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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조각하는 죽음의 공간
이 창 익
Ⅰ. 종교와 섹슈얼리티의 갈등
아주 오래 전에 랍비 엘리에제르(Rabbi Eliezer)는 “소변을 볼 때 남근을 움켜쥔 누구든지 마치 세상 속에 홍수를 초래하는 것과도 같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1)
인간 신체의 일부인 성적 기관이 미치는 오염에 대한 이러한 시선은 기이하고 극단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사실은 섹슈얼리티를 향한 종교의 시선을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일지도 모른다. 종교는 성적 기관을 중심으로 하여 편제되는 관념의 질서와 밀접한 상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신체 전체를 성적인 것으로 포맷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신체의 성별화에 입각하여 신체를 조작하는 것이 종교의 핵심 동력 가운데 하나인 것 같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중세 기독교에서 성기와 성욕을 둘러싸고 전개된 신학적 고민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수도회의 독신 생활이나 결혼 생활의 정숙함 같은 실제적인 문제에 해법을 제공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근친상간·축첩·수간·남색·간음·간통처럼 신의 질서를 해치는 섹슈얼리티의 부산물들과 끊임없이 투쟁을 벌여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유럽 사회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성생활은 동물적 본능의 수준으로 격하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고대 사회의 성적 문화는 상당 부분 파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성적인 것을 지속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역으로 섹슈얼리티가 새로운 자율적인 영역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게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배제는 항상 새로운 의미론적 질서를 창조하는 모태일 수 있기 때문이다.2)
로마 제국 사람들은 섹스를 사회적인 문제로 인식하였으며, 지나친 성행위가 남자들의 공적 활동을 방해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하여 예컨대 포식을 한 후나 아침의 공복 상태에서 섹스를 하지 않는 것, 섹스 후에 운동을 하거나 마사지를 받는 것 등의 주의 사항이 강조되었다. 그래서 섹스를 하는 동안에는 인간의 이성이 사라진다는 스토아 학파의 주장이나, 정욕이 지적 능력을 쇠약하게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일반적인 생각이 주류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로마인들은 섹슈얼리티를 여성성과 등가시하였으며, 그리하여 지나친 섹스가 남성을 여성화시킨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즉 과도한 정액 사출은 남성을 차갑고 촉촉하게 만들어서 여성화시킨다는 것이다. 또한 여성에 대한 남성의 구강 성교는 남성이 봉사받지 않고 봉사하게 함으로써 사회적인 위계질서를 역전시키는 것으로 생각되어 비난받았다. 그러나 공적 생활에 영향을 주지 않는 한, 자위·동성애·수간 등은 로마인들에게 얼마든지 수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3)
*이 논문은 2012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2S1A6A3A01033504).
1) Thomas W. Laqueur, Solitary Sex: A Cultural History of Masturbation, New York: Zone Books, 2003, p. 120.
2) Niklas Luhmann, Love as Passion: The Codification of Intimacy, trans. Jeremy Gaines & Doris L. Jones,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6, p. 111.
3) Josey E. Salisbury, “When Sex Stopped Being a Social Disease: Sex and Desert Fathers and Mothers,” in April Harper & Caroline Proctor, eds., Medieval Sexuality: A Casebook, London: Routledge, 2008, pp. 47-49.
그러나 로마의 박해를 피해 사막으로 떠난 기독교 수도자들은 다양한 형태의 성적 유혹에 직면함으로써 섹스가 단지 사회적인 질병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있는 개인적인 질병일 수 있다는 생각을 점차 하게 되었다. 그래서 예컨대 6세기의 수도자인 요한 클리마쿠스(John Climacus)는 수도자들에게 수도원의 당나귀를 가까이 함으로써 성적인 죄에 빠져들 수 있다고 경고한다.
수도자들은 여성·소년·당나귀·양 등을 끊임없이 경계해야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탄이 매춘부나 여자를 이용하여 성인들을 유혹하려 한다는 생각이 역시 자주 등장한다.4)
여성 수도자들과 달리 특히 남성 수도자들은 마음의 상태와는 무관한 성적 자극의 가시적인 기호들과 싸워야 했다. 예컨대 카시아노(Cassian)는 가득 찬 방광에 의한 자연스러운 발기, 척수의 골수에서 만들어지는 과도한 체액의 자연스러운 방출로서의 몽정 등의 문제를 거론한다. 그는 성교, 자위와 몽정, 마음 속의 간음이라는 세 가지 종류의 간음을 이야기한다.
가이사랴의 바실리우스(Basil of Caesarea)는 “나는 여자를 모르지만 동정은 아니다.”라고 말하는데, 그가 보기에 여자의 경우에는 처녀막이 손상되지 않았다는 것이 동정의 증거였지만, 남자의 경우에는 몽정의 경험이 성적 경험인지 아닌지에 대한 모호성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카시아노는 음탕한 이미지를 수반하지 않는 몽정은 무해한 것이고, 음탕한 생각을 하더라도 발기하지 않으면 무해하다는 식의 주장을 펼치게 된다. 그러나 카시아노는 몽정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사악한 것이므로, 두 달에 한 번 정도의 몽정만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주장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세레누스(Serenus)는 더 이상 잠자는 동안 육체의 자극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54세에 죽은 에바그리우스(Evagrius)는 죽기 전 3년 동안 육욕의 고통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몽정의 빈도는 수도자의 정신적 진전의 척도처럼 간주되었다.
카시아노에 따르면, 고행자는 먼저 모든 고의적인 성적 활동을 중지해야 하고, 두 번째로는 음탕한 생각을 거부해야 하고, 세 번째로는 여자를 보고도 동하지 않아야 하며, 네 번째로는 깨어 있을 때 더 이상 발기하지 않아야 하며, 다섯 번째로는 성서에서 언급되는 성행위에 대한 언급들이 마치 벽돌을 만드는 과정 정도의 의미로만 그에게 영향을 미쳐야 하고, 마지막으로 잠자는 동안 성적인 꿈을 꾸거나 몽정을 하지 않아야 한다. 수도자들의 이러한 생각은 섹슈얼리티가 사회적인 영역에서 점차 몸의 내부로 옮겨가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5)
수도자들은 다양한 방식을 통해 몸으로부터 섹슈얼리티를 제거해 나갔다. 예컨대 어떤 이야기 속에서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생각으로 괴로워하던 수도자는 그 여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무덤을 파고 시체를 꺼내서 썩어가는 살로 자신의 외투를 닦은 다음, 육욕을 느낄 때마다 외투의 냄새를 맡았다고 한다.
또한 신체를 성적이지 않은 것으로 변모시키기 위해서 수도자들이 애용한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단식이었다. 아보트 히페리키우스(Abbott Hypericius)는 “단식을 멈춘 사람은 암말을 보자마자 음욕을 느끼는 종마와도 같다.”라고 말하면서 “단식이 세속적인 쾌락이 흐르는 도관을 마르게 한다.”고 덧붙인다.
대수도원장인 디오스코루스(Dioscorus)는 음식과 섹슈얼리티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정액이 과도한 음식과 음료로부터 만들어지기 때문에, 단식을 통해서 관능적인 욕구를 자극하는 몸안의 액체를 고갈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온갖 방법을 통해서도 몸으로부터 정욕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수도자들은 신의 은총 없이는 육욕의 극복이 불가능하다는 주장까지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섹슈얼리티를 육체 안에 각인된 원죄라고 생각했다. 또한 교부 엘리야(Elias)는 꿈속에서 세 명의 천사를 만나게 되는데, 한 천사는 손을 붙들고 다른 천사는 다리를 붙들고 나머지 천사가 면도칼로 그를 거세하는 꿈을 꾸게 된다. 교부 세레누스 역시 신에게 자신을 고자로 만들어 달라는 기도를 하고 나서, 천사가 그의 몸을 열어 종양(성기)을 제거하는 꿈을 꾸게 된다. 이러한 신비적 거세는 수도자에게 주는 신의 은총이었다.6)
4) Ibid., p. 51.
5) Ibid., pp. 52-54.
6) Ibid., pp. 55-57.
중세 교회에서 성적 쾌락은 ‘생식을 위한 성교’의 처치 곤란한 부산물처럼 인식되었다. 모든 쾌락을 적대시하는 조금 더 극단적인 입장에서는, 결혼조차도 결코 순수한 성적 쾌락을 낳을 수는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코미니아누스의 《고해 의식서》(Penitential of Cummean)에 따르면, 20살 이하의 나이든 소년이 자위를 할 경우에는 20~40일 동안, 성교를 흉내낸 아이는 20일 동안, 거친 상상력으로 자신을 오염시킨 사제는 7일 동안 고해를 해야 하며, 정액으로 자신을 오염시킨 자는 처음에는 100일 동안 고해를 하고 추가로 고해를 반복해야 하며, 15살 이하의 소년은 40일 동안 고해를 해야 한다.
그밖에도 이웃의 아내를 범한 자는 자기 아내와 섹스를 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적어도 세 차례에 걸쳐서 축일을 중심으로 40일 동안 성교를 삼가해야 한다. 사제나 수도자의 경우에 독신의 위반은 중요한 죄로 인식되었다. 구강 성교로 입술을 더럽힌 경우에는 4년 동안, 근친상간의 경우에는 3년 동안, 남색의 경우에는 7년 동안 고해를 해야 하고, 간음한 주교는 강등되어 12년 동안 고해를 해야 한다. 지위가 높을수록 처벌의 수위도 높아졌다.7)
테오도로 주교(Theodore of Canterbury)의 《고해 의식서》에 따르면, 상상력에 의해 정액을 흘린 사제는 일 주일 동안 단식해야 하고, 수음을 한 자는 3주 동안 단식을 해야 하며, 여자를 만지거나 여자에게 키스하여 자신을 오염시킨 자는 40일 동안 고해를 해야 한다. 또한 생각을 통해 자주 정액을 흘리는 자는 20일 동안, 잠자는 동안 교회에서 정액을 흘린 자는 7일 동안, 자위를 한 자는 처음에는 20일 동안 고해를 하고 다시 40일 동안 고해를 해야 한다. 또한 금지된 시간에 성교를 하거나 후배위처럼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성교를 하는 것은 더욱 가혹하게 비난받았다. 간음하는 수도자나 성처녀는 7년 동안 고해를 하고, 처녀와 간음한 평신도는 1년 동안, 유부녀와 간음한 평신도는 4년 동안 고해를 해야 한다. 또한 11세기 초에 보름스의 부르하르트(Burchard of Worms)는 남색을 세밀하게 구분하여, 항문 삽입인지 엉덩이나 허벅지 사이를 통한 간음인지 수음인지에 따라 처벌을 달리한다. 남색은 10~15년 동안의 혹독한 고해를, 가랑이 사이의 성교는 빵과 물만으로 90일 동안, 수음은 빵과 물만으로 10일 동안 고해를 해야 한다.8)
베드로 다미아노(Peter Damian)의 《고모라의 책》에서는 남색을 네 가지 유형으로, 즉 홀로 저지른 죄, 다른 사람의 손으로 상호적인 수음을 범한 죄, 허벅지 사이의 간음을 범한 죄, 항문 삽입으로 정리한다.9)
특이하게도 다미아노는 수음을 남색으로 분류하고 있다. 동성애적 욕망을 겨냥한 다미아노의 논쟁은 특히 수도원 내에서의 소아성애(페도필리아)를 겨냥한 것이었다. 페도필리아(pedophilia)는 사제가 영적인 아들이나 딸과 벌이는 근친상간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다미아노의 분류법은 13세기 후반에 일종의 정설로 자리잡게 된다.10)
토마스 아퀴나스도 《신학대전》에서 음탕함 가운데서도 가장 나쁜 것은 자연에 반하는 죄, 즉 생식과 무관한 성적 행위라고 비판한다. 아퀴나스는 네 가지 종류의 죄를 명시한다.
첫 번째는 자위처럼 외부에 정액을 방출하는 성교이고, 두 번째는 다른 종과 성교하는 수간이고, 세 번째는 동성간의 성교이며, 네 번째는 부적절한 기관을 사용하는 성교나 야만적이고 기괴한 성적 행위들이다. 여기에는 오럴 섹스, 남성 상위 이외의 성적 체위, 남녀의 비역질(sodomy)도 포함된다.11)
신은 타락한 인간들이 각자의 욕정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결혼과 독신이라는 두 가지 삶의 방식을 창조했다. 그러므로 색욕에 따른 고통은 신의 형벌처럼 생각되었다. 부부간의 체위는 여자가 등을 대고 아래에 눕고 남자가 위에 올라가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체위야말로 생식과 욕망의 절제에 합당한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7) Thomas W. Laqueur, op. cit., p. 145.
8) Ibid., pp. 146-148.
9) Peter Damian, Book of Gomorrah: An Eleventh Century Treatise Against Clerical Homosexual Practices, trans. Pierre J. Payer, Waterloo: Wilfrid Laurier University Press, 1982.
10) Thomas W. Laqueur, op. cit., pp. 150-151.
11) Ibid., pp. 152-153.
중세 기독교 안에서 우리는 섹스와 생식을 일치시키려는 부단한 노력을 보게 된다. 섹스는 종의 보존을 위해 불가피하게 필요한 물질적 토대일 뿐이었으며, 생식과는 무관한 성적 행위와 쾌락은 가능한 한 철저히 제거해야 할 부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중세 기독교 세계에서 강조되었던 이러한 ‘최소한도의 섹슈얼리티’는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이러한 모습은 적어도 현대사회를 물들이고 있는 ‘최대한도의 섹슈얼리티’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종교와 섹슈얼리티의 함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많은 경우에 종교는 중세 기독교에서처럼 금욕을 강조하면서 생식의 범주를 벗어나는 섹슈얼리티를 철저하게 제거하거나, 아니면 탄트리즘에서 보는 것처럼 생식으로부터 철저히 분리된 섹슈얼리티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으로는 신이 내린 생식의 형벌을 묵묵히 감내하고 성적 쾌락이 없는 섹스를 추구하면서 인간이라는 종적 개체를 무한히 복제하는 일에 매진하는 종교가 있다. 이때 사제는 ‘섹스 없는 종교성’을 추구함으로써 더 이상 생식을 하지 않아도 되는 특별한 지위를 누리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섹스와 생식을 분리하여 ‘생식 없는 섹스’를 통해 인간 종의 단절과 제거를 추구하는 종교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저 이러한 두 가지 정반대 현상을 몸에 대한 강한 부정과 몸에 대한 강한 긍정의 사례로 읽어야 하는가?
앤서니 기든스는 근대사회가 지닌 특징을 ‘플라스틱 섹슈얼리티(plastic sexuality)’라는 개념을 통해서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플라스틱 섹슈얼리티는 생식의 요구에서 자유로운 섹슈얼리티를 가리키며, 대략 ‘자연적인 섹슈얼리티’에 대비되는 ‘인공적인 섹슈얼리티’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12) 피임이나 부인과 의학의 발달, 그리고 문자 포르노그라피와 이미지 포르노그라피의 발전을 통한 ‘미디어 섹슈얼리티’의 발달, 호모섹슈얼리티의 부분적인 해방 등이 바로 생식으로부터 분리된 다양한 섹슈얼리티의 양상들일 것이다.
과거에는 죄악시되었던 이러한 섹슈얼리티가 이제는 종교적이며 의학적인 병리학의 자리에서 서서히 정상성의 자리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의 ‘플라스틱 섹슈얼리티’는 중세 기독교의 ‘생식과 금욕의 섹슈얼리티’와는 전혀 다른 정반대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생식으로부터 분리된 섹슈얼리티, 그리고 섹슈얼리티의 물질성을 은폐하는 사랑의 신화, 이런 것들이 이 글에서 다루어질 중심적인 내용이다.
12) Anthony Giddens, The Transformation of Intimacy: Sexuality, Love and Eroticism in Modern Societies,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2, p. 2.
Ⅱ. 섹슈얼리티와 죽음
티베트 신화 가운데 흥미로운 섹스 기원의 신화가 있다.
“태초에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의 내적인 빛이 주입되어 있었고 성별이 없었다. 아직까지는 태양과 달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적 욕망에 눈을 뜨면서 성기가 나타났다. 그리고 인간 내부의 빛이 꺼지면서 하늘에서 태양과 달이 나타났다.”13)
어떤 티베트 수도자에 따르면, 태초에는 남성의 몸에서 발산되는 빛이 여성의 자궁에 스며들어 빛을 밝히면 수태가 이루어졌다. 이때 성적 욕망은 단지 시각을 통해서만 충족되었다. 그러나 인간들이 타락하여 손으로 서로를 만지기 시작하였으며, 그리하여 마침내 인간들은 성적 결합을 발견하게 되었다.14) 섹스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신화는 섹스에 대한 종교적 사유의 또 다른 양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14세기와 15세기의 보헤미아 종파였던 아담파(Adamites)의 경우에서처럼,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의 순수한 상태로 회귀하기 위해서 남녀가 벌거벗은 채 자유롭게 섹스를 하며 성적 난교를 벌였던 사례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주로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벌어진 ‘섹슈얼리티의 악마화’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띠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토스 산(Mount Athos)의 수도자인 라자루스(Lazarus)도 ‘누디즘(nudism)’을 이용하여 타락 이전의 순수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러시아의 순수파(Innocentists) 역시 지하 동굴에서 벌거벗은 채 생활을 하면서 무차별적 성교를 하였다. 이러한 ‘저항적 섹슈얼리티’는 신이 아담과 이브를 에덴에서 추방하면서 금지한 벌거벗음과 성적 순수의 상태로 회귀하고자 하는 신화적 동기에 의해 추동되었다.15)
그런데 섹슈얼리티의 악마적인 성격은 마니교에서 가장 극적으로 묘사된다.
마니교 신화에 따르면 성교와 생식은 후손의 몸에 빛을 가두는 행위로 그려진다. 인간의 몸 안에 갇힌 빛은 대개 정액이나 정신과 동일시된다. 마니교뿐만 아니라 영지주의에서도 세계는 데미우르고스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고 이해되며, 이로 인해서 인간의 실존은 ‘빛-정신’이 ‘어둠-몸’ 안에 갇힌 상태로 해석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유를 전개하는 종교에서는 엑스터시와 같은 ‘신비적인 분리의 기술’이 강조된다.
구원을 위해서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자신의 몸 안에 있는 빛을 밖으로 꺼내야 하는 것이다. 섹슈얼리티는 이러한 빛을 계속해서 어둠(몸) 속에 가두는 행위로서 묘사된다.16)
13) Mircea Eliade, Occultism, Witchcraft, and Cultural Fashions: Essays in Comparative Religion,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1976,p. 98.
14) Ibid., pp. 134-135, note 27.
15) Ibid., pp. 89-90.
16) Ibid., pp.106-109.
의례적인 성교, 정액의 수합, 성례전을 통한 정액의 의례적인 섭취는 탄트리즘뿐만 아니라 음란한 영지주의 종파에서도 볼 수 있는 내용이다. 힌두교의 시바교 전통에서도 우리는 “정액이 여자의 입에서 남자의 입으로 앞뒤로 전달되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성화된 그릇 안에 쏟아 부어져야 한다.”는 내용뿐만 아니라, 남성 정액과 여성 분비물의 혼합물을 성화된 그릇에 담아 먹는 내용까지도 볼 수 있다.17) 영지주의의 보르보로스파(Borborites)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그들은 월경혈과 정액 안에 담긴 힘을 ‘프시케(Psyche)’라고 불렀으며, 이것을 모아서 마시곤 했다. 그리고 고기든 채소든 빵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지 간에, 즉 우리가 무엇을 먹든지 간에 우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프시케’를 수집한다는 점에서 피조물들에게 호의를 베풀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동물과 가축, 물고기, 뱀, 인간, 채소, 나무, 그리고 생산되는 모든 것 안에 흩뿌려져 있는 것도 바로 똑같은 ‘프시케’라고 말한다.18)"
이러한 논리 속에서 생식은 프시케를 분할하고 프시케를 세상에 머무르게 하는 범죄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식사는 음식 안에 깃들인 정액을 섭취하는 행위가 되고, 섹스는 그렇게 몸 안에 흡수된 정액을 몸 밖으로 분출하는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보르보로스파의 목적은 ‘모든 것의 점진적인 정액화’를 통해서 세상을 끝장내는 것이다. 4세기에 근동에 존재했던 한 영지주의 종파의 의례적인 실천에 대한 보고서에 따르면, 기독교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르벨로(Barbelo)라고 불리는 딸을 낳았던 신에게 기도를 드렸는데, 바르벨로는 사바오트(Sabaoth)라고 불리는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얻기 위해 사바오트가 그의 신성한 어머니와 할아버지의 권위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바르벨로는 그녀의 관능적인 매력을 통해 사제들을 유혹하기 시작했으며, 그녀의 몸 안에 인간의 정액을 수집함으로써 피조물들 안에 흩뿌려진 생명력을 그녀의 몸 안으로 다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단 사냥꾼인 에파파니우스(Epiphanius)는 비밀리에 바르벨로 연회에 잠입하여 관찰했던 그 연회에 대해서 기록했다.19)
17) Ibid., p.101.
18) Ibid., p. 111.
19) Peter Sloterdijk, Critique of Cynical Reason, trans. Michael Eldred,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7, p. 257.
"그들은 그들 간에 자신들의 여자들을 분배하며, 이방인이 그들에게 합류하자마자 남자들은 여자들을 주고,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특별한 신호를 한다. 손을 뻗어 손바닥을 치면서 그들은 이방인이 자신들의 종교의 일원이 되었음을 알린다. 그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탁자에 앉는다.
그들은 최상의 요리를 이리저리 나르고 고기를 먹고 와인을 마시는데, 심지어 가난한 자들도 그렇게 한다. 완전한 포만감에 젖었을 때, 내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특별한 힘으로 그들의 동맥을 채웠을 때, 그들은 방탕한 짓을 시작한다. 남자가 그의 여자 옆에 있던 자기 자리를 떠나며 그녀에게 “일어나서 당신의 형제와 아가페(사랑의 성찬식)를 행하라!”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이 모든 불행한 자들은 서로 간통에 빠져들기 시작하는데, 비록 그들의 더러운 예배를 묘사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내 얼굴이 붉어질지라도, 그들 또한 그런 일을 범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므로, 나는 그런 일을 큰 소리를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 이제 그들이 다시 무리를 지어 모이자마자, 마치 매춘의 범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듯 그들은 자신들의 치욕스러운 것을 하늘을 향해 들어올린다. 남자와 여자가 남자의 정액을 손에 담아 하늘을 향해 눈을 들어올리며 앞으로 걸어나와, “우리는 당신에게 그리스도의 몸인 이 선물을 바칩니다.”라는 말을 하며 아버지 하느님에게 손에 담은 수치스러운 것을 바친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정액을 먹고 자신의 정액을 나눠 먹는데, 모든 사람이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것은 우리의 몸이 고통을 겪고 그리스도의 고통을 고백하는 부활절 연회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여성의 월경혈로 정확히 똑같은 것을 한다. 그들은 그녀의 불순한 피를 수집하여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다.”라고 말하면서 똑같은 방식으로 그것을 나눠 먹는다.
그러나 그들의 수많은 모든 과도함에서도 그들은 아이를 낳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매우 음란하게 그들은 이러한 불명예스러운 행위를 수행한다. 그들은 만족할 때까지 육욕의 행위를 행하지만, 더 깊이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정액을 수집하며, 그러고 나서 수치의 열매를 소비한다
… 그들 가운데 한 명이 우연히 여자 내부로 지나치게 깊이 정액을 스며들게 하여 여자가 임신하게 되자마자, 이때 그들이 그 다음에 어떤 더욱 엄청난 혐오스러운 일을 저지르는지를 경청해보라. 그들은 손가락으로 움켜쥘 수 있을 때 태아를 떼어내어 유산을 시키고, 일종의 절구 안에 넣고 태아를 빻은 다음에, 혐오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것과 함께 향료뿐만 아니라 꿀, 후추, 그리고 다양한 양념을 섞는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함께 모여서―진정한 돼지와 개의 집회―각자 이러한 유산된 반죽을 먹음으로써 자신의 손가락으로 성찬식을 한다.
“만찬”이 끝나자마자 그들은 “우리는 육욕의 최고의 대가가 우리와 함께 놀이를 하도록 하지는 못했지만, 우리 형제의 잘못을 우리 안으로 흡수했습니다.”라는 기도로 끝을 맺는다. 그들이 보기에 이것은 완전한 부활절 연회를 뜻한다. 이것 외에도 그들은 온갖 종류의 혐오스러운 일을 실천한다.
성적 결합 동안에 엑스터시 상태에 빠져들 때, 그들은 수치스러운 정액으로 자신들의 손을 더럽히고 도처에 정액을 분배하며, 이러한 행위를 통해 하느님에게 이르는 자유로운 접근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완전히 벌거벗은 채 더럽혀진 손으로 기도를 한다.20)"
20) Ibid., pp. 258-259.
페터 슬로터다이크가 말하듯이, 앞의 인용문에서 우리는 기독교적 오르지(orgy) 같은 게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여기에서는 신의 아들이 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반대 유형인 바르벨로에 의해 대체된다. 기독교 신화의 대안적인 극단적 가능성이 추구된다고 할 수 있으며, 여성의 피가 그리스도의 피와 등가시됨으로써 여성 신체의 영지주의적 해방이 감행된다. 바르벨로 의례에 대한 이러한 묘사와 관련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에게 에피파니우스가 이 종파를 비난했을 때 무려 80개의 영지주의 종파가 파문되었다.
기독교 안에서 정신-신체적으로 사랑의 계율을 실현하여 이원론적 형이상학으로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했던 영지주의 종파는 이렇게 역사 속에서 제거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중세 시대의 정점에서 기독교화된 섹슈얼리티는 육체를 증발시킨 채 신에 대한 신비적인 사랑의 언어 속에서 재발견된다.21)
기독교의 창세기에서 이브가 아담에게 건넨 과일은 선악에 대한 지식의 나무에서 온 것이며, 이로 인해서 그들은 눈을 뜨게 해주는 지식을 얻게 된다. 과일을 먹고 아담과 이브는 눈이 열리면서 자신들이 벌거벗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선악에 대한 지식은 단지 벌거벗음에 대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죄를 통해 인간의 본성이 뒤틀리게 되고, 이것은 섹슈얼리티의 기호로 가득 찬 ‘몸의 발견’을 가져온다. 그리고 몸, 섹슈얼리티, 그리고 벌거벗음과 더불어, 신은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게 된다. 인간이 비로소 처음으로 옷을 입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옷을 입은 이러한 인간은 섹슈얼리티와 출산과 죽음이 존재하는 새로운 세계 속으로 추방된다.22)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만약 인간이 원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인간의 섹슈얼리티가 어떠했을지에 대한, 즉 에덴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자신의 상상력을 전개한다. 그에 의하면 타락 이후의 리비도(libido)는 성기를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지만, 에덴에서는 의지에 의한 성기의 완벽한 제어가 가능했다.
22) Giorgio Agamben, “Nudity,” Nudities, trans. David Kishik & Stefan Pedatella,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1, pp. 58-63.
"낙원에서, 만약 비난받을 만한 위반이 또 다른 위반으로 처벌되지 않았다면, 결혼은 리비도와 의지의 이러한 투쟁, 이러한 저항, 이러한 대립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신체의 다른 모든 부분들처럼 우리의 사적인 부분들도 의지의 지배를 받았을 것이다. 손이 땅에 씨앗을 뿌리는 것처럼, 이러한 목적을 위해 창조된 그런 것이 생식의 들판에 씨앗을 뿌렸을 것이다… 단지 필요할 때, 필요한 정도로, 리비도의 흥분 때문이 아니라 의지의 명령의 결과로서, 남자는 씨앗을 뿌렸을 것이고 여자는 자신의 성기로 씨앗을 받았을 것이다.23)"
아우구스티누스는 에덴의 섹슈얼리티를 상상하면서 성욕이 제거된 섹슈얼리티의 가능성을 상상한다. 성기를 마음대로 제어하는 능력을 실증하기 위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제어할 수 없는 신체의 부분을 의지에 의해 제어하는 다소 기묘한 예를 들고 있다.
"우리는 자신들의 신체를 가지고서 다른 사람들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들을 성취하는 놀라운 능력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사람들에 대해서 알고 있다. 자신들의 귀를 한 번에 하나씩, 혹은 두 개를 함께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두피를 앞뒤로 자유자재로 움직임으로써 머리카락이 난 부분을 움직일 수 있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은 명령을 받자마자 마치 가방처럼 배를 살며시 압박함으로써 자신들이 집어삼킨 모든 것을 토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차이를 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새나 짐승의 울음소리를 흉내낼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쾌한 냄새를 전혀 풍기지 않은 채 자유자재로 항문에서 다양한 소리를 내어, 마치 그 부위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24)"
아우구스티누스가 상상하는 이러한 섹슈얼리티는 마치 손을 들어올리듯이 의식적으로 성기가 발기되어, 리비도의 자극 없이 남편이 아내를 임신시키는 장면을 가리킨다. 마치 월경혈이 처녀의 무결성을 해치지 않고 자궁에서 흘러나오듯이 그렇게, 남자는 신체적 무결성을 해치지 않은 채 아내에게 씨앗을 전달할 수 있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러한 상상력은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영화에서 신체를 접촉하지 않고도 생식을 하는 물고기와는 다르게 인간이 섹스를 하는 것은 인간이 물속에서 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쌍둥이 소년들의 대화를 떠올리게 한다.25)
죽음 이후에 낙원에서 부활한 몸의 상태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은 매우 흥미롭다.
신학자들이 직면한 첫 번째 문제는 부활한 몸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예컨대 부활한 자는 죽었을 당시의 나이로, 즉 노인은 노인으로, 아이는 아이로, 성인은 성인으로 부활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이 자연적인 결함 없이 부활할 것이라고 말한다.
부활은 모든 사람을 청춘의 완벽함으로, 즉 그리스도가 부활했던 나이로 되돌릴 것이다. 낙원은 삼십대의 인간들을 위한 세계이자 성적 차이가 유지되는 세계이다. 아퀴나스는 여성의 몸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부활한 자들은 모두 남성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과는 의견을 달리한다.26)
23) Ibid., pp. 68-69; Saint Augustine, The City of God against the Pagans, ed. R. W. Dyso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pp. 624-626.
24) Ibid., p. 69; Saint Augustine, op, cit., pp. 626-627.
25) David Cronenberg, Dead Ringers, 1988.
26) Giorgio Agamben, “The Glorious Body,” Nudities, pp. 91-92.
두 번째는 부활한 몸과 지상의 몸의 물질적 동일성이라는 문제가 있다.
절단된 도둑의 손은, 만약 도둑이 회개하여 용서받는다면, 부활의 순간에 그의 몸에 다시 붙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담의 갈비뼈는 아담의 몸으로 부활할 것인가, 아니면 이브의 몸으로 부활할 것인가?
식인종의 경우에, 그가 먹어 소화한 인간의 살은 그의 몸으로 부활할 것인가, 아니면 희생자의 몸으로 부활할 것인가? 중세 과학에서 볼 때, 정액은 소화된 음식의 잉여로부터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인간의 살만 먹은, 혹은 태아만을 먹은 식인종이 아이를 낳았다고 할 때, 동일한 육체가 하나 이상의 몸에 속하게 되며, 그리하여 동일한 육체가 서로 다른 몸들로 부활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와 관련하여 오리게네스(Origen)는 ‘이미지적 부활’을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각각의 개인과 마주칠 때마다 인지하게 되는 그 개인의 이미지(eidos)는 불변적인 것이다. 유년기에서 노령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물질적 특징은 지속적으로 변할지라도, 인간의 이미지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바로 이러한 이미지가 부활한 몸의 정체성을 보증한다는 것이다.27)
또한 신학자들에 따르면, 부활한 자들의 몸은 혼란스러운 열정에 굴하지 않는 ‘무감각(impassibility)’을 지닌다. 어떤 신학자는 낙원에서는 후각, 미각, 촉각 등의 모든 감각이 사라진다고 주장하지만 아퀴나스는 이를 거부한다. 또한 부활한 자들의 몸은 ‘미묘성(subtlety)’을 지닌다. 아퀴나스가 이단으로 생각한 입장에 따르면, 부활한 몸은 공기나 바람과 비슷하여 다른 몸에 의해 관통될 수 있고, 촉지할 수 없어서 숨이나 정령과 구별될 수 없으며, 다른 몸이 점유한 공간을 동시에 같이 점유할 수 있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부활한 몸은 감지할 수 있는 것이며, 다만 살아있는 몸으로는 감지할 수 없을 따름이라고 말한다. 또한 부활한 몸은 ‘민첩성(agility)’을 지닌다. 이때의 민첩성은 사이에 놓인 공간을 통과하는 것 없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움직임 자체를 몸의 불완전성이자 타락이라고 생각하여 부활한 몸은 부동성을 지닌다고 생각했던 사람들과는 달리, 신학자들에 따르면 민첩성이란 가고자 하는 곳으로 거의 순식간에 노력 없이 이동하는 능력을 의미했다. 마지막으로 부활한 몸은 ‘투명성(clarity)’을 지니므로 수정처럼 투명하지만, 마치 황금처럼 빛을 투과시키지는 않는다.28)
신학자들이 설명하는 부활한 몸의 생리학에 따르면, 부활한 자는 성별에 따라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지니게 되며, 위장과 창자뿐만 아니라 정맥과 동맥에 흐르는 피도 역시 지닐 것이다. 그러나 번식하거나 먹을 필요가 없는 낙원에서 이러한 기관들이 왜 필요한지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낙원에서의 부활을 이야기하면서 몸의 체액(피, 젖, 흑담즙, 땀, 정액, 콧물, 오줌 등)의 부활이라고 하는 당황스러운 문제를 다루기 전에, 머리카락과 손발톱의 부활이라고 하는 문제를 다룬다. 손발톱이나 머리카락은 필수적인 신체 기관을 보호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므로 낙원에서도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부활한 자들의 나이가 영원히 동일한 상태로 존재하는 것처럼, 낙원에서는 머리카락과 손발톱의 길이도 항상 똑같을 것이다. 체액과 관련하여 아퀴나스는 오줌, 콧물, 땀은 개체의 완전성과는 무관한 것이므로 부활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정액과 젖도 살아있는 몸에 유용하기는 하지만 부활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피, 흑담즙, 황담즙, 점액은 부활할 것이다.29)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적인 생식과 영양 섭취에 관련된 부활의 문제일 것이다.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들, 즉 고환, 음경, 질, 자궁, 위장, 창자가 부활한다면, 그것들은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가? 생식은 인류를 증식시키기 위한 것이고 영양 섭취는 개체의 회복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부활 이후에 인류는 신이 예정한 완벽한 숫자에 도달할 것이며, 몸은 더 이상 축소나 성장을 겪지 않을 것이다. 생식과 영양 섭취가 존재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아퀴나스는 신체의 또 다른 사용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각 기관들을 특수한 생리학적 기능으로부터 분리시킨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각각의 신체 기관들이 그것들의 작용으로부터 분리되어 중지되더라도, 그 기관들은 중지된 작용에 상응하는 덕목(virtue)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부활 이후에 성적 기관은 생식이라는 덕목, 즉 생식의 잠재성만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부활한 몸은 기능하는 몸이 아니라 전시되는 몸이 된다.30)
어떤 신학자들은 예수가 먹은 구운 물고기가 소화되어 흡수되었는지 어떤지, 그리고 소화의 잔여물이 마침내 예수의 몸으로부터 배설되었는지 어떤지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가이사랴의 바실리우스와 동방교회의 교부들로 소급되는 전통에서는, 예수가 먹은 음식은 그의 몸 속에 완전히 흡수되어 잔여물의 제거가 필요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예수의 몸 안에서는 음식이 일종의 기적적인 증발에 의해 즉시 영적인 본질로 변형된다는 것이 주장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시작된 전통에서는 일반적으로 부활한 자들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데도 음식을 먹고 소화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데도 배변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부활 이후의 배변의 실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데도 섹스를 하고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데도 음식을 먹는 부활한 육체는 모든 생리학적 기능의 ‘영도(零度)’를 지향한다.
인간들이 묘사하는 죽음 이후는 대체로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데도 그렇게 하는 것’, 혹은 ‘그렇게 존재할 필요가 없는데도 그렇게 존재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사랑의 욕망이나 성도착에 대해서도 동일한 말을 할 수 있다. 키스나 섹스 같은 사랑의 행위는 입술이나 성기나 유방 같은 인간의 신체 기관이 지닌 본연의 생리학적 기능을 중지시키고, 이렇게 작동이 중지된 신체 기관에 새로운 보다 인간적인 기능을 부여할 때 발생한다. 성도착도 마찬가지로 인간 신체의 색다른 이용 방식일 것이다. 키스를 받을 때 입은 진정한 입이 된다.31)
우리는 중세 신학에서 교부들이 부활한 자들의 몸을 가지고 논쟁했던 내용을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동물은 개체의 보존을 위해서 음식을 먹고 종의 보존을 위해서 생식을 한다.
그렇다면 부활한 자들도 음식을 먹고 섹스를 할 것인가?
그렇다면 죽음이 없는 세계에서 부활한 자들이 낳은 아이들의 수는 무한히 늘어날 것인가?
아니면 부활한 사람들의 숫자가 미리 정해짐으로써 죽음도 탄생도 없는 세계에서 인간은 먹지도 않고 섹스를 하지도 않아야 하는 것인가? 만약 부활한 자들이 계속해서 먹고 섹스를 한다면 낙원은 무한히 큰 것이어야 하며, 그 많은 배설물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부활 후에 먹고 마시고 잠자고 아이를 낳는 이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32) 기독교에서 죽음과 섹스는 이렇게 한 쌍의 저주처럼 연결되어 있다. 수도자들이 섹스를 제거함으로써 죽음을 극복하고자 했다는 것, 혹은 탄트리즘이나 마니교의 경우처럼 인간들이 생식과 섹스를 분리함으로써 세계를 끝장내고 싶어했다는 것 등은 그러한 저주를 푸는 서로 다른 주문이었을 것이다.
27) Ibid., pp. 92-93.
28) Ibid., pp. 94-96.
29) Ibid. pp. 96-97.
30) Ibid. pp. 97-98.
31) Ibid. pp. 100-102.
32) Giorgio Agamben, The Open: Man and Animal, trans. Kevin Attell,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4, pp. 18-19.
Ⅲ.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마스터베이션이 히스테리를 위한 표준적인 의학적 치료법으로 제시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장면은 매우 기이한 것으로 생각된다. 의사나 산파가 여성의 성기를 마사지하여 오르가즘에 이르게 하고 이를 통해서 히스테리를 치료하는 다음과 같은 장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증상이 나타날 때, 우리는 산파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그리하여 그녀가 백합 기름이나 감송향 뿌리나 샤프란 등의 비슷한 [어떤 것]을 사용하면서 손가락을 넣은 채 성기를 마사지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병으로 괴로워하는 여자는 이러한 방식에 의해서 발작을 일으킬 때까지 자극받을 수 있다.
그라두스 [페라리 다 그라디]가 제안하는 것처럼, 갈렌과 아비케나는 여타의 사람들 가운데서도 특히나 과부, 독신 생활을 사는 사람, 여성 수도자를 위해서 손가락으로 하는 이러한 종류의 자극을 추천한다.
이것은 매우 젊은 여성이나 창녀나 결혼한 여성에게는 드물게 추천되는데, 왜냐하면 결혼한 여성에게는 배우자와 성교하는 것이 더 좋은 치료법이기 때문이다.33)"
레이첼 메인즈에 의하면 전기-기계적인 마스터베이션을 위한 바이브레이터는 의학용 도구로서 발명되었다. 히스테리 환자들을 위해 누구도 원하지 않은 일을 대신했던 의사들은 기계를 발명함으로써 그러한 고역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바이브레이터는 영국인 의사인 모티머 그랑빌(Mortimer Granville)에 의해 디자인되어 1880년대에 와이스(Weiss) 모델이 출시되었고, 그후 15년이 지나기 전에 배터리로 작동하거나 전기로 작동하는 바이브레이터가 출시되었다. 그리고 1920년대에는 에로틱한 영화에서 바이브레이터가 등장하기 시작했다.34)
그러나 의학용 도구로 발명된 바이브레이터가 이후 자위를 위한 도구로 대중화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미국 정신의학회는 1952년에 질병 목록에서 히스테리를 삭제하게 된다. 레이첼 메인즈는 이것을 바이브레이터에 의한 ‘가짜 섹스’의 유포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가짜 섹스’는 가짜가 아니었다. 성기의 삽입에 의해서 발생하는 성적 쾌락만을 인정하던 ‘진짜 섹스’의 환영이 ‘가짜 섹스’의 범람에 의해 서서히 잠식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남성의 섹슈얼리티와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심을 발생시켰다. 섹스는 더 이상 남녀간의 관계를 정의하는 유일한 수단이 될 수 없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사랑이라는 또 다른 신화를 만나게 된다.
울리히 벡은 사랑이 이제 우리의 세속적인 종교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사랑의 본질은 종교와의 비교를 통해서 가장 잘 파악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사랑을 위한 결혼은 산업혁명이 시작된 이래로 존재하게 되었다. 사랑을 통해서 구성되는 가족이 사회의 모든 차원에서 이상화되었다.
마치 종교에서처럼 사랑은 완벽한 행복을 약속하고 자신의 절대성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게 한다. 사랑을 통해서 연인들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게 되고 다른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사랑은 ‘둘을 위한 혁명’이 된다.35) 실제로 종교가 그 기반을 상실함에 따라 사람들은 사적인 성소에서 위안을 찾기 시작했다. 사랑은 친밀성이나 섹스를 넘어서는 어떤 희망과 관련된다. 사랑을 나누는 침대나 병상을 지키는 연인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사랑은 상대방의 약점·실수·태만·나이·범죄까지도 감싸안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관계가 끝나게 되면 사랑의 모든 것은 무의미해진다.
그러나 울리히 벡에 의하면, 사랑은 사적인 우주이며, 연인들은 그들 자신의 교회, 그들 자신의 사제, 그들 자신의 경전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들은 그들만의 규칙과 금기를 창조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창조되었다가 쉽게 소멸하는 무수한 사적 우주를 창조한다. 결국 지위나 돈이 아니라 오로지 직접적인 감정에 의해서 창조되는 사랑의 세계는 산업화된 세계에 대항하는 가장 좋은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36)
울리히 벡은 사랑과 결혼의 관계에 따라 세 가지 시기를 구분한다.
첫 번째 시기는 고대에서 중세를 거쳐 18세기에까지 이르는 기간으로서, 여기에서 사랑과 정열은 결혼을 해치는 죄악으로 인식되었다. “아내를 정부처럼 사랑하는 것보다 수치스러운 것은 없다.”라는 말이 이러한 인식을 잘 표현해 준다.
두 번째 시기는 18세기 말에 영국에서 시작되며, 이때는 산업화에 의해 탄생한 새로운 중산계급이 사회 전체에 청교도적 태도를 강제하게 된다. 그리하여 성적 욕망이 은폐되고 일탈적인 성적 행동은 심리학이나 의학의 치료 대상이 된다.
세 번째 시기는 엄격한 중산계급의 도덕성에 의해 금지된 행동에 대한 은밀한 관심이 싹트게 된 시기이며, 이때 사람들은 사랑을 통해 성적 욕망을 총족시키고 자유를 성취하게 된다. 낭만주의에 입각하여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적인 짝을 찾아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낭만적인 사랑이 대중적인 현상이 되면서 사랑이라는 세속적인 종교가 탄생하게 된다.37)
33) Rachel P. Maines, The Technology of Orgasm: “Hysteria,” the Vibrator, and Women’s Sexual Satisfaction, Baltimore: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9, p. 1. 이 인용문의 본래 출전은 아래와 같다. Alemarianus Petrus Forestus [Pieter van Foreest], Observationem et Curationem Medicinaliumac Chirurgicarum Opera Omnia (Rouen: Bertherlin, 1653), vol. 3, bk. 28.
34) Ibid., pp. 10-11.
35) Ulrich Beck & Elisabeth Beck-Gernsheim, The Normal Chaos of Love, trans. Mark Ritter & Jane Wiebel, Cambridge: Polity Press, 1995, p. 175.
36) Ibid., pp. 179-181.
37) Ibid., p. 184.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흔히 플라톤의 《향연》에서 등장하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태초에 인간은 성적으로 자기 충족적이었고 완전했으며, 남성과 여성의 속성을 모두 지닌 양성구유적인 존재였다. 본래적인 인간은 네 개의 다리와 네 개의 팔과 두 개의 얼굴과 양성의 성기를 지닌 채 공처럼 둥근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기이한 양성구유적 동물은 자기 도취적인 오만한 존재여서 신들의 질투를 사게 된다. 신들은 톱으로 본래적인 인간을 둘로 자르게 되고, 각각의 절반은 남성과 여성이라고 불리게 되며, 부분은 전체가 아니며 인간은 신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도록 이때부터 인간들은 피흘리는 영혼을 지닌 채 다른 절반을 쫓아다니도록 운명지어진다. 그리하여 남녀는 결국 에로스 신의 도움을 받아 다시 하나로 결합될 것을 꿈꾸게 된다. 이러한 상상력은 결핍과 상실에 대한 기억이 바로 사랑의 동력이라고 이야기한다.
누군가가 결혼을 한다. 수많은 결혼의 방식, 혹은 사랑의 방식이 존재한다. 그들은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을까? 사랑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할까?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의 운명적인 반쪽을 인지하는가?
1967년 6월 25일에 런던의 BBC 방송국은 3대의 미국 인공위성과 1대의 러시아 인공위성을 통해, 지구의 반대편의 화면을 전송하는 최초의 텔레비전 다원 중계 방송을 하게 된다. BBC는 “우리 세계(Our World)”라고 불린 이 프로그램을 위한 음악을 이엠아이(EMI)와 비틀즈(Beatles)에게 맡기고, 이때 비틀즈의 존 레논(John Lennon)은 “네게 필요한 건 오직 사랑뿐(All You Need Is Love)”이라는 세계 통합의 찬가를 만들게 된다.
1967년 7월의 한 인터뷰에서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전세계가 동시에 녹음하는 모습을 지켜본다고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라는 세계를 위한 한 가지 메시지를 담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많은 사랑을 필요로 한다. 지금 이 순간은 사랑을 필요로 하는 역사상의 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방송 산업과 결혼 산업을 위해서, 그리고 전세계를 포용하는 수단을 위해서, 그리고 철학·종교·인문학을 위해서, 그리고 매일의 노동량을 견디고 수퍼마켓에서 쇼핑을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사랑뿐인 그러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사랑이 존재하는 곳에서 모든 것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비틀즈의 이 노래 이후 30년 동안 서양인은 이러한 사랑을 찾기 위해 골몰했고, 전세계적으로 매일 24시간 동안 이러한 사랑 찾기를 방송했다. 동양도 이제는 서양의 사랑에 스스로를 내던지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삶속에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사랑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회의적이다.
사실 사랑의 문제는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감정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저 사랑은 지나가는 소비재이며 삶의 부산물이며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며 계속해서 움직이는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38)
사실 과거에 사람들이 결혼하는 방식은 그들이 사랑하는 방식과는 무관한 그런 것이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이야기하는 ‘친족의 기본 구조’는 친족의 범위가 배우자의 결정을 가능하게 하는 체계, 즉 “선호되는 배우자의 거의 자동적인 결정”이 이루어지는 체계를 가리킨다. 이에 반하여 ‘친족의 복잡 구조’는 친족만으로는 배우자의 결정이 불가능한 체계, 즉 경제적이고 심리학적인 메커니즘에 의해 배우자가 결정됨으로써 부의 이동이나 자유로운 선택 등의 관념이 강조되는 체계를 가리킨다. 그렇지만 오로지 한 명의 개인만을 배우자의 선택 범위 안에 들어오게 하는 체계는 거의 불가능한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기본 구조에서도 선택의 자유는 존재하며, 복잡 구조에서도 완전한 선택의 자유는 허용되지 않는다. 복잡 구조에서도 누구와든 결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명시적으로 금지되지 않은 사람들과의 결혼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39)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근대사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닌 배우자의 자유 선택이라는 관념이 얼마나 환영적이고 허구적인 것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초 구조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사랑의 에너지가 차갑게 냉각되는 사회, 그리고 사랑 선택/대상 선택의 가능성이 극도로 제한된 사회가 의도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섹슈얼리티의 제거를 추구하는 종교에는 인간 관계의 모든 에너지를, 즉 인간들의 모든 마찰 에너지를 종교 안으로 응집하고자 하는 경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마찰이 종교적·경제적·사회적 구조를 통해 철저히 통제되며, 섹슈얼리티가 철저하게 인간의 자원화로 수렴되는 것이다.
38) Klaus Theweleit, Object-Choice (All You Need Is Love): on Marriage Strategies & a Fragment of a Freud Biography, London: Verso, 1990, pp. 1-2.
39) Claude L vi-Strauss, “Preface to the First Edition” & “ Preface to the Second Edition,” to The Elementary Structures of Kinship, trans. James Harle Bell & John Richard von Sturmer, Boston: Beacon Press, 1969.
물론 클라우스 테벨라이트가 지적하듯이 사랑을 위한 결혼은 무엇보다도 문학의 관심사였고, 글쓰기 매체의 출현이 이러한 관념의 전파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즉 군사적이고 전제군주적인 체계가 사라지면서, 그리고 사랑이 책에서 영화와 레코드판으로 이동하면서 ‘사랑=결혼’에 대한 대중적인 실험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과도한 노동으로 피로에 찌들어 있고 부적절한 음식과 밀집된 주거 환경 속에서 아둥바둥거리는 취약한 사회 계층조차도 감정에 기반한 사랑을 꿈꾸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치적인 참정권의 부여와 동시에 사랑 선택의 자유 역시 여자들에게 주어지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40)
역사적으로 결혼 형식은 원래 딸들을 거래하는 절차 같은 것이었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필연적으로 딸들의 섹슈얼리티는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상황은 엄청난 변화를 몰고올 수밖에 없었다.
테벨라이트에 의하면 결혼의 형태와 사랑의 형태를 연결시키고자 했던 최초의 이론가는 바로 프로이트였다. 사랑과 결혼의 결합은 필연적으로 사회-경제적인 규칙을 위반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위반을 위해서는 반드시 전통적인 행동 기반을 버릴 수 있게 하는 에너지, 즉 어떤 처벌도 두려워하지 않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일정한 도취 상태, 혹은 교묘한 광기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트에 의하면 사랑을 위한 결혼은 일정한 규칙을 따르는 일종의 광기였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근본적인 잘못된 지각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을 이상화하고 성적으로 과대평가해야 하는 과정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여자와 남자의 섹슈얼리티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먼저 애착의 모델(attachment model)은 최초의 만족의 경험을 제공한 사람, 특히 어머니에 대한 경험에 근거하는 사랑 선택의 방식이며, 이것은 주로 남자들의 사랑 선택의 방식이다.41)
중요한 것은 프로이트가 사랑의 법칙을 정립함으로써 사랑의 환영을 깨뜨리고자 했다는 점이다. 애착 유형의 대상 선택을 결정하는 정서는 현전하지 않는 사람, 즉 이전의 어머니나 상상적인 어머니를 향해 겨냥된다. 그러므로 프로이트에 의하면 이때 눈앞에 있는 신체 안에서 사랑받는 것은 부재하는 사람의 현존이 된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네가 아니다.”
결국 사랑은 그 자체의 특수한 힘을 지니는 것이 아니며, 성적 욕구의 충족에 의한 긴장의 이완조차도 그저 초기의 경험에 대한 미약한 모방일 뿐이다.42)
이러한 애착의 유형은 부모-자식의 관계의 반복을 위한 것이 된다. 항상 동일한 유형의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여자나, 항상 동일한 유형의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남자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보통은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파트너의 지속적인 교체를 통해서 계속해서 어머니를 찾아 헤매게 된다. 물론 자기의 어머니나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상대방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 역시 자신이 갖지 못한 어머니나 아버지를 갖고자 한다는 점에서 부모-자식의 관계 속에서 정의되는 사랑의 모델에 속하게 된다.43)
다음으로 나르시시즘의 모델(narcissistic model)에서는 사랑 선택이 자기를 기준을 해서 이루어지며, 크게 네 가지의 서로 다른 방식이 존재한다. 현재의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 과거의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 자기가 되고자 하는 바를 사랑하는 것, 한때 자기 자신의 일부였던 것을 사랑하는 것이 그것들이다.
이 모델은 주로 여자들의 사랑 선택의 방식이 된다. 그래서 나르시시즘의 모델에서는 자신과 정신의 향기가 비슷한 사람을 사랑하거나, 자기가 되고자 하는 완벽한 상태를 구현하는 사람을 사랑하거나, 아니면 한때 자신의 일부였던 아이에게 사랑을 집중하거나 하는 방식의 사랑의 유형들이 생겨나게 된다.44)
40) Ibid., p. 3.
41) Ibid., p. 6.
42) Ibid., p. 17.
43) Ibid., pp. 9-11.
44) Ibid., p. 19.
20세기 전반기에 유행했던 ‘사랑=결혼’의 방식 가운데 하나는 친구의 형제나 자매와 결혼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자기와 친한 친구의 여동생과 결혼하는 남자는 사실은 ‘친구의 도플갱어’와 결혼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동성애의 흔적이 배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지나치게 성적인 경험이 많은 여성을 회피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또한 친한 친구에게 자기의 여동생을 줌으로써 이루어지는 결혼은 감추어진 근친상간적 욕망의 충족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과거에 딸들은 형제나 아버지로부터 밤마다 성적 공격을 당하는 대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에게 여동생을 내주는 것은 여동생을 자신의 시야에 두기 위한 전략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대상 선택은 사실은 사랑 선택이 아니라 그저 자기의 세계를 보존하기 위한 보호 메커니즘의 발로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러한 사랑 유형은 친한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거나 친한 친구의 남편을 사랑하는 형태로 이어지기도 한다.45) 이러한 사랑 선택에서 중요한 것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아니라 자식과 자식의 관계, 즉 동기간의 관계라고 할수 있다.
로이드 드 모즈(Lloyd de Mause)는 태어나는 순서에 따라서, 즉 장자인지 차남인지 등에 따라서 각각의 정신의 기질이 달라진다고 말하면서, 이것을 ‘정신 계급(psycho class)’이라고 지칭한다.
그러므로 첫째는 첫째와, 둘째는 둘째와, 셋째는 셋째와 사랑에 빠지는 일이 매우 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출생 순서에 의해서 그 사람의 정신의 향기가 어느 정도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일한 상황에 처한 비슷한 사람과 결혼한다는 것도 우리가 사랑을 선택하는 은폐된 방식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46)
그러나 또 다른 가장 흔한 사랑 선택의 방식은 테벨라이트가 ‘미디어로서의 여성(medial woman)’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우리는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이 당대의 유명한 필름 편집자였던 앨머 레빌(Alma Reville)과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통해서, 그리고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와 사랑에 빠졌던 방식을 통해서, 그리고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크누트 함순(Knut Hamsun)이 마리 안데르센(Marie Andersen)이라는 여배우 사랑에 빠졌던 방식을 통해서, 어떻게 남녀가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서로를 미디어로서 이용하는지를 보게 된다.
우리는 여배우, 무용수, 가수, 모델이 어떠한 남자들과 사랑에 빠지는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많은 남성 작가들은 고트프리트 벤(Gottfried Benn)처럼 여성 타이피스트와 결혼하거나 정신분석가와 결혼한다.
브레히트(Brecht)는 여배우이자 타이피스트였던 그레테 슈테핀(Grete Steffin)과 연인 관계였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작품의 방향이 바뀔 때마다 필요한 ‘여성 미디어’를 교체한다. 한 명이 아니라 다수의 연속적인 파트너들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또는 이러한 사랑 선택은 관련된 여자의 죽음과 함께 끝나기도 한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섹슈얼리티를 가리켜서 테벨라이트는 ‘생산의 섹슈얼리티(production sexuality)’라는 이름을 붙인다.47)
46) Ibid., pp. 16-17.
47) Ibid. pp. 21-33.
그런데 여기에서 지적할 것은 섹슈얼리티는 결코 단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위에서 언급한 ‘다양한 섹슈얼리티(various sexualities)’ 가운데 하나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실 사람들에게는 자기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섹슈얼리티의 균형점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생산의 섹슈얼리티, 신체적인 접촉의 섹슈얼리티, 부재하는 대상을 현존하게 하려는 섹슈얼리티, 정신의 향기에 따른 섹슈얼리티, 자기 보존적인 섹슈얼리티 등이 자기 안에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서로 다른 유형의 여성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 안에 내재된 다양한 유형의 섹슈얼리티를 충족시키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방식일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스와핑(swapping)은 동일한 종류의 섹슈얼리티 안에서 사랑의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치환하는 방법일 뿐이다. 즉 하나의 섹슈얼리티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섹슈얼리티의 충족은 하나의 몸으로 두 사람 안에 현존하고자 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이와는 반대로, 한 사람의 여자 혹은 남자에게 자신의 다양한 섹슈얼리티에 대한 총체적인 충족을 요구할 때, 즉 한 사람에게 성적 과부하를 걸 때도 항상 문제가 발생한다. 또한 우리는 학교나 교회 같은 집단 안에서 작동하는 섹슈얼리티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학교나 교회에서 작동하는 성적 규범은 많은 경우에 섹슈얼리티의 독점이나 제거를 지향하게 된다. 교인들과의 결혼에 대한 강조가 아무리 많은 신학적 사변을 동반하더라도 결국 딸들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고 지배하여 독점하기 위한 폐쇄적인 사이클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학교라는 공간이 만들어내는 지적인 섹슈얼리티 역시 비슷하다. 섹슈얼리티의 독점이나 집중을 통해서 공동체를 유지한다는 것은 매우 흔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근대적인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야기는 이러한 것까지도 담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알랭 바디우는 현대 사회에 존재하는 사랑에 대한 두 가지 위협을 이야기한다.
그 하나는 ‘안전성에 대한 요구’로서, 마치 ‘죽음 없는 전쟁’이라는 미군 홍보 문구처럼 ‘위험 없는 사랑’이라는 문구가 사랑 개념을 지배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예컨대 인터넷 데이트 사이트, 채팅 사이트 등은 모두 사진, 상대방의 기본적인 프로필, 나이, 호불호, 취미 등에 대한 모든 정보를 미리 망라함으로써 우연과 갈등과 위험이 없는 위생학적 사랑을 추구하게 한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스펙을 보고 그 사람과의 미래를 그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젓게 된다.
다른 하나는 ‘쿨한 사랑’에 대한 강조이다. 쾌락주의의 구도 속에서 사랑을 학습한 사람들은 쿨하지 못한 사람을 근대적이지 않은, 그래서 구시대적인 사람으로 취급하게 된다.
사랑에 대한 두 번째 위협은 사랑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관념을 전파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디우는 사랑을 위해서는 안전성과 안락이 아니라 위험과 모험을 재발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사랑을 재발명할 필요가 있다”는 랭보의 말을 되풀이한다.48)
알랭 바디우는 테벨라이트와는 다르게 사랑에는 법칙이 없다고 강조한다.49)
사랑은 성적 차이처럼 두 사람의 차이에 입각한 분리를 포함한다. 사랑은 둘에서 시작하여 하나를 만드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어떻게 둘이 하나가 될 수 있는가? 아이를 가질 경우 어떻게 셋이 하나가 될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들이 사랑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바디우에 의하면 사랑은 항상 마주침에서 출발한다. 바디우는 이러한 마주침에 ‘사건’이라는 준형이상학적 지위를 부여한다. 사건이란 직접적인 사물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무엇이다. 그래서 바디우에게 사랑은 하나의 관점이 아니라 둘의 관점으로부터 만들어지고 있는 구성물이자 삶이 된다. 그러나 바디우는 사랑에 대한 융합적 해석, 즉 낭만적인 사랑 개념에 반대한다.
둘이 만들어내는 둘에 의해서만 가능해지는 새로운 세계를 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낭만적인 사랑 개념은 두 사람이 하나의 세계만을 보게 한다. 그러나 하나로 융합하는 하나의 세계만을 추구할 때 사랑은 보통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사랑이 형언할 수 없는 예외성 속에서 소모되는 것이다. 이때 사랑은 세상 밖의 것이 된다. 그러나 사랑은 세상 안에서 벌어지는 것이므로 사랑의 철학은 이러한 낭만적 개념을 넘어서야 한다.50)
바디우는 사랑은 마주침이 아니라 구성-건축임을 분명히 한다. 사랑은 시간을 견뎌야 하는 끈기있는 모험이다. 진정한 사랑은 시간과 공간과 세계가 던져놓은 장애물을 넘으면서 지속적으로 승리하는 어떤 것이다. 바디우는 “나는 사실 사랑의 지속하는 시간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51)
이때 지속이란 사랑이 지속된다거나 영원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삶을 지속하는 상이한 방식을 창안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게 사랑은 “내가 알지 못했던 어떤 사람과의 마주침이라는 절대적인 우연성이 마침내 운명의 외관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52)
바디우에게 사랑은 어떤 종류의 진리가 구성되는 경험이다. 이러한 진리는 둘에 대한 진리이자, 차이로부터 파생되는 진리이고, 둘이 보는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가 보는 둘의 세계에 대한 경험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강조하는 “둘의 장면(Two scene)”이 의미하는 바이다.
“어떻게 해서 처음에는 순수한 우연이었던 것이 진리 구성을 위한 지렛대가 될 수 있는가?”
“어떻게 해서 예측할 수 없는 존재의 변덕에 결부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 만나서 짝이 된 두 명의 삶의 전체 의미가 되어, 그들이 차이의 시선의 매개를 통해 세계의 재탄생에 대한 확장된 경험에 참여하는 것인가?” “어떻게 해서 당신은 순전한 마주침으로부터 우리가 둘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단일한 세계라는 역설을 향해 움직이는가? 그러한 것은 완전한 신비라고 할 수 있다.”
알랭 바디우의 질문은 이러한 것들이다.
알랭 바디우에 따르면, 사랑은 개인들의 만족보다는 커플의 생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산주의적이다.
그래서 바디우는 사랑은 ‘최소한도의 공산주의(minimal communism)’라고 말한다.53)
그래서 사랑은 분리에 저항하는 지속적인 투쟁이며, 항상 위태한 것일 수밖에 없다. 사랑은 우리가 자신의 몸을 포기하고 관념이나 언어의 먹이가 되게 하기도 한다. 사랑의 언어는 그렇게 몸의 각본이 되어 몸을 지배한다. 그러나 사랑의 언어가 몸으로 스며들기 위해서는 ‘사랑한다’는 말의 무한 반복이 필요하다. 끊임없이 갱신되는 사랑의 선언에 의해서 사랑의 언어가 몸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사랑하는 자는 대상 전체를 사랑할 뿐이지, 결코 다른 부분은 거부한 채 한 부분만을 선택하여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랑은 총체적인 것이다. 사랑은 자기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경험일 뿐만 아니라 상대방과 자기의 차이를 가장 예리하게 경험하게 되는 현장이 된다. 그래서 사랑은 살인과 자살을 낳기도 한다.
48) Alain Badiou (with Nicholas Truong), In Praise of Love, trans. Peter Bush, London: Serpent’s Tail, 2012, pp. 5-10.
49) Ibid. p. 78.
50) Ibid. pp. 27-36.
51) Ibid. p. 33.
52) Ibid. p. 43.
53) Ibid. p. 90.
Ⅳ. 사랑을 사랑한다는 것
니클라스 루만에 의하면 유럽에서는 17세기 중반 이후로 서서히 ‘사랑의 의미론’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정립되기 시작했다. 그전에 사랑은 대상의 완벽성에 의해, 즉 이상화된 대상에 의해 자극되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사랑의 열정(amour passion)’이 사랑의 핵심 요소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점차 사랑 자체가 두 사람만을 위한 특별한 폐쇄적 커뮤니케이션 체계로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사랑을 위한 분류체계’의 분화도 진행되었다.54)
사랑은 사회 안에 있는 사회 밖의 공간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회의 내부에 존재하는 사회의 외부이며, 우리는 사랑을 통해 사회 안에서 사회를 탈출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누구도 탈출하고 싶어하지 않는 감옥이다.”라는 표현이나, “사랑은 건강보다 선호되는 질병이며, 상처받은 자가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상처다.”라는 표현은 모두 정상성과는 대조되는 사랑의 위상을 보여준다.
특히 과도성이나 총체성에 대한 지향은 사랑의 척도처럼 간주된다. 마치 종교처럼 사랑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연인과 관계된 모든 것을 의미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에 가치를 부여한다. 사랑은 탈출구가 없는 닫힌 원이며, 그 안에 있는 모든 요소들이 서로를 강화시키는 체계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이 사랑을 하게 될 때, 사랑이라고 하는 상호작용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그 의미를 변화시키게 된다. 그래서 사랑은 메시지의 의미를 결정하는 미디어가 된다. 즉 사랑이라는 미디어에 실리는 순간 모든 정보는 사랑의 미디어에 적합한 전혀 다른 의미를 드러내게 된다. 그러므로 총체적 완전성을 지향하는 사랑에서는 가장 작은 사소한 실수조차도 용납하기 힘든 치명적인 것이 되고 만다. “누구도 용서할 수 없는 자가 더욱더 강력하게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55)
가장 사소한 실수조차도 언제든지 사랑을 붕괴시킬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사랑은 규칙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이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를 규칙을 통해서 확인할 수가 없다.56)
특히 낭만적 사랑에서는 연인만이 유일한 목적이 되기 때문에, 사랑의 부작용이나 기회비용 같은 것에 주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연인이라는 목적이 다른 모든 것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또한 사랑은 이유 없는 것이며, 어떤 분명한 이유를 제시하는 것은 사랑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으로 생각된다. 오로지 사랑의 증거를 제시하고 찾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이러한 것을 통해 우리는 사랑과 종교가 겹쳐지는 지점을 확인할 수 있다. 종교에서도 신을 믿는 이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을 믿고 있다는 증거를 내보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두 사람만의 사적인 종교 같은 것이다. 사랑과 종교 모두는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에 대한 과도한 해석을 지향한다.57)
특히 낭만적 사랑에서는 모든 비개연적인 것이 개연적인 것으로 변형된다. 즉 결코 일어날 법하지 않은, 혹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들이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취급된다. 일상적인 것, 당연한 것, 논리적인 것, 평범한 것이 모두 거부된다. 또한 사랑에 빠진 연인에게는 돈도 가족도 지위도 명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랑은 모든 역설적인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 파괴적인 측면을 지닌다. 그리고 종교가 집단적인 신화와 의례에 의해 유지된다면, 사랑은 지극히 사적인 둘만의 신화와 의례를 통해 지속된다.
54) Niklas Luhmann, Love as Passion, p. 65.
55) Ibid. p. 200, no. 58.
56) Ibid. pp. 68-69.
57) Ibid. pp. 69-73.
니클라스 루만에 의하면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섹슈얼리티와 결혼을 포함하는 총체적인 사랑 개념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결혼을 사랑의 끝이라고 생각하고, 결혼한다는 것은 연인과 절교하는 고귀한 방식이라고 생각했던 그 이전의 관점과는 다르게, 19세기 이후에는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다는 새로운 관념이 등장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루만은 사랑 안에서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실제로 개인들은 인류의 재생산에 기여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한다.58) 그러므로 생식 과정의 진화론적 분화가 낳은 최종 형태가 바로 사랑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59) 과거에는 가족 안에서 각각의 세대가 구성되었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가족은 각각의 세대에 의해 매번 새롭게 재구성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랑과 결혼의 일치는 가족이라는 제도가 사랑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매번 새롭게 재구성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60)
사랑의 신화에 의해 생식과 섹슈얼리티를 철저하게 비가시적인 곳으로 이동시켜 은폐하는 것, 이것이 바로 근대적인 사랑의 가장 중요한 기능일 것이다.
니클라스 루만에 따르면, 사랑이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우선 사랑은 경험을 채색하고, 사랑 자체의 독특한 총체성에 의해서 경험과 행동의 지평이 되는 세계를 변화시킨다. 그리하여 사랑은 특정한 사물들과 사건들, 그리고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에 설득력을 준다.
다음으로 사랑은 사랑의 표현으로 선택된 그러한 방식으로 사람들이 행동하게 한다. 혹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특수한 세계가 제시하는 방식대로 사람들이 행동하게 한다.
이 특수한 세계는 공통의 취향과 공통의 역사를 지닌 세계이며, 문제들이 사랑의 관점에서 논의되고 판단되는 세계이다.61) 특히 사랑은 다른 사람의 존재의 문제이다. 그리고 사랑에 따라 구조화되는 사회 체계는 커뮤니케이션의 개방성을 필요 조건으로 삼는다. 파트너의 전체 경험이 공통적으로 공유되는 경험이 되어야 한다. 각각의 파트너는 자기가 매일 경험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해야 하며, 자기의 문제에 대한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해야 하고, 함께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비밀을 감추는 허울이 없어야 하고 꾸며진 이야기도 없어야 한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의 개방성이 제도화된다는 것은 체계의 인식할 수 있는 경계선이 존재하며, 각각의 파트너가 체계의 동일한 경계선을 의식하고 존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상대방이 그렇게 할 것이며 상대방으로부터 그러한 것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62) 사랑은 이러한 경계선 안에서 작동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특수한 방식으로 세계를 보고 느끼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를 사랑을 하게 될 때 그의 세계관은 또한 나에게도 설득력을 발휘하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러한 풍경, 이러한 사람, 이러한 오락 형태, 이러한 생활 방식, 이러한 사물 향유 방식을 선호하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이 다른 가능성들보다도 나에게 있어서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 사랑은 진리에 부착되는 보편성의 조건을 결여한다.
또한 사랑에서는 가능한 성관계들의 배제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모든 여자/남자의 포기에 의한 한 여자/남자의 선택이 바로 사랑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근친상간 금기는 이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근친상간 금기는 아이에게 내려진 부모의 형벌이며, 이로 인해서 아이들은 가족 밖에서 여자/남자를 찾게 된다. 그러므로 근친상간 금기는 사회화의 초석이 된다. 사랑은 가능한 모든 성관계의 포기에 기초한 하나의 성관계이고, 근친상간 금기는 하나의 성관계를 포기하면서 생기는 무수한 성관계의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다.
58) Ibid. p. 148.
59) Ibid. p. 232, no. 24.
60) Ibid. p. 149.
61) Niklas Luhmann, Love: A Sketch, Cambridge: Polity Press, 2010,
62) Ibid. pp. 9-10.
사랑은 우연성에 입각한 것이므로 많은 불확실성을 야기한다.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로서 사랑의 의미론은 자기 지시적인 폐쇄 체계를 형성하면서 사랑의 불확실성을 제거해 나간다. 사랑의 이러한 재귀성에 의해서, 사랑이 단지 사랑에 의해서 자극되고, 사랑이 사랑을 지시하고, 사랑이 사랑을 추구하고, 사랑이 사랑을 발견하여 사랑으로서 성취하는 한, 사랑이 자라게 된다.
사랑이라는 매체의 분화는 사랑이 사랑의 의미론 안에서만 폐쇄적으로 무한 재귀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사랑의 재귀성이란 사랑하고 사랑받는 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고 사랑받는 자로서의 타자를 사랑하는 것을 모두 포함한다. 비록 아직 파트너가 없거나 파트너가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더라도, “사랑을 사랑하는 것(to love love)”이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첫눈에 사랑한다는 것은 처음 보기 전에 이미 사랑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처럼 사랑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사회가 사랑을 커뮤니케이션 매체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63)
사랑이 성행위를 통해 성취되는 관계의 결과물로 생각될 때, 즉 사랑 안에 섹슈얼리티가 포함될 때, 섹슈얼리티는 생식의 차원을 넘어선 사회적 기능을 취하게 된다. 섹슈얼리티가 사랑의 물적 토대로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성적 관계의 독특한 점은 두 사람의 특정한 관계가 외부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즉 공적으로 표상될 필요 없이 성취될 수 있다는 점이다. 사랑의 역설은 이러한 비가시적인 관계가 모든 가시적인 관계보다 더욱 중요한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가시적 관계 속에서 사랑은 다른 사랑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 되며, 성적 접촉의 확산적 성격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불균형한 관계조차도 사랑 안에서는 동등한 것으로 경험될 수 있다. 사람들은 사랑 안에서 자신 자신의 경험이 파트너의 경험과 같다는 기대를 하게 된다.
그러나 사랑은 성적 만족을 위한 중간 단계로 간주되기도 하며, 때로는 목적과 수단이 역전되어 성행위가 사랑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64)
또한 섹슈얼리티와 관련될 때, 첫째,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매력적인 성적 제안을 거부할 수 있는 ‘무관심’을 조장함으로써 성적 경쟁의 문제를 해소한다.
둘째, 사랑은 기대감을 통해 기다림의 시간을 채우게 된다. 사랑의 시간성이 확보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일상적인 상호작용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에, 사랑에 빠진 자는 일상적인 작은 사건들에 대한 일종의 면역력을 지니게 된다. “만약 네가 그렇게 한다면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야”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이 말은 둘 사이의 접촉이 사랑의 수준으로 분화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의 표현으로 간주된다.
또한 사랑하는 남자는 한 여자와 다른 여자의 차이를 과장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인 선호에 의해 결정된 성적 파트너와의 성적 관계로서 사랑이 개별화될 때, 연인은 다른 사람들의 성적인 힘이나 그들의 의견이나 판단 등에 무관심해진다. 왜냐하면 단지 연인들만이 자신들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다는 배타적인 사랑의 신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개별화와 고립화 속에만 사랑의 열정이 점화될 수 있다.65)
성적 관계에 이르는 열정적인 사랑은 보통 가족의 확립을 통해 지속력을 확보한다. 그러나 열정과 사랑은 ‘매우 불안정한 체계적 원리’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루만이 말하듯 사회 체계의 구조화 원리로서 사랑은 일정한 위험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결혼과 가족이 밀려들고 사그라지는 변화무쌍한 감정에 결부되어 있다는 생각은 매우 끔직한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에 의해 봉인된 결혼은 열정보다 오래가는 안정화 메커니즘을 발달시킨다. 즉 열정 없이도 유지되는 사적 세계가 창조될 수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사랑이 열정에서 출발하지만, 나중에는 두 사람의 사적 역사가 열정을 대체하게 된다. 이처럼 ‘열정’이 ‘역사’로 변형될 때, 열정적인 사랑이 안정적인 사랑이 되는 것이다.
좋은 결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도로 발달된 심리학적 능력, 분화된 사회적 감수성, 그리고 복잡한 개인적인 경험 처리 체계가 필요하다. 사랑과 결혼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정신적 긴장을 즐길 수 있는 고도의 심리학적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못할 때, 결혼은 전쟁보다도 더 큰 잠재적인 정신 장애를 초래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경우 사랑에 근거한 근대 가족은 심리학적으로 상처받은 구성원을 감당하지 못한 채 정신의학적 치료를 요하는 무수한 사례를 양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66)
63) Ibid. pp. 34-36.
64) Ibid. pp. 37-42.
65) Ibid. pp. 42-46.
사랑하는 자로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볼 필요가 있으며, 연인과의 상호작용 속에 들어가는 것을 사랑해야 한다. 특히 사랑은 ‘매우 투사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의 필요에 근거하여 다른 사람의 이미지를 창조하게 된다. 사랑은 일정한 ‘상상력의 허구’ 속에서 유지된다. 그러므로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자는 연인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랑의 구조 속에서 우리는 상대방의 실제 경험을 오해하거나 과대해석하도록 프로그래밍된다.
이러한 상상적 허구와 과대해석은 따뜻하면서도 위험하다. 또한 사랑에서 중요한 것은 함께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함께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랑은 비개연적인 상황을 초래한다. 즉 열정으로서의 사랑이 사회 안에서 제도화되기 위해서는 무수한 전제조건이 필요하며, 이러한 토대에 입각하여 결혼하고 가족을 갖는다는 것은 개인적인 위험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위험까지도 수반하는 것이다.
사실 사랑이라는 비개연적인 제도가 엄청난 개연성을 지니며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매우 기이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랑은 위험에 처하기 쉽고 고장나기 쉬운 사회 체계이기 때문이다. 사랑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터무니없는 기대를 하게 되고, 사랑을 모든 것과 관련하여 ‘우선 순위’에 놓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사회는 이러한 과도한 긴장감의 일상화를 견디지 못한다. 그저 그러한 과도성을 사랑이라는 보이지 않는 사적 영역 안으로 이동시킬 뿐이다.67)
흔히 열정적인 사랑은 ‘비개연적인 행운의 사건’이나 ‘위험한 운명’처럼 그려진다.68)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 우리는 사랑이라는 매체에 대한 상징적 과장을 매일 경험한다. 흔히 사람들은 사랑해서 결혼을 하거나, 사랑을 해야만 결혼을 하거나, 사랑을 하니 결혼을 해야만 한다. 섹스에 대해서도 동일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물론 수많은 소설이나 영화는 사랑하지 않는데도 결혼을 하거나, 사랑하는데도 결혼을 하지 못하는 상황을 그려보여 준다. 역시 섹스에 대해서도 동일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어찌 됐든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 사랑을 해야만 하는 사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비정상으로 분류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이 글에서 나는 사랑, 섹스, 결혼이라는 이 굳건한 근대적 삼위일체의 구조가 지닌 역사적 우연성을 보여주고자 했다. 사랑은 두 사람이 같은 경험을 하거나 같은 생각을 갖거나 같은 세계를 경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비개연적 가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전혀 모르던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 서로의 호감에 의해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며 가족을 구성한다. 둘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둘의 하나를 주장한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증거는 오로지 섹슈얼리티라는 물질적 메커니즘뿐이다. 오로지 섹슈얼리티가 지니는 내밀성과 비밀성의 체계를 이용하면서 사랑은 문화적 이데올로기라는 자신의 혐의를 은폐한다.
사실 우리는 사회적 책임의 많은 부분이 사랑이라는 사적 관계 속으로 무한 이동하는 세계를 살고 있다. 우리가 지닌 사랑의 신화는, 혹은 사랑이라는 ‘문화적 명령’은 우연성과 변덕스러운 감정과 짧은 섹스라는 허약한 기반 위에 지나치게 많은 무거운 것을 올려두고 있다. 그래서 사랑은 지극히 위험한 사회적 구성물이다.
이러한 사랑으로 인해, 혹은 사랑의 결핍으로 인해 우리는 위험한 죽음의 공간에 당도하게 된다. 이와는 다른 맥락에서 종교는 모든 것,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비개연성을 주장한다. 종교 안에서의 섹슈얼리티는 그러므로 근대적 섹슈얼리티와는 상반되는 지점에서 구성된다. 그러나 종교적이든 근대적이든 사랑과 섹슈얼리티는 그 과도함으로 인해서 죽음의 공간에 근접해 있다. 이 글의 핵심 개념들은 대략 이렇게 구조화될 수 있다.
66) Ibid. pp. 50-56.
67) Ibid. pp. 58-63.
68) Ibid. p. 65.
_이창익
한림대학교 생사학연구단 HK연구교수. 주요 논문으로 〈종교와 미디어 테크놀로지: 마음의 물질적 조건에 관한 시론〉(2011), 〈신 관념의 인지적 구조: 마음 읽기의 한계선〉(2012), 〈종교 사용 설명서: 종교 교육에 대한 시론적 접근〉(2012) 등이 있고, 저서로는 《조선시대 달력의 변천과 세시의례》(201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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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중세 기독교의 수도자들이 섹슈얼리티의 제거를 위해 얼마나 악전고투했는지를 묘사하면서 시작된다. 중세 기독교에서 성적 쾌락은 구원을 방해하는 신의 저주로 인식되었을 뿐만 아니라, 생식을 위한 성교의 처치 곤란한 부산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종교와 섹슈얼리티의 극단적인 분리를 통해서 역으로 수도자들은 섹슈얼리티에 대한 극단적인 감수성을 보유할 수 있었다. 섹슈얼리티가 배제된 극단적인 종교성은 결국 섹슈얼리티의 성화를 통한 저항적 종교성을 낳을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이 글은 생식없는 섹스의 가능성을 추구한 역사적인 종교 현상들을 살펴봄으로써, 생식과 섹스의 극
단적인 분리가 어떠한 논리적 확장에 이르게 되는지를 추적한다. 죽음 이후에 부활한 자의 몸에 대한 신학적 성찰은 낙원에서의 섹슈얼리티라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죽음 이후의 섹슈얼리티의 문제이기도 하며, 죽음의 상상력이 섹슈얼리티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어서 이 글은 섹스와 생식의 분리가 일상화된 근대적인 상황을 어떻개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근대의 인공적인 섹슈얼리티는 성적 쾌락을 배제하는 ‘생식을 위한 섹스’가 아니라, 역으로 성적 쾌락만을 위한 ‘생식이 배제된 섹스’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러한 근대적인 인공적 섹슈얼리티는 종교적 섹슈얼리티와는 다른 궤도에서 섹슈얼리티를 이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사랑, 섹슈얼리티, 결혼의 폐쇄적인 연결 고리 속에서 짜여진 근대적인 사랑의 공식을 분석하고, 이러한 사랑의 구조가 어떤 함의를 지니는지를 추적한다. 이제 사랑의 구조 밖으로 튕겨나간 사랑과 결혼과 섹슈얼리티는 제각각 극단적인 방향성을 지향하면서 스스로 소멸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근대적인 섹슈얼리티가 낙원의 섹슈얼리티와 얼마나 비슷한지,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Lee, Chang Yick
Hallym University
투 고 일: 2013. 01. 02
심 사 일: 2013. 02. 05
게재결정일: 2013. 02. 14
종교문화비평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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