。共處山峽中。半生工夫。要是君子路上事也。”
이식은 부자관계를 “골육으로 맺어진 관계”면서 “난세를 함께 헤쳐 나가는 붕우”라고 말하고 있다. “오랜 세월 시고 쓴 맛을 함께 맛본” 혈연적 관계이자 “군자가 되기 위한 길을 함께 걸어온” 동지적 관계로 인식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한편 강희맹은 부자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하였다.
"어째서 훈계하는 것인가 하면, 그 미치지 못한 바를 훈계하기 위한 것이요,
어째서 자신을 헤아리지 못하고 함부로 說을 만들었는가 하면,
그 사연은 저속하지만 그 뜻인즉 옛 성현의 끼친 뜻이기 때문이며,
어째서 과감하게 바로 나무라지 못하고 살짝 그 뜻만 보였는가하면, 父子간이라서 말이 자연히 순하게 된 것이다.42)"
42) 강희맹, 私淑齋集 , 「訓子五說」,
“曷爲訓之。訓其所不逮也。
曷不自揆而濫爲之說歟。
其言則俚。而其意則古昔聖賢之遺意也。
何以不敢直斥。而微示其意歟。父子之間。言猶婉也。”
강희맹에 의하면 아버지는 아직 미치지 못한 것이 있는 아들에게 성현의 뜻을 깨우쳐 주어야 할 책무가 있는 존재이다. 다만 아버지 스스로가 완결된 인격체가 아니고 아들 또한 과감하게 나무랄 수 있는 대상이 아닌 이상, 방법은 ‘순한 말’로 완곡하게 ‘살짝 그 뜻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아들 스스로 깨닫게 하는 데 있다.
이들의 언급에서 간취할 수 있는 것은 조선시대 사대부 사회에서 부자 관계는 단순한 혈연관계 이상의 의미를 지녔고 계자의 글 역시 조선시대 부자 관계의 특수한 면을 포괄적으로 투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자관계가 혈연관계와 등식이 되지 않았던 가족 제도는, 양자는 물론 친자조차도 자연적으로 우러나오는 피붙이에 대한 애정보다는 가문을 잇고 가부장권을 계승하는 존재, 나아가서는 정치적으로나 이념적으로 뜻을 같이하는 존재로서의 인식이 우위에 서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측면은 부자 관계에 일정한 거리를 형성하
게 하고 아들에 대한 태도나 표현에 있어서도 이중적인 면모를 견지하게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부분의 <계자>류가 유교 사회가 지향하는 보편적 군자상을 상정하고 가문에 대한 자부심과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책무의식을 전면에 주제로 내세우고 있는 것은 글의 목적이 일차적으로 규범적 부자 관계에 뿌리를 두고 사회의 기본 단위인 가정 속에서 자식을 훈계하고 교육시켜 이상적인 유자로 키우는데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계자문을 지은 많은 사대부들은 표면적으로는 윤리 도덕을 표방하고 규범적 아버지의 모습을 드러내면서도 그 이면과 행간에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투영시켰다.
규범서의 경직성에서 벗어나 예화를 통한 이야기 방식, 아버지의 실제 삶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서술방식 등을 구사하였으며 그 속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의지처이자 말벗으로, 남들에게 드러내지 못하는 속내를 드러낼 수 있는 대상으로 부각되고 있다.
계자문을 가훈서나 규범서는 물론 딱히 용건이 있어 전하는 일반 편지와 차별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계자의 글은 단지 아버지가 아들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훈계의 글이기 보다는 일상의 영역에서 부자간에 소통하는 방식이었고 아들의 실천을 강요하기 전에 아버지가 솔선수범하여 감화를 유도하는 지극히 합리적인 교육 방식이었다.
조선시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일률적으로 말하기 곤란한 것처럼 <계자>류의 글 역시 그 성격을 한마디로 규정짓기는 어렵다.
아들의 유형이 다양하듯 근엄한 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인간적 감정이 앞서는 아버지가 있고, 간단하게 몇 마디 말로 훈계하는 계자문이 있는가 하면 시시콜콜 잔소리 하듯 훈계하는 계자문도 있으며, 압축적이며 감상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계자시도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취한 계자의 방법과 의미를 곧바로 현대로 끌어 오는 것도 한계가 없는 바는 아니다. 유학이라고 하는 공통의 가치관과 부자지간의 특별한 유대관계가 바탕이 되고있는 시대적 조건도 고려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들에게 다가가고 진정한 마음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아들을 가르치려 했던 <계자>류 속 아버지의 목소리는 대화가 단절되고 가치관이 부재한 현대 사회에 시사 하는바가 크다.
===============================================
「조선시대 <戒子>類 考察 」 에 대한 토론 요지
문 정 우*
* 경상대학교
이 발표문은 오늘날 사라져가는 가정교육・밥상머리 교육과 통하는 것이라서 현재에 중요한 의미가 있겠습니다.
1.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에 걸쳐 <계자>류의 글이 급격히 늘어나는 배경이 널리 추론해볼 수 있는 일반적인 내용으로 다소 소략한데 좀 더 뒷받침 되는 자료나 근거를 가져올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2. 일부 선비들이 자신의 아버지와는 뒤늦은 소통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현재 자신의 아들과는 얼마나 소통과 공감을 이끌어내고 소통하며 아들의 실천을 유도했는지가 자못 궁금해졌습니다. 아버지의 편지를 받은 아들의 변화된 모습이나 답장 등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마도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이리라 여겨집니다.
3. 선비들이 戒子文을 지을 때 유교적 가치와 규범을 담은 내용이외에 ‘규범서의 경직성에서 벗어나 예화를 통한 이야기 방식, 아버지의 실제 삶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서술방식’을 구사했다고 언급하였듯이, 이런 예화들을 분류하여 소개한다면 흥미로운 읽을 거리이면서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 부모들은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것을 자식에게 요구하는 경향이 강한데 옛 선비들도 예외는 아닌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죽음을 앞두고 지은 遺誡의 경우 자기반성이자 독백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이상입니다.
2015年 東方漢文學會 秋季 學術大會
경북대학교 ․ 한국연구재단
===========================
論衡紀妖 第六十四 016
凡妖之發, 或象人爲鬼, 或爲人象鬼而使, 其實一也.
晉公子重耳失國, 乏食於道, 從耕者乞飯. 耕者奉塊土以賜公子, 公子怒. 咎犯曰 : “此吉祥, 天賜土地也.” 其後公子得國復土, 如咎犯之言. 齊田單保卽墨之城, 欲詐燕軍, 云 : “天神下助我.” 有一人前曰 : “我可以爲神乎?” 田單却走再拜事之, 竟以神下之言聞於燕軍. 燕軍信其有神, 又見牛若五采之文, 遂信畏懼, 軍破兵北. 田單卒勝, 復獲侵地. 此人象鬼之妖也. 使者過華陰, 人持璧遮道, 委璧而去, 妖鬼象人之形也. 夫沉璧於江, 欲求福也. 今還璧, 示不受物, 福不可得也. 璧者象前所沉之璧, 其實非也.
何以明之? 以鬼象人而見, 非實人也. 人見鬼象生存之人, 定問生存之人, 不與己相見, 妖氣象類人也. 妖氣象人之形, 則其所@齎持之物, 非眞物矣. “祖龍死” , 謂始皇也. 祖, 人之本 ; 龍, 人君之象也. 人·物類, 則其言禍亦放矣.
'선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임사체험의 특성과 시사점 (0) | 2016.06.04 |
---|---|
[스크랩] 아들에게 전하는 아버지의 목소리: 조선시대 <戒子>類 考察 (0) | 2016.06.04 |
[스크랩] `자아`와의 소통 -자신의 내면을 향한 두 가지 목소리 (0) | 2016.06.04 |
[스크랩] 사랑이 조각하는 죽음의 공간 (0) | 2016.06.04 |
[스크랩] 天干의 상호 변화작용 관계로서 天干合 연구 (0) | 2016.06.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