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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행복론의 고도화에 따른 산상수훈(팔복)의 고찰과 적용사례

장안봉(微山) 2016. 6. 4. 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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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론의 고도화에 따른 산상수훈(팔복)의 고찰과 적용사례


김 한 경



<요약>


행복론을 논할 때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접근 할 수 있겠지만 본고에서는 세계 3대 (카알 힐티, 알랭, 버틀란트 러셀) 행복론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먼저 조명해보고 아울러 타종교(유교, 도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행복론도 살펴보고자 한다.

본고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 기독교의 행복론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의 산상수훈(팔복)을 고찰하겠다. 그 이유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행복에 대한 명쾌한 정의와 인생의 궁극적 목표인 행복한 삶을 영위함에 있어서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팔복만큼 행복에 관해서 확실한 방법을 제시한 것은 없다고 사료되기 때문이다. 본인이 대구대학교에서 ‘행복의 기술’을 강의 하면서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팔복을 적용한 사례를 중심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핵심주제어: 행복론, 세계 3대 행복론, 타문화 행복론, 산상수훈(팔복),

대구대학교 외래교수

논문접수 : 2012. 5. 15. 1차 심사 : 2012. 6. 5, 게재확정 : 2012. 6. 12



Ⅰ. 서 론


미국의 독립선언문은 3가지의 권리를 선언했다. 생명, 자유, 행복에 대한 권리가 그것이다. 인간은 물론 모든 유기체에 있어서 생명이 가장 귀중하다. 생명을 가지고 있어도 자유가 없으면 그 삶은 무의미 하며 생명과 자유가 있어도 행복이 없다면 인간 삶의 가치를 상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이란무엇인가? 행복을 정의 한다는 것은 각자의 주관적 판단에 의한 매우 어려운 문제이나 대체로 마음속에 보람과 만족, 그리고 기쁨과 즐거움과 재미를 누리는 삶의 정도로 말할 수 있다.

류보머스키(Lyubomirsky)를 비롯한 긍정 심리학자들은 행복의 결정 요인으로서 선천적 유전이 행복의 50%를 결정하고 주위 삶의 환경이 10%, 그리고 개인의 의지적 활동 노력이 40%를 결정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정신 분석의 아버지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상가들이 행복에 관해서 여러 가지로 논하기도 했다. 아리토텔레스는 행복은 “생의 의미와 목적이고, 인간 존재가 추구하는 목적의 전부이자 궁극이다”라고 했고 프로이트는 행복은 곧 ‘일하고 사랑하는 것(Arbeiten und Lieben)의 문제’라고 했다.


하여간 행복이라는 개념은 최소한 세 가지 측면, 즉 감정적인 행복(emotional happiness)평가적인 행복(judgemental happiness) 그리고 도덕적인 행복(moral happiness)을 보편적으로 말하는데 여기서는 도덕적 행복의 범주에 속하는 것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Ⅱ.세계 3대 행복론


2.1.카알 힐티(Carl Hilty)의 행복론


카알 힐티는 자기관리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철저 하였으며 그의 많은 저서 가운데 ‘행복론’이라는 책에서 “나는 이렇게 살아왔고, 이러한 신념을 경험적으로 얻게 되었다”라고 하면서“가능하면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살도록 권하고 싶다”라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카알 힐티는 행복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관념을 지녀야만 된다는 것을 명백히 했다. 즉, 하나님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이 세상을 잘 지배하고 또한 올바르게 이끌어 가고 있다는 것과 인간은 하나님을 따르도록 정해져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여서 기쁘게 따라야만 된다는 것 등이 ‘행복’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생물은 자신에게 해로운 것과 그 원인이 되는 것은 회피하고 혐오하는 반면, 자신에게 유리한 것 및 그 원인을 찾아내어 그러한 손해를 끼치게 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만족감을 느낄 수 없는 것은 마치 손해 그 자체를 기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가령 아버지라고 하더라도 그가 그 자식에게 재산이나 보물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주지 않으려고 거부할 때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남보다 못할 경우도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농부나 선원이나 상인 그리고 처자를 잃은 자가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을 늘어놓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행복과 종교가 동거하고 있다. 올바른 욕구와 올바른 혐오감을 가진 자만이 바람직한 행복과 진실한 종교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저서 행복론 중 ‘행복의조건’이라는 장에서는 겸손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기독교의 대표적 덕목 가운데 하나인 겸손을 강조하고 사람이 행복하려면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하라고 주장한다.



2.2.알랭(Alain Chartier)의 행복론


알랭의 행복론의 원제는 Propos sur le Bonheur, 즉 ‘행복에 대한 단장’으로 프랑스에서는 100여 판을 거듭하고 있는 명저 중의 명저이다. 카알 힐티와 달리 알랭의 행복론에서는 기독교적인 행복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간접적으로 기독교적인 행복을 엿볼 수 있는데 ‘행복의 미덕’이라는 장에서 행복은 마음 밭의 씨앗과 같다고 하였다.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러 가서 씨를 뿌릴새, 더러는 길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리고, 더러는 흙이 깊지 않으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덩굴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하였다”는 성경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인용하면서 행복은 마음 밭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행복의 관습은 사람의 사고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상냥함, 기쁨, 친절을 모방하는 것은 우울감은 물론 위장병에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든지 미소를 짓는 운동에는 그와 반대되는 노여움 ․ 불신 ․ 우울과 같은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장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교 생활 ․ 방문 ․ 의식 ․ 축하 등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다. 그것은 행복을 연출해보는 기회이다. 그리고 이러한 희극은 분명 우리를 비극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이것은 대단한 일이다.


기독교가 제시하는 숭고한 노동의 행복에서는 모든 사람을 기준으로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무릎을 꿇고 몸을 구부리고 다시 편한 자세로 돌아오는 동작을 하면서, 몸의 여러 기관이 편안해지고 생명의 기능이 한층 활발해지기 때문이다. 행복하려면 교만을 버리라고 하는 것은 카알 힐티의 행복론과 의미가 상통 하는 점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침묵하고, 눈을 쉬게 하고, 유순한 마음으로 행동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거친 성격이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성격이 영원히 사라지거나 완전히 바뀌는 것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러한 지겨운 생각을 어떻게 몰아내기위해 근육을 풀고 어깨를 들썩이고 가슴을 움직이고 머리를 빙빙 돌리고 손가락 관절을 꺾어 소리를 내기도 한다. 이런 몸짓이 절도와 부드러움을 부여해주고, 모든 분노라 초조함을 몰아낸다면 우울증 환자도 치유될 것이다.


그의 행복론을 주장 하면서 알랭은 자기의 사색을 체계화하여 으리으리한 사상의 궁전을 쌓아 올리는 여느 철학자와는 달리, 길가를 굴러다니는 돌덩이나 한 컵의 생수 같은 것을 소재로 산 진리를 이야기하는 거리의 철학자이다. 그가 말하는 행복이란 요컨대 고대의 그리스인들이 생각한 모럴의 극치로, 인격의 원숙한 경지에서 세속을 초탈하여 마음의 평정을 누리는 데 있었다.



2.3.버틀란트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의 행복론


버틀란트 러셀은 위대한 석학으로 행복론 역시 직접적인 기독교적 행복론을 찾아보기가 어렵지만 ‘행복한 인간’이라는 장에서 인간의 행복이란 신을 떠나서는 있을 수가 없기에 신의 계시(여기서는 기독교적 섭리)안에서 참 행복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의 행복은 분명히 일부는 신적인 환경에 달려 있고, 일부는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자기 자신에 달려 있는 이 부분의 행복 비결은 매우 간단하다. 많은 사람들은 그 가운데는 기독교적인 사상도 포함시켜야 하지만 어느 정도 다양한 종교적인 신조가 없으면 행복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불행한 자들은 슬픔의 원인은 매우 복잡하며, 많은 지적인 요소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것이 행 ․ 불행의 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을 정확히 기독교적 하나님의 섭리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불행한 자는 대체로 불행한 신조를 갖고 있을 것이며, 행복한 자는 행복한 신조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각자가 행복과 불행을 자기 신조에 돌릴 것이다. 그러나 참된 원인은 다른 데 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행복을 누리려면 물질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것은 간단하다음식, 집, 건강, 사랑, 사업의 성공, 세상 사람들의 존경 등등. 어떤 사람에게는 부성애가 필요하다. 이런 것이 없어도 행복한 자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즐기고 계획적인 노력에 의해 이를 얻을 수 있는 경우에도 여전히 불행한 인간은 심리적인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외부의 환경이 그다지 불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정열과 흥미가 내부로 향하지 않고 외부로 향하게 되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본래의 욕심을 버리고, 언제나 자기만을 위하는 생각을 억제할 수 있는 것이 교육의 목표요, 자기를 환경 세계에 적응시키고 타인을 위하는 즉 이타적인 삶을 구현 할 때 행복은 찾아온다고 본다.


인생의 다양성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을 따뜻한 옷에 감싸려고 하는 것은 주로 공포 때문이며 가시에 의해 그 옷이 찢기고 그 구멍에 찬바람이 스며든다. 따뜻한 옷에 싸여 성장한 사람은 찬바람을 맞고 성장한 사람보다 당하는 고통이 크다.


러셀의 책 여러 장에서 언급한 방법에 따라 합리적인 신념을 무의식 속에 섞어 놓고, 어느 정도 중립적인 행동 속에 자기 자신을 잊도록 하는 것이다. 자기 환경 속에는 이렇다 할 불행에 사로잡힐 까닭이 없다는 자각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공포심으로 하여 괴로움을 당하면 용기를 내는 훈련을 필요로 한다. 자고로 전쟁터에서 용감한 것은 커다란 덕으로 간주해 왔었다. 또한 청소년을 훈련시키는 목표도 주로 전쟁에 나가 두려움을 모르는 용감한 인간으로 육성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훈련을 몇 해 동안 계속하면 용감한 태도로 현실에 직면할 수 있을 것이며 넓은 세계로 해방될 것이다.


행복한 생활은 종교적인 선한 생활과 닮은 데가 많다. 전문적으로 도덕을 숭상하는 자들은 자기 부정을 중요하게 생각함으로써 잘못된 주장을 내세우게 되었다. 의식적인 자기 부정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아에 전념하도록 하고, 자기가 무엇을 희생하는지 기억하고 있다. 그리하여 때때로 직접적인 목적 달성에 실패하고 또 거의 언제나 궁극적인 목적 달성에 실패하게 된다.


그가 주장하는 생활태도와 전통적인 도덕가들이 주장하는 생활태도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예컨대 전통적인 도덕가들은 사랑은 이기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의 성공과 행복은 서로 연관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만일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에게 청혼을 할 경우에 그 여자의 행복을 절실히 바라는 동시에, 그 여자는 자기에게 희생적으로 대해 줄 것이라고 기대할 때, 그 여자가 이에 만족을 느낄 수 있을는지 의심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물론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것이 당연하지만, 결코 우리 자신의 행복과 바꾸게 되어서는 안 된다. 이처럼 사랑도 생명의 큰 물줄기와 본능적으로 깊이 결합될 경우에, 우리는 가장 큰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Ⅲ. 타 종교적 문화권의 행복론


“무엇을 위하며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삶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문화권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다. 각각의 종교적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마다 추구하는 가치나 목표가 다르기 때문이다.

서양사회와는 삶의 환경과 문화가 다른 동양사회에서도 여러 철학적 사상가들과 종교지도자에 의해 다양한 행복관이 제시되었으며 현대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기에서는 고대의 동양사회에서 태동하여 동양인의 행복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유교, 도교, 불교 그리고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행복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3.1.유교적 행복론


유교(儒敎)는 중국 춘추시대의 인물인 공자에 의해서 창시된 철학 체계이자 윤리이며 일종의 정치학이라 할 수 있다. 극심한 정치적 혼란기에 살았던 공자는 개인적 삶에 있어 사회적 관계를 중시하면서 평화롭고 안정된 사회의 구현을 지향하였다. 이를 위해서 인(仁)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으며 수신(修身) ․ 제가(齊家) ․ 치국(治國) ․ 평천하(平天下)의 실현을 목표로 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仁)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서 효제(孝悌), 즉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를 실천함으로써 함양되는 것이다. 가족구성원 간의 진정한 애정을 중시하는 이러한 가족 윤리를 출발점으로 하여, 이를 인간사회의 조화와 평화를 이루는 원리로 삼아 정치에도 확대하여 적용하였다.

공자에게 있어서 최선의 삶은 긍정적이고 조화로운 인간관계속에서 평화로운 사회가 국가를 위해 공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후에 맹자는 인의 실천을 위한 의(義)의 덕목을 내세워 인의(仁義)를 함께 중시했으며 인간의 본성은 선(善)하므로 이를 잘 발현시키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후에 유교에서는 인간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기본적 덕목인 오상(五常), 즉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이 강조되었으며 구체적인 행동적 강령으로서 삼강오륜(三綱五倫)이 제시되었다.


3.2도교(道敎)적 행복론


도교는 공자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노자(老子)에 의해서 제시된 철학체계이자 인생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가르침은 도덕경(道德經)에 전해지고 있다. 그는 세상만사의 근본원리이자 운행동력인 도(道)를 따르는 것이 최선의 삶이고 행복이라고 주장한다. ‘도’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으며 다양한 삶의 경험을 통해서 체득되는 것이지만 세상만물의 양극적 세력인 음(陰)과 양(陽)의 균형과 조화를 반영한다.

개인적 삶에 있어서는 이전투구의 세속적인 삶에서 벗어난 어떠한 일을 인위적으로 도모하기보다 자연의 도리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무위자연의 삶을 지향했다. 상선약수(上善若水), 즉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최선의 행복한 삶이라고 주장하였다.


3.3.불교(佛敎)적 행복론


불교는 인도의 북부 카필라 왕국의 고타마 싯다르타에 의해 창시된 철학체계이자 종교이다.

불교의 행복론은 팔복전(八福田)에도 나타나는데 ①길가에 샘 파는 일 ②물가에 다리 놓는 일 ③험한 길을 닦는 일 ④부모에게 효도 하는 일 ⑤삼보(三寶)를 공경하는 일 ⑥병인(病人)을 구완하는 일 ⑦가난한 사람에게 밥 주는 일 ⑧무차대회(無遮大會)를 베푸는 일을 말한다.

또 불교의 가르침은 사성제(四聖諸), 즉 고(苦), 집(集), 멸(滅), 도(道)로 집약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탐(貪) ․ 진(瞋) ․ 치(痴)라는 세 가지 집착인 삼독(三毒)에 의해서 고통을 받게 되므로 계(戒) ․ 정(靜) ․ 혜(慧), 즉 삼학(三學)의 수련을 통해 모든 집착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경지인 해탈(解脫)과 열반(涅槃)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불교의 교리에 따르면, 모든 인연은 인과업보에 따르는 것이므로 원하는 좋은 결과, 즉 선과를 얻기 위해서는 수행과 선행의 선업(先業)을 쌓아야 한다. 팔정도(八正道), 육라밀(六羅蜜), 삼학(三學), 지관쌍수(止觀雙修)와 같은 수행을 통해서 삶의 실상을 깨닫게 되면 어리석음과 집착에서 벗어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북방의 대승불교에서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下化衆生), 즉 위로는 깨달음을 추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의 삶을 지향함으로써 개인적 해탈을 위한 수행뿐만 아니라 사회적 헌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3.4힌두교적 행복론


힌두교는 인도에서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바라문교가 복잡한 민간신앙과 결합되면서 발전한 종교로서 그 기본적 사상은 <리그베다>, <우파니샤드> 등의 경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신성한 최고신인 브라만을 숭배하는 브라만교에 다양한 신을 모시는 민간신앙과 더불어 윤회(輪廻), 업(業), 해탈(解脫)의 철학사상이 결합되면서 힌두교는 교리와 수행법에 있어서 매우 다양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힌두교는 다양한 신에 대한 숭배와 봉헌을 중시하는 유신론적 측면을 지닐 뿐만 아니라 지혜와 자기수련을 강조하는 철학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 힌두교는 생명이 죽은 뒤에서도 세상으로 회귀한다는 윤회와 현재의 삶은 과거의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는 업의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윤회의 사슬로부터 영원히 벗어나는 해탈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 이러한 힌두교의 유신론적 측면과 철학적 측면은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 즉 브라만과 아트만이 하나라는 철학으로 통합되었다. 정신수련을 통해서 개인이 최고신과 하나임을 깨닫는 신비한 직관을 체득함으로써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입장이다. 힌두교에서는 신에 대한 헌신, 진언과 주문, 금욕과 신체수련, 선한 행위, 정신집중과 명상을 중시하는 다양한 요가 수행법이 제시되고 있으나 모두 범아일여의 체득을 통한 해탈을 지향하고 있다.


3.5 이슬람교적 행복론


이슬람교의 행복론은 오주(吾柱)로 설명 할 수가 있다. 즉 오주란 무슬림에게는 실행하여야 할 중요한 의무 다섯 가지를 행복과 결부 시켜서 설명 할 수 있다. 이것을 이슬람의 오주라 하며 이들 의무를 다함으로써 알라에게 봉사하는 일을 <이바다>라고 한다.《코란》에서는 희사와 단식을 중요한 봉사로 들고 있으나, 후세에 이르러 다음의 다섯 가지를 이르는 것이 상례로 되었다.


①증언 또는 고백: <나는 알라 이외에 신이 없음을 증언합니다. 또 나는 마호멧이 알라의 사자임을 증언합니다>하고 입으로 왼다. 신도는 어려서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증언을 행하게 되어 있다.

 ②예배: 일정한 시각에 규정된 형식에 따라 행하는 예배를 말하며, 개인적으로 수시에 행하는 기도는 <두아>라고 부른다. 예배는 하루에 다섯 번을 행한다. 일출 ․ 정오 ․ 하오 ․ 일몰 ․ 심야의 다섯 번이며 특히 금요일 정오에는 모스크에서 집단 예배를 행한다. 또한 예배를 할 때는 메카 쪽을 향하여 행한다.

③희사 또는 천과: 국가재정의 기본이 되며 비이슬람 국가에서는 선교기반이 이루어지는 데 필요 불가결한 무슬림의 의무 중의 하나이다.

④단식: 성년인 무슬림은 매년 라마단 월간 주간에 음식 ․ 흡연 ․ 향료 ․ 성교를 금하고, 과격한 말을 삼가며 가능한 한《코란》독송한다. 단 음식은 흰 실과 검은 실의 구별이 안될 만큼 어두워진 야간에는 허용된다. 라마단 월간이 끝나고 다음 새달이 하늘에 떠오르면 단식 완료의 축제가 시작되는데, 화려한 의상을 입은 군중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서로 축하하는 풍습이 있다.

⑤순례: 모든 무슬림은 매년 하즈달에 커버 신전 부근 또는 메카 북동쪽 교외에서 열리는 대제에 적어도 일생에 한 번은 참가할 의무가 있다고 한다. 능력이 없는 자는 하즈를 못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 일정하지는 않으나 현재도 매년 약 200만 명에 달하는 신도가 하즈에 참가하고 있다. 메카 다음가는 성지는 메디나에 있는 마호멧의 묘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 예루살렘의 여러 성적 등이 있으며, 또 시아파의 무슬림은 알리의 묘가 있는 나자프, 알리의 아들 후세인의 묘가 있는 카르발라, 이란 동부의 메시에드 등을 성지로 하여 순례하는 사람이 많다. 이슬람교의 행복론은 한마디로 유일신 알라신을 경배함으로서 찾는다고 할 수 있다



Ⅳ.산상수훈(팔복)의 행복론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5복은 ①수(壽) ②부귀(富貴) ③강령(康寧) ④유호덕(攸好德) ⑤고종명(考終命)을 말하기도 한다.


성경의 팔복은 세상 5복과는 거의 반대이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과 완전히 다른 관점이 오묘한 복의 비밀이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성경에는 가난하고 애통하고 핍박받는 것이 복이라고 하였다. 세상의 복은 건강한 것이 복이지만 하늘나라의 복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병든 것도 복이 될 수 있다.


몸이 건강한 것이 좋으나 건강하기 때문에 교만해지고 방탕하고 악한 마음을 갖게 된다면 차라리 병이 들어서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온유한 마음을 갖는 것 보다 못하다.


칼빈이 기독교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지만 몸은 퍽 약하였다고 한다. 몸이 약하였기 때문에 칼빈이 위대한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예수님은 팔복에서 우리를 행복으로 초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행복이다. 오직 하나님만 인간의 끝없는 행복 추구에 대한 정답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4.1.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님의 유명한 산상수훈(山上垂訓)의 팔복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고 하는데 여기서 마음이 가난하다는 의미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지 않는 자를 뜻한다. 즉, 영적 가난을 자각하게 된 자들이다. 또한 이러한 자는 자신의 칭의(稱義)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의존할 수 있는 자이며 또한 자신의 성화(聖化)를 위해 그리스도의 영광과 은혜를 의존할 수 있는 자이다. 예를 들면 눈물로써 통회하고 긍휼을 부르짖었던 세리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마태복음 18:13)


이러한 사실을 감안해 볼 때 반드시 우리는 마음이 가난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마음이 가난해 있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아모스8:11)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는 천국을 소유할 특권이 주어지는 축복이 있다.


왜냐하면 은혜의 왕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들만이 ‘가난한 자의 모임’(시편 74:19)이라 불리는 그리스도 교회의 일원이 되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과 타인들 앞에 겸손한 삶은 영위하는 자가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이 가난한 자는 자신이 피조물이며 죄인임을 인정한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죄와의 관계를 끊을 준비가 되어 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이 행복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건강해도 믿음을 잘 지킬 수 있는 사람은 건강한 것이 복이고 병이 들어야 믿음을 잘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병드는 것이 복이 될 수 있다. 육신의 몸이 항상 건강해야 복이 되는 것은 아니다.


디모데도 위병을 앓았고 바울도 육체에 가시가 있었다고 하였다. 사람의 생각에는 바울에게 그 가시가 없었더라면 하나님의 일을 더 많이 하였을 것같이 생각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그 가시가 없었다면 바울이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망하게 될 수도 있었다. 성도의 복은 육신에 표준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천국에 대하여 가난한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마음이 가난한 자 영적 문제에 대하여 가난을 느끼는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 마음이라는 것은 영혼이 마음을 통해서 역사하는 면을 말한다. 영적인 문제에 대하여 가난을 느끼는 사람은 영이 산 사람이다. 심령이 깨어 산 역사가 있어야 가난한 것을 느끼게 된다. 심령이 잠자는 상태에 있으면 가난을 느끼지 못한다.


야고보서 2 :17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 이라고 하였다. 믿음 자체가 마음을 통하여 생명력을 발휘해야 될 터인데 믿음이 죽었기 때문에 생명력이 없고 생명의 역사가 없는 것이다. 생명의 역사가 없는 자는 예수를 믿어도 죽은 믿음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리하여 기쁜 노래를 불러도 춤추지 아니하고 슬픈 소리를 해도 가슴을 치지 않는 무감각한 상태에 빠진다. 영이 깨어서 마음이 일을 하는 사람이라야 마음의 가난함을 느끼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일하는 사람은 항상 모자라게 느껴 갈급하고 있고 일하지 않는 사람은 갈급함을 느끼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마음이 깨어서 영의 역사가 있고 마음에 영적인 가난을 느끼게 되면 그 사람은 벌써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다.


마음에 가난을 느끼는 사람은 갈급하여 하나님께 부르짖기 때문에 하나님이 더 많은 것을 주신다. 많은 것을 받은 다음에는 그것을 가지고 또 영의 일을 해 나가야 한다. 영의 일을 해 나가면 또 다시 모자라게 되어 다시 더 많은 것을 하나님께 구하게 되고 하나님은 또 더 많은 것을 주신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항상 하나님 앞에 신령한 것을 구하게 되고 하나님께로부터 신령한 것을 많이 받게 된다. 마음에 가난을 느껴야 하나님께 매달릴 생각이 나고 기도할 생각이 난다.


마음에 가난을 느끼면 성경을 배울 때에도 열심히 듣게 되며 성경 말씀이 꿀 송이 보다 달고 정금보다 귀하게 여겨진다.


그러므로 그 말씀대로 살려고 힘을 쓰고 그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게 된다.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하늘나라를 많이 소유할 사람이다. 현재에도 천국을 소유하고 있으나 앞으로도 점점 더 많이 소유하게 되어 하늘나라의 보화가 아주 많아지게 된다.


우리는 먼저 자신의 가난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부유해질 수 있다.



4.2.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슬퍼하는 자가 행복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에서 떠나 세상 것으로 부하고 웃고 즐거워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 누가복음 6:25에 “화 있을 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슬퍼하며 울리로다”라고 하였다.


슬퍼하는 자는

①자기의 죄를 붙들고 슬퍼하는 사람을 말한다.

②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 나가기를 소망하면서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이루지 못한 것 즉, 말씀대로 신앙 인격이 만들어지지 못한 것을 슬퍼하는 사람이다.

③신령한 세계에 들어가지 못해서 슬퍼하는 사람이다. 신령한 세계에 들어갔더라도 좀 더 깊은 세계에 들어가고자 슬퍼한다. 세상의 것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 아니고 신령한 것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가 행복하다는 의미이다.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죄 때문에 슬퍼하면 죄사함 받은 기쁨이 있게 된다. 또 말씀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슬퍼하면 말씀대로 이루어지게 되고,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여 애통하고 성도가 말씀을 받았으나 말씀대로 만들어지지 않아서 애통하면 드디어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게 되고 하늘로부터 오는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애통함과 해산하는 수고 없이 예수 믿는 사람은 진리에 대한 성공이 있을 수 없다. 십자가 후에 부활이 있었다. 피와 땀을 흘리고 해산하는 수고를 하여 진액을 짜 바치고, 사선을 넘는 수고와 인내가 있어야 생명을 살릴 수 있다.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대로 자기 인격이 만들어지지 못한 것을 슬퍼하면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도와 주셔서 조금씩 조금씩 말씀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부족함에 대한 슬픔은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울음이다. 성경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 하시는 도다”(시편34:18).



4.3.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기에 행복하다는 것이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진리를 붙든 자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붙든 자는 마음이 든든하고 온유하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와 주장을 받게 된다. 무조건 다른 사람이 하자는 대로 하는 것이 온유가 아니다. 자기 마음대로만 하는 사람은 완고한 고집쟁이 이고 다른 사람이 하자는 대로 따라 가기만 하는 사람은 쓸모가 적은 사람이다. 참으로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와 주장을 받아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판단하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이 때로는 고집쟁이라는 말을 듣게 되나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아주 온유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인도와 주장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나아가는 자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 그 사람의 구원을 이루어 나아가는데 쓰임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고린도전서 3:21~22에는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 것이요”라고 하였다. 온유한 사람에게는 만물이 다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데 이용되어 유익한 것이다. 온유한 자는 먼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것으로 삼아놓고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사람이다.


온유한 사람은 악한 사람에게 악한 일을 당할 찌라도 그것을 유익하게 이용한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고 빌라도가 악을 행하였으나 결국 그들은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사명을 이루는 것을 도와 예수님의 일을 해주었다. 모든 선한 것과 악한 것이 예수님을 위하여 있고 예수님은 그것들을 바르게 이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 드렸다. 온유한 자에게는 모든 것이 그 사람을 위하여 일해 주고 도와준다. 풍랑이 일어난다고 하여도 그 풍랑 인연하여 더 빨리 나아갈지언정 그 풍랑 때문에 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땅 위의 모든 것이 그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 이것이 땅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온유함은 나를 하나님께 맡기고 내면의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하고 쓸모 있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온유한 자들은 내어 맡기는 자들로서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기는’자들은 행복하다는 것이다.



4.4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행복하다는 개념은 ‘어떻게 해야 옳은 길을 걸어 나아갈까?’ 또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대로 살까?’ 하고 하나님의 의를 찾고 그 의를 이루어 나가는 일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처럼 갈급한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행복이 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사람은 의가 아니면 천하는 다 주어도 가지려 하지 않고 ‘의’ 하나를 생명보다 귀하게 여긴다.


베드로후서 3장 13절에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의를 이룬 것은 하늘나라에 영원히 남아 있게 된다.


누가복음 19:12~19에는 열 므나 남긴 사람은 열 고을 권세, 다섯 므나 남긴 사람은 다섯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땅에서 의를 이루는 것이 참으로 가치 있고 고귀한 것이다. 우리 성도는 천하를 다 준다고 하여도 의가 아니면 행치 말고 의를 이루는 일이라면 죽음이라도 사양치 말고 나아가야 한다. 스데반은 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고, 다니엘은 의를 위하여 사자 굴에 들어갔다. 의가 참으로 귀한 줄 알고 오늘 이루어야 할 의는 오늘 이루고 내일 이루어야 할 의는 내일 또 이루어 나아가야 한다.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례를 베풀고 헤롯왕을 책망하다가 감옥에 갇히어 죽기까지 하였다.


우리 성도가 ‘의’ 사모하기를 주리고 목마른 것처럼 간절히 사모하고 ‘의’를 이루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다 기울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의로 만족하게 되고 또 자기가 의를 이루어 만족하게 된다는 뜻이다. ‘의’를 이루기 위하여 간절히 사모하는 자는 마침내 ‘의’를 이루게 된다. ‘의’를 이루기 위해서 밤낮 애타는 심정으로 사모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심으로 ‘의’를 이룰 날이 오게 된다.


성도를 이 세상에 살게 하는 목적은 믿는 일을 잘하여 의(하나님의 뜻)를 이루라는 것이다. ‘의’인 줄 알면서도 자기 육신을 아끼느라고 따라가지 못하고 돈과 인정 때문에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은 ‘의’가 얼마나 귀한 것인 줄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의’인 줄 알았으면 자기의 모든 재산이나 자기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한이 있어도 따라가야 한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도 바치는 것이 ‘의’이다. 주님께서 나귀를 바치라 할 때에 바치지 않으면 불의한 일이요 죄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너라”하실 때에 제자들은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이것이 ‘의’이다. 예수님께서 따라 오라고 하실 때 따라가지 않으면 불의요 죄이다.


‘의’를 하나 이루면 자기 영이 그만큼 배가 부르고, 강해지고, 자라나고, 커짐으로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그만큼 크다.


고린도후서 9:9에 “기록한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고 하였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했음으로 그 ‘의’가 영원히 하늘나라에 남아 있다는 뜻이다.


참된 신앙으로 ‘의’를 이루어 나가면 영혼이 만족하고 새 힘을 얻어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남아 있게 된다.


‘의’를 향한 주림이 없다면 우리가 죄를 용납했고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한 갈망이 식었다는 뜻이다. ‘의’에 대한 주림을 인정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맡길 때 비로소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



4.5.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나님의 자비를 맛본 사람들은 이웃에게도 자비를 베푼다. 즉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하신다.


성도가 하나님께 받은 자비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우리에게 있는 작은 자비를 다른 사람에게 주면 하나님은 더 많은 자비를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가 자비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면 하나님은 계속해서 더 많은 자비를 우리에게 주시게 되므로 자비의 그릇이 점점 더 커진다. 그릇이 커지면 하나님의 자비를 더욱 더 많이 받게 된다. 우리 성도가 항상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겨 허물을 덮어 주어야 한다. 우리에게 손해를 주고 잘못을 범하였을 지라도 불쌍히 여겨 용서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남을 긍휼히 여기지 않고 관용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긍휼 없는 심판을 받게 된다. (야고보서 2:13 참조).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면 되겠느냐고 묻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셨다. 또 믿지 않는 사람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한다.



4.6.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마음이 깨끗해지려면 물욕과 정욕과 사욕을 벗어버리고 중생한 영혼을 따라 살아야 한다. 마음의 욕심을 따라 살 때에는 더럽고 악한 마음이 된다.


그러나 마음이 성령과 중생한 영혼을 따라 살 때에는 깨끗하고 거룩하게 되어 그 마음을 통하여서 하나님과 사귀게 되고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신자의 마음과 육신이 중생한 영혼에게 이용될 수 있고 육체의 부패성에 이용될 수도 있다. 중생한 영혼에게 이용될 때에는 의의 병기가 되고 부패성(죄성)에게 이용될 때에는 불의의 병기가 된다. (로마서 6:15~19)


중생한 영혼에는 언제나 성령이 내재한다. 그러므로 중생한 영혼이 마음을 사용하면 청결한 마음이 된다. 성경에는 마음이 두 가지 상태로 표현되어 있다. 마음이 전적으로 부패하였다는 말씀도 있고(로마서 7:18, 예레미야 17:9, 마가복음7:21~23), 하나님을 사모하는 좋은 마음으로도 표현되어 있다.(로마서 7:25, 마태복음 13:34~35, 열왕기상 8:18,23)


중생한 영혼이 마음을 사용할 때에는 선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사모하고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뜻만 좋아하며 그 뜻대로 살려고 한다(로마서 7:22).


반대로 부패성이 마음을 이용하면 악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멀리하여 떠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된다. 마음이 깨끗한 자가 되려면 마음이 항상 중생한 영혼에 붙들려서 중생한 영혼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마음이 된다. 마음이 깨끗한 자가 누리는 가장 큰 행복은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뿐 아니라 하나님과 최고의 관계다. 깨끗한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온다.



4.7.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세상은 필사적으로 평화를 추구한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돈만 많으면 평화로울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소유에서 평화를 찾지 못했다. 사람들은 모든 무기가 사라지면 세상이 평화로워 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인은 총 없이 아벨을 죽였다. 문제는 인간의 마음이다.


‘평화케 하는 자’란 ①하나님과 평화하고 ②자기 마음에 평화를 누리고 ③다른 삶과 평화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어 자기 마음이 평화를 누리고 다른 사람과 평화 하여야 복이 있다. 성도는 모든 일을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불의를 당하고 속는 한이 있더라도 평화로운 가운데 모든 문제를 해결하도록 힘써야 한다.(고린도전서 6:7)


사람이 악한 마음을 쓰면 한없이 악하여지고 선한 마음으로 나아가면 아무리 억울하고 불의를 당한 경우에라도 평화를 이룰 수가 있다. 마귀는 육신의 부패성(정욕)을 충동시켜 마음에서 평화를 제하여 분노하게 만들고, 미워하게 만들려고 한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이 성령과 중생한 영혼을 따라 가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중생한 영혼이 성령의 역사를 힘입어 내 마음을 붙들고 사용하면 무슨 일에나 평화를 이루며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성령과 중생한 영혼에게 이용되는 마음은 항상 화평하고 다른 사람과도 평화를 이루기를 원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행동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일컬음을 받게 된다. 만일 반대로 불화하는 자가 되면 화가 있고 오히려 마귀를 기쁘게 하는 자가 된다. 어떤 사람으로 인하여 억울하게 고통 가운데 빠져 있다고 하더라고 마음을 선하게 쓰고 하나님을 순종해 나가면 마침내 하나님이 건져주시게 된다. 우리가 그분을 알고 그분이 주시는 평화를 알 때 우리는 피스메이커가 될 수 있다.



4.8.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옳은 일을 이루어 나아가려면 반드시 핍박이 오게 되어 있다. 언제나 예수를 바로 믿으려고 하면 여러 가지로 비방과 핍박을 받게 된다. 그러나 핍박이 올 때에 기뻐해야 한다. 의로 인해 핍박이 오는 것은 바로 믿는 증거이다.


서 있는 나무는 바람을 맞게 되나 누워 있는 나무는 바람을 맞지 않는다. 태풍 맞는 것이 싫다고 부러져 누워 있는 나무는 잠시는 평안할지 모르지만 태풍이 지나가면 말라 죽고 만다. 바로 서서 태풍을 견디어 낸 나무는 고난이 많았으나 태풍이 그치고 해가 나오면 더 싱싱하게 자라나고 뿌리가 더 깊이 박힌다. 성도에게 핍박이 오는 것은 믿음이 산 증거이고, 의의 길을 걷는 증거이다. 핍박을 믿음으로 통과하면 연단이 되어 더 좋은 인격이 만들어진다.


전에 있던 모든 선지자들도 핍박을 받았고 거짓말로 비방을 당한 것이다. 성도가 핍박을 받게 되면 선지자가 걸어간 길을 걸어가는 줄 알고 기쁘게 받으며 끝까지 참고 믿음을 지켜 나가야 한다. 주님과 옳은 일을 위해 핍박을 달게 받으면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크다. 그러므로 옳은 일을 위해 핍박당하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옳은 일을 위해 핍박 받는 자들이 행복한 이유는 천국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에게 핍박은 성장 통이나 다름없다. 아픔이 없으면 성장도 없고 고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다.



Ⅴ.적용 사례.


-- 학생들의 교육과정으로 생략 --



Ⅵ. 결론 및 향후 연구 방향


프랑스의 어느 철학자가 얘기 했듯이 “현대인 들은 미친 듯이 모두가 행복을 찾아 다닌다”고 했다. 그리고 “행복이란 파랑나비를 찾기 위해 멀리 갔더니 알고 보니 가장 가까운 곳에 행복이 있었다.” 는 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도서를 인터넷에 검색하면 5천종 이상 검색이 가능할 정도로 현대는 행복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에서 세계 3대 행복론(카알 힐티. 알랭. 버틀란드 러셀)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았고 기독교 행복의 진수라 할 수 있는 예수님의 산상보훈 중에서 팔복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대구대학교에서 선택 교양과목인 ‘행복의 기술’을 지난 1년간 2학기에 걸쳐서 강의한 것을 중심으로 ‘행복론’을 고찰해 본 것이다.


요즘 대학생들 가운데 행복을 사회 추세에 따라 너무 물질적인 것에서 찾고자 한다. 어느 통계에도 나와 있듯이 종교를 가진 사람이 갖지 않는 사람보다도 더 행복 하다는 통계와 같이 올바른 기독교 행복관의 가치를 갖자는 뜻에서 연구해 보았다.


이번 연구를 통해서 대학생들에게 바람직하고 건전한 행복의 가치관을 심어 줄 필요가 있다고 사료된다. 향후 연구 방향으로는

(1) ‘행복론’을 대학 선택 교양 과정 보다도 선택 필수 교양으로도 생각해야 할 필요성은?

(2) 서울대 행복 연구센터와 함께 대학생을 위한 체계적인 ‘행복론’의 연구 개발 필요성은?

(3)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행복론’의 연구 개발의 필요성은?

(4) ‘행복론’을 연구 할 때는 설문지를 통한 과학적 데이터를 활용할 필요성은?

(5) 21세기 삶의 질을 향상 시키는 차원에서 대학에 행복 연구소를 설치할 필요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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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자는 영남대학교 교육대학원(영어교육전공 1기), 수원대학교 대학원에서 응용언어학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대구대학교 사범대학 겸임교수, 경주대학교 외래교수를 지냈다. 저서로는 영어독해 학습 지도론과 幸福論의 理解가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는 영어독해 교수-학습 책략이 독해력 향상에 미치는 효과와 自己主導 學習法으로서 易讀性 硏究 등이 있다. 정부로부터 녹조 근정훈장을 수여 받았으며 현재 대구동촌제일교회 시무장로와 Happier Mission Institute대표로 섬기고 있으며 대구대학교에서 ‘행복의 기술’을 강의 하고 있다.




<abstract>


Consideration and Application Case of Sansangsuhun(山上垂訓: Sermon on the Mount)(the Beatitudes) According to Advancement in Theory of Happiness

 

Kim, Han-kyung*

 * Professor, Daegu University


Discussing a theory of happiness, it can be approached in several aspects. However, this study will first examine the worlds' three(Carl Hilty, Alain, Bertrand Russell) theories of happiness from the Christian aspect, and will inquire even into the theories of happiness spoken by other religions(Confucianism, Taoism, Buddhism, Hinduism, Islam) for reference. What will come to be addressed most intensively in this study can be said to be the theory of happiness in Christianity. In other words, it will consider Jesus Christ's Sansangsuhun(山上垂訓: Sermon on the Mount)(the Beatitudes). The reason is because of being considered that there is nothing that suggested the clear definition on happiness regardless of all ages and countries, and a definite method on happiness as much as the Beatitudes in Jesus Christ's Sansangsuhun in managing happy life, which is the ultimate goal of life. The person in question aims to examine centering on a case with application of the Beatitudes in Jesus Christ's Sansangsuhun while giving a lecture of 'The skills of happiness' at Daegu University.


*Key Words: Theory of Happiness, World's 3 theories of happiness, Theory of happiness on other culture, Sansangsuhun(山上垂訓: Sermon on the Mount)(the Beatitudes)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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