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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취미생활과 문화현상
安 大 會*
*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1. 머리말
2. 취미의 개념과 그에 대한 태도
3. 소비문화의 발전과 취미생활
4. 취미 향유의 실상
5. 수석 취미의 대두와 향유
6. 맺음말
1. 머리말
조선 후기의 문화는 그 이전 시대와 비교하여 훨씬 다양해지고 개성적으로 변모하였다. 그 문화현상은 상층 지식인의 지적 활동에 다양한 자취를 남겨서 문학작품을 비롯하여 예술과 문서 속에 구체적 양상이 기록되었다. 다양한 시각에서 조명한다면 그 시대의 문화현상의 입체적인 모습이 더 잘 이해될 수 있다.그것이 조선 후기 사람의 취미생활에 초점을 맞추어 그 시대의 문화현상을 이해하려는 이 논문의 집필 동기이다.
조선 후기 일상과 문화에서 취미는 당시부터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18세기 중 후반 중상층 사람의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士小節』에서 이덕무는 “산수와 花鳥, 서화와 각종 완상품 따위는 그 고아한 취향이 주색잡기나 재물욕심보다 낫다. 그러나 그것에 도취되어 정신을 잃고 본업을 망치며, 심지어는 남의 물건을 빼앗거나 남에게 빼앗기는 지경에 이른다면 그 해악은 주색잡기나 재물 욕심보다 더 크다.”1) 라고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산수는 산수를 여행하는 취미를, 花鳥는 꽃을 가꾸고 새를 키우는 취미를 가리킨다. 그 취미를 포함하여 서화를 수집 감상하고, 나아가 갖가지 기호품을 소유·감상하는 취미의 추구가 일으키는 해악을 이덕무는 경고하고 있다. 아무리 고상한 취미라도 도에 넘치게 도취할 우려가 있고, 그 결과 본업을 방해할 위험성이 도사리며, 따라서 좋지 못한 취미보다 더 나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이유를 댔다.
이덕무가 말한 주색잡기나 재물욕심은 악취미에 속하고, 산수와 화조 따위는 고상한 취미에 속한다. 그 시대에는 우려를 자아낼 만큼 다양한 취미에 도취된 풍조가 폭넓게 확산되었고, 이덕무는 그 풍조에 휩쓸리지 말 것을 경고한다. 그의 경고를 과도한 노파심으로 돌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취미생활은 도시공간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취미는 특정한 개인의 취미생활 차원에 머물지 않고 그 시대의 문화적 개성을 보여주는 시대적 트렌드로 자리매김할 수준에 이르렀다.
각종 취미가 집단적 유행과 소비행태에 따라 부침을 겪으면서 문학과 회화를 비롯한 문화의 여러 갈래에 반영되었다. 문화현상에 내재하는 취미의 문제를 분석하는 동기가 여기에 있다.
1) 李德懋, 『靑莊館全書』권28, 『士小節』 ‘士典2’(문집총간 257집)
“山水花鳥書畫器玩, 其雅致優於酒色財利. 然及其惑溺而喪志敗業, 甚至攘奪人物, 又爲人所攘奪, 其害反大於酒色財利.”
2. 취미의 개념과 그에 대한 태도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취미(趣味)는 (1)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과 (2) 아름다운 대상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힘, 그리고 (3) 감흥을 느끼어 마음이 당기는 멋이란 세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일반적으로 취미는 노동이나 직업 이외의 영역에서 개인이 즐기거나 재충전할 수 있는 오락, 여기의 의미로 쓰인다. 축구나 등산 같은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실천에서부터 음악 감상이나 다도와 같은 정신적 층위까지 포함하며, 소비활동과 생산 활동을 넘나드는 등 취미와 조합해서 지시할 수 있는 인간의 정서적 상태나 활동은 무한대로 확장될 수 있다.2)
취미란 말은 과거의 언어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으나 현대의 의미는 서양어의 번역이다. 다시 말해, 한자어이지만 실은 심미적 개념의 취미[taste]와 개인의 기호에 따른 오락 취미[hobby]의 서구적 의미가 중첩되어 사용되고 있다. 중국 근대의 사상가인 梁啓超도 taste의 번역어로서 취미를 미학적 개념으로 사용하며 그의 미학에서 중요하게 취급하였다. 일본은 메이지 시대 말엽에 서구적 취미 개념이 빈번하게 사용되어 도시 시민계급의 소비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고, 그것이 식민지 조선에도 파급되어 새로운 시대적 가치로 자리매김되었다. 대중 문화의 성장과 함께 즉흥적이고 감각적인 오락성이 대중의 일상과 취미문화를 장악해갔고, 근대적 취미를 향유하는 문화주체가 형성되었으며,3) 다양한 역사적 변화를 거쳐 현재의 취미문화로 자리를 잡아갔다.
근현대에 형성된 취미의 개념에서 알 수 있듯이 취미는 서구적 개념으로 사용함으로써 그 직전의 조선시대와 분명한 단절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명확하게 단절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개념부터 살펴본다면, 조선시대에 ‘취미’란 말은 적어도 한문을 이해하는 집단에서는 아주 흔하게 사용된 개념으로서 앞에서 제시한 세 가지 의미를 거의 모두 포함하고 있다. 사용되는 빈도를 정확하게 통계잡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볼 때 (1)의 빈도가 가장 낮았고, 다음으로 (2)의 빈도가 높으며, (3)이 가장 폭넓게 사용되었다.
세가지 의미가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은 채 고상하고도 우아한 취미와 취향, 嗜好를 포괄하는 의미로 쓰였다.4)
근대 이전 사회에서 널리 쓰인 취미도 대체로는 현재와 비슷한 함의를 공유한다.
2) 문경연, 2011 「식민지 근대와 ‘취미’ 개념의 형성」 『개념과 소통』 제7호, 35~36면.
3) 문경연, 앞의 논문, 35~71면.
4) 鄭曄, 『守夢集』권3, 「菖蒲說」(문집총간 66집)
“古之人有愛竹者, 有愛菊者, 有愛蓮者, 或趣味之有所同耶? 抑亦物各有所遇者耶?” ; 蔡濟恭, 『樊巖集』권18(문집총간 235집) 「曾在明德山也, 貞敬權夫人, 爲製鶴氅衣, 以佐水石趣味, 蓋知我有考槃永矢之意也.」.
근대 이후에 서양의 취미활동과 개념, 대상이 동아시아에 전파되어 이전에 비해 새로운 함의와 내용이 첨가된 것처럼, 조선 후기에는 그 이전과 차별화되는 취미 활동과 개념, 대상이 등장한다. 전통사회에서 취미는 聲色臭味와 琴棋書畵라는 말로 표현하는 상식적인 범주에 한정된 측면이 있다. 이는 각기 향락적 취미와 고급스런 취미로 나뉘어 과도하게 쏠리지만 않는다면 일상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들어서는 전통적인 취미의 향유 범주를 벗어나는 상당한 변화가 발생한다. 평범한 수준과는 차별화된 물품을 향유하면서 어디에서 만들어졌고 누가 만들었느냐를 따지면서 소비하고 간직하는 소비행태와 감상태도가 확산된다.
문화주체들은 물건의 품질과 개성, 기호만 만족시키면 지갑을 열어 큰돈을 내놓는 자세가 준비되었다. 다시 말해, 물건의 효용가치만을 따지지 않고 예술성과 기호성에 큰 가치를 부여하는 태도가 등장하였다.
그 행태에 대해 柳本學은 “무릇 즐기고 좋아하며 입고 쓰는 물건으로서 특정한 산지에서 나오고 특정 기능인이 제작하여 품질이 특이하고 모양이 좋다면, 세상 사람들은 반드시 가진 힘을 다해 얻고 깊이 숨겨두어 보관하려 한다. 그에 열중하여 그치지 않는다.”5)라고 보고한 바 있다. 소비의 패턴과 대상이 변화하면서 취미를 보는 시각 자체가 크게 변화했다. 감각적이고 오락적인 쾌락의 향유를 긍정하는 시각이 취미를 보는 관점에 영향을 미쳤다.
전통적으로 특정한 사물에 대한 탐닉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즐거움의 향유는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좋지 못한 쾌락으로 규정하였다. 쾌락의 향유는 점잖은 사람이 피해야 할 유혹으로 간주되었다. 外物을 즐기다가 소중한 자기의 본심을 잃어버린다는 玩物喪志란 말이 그 관점을 대변한다. 완물상지란 말에서 物은 인간에게 쾌감을 느끼게 하는 사물과 행위를 가리킨다. 유학에서는 마음이 쾌락을 느끼는 어떠한 것도 탐닉에 빠질 위험성을 지니고, 탐닉은 한 개인에게는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고 방기하여 정신적 공황상태를 불러일으키며, 그것이 확대되면 그가 속한 사회와 국가를 혼란으로 몰아갈 폐단을 야기한다고 경고해왔다.
조선 중기의 栗谷 李珥는 곳곳에서 사대부의 道에 기준을 둔 생활의 지침을 설정하였는데 자연스럽게 취미를 비롯한 다양한 욕망을 절제하고 제한할 것을 요구하였다. 예컨대, “학문하는 자는 한결같이 도를 추구하여 외물에 굴복당해서는 안 된다. 올바르지 못한 외물은 일체 마음에 머물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6)라고 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物에 대한 사랑은 道의 추구를 방해하는 장애물이다. 자연스럽게 작은 물건에 기호를 갖는 것조차 경계의 눈초리로 보았다. 외물에 굴복당하여 취미를 즐겨서는 안 된다는 사고는 성리학자들 사이에서는 더욱 강화되어 쾌감을 느끼게 하는 어떤 취미활동도 금기시하는 금욕적인 태도로 고착되었다.
도를 제외한 외물은 모두 그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서화를 수집하고 감상하는 전통적이고 고상한 취미조차도 탐닉에 빠질까 우려하여 蘇軾은 사물에 마음을 잠깐 붙이는 寓物은 일정하게 허용해도 사물에 마음을 오래 머물게하는 留物은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7)
그림이나 글씨와 같은 고급스런 문화적 산물에 애정을 표명하는 것조차도 경계의 시선으로 대하였으므로 다른 사물에 대한 경계심은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인간의 도덕적 완성과 균형 잡힌 삶을 유지하는 목표를 위해서는 즐거움의 과도한 추구는 좋지 못한 방해물이었다. 그 대상이 아름답고 우아하여 실제로 인간의 심성을 해치지 않는다 해도 그랬다. 그런 사유가 힘을 얻은 시대에는 취미를 마음 놓고 즐기는 것도, 취미를 긍정하는 생각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도 망설여졌다.
5) 柳本學, 『問庵文藁』乾, 「贈邊哨官琦序」(개인소장 사본) “凡玩好服用之物地産與人製之者, 苟品異而樣好, 則世人必費力以求之, 深藏而護之, 矻矻然不已.”
6) 李珥, 『栗谷全書』 권27, 「擊蒙要訣」 ‘持身章’(문집총간 45집) “爲學者一味向道, 不可爲外物所勝. 外物之不正者, 當一切不留於心.”
7) 蘇軾, 『經進東坡文集事略』권53, 「王君寶繪堂記」(中華書局, 856면) “君子可以寓意於物, 而不可以留意於物. 寓意於物, 雖微物足以爲樂, 雖尤物不足以爲病. 留意於物, 雖微物足以爲病, 雖尤物不足以爲樂.”
조선 후기에도 그런 관점은 크게 영향을 미쳤다. 미적으로도 아름답고 심성의 훈육에도 도움이 될 화훼를 감상하면서도 지나치게 탐닉할까봐 스스로를 경계하며 그 대상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쓴 18세기의 성리학자 鳳巖 蔡之洪의 경우가 그렇다. 그는 꽃을 감상하면서 “감히 아름다움을 즐기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화훼초목에 깊이 젖어 들어갈까봐” 조바심을 내는 심경을 폭로한다.8)
건전하지 않다고 간주되는 매혹적인 사물과는 거리가 먼 화훼를 감상하면서 스스로를 통제한다. 물건에서 즐거움을 취하고, 취미를 통해 심리적 만족을 얻는 평범한 인간의 욕구가 이데올로기와 종교적 신념에 의해 완고하게 제한을 당했다.
따라서 그같은 근엄한 신념의 소유자에게서 취미의 향유를 긍정하는 시선이 나오기는 어렵다. 그 신념은 채지홍의 乖僻한 性癖이 아니라 성리학자에게 공유된 상식적 태도였다. 비슷한 시대의 尹行儼 역시 「癖說」에서 사람마다 모두 좋아하는 고질적인 취미를 갖고 있어 詩酒癖, 禽獸癖, 玩好癖 따위를 꼽을 수 있는데 모두 건강한 의지를 잃게 만들어 몸을 해친다고 경계하고 있다.9) 이이, 채지홍과 같은 취지다. 그밖의 많은 언급을 통해서 취미를 억압하는 관점이 여전히 세력을 잃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조선 후기 들어 그같은 완고한 의식의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고아한 예술과 사물을 점잖고 부드럽게 즐기는 상식적 취미활동의 범주를 넘어서 다양한 취미대상을 설정하여 탐닉하는 마니아들의 수가 늘어나고, 그 활동을 긍정하는 시각이 공개적으로 표명된다. 적극적으로 취미 활동의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낸 새로운 문화주체들이 형성되어 개성적인 취미행위를 癖(고질병), 狂(미치광이), 懶(게으름), 痴(바보), 傲(오만함)와 같은 개념으로 즐겨 설명하고 있다.10)
이 개념은 좋아하는 취미대상을 즐기는데 망설임이 없이 과감하고, 넋을 놓고 탐닉하는 행위를 설명한다. 취미를 적당히 즐기는 한계를 넘어 열정적으로 즐기는 태도이다. 이렇게 열정적 취미활동을 행하고, 서슴없이 표현하는 새로운 문화주체들은 금욕적인 절제의 태도를 견지하는 사대부들과는 세상과 인생을 보는 자세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사대부의 본업을 벗어나 취미활동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기는커녕 오히려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취미활동이 사대부의 본업을 방해한다고 보지 않고 오히려 취미를 즐기는 자세가 없으면 본업도 제대로 잘 할 수 없다고 본다.
朴齊家는 화훼만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화가에게 “사람이 癖이 없으면 그 사람은 버림받은 자이다. 癖이란 글자는 질병과 치우침으로 구성되어 편벽된 병을 앓는다는 의미가 된다. 벽이 편벽된 병을 의미하지만 고독하게 새로운 것을 개척하고, 전문적 기예를 익히는 자는 오직 벽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하다.”11)라고 추켜세웠다. 洪顯周는 粧潢 전문가인 方孝良에게 “벽이란 것은 병이다. 어떤 사물이든지 좋아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인데 좋아하는 정도가 심해지면 즐긴다고 한다. 어떤 사물이든지 즐기는 사람이 있게 마련인데 즐기는 정도가 심해지면 벽이라고 한다.”12)라고 하여 벽의 소유자를 옹호한다. 화가와 장황가에게 취미는 곧 직업 자체다.
이들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자는 취미를 가진 자가 아니라 취미가 없는 자다. 이이, 채지홍, 윤행엄과는 반대로 벽이 없는 자를 버림받은 인간이라고까지 몰아세운다. 관점의 역전이 일어난다. 박제가나 홍현주와 비슷한 주장을 내세우는 문사들이 17세기 후반 이후 매우 많아지는데 그 현상을 통해서 과거의 문화 주체가 보여준 태도나 의식으로부터 확실하게 변화한 시대 풍조를 확인할 수 있다.13)
이제는 유학의 학습이나 관직의 복무, 가업의 유지와 같은 지식인의 본업 외에 자기만의 취미활동에 깊이 몰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거꾸로 생기가 없는 밥 보따리와 때 주머니로 비판받고, 천하를 망치는 인간, 버림받은 사람으로 매도당하기도 하였다. 취미의 향유는 그만의 독특한 빛깔을 드러냄으로써 속물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시켜주는 가치있는 인생활동으로 탈바꿈하였다.
快와 樂의 감정에 충실할 수 있는 의식의 변화가 지식인들 사이에 형성되었다. 삶에 쾌감을 가져온다면 조금 지나치게 즐긴다 해도 그 취미의 향유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시대가 된 것이다. 취미활동의 의의를 부정하고 경계하는 태도를 지닌 사대부가 여전히 다수를 점하기는 했으나 그들은 새로운 문화적 트렌드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취미를 바라보는 시선에 긍정과 부정이 교차하고 갈등하면서 취미의 대상은 확대되고 적극적으로 취미활동을 하는 사람은 늘어갔다. 그리고 취미가 다양한 문화와 결합되면서 문학을 비롯한 각종 예술에 반영되었다.
8) 안대회, 2001 「한국 蟲魚草木花卉詩의 전개와 특징」 『한국문학연구』 제2호, 147~173면.
9) 尹行儼, 『守默堂遺稿』 하, 「癖說」(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사본) “人之生也, 各稟所賦, 其性也萬不同也. 而亦各有癖好焉. 有詩酒癖焉, 有禽獸癖焉, 有玩好癖焉. 癖固不一, 而其爲喪志 害己則同也, 皆可戒者.”
10) 안대회, 2005 「18세기와 21세기를 읽는 키워드 마니아」 『디지털과 실학의 만남』, 신규장각, 70~106면.
11) 朴齊家, 「百花譜序」(안대회 옮김, 2000 『궁핍한 날의 벗』, 태학사, 35면 참조) “人無癖焉, 棄人也已. 夫癖之爲字, 從疾從癖, 病之偏也. 雖然具獨往之神, 習專門之藝者, 往往惟癖者能之.”
12) 洪顯周,『海居溲勃』, 「癖說贈方幼能」(규장각소장 사본. 안대회 역, 『부족해도 넉넉하다』, 김영사)
“癖者, 病也. 凡物有好之者, 好之甚則曰樂, 有樂之者, 樂之甚則曰癖.”
13) 癖에 관한 이러한 달라진 의식은 앞에 인용한 안대회의 논문과 『벽광나치오』(휴머니스트, 2011), 정민의 「18·19세기 조선 지식인의 ‘벽’과 ‘치’ 추구 경향」(『18세기 연구』 제5․6호, 2001)에서 주목하여 설명하였다.
3. 소비문화의 발전과 취미생활
앞 장에서 살펴본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 후기에 취미의 대상이 다양해지고 취미를 즐기는 인구가 확대된 현상은 취미활동을 가로막는 의식의 제약에서 탈피한 변화가 촉진하였다. 취미는 상식적이고 흔해빠진 물건과 활동을 식상해하며 평범한 것들과 차별화된 새롭고 배타적인 물건과 활동을 향유하는 행위이다.
취미를 즐기는 문화주체는 범인들의 싸구려 감각과는 차별화된 취미의 대상을 향유하여 쾌감을 느낌으로써 거기에 시간과 금전을 투여한 것에 대해 정신적 보상을 받고자 한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앞선 위치에 있는 이들의 취미는 점차 그들을 모방하는 집단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밟는다. 그렇다고 취미의 대상이 신상품이나 새로운 문화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낡은 물건이나 행위도 취미의 대상으로 얼마든지 새롭게 부각되며 유행을 만들어낸다.
취미활동을 가로막는 뿌리 깊은 제약으로부터 탈피할 수 있는 동력은 경제의 발전, 정치와 사회의 안정화였다. 그것은 취미활동을 자극하는 적극적인 소비를 유도하고, 새롭고 고급스런 상품의 생산과 유통을 촉진시켰다. 임란과 호란 이후 국제정세의 안정이 19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고, 그에 수반하여 경제는 전반적으로 안정적 성장을 누렸다. 경제력의 집중으로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는 활력이 넘치는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을 거듭하였다.
특히, 서울은 성리학적 지배이념 중심의 왕도 문화가 경제적 이해관계를 중시하는 상업 도시 문화로 바뀌었다.14) 청나라 일본과의 국제무역도 활성화되었고, 전국적으로 場市가 발달하여 유통에서도 상당한 발달이 진행되었다.15) 나라간 지역간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진 현상은 새로운 물품을 시장에 내놓음으로써 경제력을 지닌 인구의 소비욕구를 창출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전국적인 유명세를 탄 각 지역 명품들의 목록이 존재하였고,16) 외국의 명품들이 서울 시장에서 활발하게 유통되었다.
14) 고동환, 2007 『조선시대 서울 도시사』, 태학사, 212~213면.
15) 이헌창, 2012(제5판) 『한국경제통사』, 해남, 212~221면.
16) 그 목록은 이익 『星湖僿說』권8의 「生財」와 서유구 『林園經濟志』의 「倪圭志」, 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의 「八路利病辨證說」 등에서 상세하게 거론하고 있다.
구체적인 현황은 외국으로부터 수입되는 물건이 새로운 취미를 발굴해내는 현상에서 잘 알 수 있다. 예컨대, 조선 후기에 새로 등장한 감각의 취향 가운데 담배와 차를 대표적인 것으로 꼽을 수 있는데 모두 외국으로부터 수입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된 물품이다.
담배는 굳이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이 광해군 연간에 일본으로부터 수입되어 수십 년 사이에 전국적으로 남녀노소와 지위를 불문하고 유행하여 필수품이 되었다. 특별한 사람의 취향을 자극하는 산물에서 출발하여 전국민이 일용하는 물품으로 변하였다. 차는 중국으로부터 수입되어 고상한 취미를 즐기는 일부 경화세족의 고급 음료 문화로 받아들여졌다. 조선 후기에 차를 마시는 것은 매우 고급스런 취향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는 극히 일부에게만 제한된 취향 또는 취미로서 넓게 확산되지 못한 채 구한말까지 이어졌다. 그 정황을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조선 사람들은 차를 그다지 마시지 않아서 나라 안에 본래 차 종자가 있는데도 아는 자가 드물다. 근년 50~60년 이래로 고관과 귀족들 사이에 차를 즐기는 이들이 있어 매년 많은 수레를 끌고 (연경에서) 사서 소나 말이 땀이 날 정도로 싣고 왔다. 그러나 진짜는 거의 드물다.
종가시나무 상수리나무 박달나무 주엽나무의 잎이 많이 섞여서 오래 마시면 몸을 차게 하여 설사를 하게 한다. … 만약 심고 가꾸고 말리고 가공하는 기술이 있으면 우리나라에 고유한 진짜 차를 버리고 다른 나라의 값비싼
가짜 차를 구매하지 않아도 되리라.17)"
17) 徐有榘,『林園經濟志』, 「晩學志」 권5, ‘雜植’(만학지2, 소와당, 227면) [按說].
“東人不甚啜茶, 國中自有茶種而知者亦鮮. 近者五六十年來, 縉紳貴遊往往有嗜之者, 每歲薆輈之購來者, 動輒汗牛馬. 然眞者絶罕, 多雜以櫧櫟檀皂之葉, 久服之, 令人冷利.
… 苟其蒔藝焙造之有術, 庶不至捨吾邦固有之眞茶, 而購他域價翔之僞茶也.”
18세기에 차라는 기호식품이 상층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여 소비되는 현상과 과정을 냉정하게 서술하고 있다. 차 마시기가 대중의 음료 취미로 정착하지 못하고 사찰과 일부 지방, 귀족들 일부의 기호로 명맥을 유지하는 실상을 보여준다. 구한말 외국인의 조선기행문에서도 일본 중국에서는 차를 일상으로 마시는 반면 조선은 전혀 마시지 않는다고 의아해 하고 있다.18)
차를 마시는 취미는 중국 취향에 경사된 상층 귀족 일부에 의해 외국 무역이나 사찰 중심의 자생차 향유로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차는 이국적 취향과 국제 무역에 의해 촉진된 취미로 간주할 수 있다.
차 마시기의 취미가 전개된 과정은 다른 많은 취미에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이렇게 새로운 취미는 큰 시장이 있고 세련된 문화 활동이 집중된 상업 도시 서울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외국에서 수입된 최신의 정보와 물품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여건이 놓여 있다. 국왕 정조가 외국으로부터 수입된 문화와 물산의 폐단을 지적한 다음 글은 그 점에서 음미할 필요가 있다.
"唐學은 세 가지가 있다. 明淸의 小品異書를 많이 수장한 자가 있고, 오로지 서양의 曆數之學을 숭상하는 자가 있고, 燕京 시장에서 수입된 衣飾器皿을 즐겨 사용하는 자가 있다. 그 폐단은 똑같다.19)"
19) 正祖,『弘齋全書』권177, 日得錄17(문집총간 267집)
“唐學有三種. 有多蓄明淸間小品異書者, 有專尙西洋曆數之學者, 有衣飾器皿之喜用燕市之物者. 其弊則一也.”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문학저술과 천문학이 식자의 의식을 사로잡고, 신상품 명품의 의복과 장식품, 그릇 물품이 부유층의 취향을 사로잡는 현실이 확산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청나라 문물과 물산의 수입이 사치풍조를 조장하는 차원을 넘어 의식과 취향을 장악하는 현상은 하나의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파악하고 깊이 우려하고 있다.
국왕의 우려는 현상을 오도하거나 허황한 것이 아니다. 18세기 서울의 중인인 金世禧(1744~1791)는 종로 저잣거리에서 중국과 일본에서 수입된 고급스런 물건이 팔리는 현상을 증언하고 있다.20) 그 물건은 조선의 산물과 비교하여 기술도 장식도 우수하고, 값도 비싸다. 그 물건은 단순하고 흔해빠진 소비품이 아니라 도회지 부유층의 문화적 욕구를 만족시키고 취미 생활을 뒷받침하는 소비재다. 서민층의 평범하고 낡은 취향을 무시하고 세련되고 화려한 취향으로 자신들을 차별화하는 도구들이다.
18) 버튼 홀스(이진석 옮김), 2012 『1901년 서울을 걷다』, 푸른길, 162~165면.
20) 金世禧,『寬我堂遺稿』, 「鐘街記」(규장각 소장 사본. 이종묵, 2010 『글로 세상을 호령하다』, 김영사, 52~55면 재인용) “街上之貨品, 有數焉, 中州之貨, 皆稱爲唐, 而唐之貨精而緻, 淡而華, 雅而無脆, 巧而有制, 故貴之爲上, 而倭貨之精細妙麗次之, 國之貨, 率多麤劣, 終未臻精, 且或倣唐而不眞, 故品居下焉.”
수입된 물건들은 취미활동과 어떻게 관련될까? 앞서 살펴본 차나 향도 그렇고, 집안을 장식하는 가구를 비롯하여 문화생활과 밀접한 각종 문방구, 그리고 골동서화가 포함된다. 그 고급스런 물품은 고상한 취미활동의 주요한 대상이다.
실제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를 보면, 중국에서 수입된 갖가지 물품 가운데 세련되고 고급스런 소비품 종류가 일일이 언급할 수준을 넘어설 만큼 많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수입된 각종 문화 상품까지 포함되어 있다. 문방도구는 너무 많아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風磬과 같은 물건은 일본에서 제작한 오색 유리로 만든 것을 추천한다.21) 서재를 장식하는 가구 가운데 비스듬히 기대어 책을 볼수 있는 欹案과 文具匣 역시 일본제를 추천하고 있다.22)
일상생활에서 누리는 취미를 다룬 항목 가운데 여행문화를 다룬 『怡雲志』의 「名勝遊衍」에서는 등산할 때 사용하면 좋은 도구를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당시에 조선과 중국, 일본에서 사용하던 지팡이를 비롯하여 수레와 남여, 등산화, 약상자, 또 시를 짓고 술과 차를 마시기 위한 도구, 찬합이 눈길을 끈다.
饌盒은 중국제와 일본제를 추천하되 특히 황금빛으로 옻칠한 일본제를 추천하고 있다.23) 여행을 취미로써 향
유하는 부유층들이 사용함직한 고급스럽고 참신한 물건들이다.
21) 徐有榘,『林園經濟志』5책, 「怡雲志」 권2(보경문화사 영인본, 1983, 276면) “倭造五色玻璃者佳”. 이 기사는 서유구 자신의 저술『金華耕讀記』에서 인용한 것으로 이 아래 인용처는 모두 똑같다.
22) 徐有榘, 위의 책 권4, 「文房雅製下」(335면) “倭造臥看書床, 無他異. 但就四足書床, 令後兩足高, 使前足三二寸, 而床板倚在器上, 俾便倚几看書. 髹漆鈿螺, 光潔可愛.” ;
같은 곳. “倭文匣, 墨鐵粧飾者佳, 可作書室之用.”
23) 徐有榘, 위의 책, 권1(251면) “倭造三撞四撞髹漆金畵者佳.”
국내외의 고급물품은 소비에 눈뜬 도회지 부유층을 평범하고 흔해빠진 물건이나 사용하고, 저급하고 저속한 생활이나 하는 평범한 사람과는 차별화시켰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아무나 향유할 수 없는 특별한 물품과 취미를 즐김으로써 그들의 문화적 허영심을 채웠다.
절약과 절제가 미덕인 조선 사회에서 그같은 경향의 대두는 새로운 문화적 트렌드라고 할 수 있다. 그 취향을 값비싼 물건 자체가 흡인하기도 했지만, 그 바탕에는 소비에 대한 문화주체의 우호적인 태도가 깔려있다. 그리고 소비에 대한 전향적 태도는 조선 후기에 널리 읽힌 소품문과 깊이 관련된다.
소품문은 새로운 취미의 공급처 역할을 한 중국 강남 지역의 부유층이 문화의 소비를 바탕으로 전개한 취미의 모델을 조선에 전파하였다. 대표적인 저작이 高濂의 『遵生八箋』과 文震亨의 『長物志』, 屠隆의 『考槃餘事』가 있다. 이밖에도 『鶴林玉露』, 『林下盟』, 『小窓淸記』 등의 저작이 조선 후기에 널리 읽히며 고급 소비 생활의 시스템을 소개하였다. 이들 저작은 晩明 시대 강남 지역 부유층의 소비 성향과 취미 생활의 도구를 갖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준생팔전』은 道家의 섭생을 목표로 한 저작으로 여덟 가지 주제로 서술되고 있으나 실제 내용은 도가적 삶을 넘어 사치스러운 생활이 묘사되어 있다.
「起居安樂箋」은 주거공간과 실내 인테리어, 유람을, 「飮饌服食箋」은 차를 비롯한 다양한 음식, 「燕閑淸賞箋」은 서화골동, 금기서화를 비롯하여 화훼 재배 등과 같은 다양한 취미 생활을 묘사하고 있다.
『장물지』는 주거공간, 화훼, 수석, 새와 물고기, 서화, 인테리어, 의상과 탈 것, 향과 차를 다루고, 『고반여사』는 서화, 문장도구, 악기, 향과 차, 분재, 정자, 의상 등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24) 여기에는 현대 사회에서도 취미의 대상으로 즐기는 고급 취미가 풍부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렇게 長物과 고급 소비품들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문화의 소비물이고, 그 물품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가치를 부여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글의 문체는 小品文에 흐르는 경향성을 보인다. 앞에서 정조가 우려한 ‘明淸의 小品異書’가 바로 이러한 유의 서적이다. 그 서적에서 추구하는 내용이 바로 고급스런 취미와 그에 필요한 물품의 향유다. 그 서적은 ‘燕京 시장에서 수입된 衣飾器皿’을 열성적으로 구매하여 천박한 취향과는 차원이 다른 취미를 즐겨도 좋다고 말하고 있다. 정조가 唐學의 세부로 열거한 세 항목은 실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취미생활과 관련한 晩明의 많은 저작은 새로운 소비사회와 소비층의 출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 실제 내용은 小品家의 미의식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소품가의 미의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인 袁宏道가 “내뱉는 말이 무미건조하고 면상이 가증스런 세상 사람은 모두가 癖이 없는 사람들이다. 만약 진정으로 벽을 가지고 있다면, 그 속에 푹 빠져 즐기느라 운명과 생사도 모조리 좋아하는 것에 맡길 터이므로, 수전노나 관리노릇에 관심이 미칠 겨를이 있을까 보냐?”25)라고 말한 것도 취미 생활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관점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사대부가 가장 앞세워야 할 정치권력의 행사도 뒤로 미루고 자신이 좋아하는 쾌락의 삶, 취미를 즐기는 생활을 앞세운다. 그가 말하는 쾌락은 성적인 것을 말하기보다는 여행과 화훼 감상, 음주의 멋 따위를 추구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여행체험을 문학적으로 묘사한 수많은 遊記를 지었다.
또 그가 지은 꽃꽂이에 관한 저작 『甁史』나 음주의 멋을 다양한 시각으로 묘사한 『觴政』이 바로 그의 취미생활과 미의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이들은 작은 주제로 취미생활의 대상이 되는 사물과 행위를 묘사하는 소품문이다.
소품문은 정치와 교육, 도덕과 같은 거대담론에만 매몰되지 말고 멋스런 취미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유혹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차원에서 소품문은 취미생활을 광고하는 문체다.
조선 후기에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긴 인물들을 살펴보면 이상에서 언급한 특징을 고루 갖고 있다. 그 가운데 李麟祥, 南公轍, 兪晩柱, 洪敬謨, 張混, 申緯의 생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몇 가지 사례를 들면, 이인상은 검, 골동, 자명종, 벼루와 거문고, 인장을 비롯한 기물에 붙인 器物銘이 60여 편에 이르는데 그의 서화골동 취미를 명료하게 보여준다.26)
남공철 역시 정조 순조 연간 京華世族의 고동서화 취미 향유 양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古董閣이나 書畵閣, 焚香館과 같은 고상한 취미를 연상시키는 저택에서 향을 사르고 거문고와 바둑판을 곁에 두며, 정원을 경영하고 화초나 수목을 가꾸며, 벗들과의 아취가 있는 모임에서 稗官異書와 고금의 經史를 담론하며 지내는 생활은 古董書畵 취미를 주축으로 세련된 고급문화를 소비하는 전형적 사례다.27)
24) 曹淑娟, 1988 『晩明性靈小品硏究』, 文津出版社 ; 毛文芳, 2000 『晩明閒賞美學硏究』, 學生書局 ; Craig Clunas, 2004 Superfluous Things: Material Culture and Social Status in Early Modern China, University of Hawai’i Press.
25) 심경호 외 역, 2005 『역주 원중랑집』, 소명출판, 5권 400면.
26) 김수진, 2012『능호관 이인상 문학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42~154면.
27) 안순태, 2011 『南公轍 散文 硏究』,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 74~91면.
유만주 역시 品格을 지키며 고상한 취미를 즐기는 생활을 추구하였는데 그 한면을 다음의 글이 보여준다.
"구부러진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있는 것, 반듯한 평상에서 잠을 자는 것, 담황색 발을 쳐서 밖에서 들어오는 먼지를 차단하는 것, 푸른 휘장을 쳐서 창문을 아늑하게 만드는 것, 예스런 솥에 향을 사르는 것, 유리 등잔에 촛불을 켜 어둠을 몰아내는 것, 비단 병풍으로 벽을 가리는 것, 수놓은 주머니에 약을 넣어두는 것, 시간을 알리는 종으로 때를 아는 것, 호숫가의 바위에서 시원한 바람을 쏘이는 것, 화분의 꽃에서 이치를 찾는 것, 書畵를 품평하는 것. 이것이 호수와 산에 사는 열두 가지 필요한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의 안목으로 이러한 것을 보기 때문에 왁자하게 사치스럽다고 여기거나 심하게는 사악한 짓이라고 배척한다. 그러나 옛날의 이름있는 선비나 고아한 분들이 이러한 일로써 성령을 도야한 사람이 많았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다. 결코 오늘날 사람들처럼 시끄럽게 배척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28)"
유만주가 제시한 열두 가지 물건과 행위는 저속하지 않게 세련된 문화감각을 지키며 여유롭게 사는데 필요하다. 그 시대 일반적 조선 사람의 생활과는 차별화된 특별한 취미와 취향을 담고 있다. 당시 조선 사람의 안목으로 보면 사치스럽고 사악한 짓이라고 말할 만큼 특별하다. 그래도 유만주는 그런 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29)29
이들보다 한두 세대 뒤의 신위는 취미활동을 더 적극적으로 즐기는 생활을 보여준다. 그는 생활 자체가 고상한 취향으로 점철되었고, 그의 작품은 그 취향을 담아내는 도구라고 할 만큼 취미생활을 소재로 썼다. 자신의 집인 碧蘆舫의 건물, 정원, 서재, 정원 안의 화훼와 서재 안의 여러 기물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가꾸고 보관하였다. 차를 음미하고 골동품을 감상하는 것이 생활의 중심을 차지하였다.30)
신위의 삶은 여유로운 상층 문사의 멋스런 취미를 향유하는 생활의 전형이었다. 신위와 같은 생활은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여유있는 계층으로 넓게 확산되어 사대부는 물론 여항의 중인이나 평민에게까지 확산되었다. 사대부인 洪敬謨가 『四宜堂志』와 『牛耳洞志』, 『耳溪巖棲志』를 저술하고,31) 張混이 「平生志」를 통해32) 주거를 중심으로 영위한 취미생활을 묘사한 것도 중요한 사례로 거론할 수 있다.
28) 兪晩柱, 『欽英』제3권(서울대 규장각 영인본), 169면.
29) 안대회, 2009 「通園 兪晩柱의 造景美學」 『한국전통조경학회지』27, 48~56면 ; 2006 「兪晩柱 淸言小品 硏究」 『한문학연구』20, 1~30면.
30) 이현일, 2010 「19세기 漢詩의 小品趣 : 申緯의 경우를 중심으로」 『한국한시연구』 18권,323~368면.
31) 이종묵, 2011 「홍경모 집안의 우이동 별서」 『관암 홍경모와 19세기 학술사』, 103~161면 ; 2009 『사의당지』, 휴머니스트.
32) 안대회, 2008 『고전산문산책』, 휴머니스트, 535~548면.
4. 취미 향유의 실상
1) 고아한 취미로서 문방도구와 서화골동
조선 후기의 지적인 부유층에 가장 친숙한 취미활동은 문방도구와 서화골동품을 즐기는 것이었다. 그들이 인생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방식에는 雅/俗과 趣/沒趣味를 따져 선택하는 일정한 기준이 있다. 어떤 취미 대상을 선택하든 雅와 趣의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심미적 판단이 개입된다. 취미의 판단에서 구별이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문화적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취미에는 대체로 예술적인 요소가 결합되었다. 문방도구와 고동서화의 수집과 감상은 그같은 취향을 만족시켜 주었다.
예술의 여러 분야 가운데 서화를 감상하고 수집하는 것이 조금 더 보편화되었다. 음악을 감상하고 창작하는 취미는 서화보다는 덜 일반화되었으나 이학규가 “음악에 손방인 사람조차도 생황과 양금을 다 소장하고 있다.”33)고 밝힌 것처럼 악기를 다루고 소유하는 문화가 지적인 부유층에는 형성되었다.
서유구가 『遊藝志』권6 「房中樂譜」에서 거문고악보와 唐琴樂譜 외에 양금악보와 생황악보를 기록해놓은 이유도 부유층에 보급된 음악 취미와 관련된다.
문방도구를 가려서 쓰는 고급스러운 취미는 지적인 사대부에게는 오랜 관례다. 문방도구의 사치는 사대부들에게 아주 다양하게 나타나고, 그같은 태도를 보여주는 글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런 태도의 대표적인 사례를 兪晩柱에게서 엿볼 수 있다.
"저택에 사치를 부리면 귀신이 엿보고, 먹고 마시는 데 사치를 부리면 신체에 해를 끼치며, 그릇이나 의복에 사치를 부리면 고아한 품위를 망가뜨린다.
오로지 문방도구에 사치를 부리는 것만은 호사를 부리면 부릴수록 고아하다. 귀신도 너그러이 눈감아 줄 일이요 신체도 편안하고 깨끗하다.34)"
34) 兪晩柱,『흠영』, 1780년 6월 15일 기사
“棟宇之奢, 鬼瞰之也; 食醼之奢, 身之賊也; 器服之奢, 雅遠之品折也. 獨文房之奢, 奢而愈雅, 鬼所寬恕, 身以寧淸.”
사치와 취미의 대상으로 열거한 것 가운데 유만주는 문방도구를 사치스런 일반적인 물건과 차별화하여 차원이 다른 고상한 것으로 격상시키고 있다. 문방도구에서 명품의 소비를 긍정하는 논리인데 이렇게 당당하게 주장한 것을 보면, 현실에서는 그에 대한 호사취미가 훨씬 더 폭넓게 적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방도구의 호사취미가 범위는 넓어도 탐닉의 정도에서는 서화취미를 넘어서기 어렵다. 서화 취미는 다른 취미와는 차원이 다른 고급스럽고 아취가 있는 것으로 인정을 받았다.
서화에 몰입하여 고급스런 취미를 지녔다고 자부하는 예들은 매우 많다. 李長載는 서화 취미를 다른 취미와 상대화하여 비교함으로써 우위라고 주장한다.
"癖은 병이다. 사람에게는 구슬과 비단에 병이 있기도 하고, 음악과 여색에 병이있기도 하고, 개나 말에 병이 있기도 하다. 구슬과 비단에 병이 있으면 그 증상은 탐욕이요, 음악과 여색에 병이 있으면 그 증상은 음란함이요, 개나 말에 병이 있으면 그 증상은 사치다.
나의 경우는 서화에 병이 있는데 저 서화는 고아한 일이다. 사람에게 서화의 병이 있더라도 고아한 일이기에 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 때문에 나는 서화에 병이 있어도 그칠 줄을 모른다.35)"
35) 李長載, 『나석관고』, 「書畵序」(『韓山世稿』 34권, 필자 소장)
“癖者, 病也. 人有癖於玉帛焉, 癖於聲色焉, 癖於狗馬焉. 癖於玉帛, 則其病也貪, 癖於聲色, 則其病也淫, 癖於狗馬, 則其病也侈.
余則癖於書畵. 夫書畵雅事也. 人雖有書畵癖, 以其雅事故, 去病則遠矣. 是以余有書畵癖, 而亦不自止.”
차원이 다른 취미라고 서화를 옹호하고 있다. 蘇軾은 서화에 몰입하는 것을 留物이라 하여 비판했으나 취미에 빠진 조선 후기 사대부들은 그런 비판과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다른 취미는 뭐라도 단점이 있으나 서화취미는 ‘고아하기에’ 단점이 없다는 근거로 자신이 즐기는 서화 취미에 의의를 부여하였다.
서화 취미가 지닌 남다른 지위를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있는데 당시 사대부들의 기호를 본다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당시 사대부들이 서화와 골동품을 감상하고 수집한 구체적인 사례는 너무 많아 일일이 예로 들기 힘들다. 17세기 이래 수많은 수집가와 감상가들이 등장하였다.36)
화가들조차 스스로 고동서화의 수집 감상가이면서 회화에 그 취미를 반영하였다. 김홍도의 『布衣風流圖』와 『士人肖像』, 沈師正의 『船遊圖』가 그같은 취향을 잘 반영한 작품이다.37) 이들 그림은 당시 부유층이 즐기는 취향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36) 구체적인 내용은 황정연, 2007 『朝鮮時代 書畵收藏 硏究』,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논문,235~384면 참조.
37) 장진성, 2008 「朝鮮後期古董書畵收集熱の性格 : 金弘道の『布衣風流圖』と『士人肖像』に對する檢討」『美術硏究』394호, 496~530면 ; 2009 「조선 후기 미술과『林園經濟志』 : 조선 후기 古董書畵 수집 및 감상 현상과 관련하여」 『진단학보』108호, 107~130면.
<그림 1>. 김홍도, 『布衣風流圖』. 개인소장.
<그림 2> 김홍도, 『士人肖像』.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그림 3> 심사정,『船遊圖』 개인 소장.
『포의풍류도』에 등장하는 각종 물건은 당시 문인의 기호품으로 물건 하나하나가 그 시대 취향과 관련이 있다. 특히, 당비파와 생황은 당시에 새롭게 주목받은 악기로 그것을 연주하고 있는 것 자체가 새로운 취미생활의 단면을 보여준다.
『사인초상』의 집기와 가구, 『선유도』의 선유 자체와 배에 실은 물품도 마찬가지로 당시 상류층 문인의 기호와 관계가 있다. 뱃놀이를 하며 굳이 괴석과 화분을 실은 것은 이 시대에 독특한 취미의 대표적인 소재이기 때문이다.
문인들이 쓴 시와 산문에도 그 취향이 흔하게 나타난다. 신위를 사례의 하나로 들면, 그의 서재는 다양한 서화골동과 문방도구, 분재 등 취미생활의 전형적 대상으로 꾸며져 있다. 그는 30종의 서재 집기를 시로 읊어 「齋中詠物三十首」를 지었는데38) 대다수가 조선과 중국, 일본의 오래되고 희귀한 물건들이다.
조선 골동품으로는 百濟 때의 瓦硯과 고려 때의 祕色 청자 술잔, 고려 때의 검은 흙으로 만든 들병, 鵲川石硯이 있고, 중국 고대의 청동기와 자기, 玉器를 비롯한 각종 골동품과 문방구, 일본의 倭剔紅創金山水杯, 赤間關硯이 들어 있다.
그 목록에 백제와 고려의 골동품이 당당히 올라 있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동서화의 감상이 그 동안의 관례에서 벗어나 새로운 단계로 진화하여 고려청자와 같은 새로운 품목에 관심이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현상은 유본학과 신위, 김정희를 비롯한 인물에서 크게 촉발되어 이후 조면호, 이유원 등에게 확인되고 있다. 신위는 고려청자 술잔을 얻고서 친구인 成海應에게 사연과 미학을 논한 글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그 글이 바로 「安文成瓷尊記」인데 이는 安珦의 고택에서 출토된 것이었다.39)
유본학도 「紫霞學士所藏高麗秘色瓷壺銘」과 「高麗古銅爐歌爲徐攸好作」을 지어 출토된 고려시대 골동품을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고려청자가 예술품으로 본격적인 감상의 대상이 된 것은 바로 이 시기 취미활동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취미 대상의 저변이 확대되면서 품목이 다변화하는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38) 申緯,『警修堂全藁』7책, <碧蘆坊藁三> ‘齋中詠物三十首’.
39) 안대회, 2010 「명품․신상에 미친 소시민들 : 서화골동 애호가들」 『조선을 사로잡은 꾼들』, 한겨레신문사, 251~263면.
<그림 4> 김홍도, 『풍속도병』. 프랑스 파리 기메 미술관 소장.
2) 쾌감을 돋우는 다양한 취미활동
사대부들 사이에서 서화골동의 감상과 수집이란 오래고도 전통적이며 고급스런 취미가 대접을 받았으나 쾌감을 주는 취미가 새롭게 개발되고 향유되었다.
악취미라고 할 수는 없으나 좋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 기생을 탐하고, 특별한 미식을 즐기는 행위나 투전과 골패와 같은 노름, 갖가지 공연의 감상, 바둑이나 장기와 같은 점잖은 유희의 취미까지 다변화되었다.
취미활동의 하나로 다양한 놀이문화가 연령과 신분, 성별과 계층에 따라 번성한 현상도 주목할 만한데 그 가운데에는 취미를 넘어 자칫 도박으로까지 빠질 위험성이 있는 놀이도 있었다. 그러나 고상한 취미활동으로 향유되는 詩牌놀이나 從政圖놀이를 응용하여 만든 觴詠圖 또는 八仙臥遊圖가 개발되어 조선 팔도의 승경지를 앉아서 탐방하는 놀이로 즐겼다.40)
요즘 아이들이 즐기는 블루마블 게임과도 비슷한 상영도 놀이는 색다른 쾌감을 주는 취미의 대상이 지속적으로 개발되는 하나의 증거다.
위 <그림 4>는 18세기의 도시공간에서 향유되는 고상한 취미활동의 내용을 잘 보여준다. 형형색색의 국화분재를 비롯한 각종 꽃을 키우는 화훼취미, 애완용 비둘기를 키우는 취미, 괴석을 화분에 담아 배치하는 壽石癖, 탁자 위 거문고에서 보이는 음악 취미,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은 어떤 놀이에 몰두하고 있다. 다른 취미의 산물을 배경으로 놀이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림은 당시 여유로운 계층이 취미를 통해 인생의 쾌락을 향유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화가의 시선은 뚜렷하게 취미활동을 포착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에는 산문작품이나 시를 통해 각종 취미의 향유가 묘사되고 추천되었다. 그리고 취미에 대한 기호가 상식적인 수준을 넘으면 중독으로 간주되어 癖의 소유자, 痴의 수준으로 치부되었다. 예컨대, 음식의 호사취미도 대단히 성행하여 화분 형상으로 폐물음식을 만들고 동자 형상으로 떡을 만드는 기교와 사치를 부려 食妖로 비판당하고,41) 소풍에 가져가는 찬합과 점심에 먹는 도시락에 엄청난 비용을 치루는 사치스런 식탁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42)
두 가지 사례는 미식가의 음식취미를 거론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된 사회적 풍토를 보여준다. 權常愼은 과일을 특별히 즐겨 당대에 과일 애호가로 널리 알려졌는데, 그의 친구인 沈魯崇은 특별히 감을 좋아하여 권상신보다 월등하다면서 경쟁하듯이 柿痴임을 자부하기도 하였다.43)
40) 이종묵, 2010 「조선 후기 놀이문화와 한시사의 한 국면」『조선 후기 문학의 성격』(성호경 편),173~208면.
41) 유만주, 앞의 책, 1784년 10월 16일 기사 “近有婚讌之饌送之壻家者, 盤上止一花盆, 而百花齊開, 衆菓交實, 色色形形, 窮眞極巧, 皆是餠餌之屬, 啖而味旨者也. 是制蓋昉於逆賊洪國榮在宿衛所時, 獻媚者所爲云. (…) 制餠餌以童子形, 而色其佩飾, 以雜讌食中, 自首而啖之, 以爲奇異. 其始爲此者, 殆甚於作俑人之相食, 不祥莫大. 並與花盆而俱可謂食妖也, 宜亟斷棄之, 不復形諸目也.”
42) 沈魯崇,『孝田散稿』 34책, 「自著實記」(연세대 도서관 소장 사본) “習俗侈汰, 飮食有甚. 讌集遊覽, 濟勝供具, 且無論, 公會傳餐, 朝晝饋食, 一器量費百餘錢, 爲五六器, 綺食瓊盤, 照耀耳目. 儓隸飫之, 寒凍暑敗, 靡費無論, 精力可惜. 競爲務勝, 耻不相下, 民窮財竭, 此其本也.”
43) 沈魯崇, 위의 책 33책 “嗜啗果品, 如病之偏. 童時, 啗未熟果子幾數升, 旣熟倍之. 夏月苽屬, 亦食兼數人. 棗·栗·梨·柿, 最其尤者, 柿有甚焉. 五十歲以後, 尙一食六七十顆, 人謂之柿癡. 權絅好常愼以果癖聞, 嘗相對較說而笑之.”
조선 후기에 개인적 취향을 넘어 널리 공유된 취미활동으로 새롭게 부각된 것을 몇 가지 살펴본다. 그럼으로써 그 시대 사람들이 쾌감을 느낀 취미가 무엇이었는지 알아본다.
먼저 살펴볼 것은 화훼수목의 재배와 동식물 사육이다. 이는 낡은 취미 활동의 하나로 볼 수 있으나 이 시기에 문화적 현상으로 부각되었다. 다시 말해, 그 취미활동과 소비가 적극적인 문화적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 그 같은 의미의 부여는 그림으로 그려지고 시문으로 묘사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문화적 가치가 있는 고급취미로 등장하였다.
먼저 애완용 동물과 새의 사육을 들 수 있다. 취미로 비둘기를 키우는 현상이 18세기에 크게 유행하였다.44)
柳得恭은 비둘기 종류와 사육을 다룬 단행본 鵓鴿經을 지었는데 관상용 비둘기 23종이 상세히 소개되고 있다. 비둘기를 취미로 기르는 유행은 당시에 매우 성행하여 유득공 본인도 직접 길렀다. 비둘기 사육현상을 상세히 기록한 이규경은 “이는 泠齋(柳得恭)가 젊은 시절 서울의 비둘기 기르는 집에서 숭상하던 현상이다. 내가 어릴 때 閭巷의 풍속을 직접 본 적이 있는데 지금은 전혀 볼 수 없으니 이상하다.”45) 라고하여 한 때의 유행이었음을 지적하였다.
시문에서도 애완용 비둘기를 다루어 이덕무의 『耳目口心書』에는 비둘기를 취미로 기르던 어떤 아이의 사연을 흥미롭게 기록하였다.46) 18세기 후반에 尹愭는 당시 서울 부귀가의 유행 네 가지를 거론하였는데 첫째가 매화분재이고, 둘째가 翠屛, 세 번째가 비둘기 사육, 네 번째가 거창한 장서였다.
그가 언급한 유행은 대체로 취미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고 당시 실상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윤기는 사람들이 비둘기를 키우는 시렁을 화려하게 만들어 “좁쌀을 쏟아 비둘기를 키워서 완상하고 즐기는(竭粟養鳩供翫娛.)”47) 현상을 비판하였다. 부귀한 집의 취미 생활로 비둘기 사육이 유행한 현상을 정확하게 꼬집고 있다.
이밖에도 애완용 동물의 사육취미로 연못과 어항에 금붕어를 키우는 것이 널리 퍼졌다. 이규경은 “근년에 燕京으로부터 수입된 金魚와 花魚가 있는데 귀족 집에서 많이들 기르고 있다. 씨를 퍼트리고 싶어하는 자가 연못에 넣어 두었는데 장마를 거치면서 물이 넘쳐 서울 청계천에 흘러들어가서 그 물고기를 잡은 자가 있다고 한다.”48)라고 보고하기도 하였다. 완상용으로 금붕어를 키우는 취미가 서울 상류층에서 유행했음을 입증하는 서술이다. 이는『임원경제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인 실상의 하나를 제시하면, 값비싼 금붕어를 어항에 넣어 완상하는 사치도 부렸다. 이학규는 금붕어를 키우는 취미가 유행하는 현상에 주목하여 “너무도 어여뻐라 오색 빛깔 금붕어는 / 천정의 물속에서 헤엄을 치네(政憐魚五色, 游泳水天萍.)”라는 시를 짓고, 그 주에서 “북경에서 수입한 오색 빛깔 붕어를 유리 어항에 기른다. 한 마리에 10냥씩 주고 사온 것이다. 간혹 유리로 소란반자[天花板]를 대신하여 그 속에서 물고기를 길러서 치켜 올려 보기에 편하게 하였다.”49)라고 묘사하였다. 금붕어 가격이 그렇게나 비싸고, 기술적으로 그렇게 공교로운 방법을 발휘하여 금붕어를 완상용으로 길렀다는 것이 놀랍다.
44) 정민, 2003 「18세기 지식인의 玩物 취미와 지적 경향」 『고전문학연구』23집, 327~354면.
45) 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 「鵓鴿辨證說」(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 “此泠齋少時京都養鴿家所尙然也. 余之髫齡時閭巷俗尙, 亦及見之. 今則絶無聞焉, 可異.”
46) 李德懋, 『靑莊館全書』권50, 「耳目口心書」3(문집총간 258집) “愛所不當愛, 而不得其正者, 是係騃也. 余外廊所寓一少年, 性癖愛馴鴿. 造次言談無非鴿也, 殆不知衣服飮食之切己. 有犬囓其一鴿, 少年逐奪之, 拊而流淚甚悲, 仍剝毛, 炙而啖之, 猶惻愴. 然味甚旨也. 此仁歟慾歟. 騃而已矣.”
47) 尹愭, 『無名子集』 4, 「詠富貴家四物」(문집총간 256집) “雕欄高架爛靑朱, 竭粟養鳩供翫娛. 聲局性淫何所取, 不如仁理在雞雛. 右鳩架.”
48) 李圭景, 앞의 책, 「金魚花魚辨證說」 “近世有金魚·花魚自燕來者, 貴家多養之. 有欲其孶長, 納于池中, 經霖潰溢, 入于京都開川, 有或捉漁者云.”
49) 李學逵,『洛下生集』18책, 「觚不觚詩集」 ‘感事三十四章’(문집총간 290집) “玻瓈盆, 養五色鯽魚自燕市, 一頭費千許錢. 或以玻瓈代天花板, 養魚其中, 以便仰觀.”
다음으로 화훼를 가꾸고 감상하는 취미를 살펴보면, 이는 오래 전부터 사대부들 사이에서 널리 향유된 것으로서 조선 후기 들어서 더욱 성행하였다. 원예에 관한 관심이 늘어 화훼업이 성장하고 기술도 발전하였다.
柳璞과 같은 전문 원예업자도 출현하고, 국화품종 개량의 전문가 김 노인도 등장한다. 19세기에 서울 삼청동에는 花儈 金敬習과 花家 金應錫이 있어 화훼를 직업으로 하였다.50)
매화를 즐기는 전통적인 취미는 식을 줄 모르고 활발해져 李麟祥과 吳瓚 등이 겨울밤에 얼음덩이를 잘라내어 그 속에 촛불을 두고 매화를 감상하는 氷燈照賓宴이나 그림자를 이용하여 국화를 감상하는 菊影法과 같이 다양한 감상법까지 등장하였다.51)
화단에서 꽃을 키우지 않고 화분에서 재배하여 감상하고 꽃병에 꽂아놓고 완상하는 盆景法과 甁花法이 널리 활용했다. 이는 조선 후기에 화훼 감상이 단순한 취미를 넘어 문화적 트렌드로 확립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세상에 매화 보는 풍속이 형성되어 / 열 집에 아홉 집이 매화 키우네. / 아! 그들의 매화 감상법은 / 가지도 아니고 등걸도 아니라. / 화분에 꽂아 위치 좋은 곳에 두고 / 마음을 온통 꽃에만 기울이네.”52)라고 묘사한 작품을 통해 한 측면을 엿볼 수 있다.
화훼 취미가 확산되어 중국으로부터 능소화와 영산홍, 종려나무 등 새 품종을 들여와 재배하기도 했는데53) 그중 水仙花는 18세기 말엽부터 수입되어 사대부들 사이에 큰 인기를 얻으며 일약 참신하고도 희귀한 완상용 화훼로 등장하였다.
그리하여 19세기 시문에 수선화를 묘사한 작품이 많이 보인다. 수선화 감상은 청나라로부터 수입된 취향으로 과거에는 없었다가 새롭게 유행한 것이며, 제주도에서 자생하는 수선화를 발견하면서부터 서울에 대거 유행하게 되었다.54)
50) 정민, 2005 「18, 19세기 문인지식층의 원예취미」 『한국한문학연구』 제35집, 한국한문학회 ;
정민, 2003 「花庵九曲의 작가 柳璞(1730-1787)과 花庵隨錄」 『한국시가연구』 14집, 101~133면 ;
안대회, 2011(개정판) 「번잡한 세상을 등진 채 ‘꽃나라’를 세운 은사 : 원예가 유박」 『벽광나치오』, 휴머니스트, 333~367면 ; 김용태, 2008 『19세기 조선 한시사의 탐색』, 돌베개, 139면.
51) 신익철, 2008 「茶山과 다산학단의 菊影詩 창작과 그 의미 : 원굉도 문학의 수용 양상과 관련하여」 『한국실학연구』 제16호, 129~159면 ;
2002 「梅社 동인의 매화시 창작과 비평 : 18세기 한시 비평의 일단」 『한국문학연구』 제3호, 35~65면 ;
2004 「18세기 매화시의 세 가지 양상」 『한국시가연구』15집, 97~126면. 정은주, 2012 「이학규의 화훼 취미와 菊影詩 창작」『인문과학』49권, 185~204면.
52) 趙冕縞,『玉垂集』 권23, 「戒梅俚語」(문집총간 127권) “世成看梅俗, 十家九梅家. 繄其取看法, 不枝而不楂. 盆供盛位置, 湊情專在花.”
53) 李裕元, 『林下筆記』 28권, 「燕京奇花」․「南中棕櫚」(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영인본, 1961, 711면).
54) 李圭景, 앞의 책, 「水仙花辨證說」 “水仙之名於東, 以予所見, 自數十年始, 而不如近日之盛, 古則無聞焉. 我東非本無也, 生於耽羅, 而人未知爲何物也. 近者自燕購來, 仍爲俗尙, 以其俗尙, 故入耽羅者, 始知水仙, 而將種渡海, 遍于京師.”
5. 수석 취미의 대두와 향유
취미의 향유는 각 시대의 유행과 소비행태, 개인의 취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취향은 하나로 고착되지 않고 문화적으로 형성된다. 조선 후기의 취미생활에서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주택의 내부나 주변에 연못을 조성하는 것을 특별히 애호하여 물고기를 키우거나 연꽃을 심어 감상하고, 생울타리인 翠屛을 조경의 하나로 설치하는 유행을 실례로 들 수 있다. 李肇源의 「養魚歌」와 李奎象의 「曲池歌」는 모두 연못을 만들어 물고기를 키우는 멋을 묘사하였고, 앞서 언급한 尹愭의 시는 서울의 부귀가에서 유행하는 翠屛 조성 현상을 다루고 있다.
이들은 모두 조선 후기에 새롭게 등장하여 시대적 분위기를 상징하는 유행의 하나로 부각되었다. 그처럼 과거에는 특별하게 주목받지 않았고, 현상은 나타났으나 사람들의 관심에서 일정하게 비켜나 있던 것들이 특별히 부각되어 유행하는 것이 적지 않다. 조선 후기에 특별하게 부각된 취미로 壽石의 수집과 감상이 있다.
怪石 또는 壽石, 水石은 정원에 배치하는 조경요소의 하나로서, 실내에 놓아두는 장식물의 하나로서 그 역사가 오래다. 조선 전기에도 문사들의 시문에 괴석이 종종 등장한다. 姜希顔의 양화소록에도 괴석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돌에 대한 애호가 다른 어떤 취미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유행을 이룬 시기는 18세기 이후다. 지식인의 미의식에 돌의 미학이 깊이 각인된 현상이 사회 전반에 나타난다. 정원의 조경요소로서 怪石이 중요하게 취급되었고, 그 현상을 반영하여 주택과 사대부의 연회를 그린 회화에서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요소로
그려지고 있는데 이는 괴석 취미의 유행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중국의 경우에도 오래전부터 괴석을 정원석으로 사용하였으나 사대부가 그 미학을 본격적으로 다루어 유행을 선도한 것은 白居易의 「太湖石記」 이후다.
조선 후기에 사대부의 아취가 있는 취미로서 새로 부각된 돌에 대한 사랑, 다시 말해 石癖은 앞서 언급한 다양한 취미와 함께 광범위하게 퍼졌다. 석벽으로 명성을 얻은 인물이 상당히 많다.
박지원의 친구인 李羲天(1738~1771)은 돌 일만 개를 수집하여 진열하고 萬石樓란 누정을 서울에 지어 살면서 돌에 대한 취미를 즐겼다.55) 그는 호도 石樓라고 지었다. 睦萬中은 「磊磊亭記」란 글에서 과거를 포기하고 충청도 광천의 오서산 자락에 磊磊亭을 짓고서 많은 수석을 수집하여 꾸미고 살아가는 李汝中이란 선비의 취미를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56) 정자 이름인 磊磊는 수많은 돌무더기를 표현한다.
55) 李羲天, 『石樓遺稿』坤, 「萬石樓上樑文」(규장각 소장 사본) “架上藏書百籤, 早占淸趣; 樓中有石萬數, 肇錫嘉名. … 盖緣好奇而愛山, 遂自成癖於嗜石.”
56) 李用休도 李汝中에게 같은 제목의 기문(『탄만集』, 「磊磊亭記」, 문집총간 223집)을 지어 세상과 절연한 채 고고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돌의 품성에 빗대었다. “山骨曰石, 某同譜者, 有文采細潤如繪畫, 爲婦孺餙者; 有姿狀恠類獸鬼, 供豪貴玩者; 有受諛辭黨枯朽, 貿亂是非者. 其落落負瓌奇之質者恥之, 磈然峙於大東海山之間, 不求知於世. 而環其地, 多名勝偉觀, 不與競, 不受壓, 自爲高焉. 余友李君汝中亭於其旁, 曰相對看. 然亦不相借爲重, 惟各守其介, 而其下有水澄明, 空一切營營者.”
<炭+夂 탄. 曼+夂 만>
19세기 들어서는 수석의 채취와 수집이 사대부들 사이에 열병처럼 번졌는데 紫霞 申緯의 문사 그룹을 비롯하여 수많은 이들이 석벽을 지녔다. 黃山 金逌根은 怪石圖를 특별히 잘 그려 괴석 취미를 확산시켰다. 趙熙龍도 수석 취미가 있어 유배지 임자도에서 수석을 널리 수집하였고, 거기서 괴석 수집에 열정을 지닌 友石先生을 만나 교유하였다. 그밖에도 趙冕縞와 南秉哲 등 일일이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지식인들이 석벽을 토로하고 있다.
특히, 서화를 비롯하여 온갖 호사취미의 소유자인 조면호57)는 평소부터 石供에 癖이 있어58) 수석을 수집하여 감상한 다양한 기록을 남겨놓았다.59) 하나의 실례를 들면, 그는 1867년 새해 첫날 진열한 11종의 수석에게 세배를 올리고 각각의 돌에 시 한 수씩 지었다. 그것이 ‘禮石詩’이다. 「禮十一石」을 쓰고 난 뒤 다시 12개의 돌에 세배를 드린 「續禮石九詩」와 「追禮三石」을 지었다. 그의 행태는 취미생활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준다.
석벽은 이들에게 국한되지 않고 보편화된 취미로 확산되었다. 19세기에 문사들이 특별히 石자가 들어가는 雅號를 많이 사용한 현상은 다름 아닌 수석 취미의 반영이다. 友石, 醉石, 晩石, 石友, 石經 등등 매우 많다.
石자를 썼다고 모두 수석취미를 가졌다고 할 수는 없으나 실제로 취미와 아호가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조면호가 강서에 유배 가서 만난 朴之一은 호가 石蓮인데 일만 개의 수석을 소장한 石癖이 있는 사람이었다.60)
저명한 화가 李維新은 호가 石塘인데 돌을 사랑한 취미를 반영한 호다. 이유신이 申緯 집에 있는 괴석을 어루만지며 차마 그 곁을 떠나지 못하자 신위가 종에게 들려 보내려고 하였다. 석당은 굽신굽신 절하고 종을 물리친 채 직접 양손에 괴석을 떠받들고 의기양양하게 시장을 지나 갔다고 전한다.61)
57) 趙冕縞, 앞의 책, 「舊所藏書幅畵㡧」(208면)에는 그의 취미를 보는 관점이 서술되어 있다.
58) 조면호, 앞의 책, 「續禮石九詩」(370면) “冕素癖石供.”
59) 김용태, 앞의 책(140~142면 ; 189~193면).
60) 趙冕縞, 앞의 책, 권12, 「禮十一石」(369면) “冕謫鶴山, 鶴山朴之一, 吃士也. 有文學氣槪, 癖於石, 園庭之際, 蓄石計可萬也. 冕有「一石山房記」者也.”
61) 劉在建, 『里鄕見聞錄』8권, ‘李石塘維新’(아세아문화사 영인본, 405면) “李維新, 號石塘, 善畵, 性愛石. 紫霞申學士有怪石, 置案上, 透漏可愛. 石塘嘗於元朝拜歲來, 見石摩沙不忍別. 申公見其如此也, 使奴携去. 石塘曰: ‘審矣乎!’ 下謝僕僕, 揮使奴去, 雙手奉石, 揚揚過市途. 時石塘老白首矣. 聞諸申公, 只此可想其爲人矣.”
수석 취미가 문학에 반영되어 그와 관련한 시문이 다채롭게 등장한다. 다양한 취미를 즐기면서 취미생활을 예술창작으로 결합한 신위에게도 흔하게 보인다.
다음은 「내게는 채석 석분이 있는데 각각 다섯 개씩 국인과 동소에게 나누어주고 시를 지었다」라는 제목의 시이다.
국인이랑 동소랑은 내 좋은 벗들 菊人桐沼吾良友
石癖과 蘭盟으로 벗이 되었지. 石癖蘭盟與結隣
두 벗에게 희사하여 시에 佛事하노니 捐作兩家詩佛事
소매 안에 동해의 작은 산 넣어두게나.62) 袖中東海小嶙峋
나이가 들어 소장하고 있던 돌을 벗에게 나눠주며 지은 시다. 여기서 石癖과 蘭盟은 돌과 난초에 취미를 공유했음을 보여주는 말로 신위가 자주 썼다. 당시 문사들 사이에서 어떤 취미가 유행했는지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62) 申緯, 『警修堂全藁』27책, 「覆瓿集」11 ‘余有盆中采石, 各以五枚分贈菊人桐沼有詩.’(문집총간 291집).
수석 취미가 널리 보급되면서 수석의 의미와 그 미학을 표현한 글들도 많이 나타났다. 그 가운데 『晝永篇』의 저자 鄭東愈(1744〜1808)가 쓴 「怪石記」는 속된 취미를 좋아하는 이유와 대비하여 괴석을 사랑하는 동기를 설명하고 있는데 당시 수석을 대하는 지식인의 미학을 엿볼 수 있다.
"내가 평상시 취미 삼아 즐기는 것을 점검해보니 이상하게도 세상에서 좋아하는 것들이 많다.
먹거리 중에는 엿이나 생선과 육류를 즐기고, 육류 중에는 기름진 것만 편식한다. 의관은 반드시 유행을 따라서 입는다. 꽃은 붉고 고운 것을 좋아하고, 그림은 완상할 것을 사랑한다.
음악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나 俗樂은 종일토록 잘 듣는다.
문장은 館閣의 화려한 것을 즐겨 보고, 시는 차라리 劉禹錫과 白居易를 배울지언정 賈島나 盧仝은 좋아하지 않는다. 글씨는 筆陣圖나 草訣 따위의 서체로 마구 벽에다 쓴 뒤에 그대로 놔두고 없애지 않는다.
일상생활에서는 이렇듯이 세상에서 흔히 쓰는 물건을 거리낌없이 즐겨 쓴다.
그런데 유독 소나무는 늠름한 것을 좋아하고 구불구불한 것을 좋아한다. 바위는 괴이하게 생긴 것을 좋아하여 무릇 가파르게 깎이고 구불구불 서리며 우묵하게 입을 벌리고 영롱한 빛을 내는 것이면 하나같이 좋아한다.
어쩌다 그런 것을 만나면 어루만지며 즐겨서 자고 먹는 것도 잊을 정도다.
늠름하고 구불구불한 소나무와 가파르게 깎이고 구불구불 서리며 우묵하게 입을 벌리고 영롱한 빛을 내는 바위야말로 이른바 기이하고 특별하면서도 세속에 어울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내 성품과 취미가 우연히 이 두 가지 사물과 어우러졌을 뿐 그 나머지 몇 가지는 취미라고 말하기에 부족한 것일까?63)"
63) 鄭東愈, 『玄同室遺稿』坤, 「怪石記」(버클리 도서관 소장 사본. 이종묵, 앞의 책, 36~40면).
“余撿平居志趣所賞, 怪多俗尙.
飮食嗜飴糖魚肉, 肉又偏喜肥腴, 衣冠必從時制, 花愛紅艶,畵愛阮品.
於聲音雖不甚好, 俗樂亦終日耐聽.
文喜看館閣綺麗, 詩寧學劉白, 不喜賈島盧仝.筆有以筆陣圖草訣等體, 胡亂題壁, 且留不去,
其日用與俗周旋, 不厭類此.
獨於松愛偃蹇, 愛詰屈. 於石愛怪, 凡峭刻菌蟠嵌呀玲瓏無不愛,
或遇之撫玩, 將以忘寢食,
豈松之偃蹇詰屈. 石之峭刻菌蟠嵌呀玲瓏者, 乃非所謂奇特而且適於俗也?
抑余性癖, 偶與此二物會, 而其餘數事, 但不足以言癖耶?”
정동유는 함경도에서 산출된 괴석을 소유하여 감상하는 동기를 설명하면서 취미에 대한 생각을 펼치고 있다. 다른 취미는 세상의 일반적인 취향을 따르지만 소나무와 돌에 대해서는 남다른 그만의 취향을 간직하고 그것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소나무와 돌의 기이하고도 특별한 모양이 흔해빠진 세속적인 물건과는 다르기에 애호의 정을 갖는다고 하였다. 소나무와 돌의 속되지 않은 고고한 품격을 취미 선택의 미의식으로 드러낸다. 정동유가 펼친 생각은 당시 지식인의 시각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이밖에도 돌의 취향에는 다양한 시각이 폭넓게 존재한다. 강세황이 조선의 괴석 취미를 비판한 언급이 그 한 사례다. 그는 해주산 水泡石이 주종을 이루는 조선의 괴석에 대해 “현재 부귀한 집에서 뜰에 늘어놓은 石盆이 모두 이 수포석이다. 반드시 세 봉우리로 깎아 만드는 것이 더욱 비루하고 속되다. 무슨 사랑스러운 면이 있다고 툭하면 모아서 기이한 완상품으로 만드는가?”라고 하였다.64)
취미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수포석의 재질과 삼신산을 인공적으로 제작하는 비속한 행태를 비판한 것이다. 이처럼 취미의 발전은 깊이 있는 미학의 전개로 확산되었다.
64) 姜世晃, 『豹菴遺稿』권5, 「怪石」 “今富貴之家, 庭列石盆, 皆是物也. 必削成三峰, 尤覺鄙俗, 有何可愛, 而輒聚而奇玩耶?”
5. 맺음말
조선 후기의 다양한 문화현상은 문학을 비롯한 다양한 예술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서울의 상층 사대부들 사이에서 향유된 각종 취미는 그들이 지닌 문화적 역량의 힘을 입어 일반 사람의 그것에 비해 더 많이 뚜렷하게 노출되고 있다. 취미의 향유가 신분과 지역, 경제적 수준과 사유의 개방성에 따라서 큰 차별을 보이고 있으므로 위에서 살펴본 문화적 현상을 조선 후기의 보편적 현상이었다고 단정지을 수만은 없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취미의 향유양상이 그 시대의 주요한 문화적 트렌드로서 역동성 있게 문화적 영향력을 확대해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취미의 유행은 그 시대 사회상의 맥락 속에서 의미있는 현상으로 부각된다.
조선 후기에는 과거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다양한 취미가 향유되었다. 취미의 향유를 막는 제약이 완화되거나 취미의 향유를 새로운 문화주체가 지녀야 할 문화적 조건으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이전에 취미를 보는 관점과는 역전이 이루어 졌다. 조선 후기 사회와 문화에서 이전 사회보다 다양성과 참신성, 개성을 보이는 문화적 현상이 부각되는 배경에는 취미의 다양한 향유가 상호 작용하고 있다.
그 동안 조선후기 문화의 분석에서 마니아의 개념과 癖과 趣의 틀로 분석한 관점은 있으나 취미라는 현대적 관점으로 분석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 논문은 조선 후기 사회에서 취미의 향유를 집중적으로 분석하여 그 사회적 맥락과 문화적 반영의 현황을 살펴보았다.
분석을 통해 조선 후기 사회와 문화, 일상사에서 취미의 향유가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음을 밝혀냈다. 앞으로는 취미의 구체적 대상에 대한 더 깊이 있는 조사와 분석이 필요하다.
주제어 : 趣味, 소비문화, 壽石趣味, 書畵骨董, 花卉趣味
투고일(2012. 11. 7), 심사시작일(2012. 11. 12), 심사완료일(2012. 11. 9)
<Abstract>
This essay explores the ways that various hobbies were enjoyed during the later period of the Chosŏn Dynasty. Hobbies are not merely related to individual tastes; more importantly, they also demonstrate the contemporary cultural trends. While gaining and losing popularity under the influence of fashion and trends of consumption, various hobbies were reflected in literary works and paintings. Escaping from the ascetic culture fostered by Neo-Confucianism where the pursuit of pleasure was deemed undesirable, appreciation of diverse kinds of tasteful hobbies was regarded as cultural qualification for the literati elite. Thus, attitudes towards hobbies were drastically changed. That is, hobbies were no longer regarded as an obstacle to fulfilling the duties of members of the ruling elite; on the contrary, it was considered that their duties would not be performed successfully without refined appreciation of hobbies. Hobbies were promoted by the consumer culture of the urban wealthy class who started to spend money on high-quality items, and they were also influenced by the extravagant consumer culture of the late Ming China. The popularity of short essays contributed to spreading a positive viewpoint on consumption and hobbies. People were widely interested in traditional calligraphic works, paintings, antiques, and stationery items; in addition, they developed a new kind of hobbies, including gardening and keeping pets such as pigeons and goldfish. Especially, as seen from the popularity of collecting and appreciating unusual and beautiful rocks, quite a few hobbies gained considerable popularity in this period.
The phenomenon of enjoying various hobbies provides a valuable perspective for understanding social and cultural changes during the later period of the Chosŏ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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