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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시작하며
Ⅱ. ‘사도士道’에 대해서
Ⅲ. ‘무사도’에 대해서
Ⅳ. 동아시아와 역사의 문맥에서 본 무사의 사상
Ⅴ. 근대 무사도의 탄생
무사도가 제창된 시대는 근세(에도[江戶]시대 또는 도쿠가와[徳川]시대)로, 에도(현재의 도쿄)에 정치의 중심인 막부幕府(에도막부)가 설치되어 있던 시대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이하 쇼군[將軍]이라 칭함)이 된 1603년부터 제15대 쇼군이 정권을 천황의 조정에 반납한 1867년까지의 265년 동안이다. 이 시대 이전에는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후반에 걸쳐 하위자가 상위자를 공격하는 ‘하극상’과 서로 싸우는 ‘전쟁’을 통해 전국 각지에 강력한 봉건제후(戦国大名)가 등장했다.
그들은 강고한 지배영역을 형성하고 다른 다이묘(大名)와 권력투쟁을 계속했다. 이것을 일본의 센코쿠(戦国)시대라 한다. 이 전쟁의 시대에서 살아남아 일본 전국의 통일을 이뤄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정권이 탄생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도요토미 정권은 조선에 대한 침략전쟁(임진왜란, 정유재란)에 의해서 스스로 피폐해져 도쿠가와 정권으로 교체되었다. 이것이 근세라는 시대로, 세계사나 일본사에서도 이례적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평화가 지속된 시대이다.
병농분리란, 센코쿠시대 말기에서 에도 초기에 걸쳐 무사(兵)와 하쿠쇼(農)의 사회적․신분적 구별을 명확히 함으로써 하쿠쇼에 대한 무사의 신분적 지배를 확립한 과정 및 그 정책을 말한다.
센코쿠시대의 무사는 농촌의 야시키(屋敷) 내부에 고용된 예속민을 사역하여 농업과 개발을 실시함과 동시에 주변의 하쿠쇼를 지배하고, 전쟁이 발생하면 그들을 종자従者로 삼아 출진하였다. 이러했던 것이 전국통일 과정에서 가신단家臣團․상인․직인職人(수공업자)의 조카마치(城下町: 다이묘가 거주하는 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로 집주하는 정책이 진행되면서, 영국領国 내에 형성된 조카마치의 군사적․정치적․경제적 거점화에 의해 도시와 농촌의 분화가 촉진되었다. 그리고 막번체제를 구성하는 지배기구 또는 지배영역인 번을 소유한 근세 다이묘 밑에 병농분리를 거친 후의 무사가 다수 결집함으로써 다이묘와 무사 사이에 봉건적인 주종관계가 형성되었다. 이 무사집단(家臣團)이 다이묘의 군대가 되는 동시에 번의 행정을 담당했다.
센코쿠시대 이전부터 무사세력은 고대의 궁정귀족에서 봉건영주로 바뀐 중세의 귀족세력을 압도하여 경제적으로 우세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무사는 단순한 전투원이 아니라 위정자적 성격도 함께 지니기 시작했다. 하극상을 이겨내고 지위를 유지하려는 자들, 또는 하극상의 분위기를 틈타 주군 대신 주군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자들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지도자적 덕성을 갖추고자 했다.
이리하여 전란이 마무리된 근세의 무사사회에서도 전투원으로서의 기풍과 마음가짐을 지키려는 전통, 치자(지도자)로서의 덕성을 중시하는 전통이 이어졌다.
치자로서의 덕성을 중시하는 전통은 근세에 이르러서 유교와 결합되어 갔다. 이러한 무사의 자세를 설명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사도士道라 일컬어졌는데, 이것은 근세의 무사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에 대해 전투원으로서 지녀야 할 마음자세의 전통을 잇는 것은 무사도라 일컬어졌다.
사도도 무사도도 무사의 마음자세이자 삶의 방식으로 자각된 것이기 때문에 무사의 사상이라는 공통성을 지니지만, 학문적으로 무사도라는 용어는 많은 경우 후자에 한정하여 사용된다. 그리고 현실은, 물론 양자가 혼용되었겠지만, 유학자는 무사도를 센코쿠가 남긴 관습이라고 규정하며 부정적인 논조를 전개하였고 무사도를 논하는 자들 또한 유교적인 사도에 대해 맹렬하게 반발하였다.
여기에서 소코가 강조한 것은 “자신의 직분(직업의 존재 이유)을 아는 것”이었다. 농민은 농사를 짓고 공인工人은 물건을 만들고 상인은 교역에 종사하며 각기 열심히 생활하고 있다.
무사는 “농사짓지 않고 물건을 만들지 않으며 물건을 팔지 않는 사士”인데, 만약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살려고 한다면 그것은 ‘유민遊民’이자 ‘천민’이다. 따라서 무사의 직분이 무엇인지는 무사 스스로 물어보아야 한다. 이때 타인이나 서적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무사의 직분을 자각해야 한다.
이를 통해 자각되어야 할 무사의 직분이란, 인륜(부자, 군신, 부부, 장유 등과 같은 인간관계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인도적 질서)의 도를 천하에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는 무사의 시키(職)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사의 직분은 주인을 얻어 봉공의 충忠을 다하고 친구를 사귀어 신信을 두텁게 하며 자신을 낮추어 오로지 의義를 실천하는 데 있다. 모든 인간은 그 자신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인륜도 존재할 수 없지만, 농공상은 그 일이 바쁘기 때문에 평소 도를 실천할 수 없다.
따라서 무사는 농공상을 대신하여 인륜을 실현하는 데 노력하고, 삼민三民 중에 인륜을 저버리는 자가 있으면 신속히 처벌하여 천하에 천도天道가 바르게 시행될 수 있도록 한다. 이로써 무사는 삼민의 위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무사는 문무의 덕과 지를 갖추어야 한다.
무사의 직분이 인륜의 지도자라는 자각은 당연히 스스로에게 도의적 인격의 형성을 요구한다. 제일 먼저 요구되는 것은 ‘대장부의 기상氣象’, 도의道義의 내면적 자각이다. ‘대장부의 기상’이란 경거망동하지 않는 신중함,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는 강인함, 만물을 뒤덮는 기개의 장대함이다. 이와 같은 기상을 기르는 것은 내면의 마음을 바르게 하기 위한 것이지만, 내면을 바르게 했을 때야말로 이러한 기상이 발휘되어 정착한다.
내면을 바르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근본은 이利를 버리고 의를 위해 사는 것, 다시 말해서 의연하게 도를 실천하고 정욕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청렴, 정직, 강조剛躁를 그 각론으로 제시한다. 즉 경제적인 결벽, 친소귀천親疎貴賤에 관계없이 의가 있는 바를 지키며 변하지 않는 것, 그 도의적인 강인함이다.
소코는 무사에게 도의적 인격을 요구하면서 그것을 ‘대장부의 기상’으로 표현하였다. 그가 좋아하는 표현으로 말하자면, 대장부의 기상은 ‘탁이卓爾’(우뚝하게 뛰어남)한 기상이기도 하다. 그가 제시하는 도덕적 인격이란, 자신의 정욕에 대해, 또 세속적인 것에 대해, 나아가 세상의 여러 사물에 대해 우뚝하게 뛰어난 것이었다.
이러한 탁이한 기상의 표방은 소코가 제시한 인격형성의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하루하루의 사소한 동작이나 행동에 ‘위의威儀’(위엄 있는 몸가짐)를 지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무사는 긍지, 즉 자신의 능력을 믿음으로써 생기는 자부심을 중시한다. 무사는 농공상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무사들 사이에서도 긍지를 지니고 살아가려고 했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뒤처지는 것을 싫어했던 무사들은 그 인격에 있어서도 고귀성을 표방하게 되었다.
소코는 무사의 출사에 대해 4가지 유형을 들고 있다.
첫 번째는 ‘도를 행하기 위해’ 출사하는 경우로, 이 경우에는 천하․국가․인민을 위해 출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스스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인군人君이 경敬과 예를 다한 후 나서야 한다.
두 번째는 반드시 도를 실현하기 위한 것은 아니지만, 예를 다하여 부름을 받아 거절하기 어려울 경우이다.
세 번째는 부모처자를 보살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출사하는 경우이다.
네 번째는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봉공해 온 내력과 이유로 출사하는 경우이다.
‘사도’가 인륜의 도를 자각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것에 비해, 떳떳한 죽음이나 죽음의 각오를 근본으로 삼는 사상의 흐름이 무사도이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하가쿠레』(葉隠)가 있다. 편저자는 미상이지만, 사가나베시마(佐賀鍋島) 번의 야마모토 조초(山本常朝)의 사상적 영향을 받아 성립하였다. 『하가쿠레』의 권1과 2는 야마모토 조초가 말한 무사된 자의 마음자세를 누군가가 1710년 이후에 기록한 것이다.
죽음에 대한 ‘사도’와 ‘무사도’의 자세를 비교해 보면, 소코는 항상 죽음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하가쿠레』는 “무사도란 죽는 일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양자는 일견 동일한 생각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소코의 경우는 무사로서 행해야 할 바 앞에서는 죽음도 피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인륜의 도를 자각하는 것을 근저에 깔고 그 실현 앞에서는 죽음도 불사해야한다고 가르치는 것으로, 이것의 전제조건으로는 죽어야 할 때에는 마땅히 그 모습에 맞게 바르고 또한 정황에 맞게 적절해야 한다는 발상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개죽음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하가쿠레』는, 사람은 누구나 생명에 대한 극복하기 힘든 집착이 있어서 마음에 빈틈이 있으면 반드시 “무사로서 해야 할 일” 등의 이유로써 자신을 속이고 행동을 정당화하면서 죽어야만 하는 순간에도 살 길을 선택하므로, 인간은 자신에게 한순간이라도 추락의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문제는 결과가 아니므로 틈을 주지 않고 죽음에 돌입하거나 항상 죽음과 밀착하여 ‘죽는 마음’으로 일관할 것을 말한다. ‘죽음을 각오하고 격하게 싸우는 것’으로 일관했을 때 부끄러움으로부터 자신을 구해 내고 충도 효도 자연스럽게 갖춰진다는 것이다. ‘사도’에서는 이비사정理非邪正을 가리는 것이 중요하지만, ‘무사도’에서는 이것을 사심私心을 숨기기 위한 구실로 보면서 오직 죽는 것으로만 순수함이 유지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도’와 ‘무사도’는 주종관계에 대해서도 서로 다르게 파악한다.
‘사도’는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아 도를 실현할 가능성이 없는 주군으로부터는 떠나라고 말한다.
이에 비해 ‘무사도’에서는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더욱더 주군 편이 되어 주군의 나쁜 점이 외부로 드러나지 않도록 하고, 주군의 나쁜 점을 자신의 책임으로 되돌리며 간언을 지속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사도’에서 주군․주가主家와의 관계는 정의적情誼的이자 절대적이다.
이와 같은 관계의 절대성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하가쿠레』의 시대에 전란의 흔적으로 남아 있던 것은 ‘겐카’(喧嘩: 무사사회에서 서로의 명예를 걸고 충돌하는 무력행위, 분쟁해결을 위한 사적인 싸움[私戰] 즉 자력구제의 관습) 정도밖에 없다. 그 원인이 길거리의 시비이든, 정치상의 의견 대립이든, 지행지知行地(가신에게 주어진 영지)의 경계를 둘러싼 것이든, 무릇 명예에 손상을 입었다고 느끼는 것에서 발생하는 여러 분쟁에 대해 무기를 사용하여 결론지으려는 행위가 ‘겐카’이다.
『하가쿠레』는 겐카에 대해서도, 아니 겐카이기 때문에 오히려 궁극적으로 ‘승패를 생각하지 않고’ ‘무턱대고 죽을 것’(死狂)을 추구하였다. 하지만 사적인 싸움은 주인에 대한 봉공과 모순된다. 사적인 싸움은 번의 질서를 흐트러뜨리고 주군의 명령에 따라야 할 목숨을 전쟁이 발생하기도 전에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주군에 대한 중대한 불의이자 불충이다.
야마모토 조초는 나베시마 번의 무사가 지녀야 할 마음자세로서 4개의 서원誓願을 들었다.
그 첫 번째는 ‘무도武道로서, 타인보다 뒤떨어지지 않도록 할 것’이고 두 번째는 ‘주군이 요구하는 일에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것’인데, 이 양자 사이의 모순이 바로 겐카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하가쿠레』에는 서로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논의도 적지 않은데, 겐카의 경우 마지막 순간에 우선시될 수밖에 없는 것은 전투자의 윤리이므로, 결국 첫 번째가 우선시된다.
이렇듯 때때로 모순을 드러내는 봉공인(주군을 따르는 종자, 가신)으로서의 무사와 전투자로서의 무사의 삶의 태도에 대해, 조초 자신은 죽음에 대한 광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이를 관념적으로 통일하였다. 봉공하는 경우나 겐카의 경우 모두 죽음에 대한 광적인 태도와 관련된다. 이처럼 죽음에 대해 앞뒤 가리지 않는 광적인 태도가 봉공인으로서의 무사라는 측면에서 추구될 때에는 사私를 철저히 부정하는 무사無私․무상無償의 헌신(남몰래 애태우는 짝사랑으로 비유된다)으로 나타났고, 전투원으로서의 무사라는 측면에서 추구될 때에는 생명에 대한 집착을 단호히 극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궁극적인 것은 무사無私, 순일무잡純一無雜(불순물이 없이 순수함, 올곧아 거짓이 없음)이다. “무사도란 죽는 일을 찾아내는 것”의 추구는 무사無私의 헌신, 순일무잡성의 추구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승부를 준비하며 살아가는 무사에게는 타자에 대한 승리가 요구되는데, 이것은 반드시 무력이나 완력으로 타자를 압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무사가 중시한 것은 정신적인 우위였으며, 더욱이 자신을 극복하는 자야말로 비로소 타자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도’에서는 인륜의 도를 철저히 자각했을 때, 무사도에서는 죽음의 각오를 철저히 했을 때, 자연스럽게 타자를 압도하는 강인함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무사도에서도 이 강인함은 용모, 언어, 행동거지의 측면에서 자연스럽게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예의바름도 무사의 강인함이 표현되는 것 중의 하나이다. 무사사회에서 예의의 존중은 단순히 봉건사회의 계층적 질서에 대한 순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무사도에 대해 언급한 서적 중에는 소코의 제자였던 병학자 다이도지 유잔(大道寺友山)의 만년작 『무도초심집武道初心集』이 있는데, 유교적인 사도士道의 입장을 취하면서도 센코쿠시대 무사들의 기풍을 되살려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이 책의 영향이 오히려 더 컸다.
이 책은, 무사된 자는 정월초하루 아침부터 섣달그믐날 밤까지 밤낮으로 항상 죽음을 준비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으로 시작하고, 결론에 이르러서는 무사도에 관한 세상 사람들의 평가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충(주군에 대한 忠勤), 의(節義의 지조), 용(용맹한 기상)의 세 가지로 집약된다고 하면서 이 세 가지 덕을 겸비한 자야말로 최고의 무사라고 적고 있다. 또한 주군의 명을 절대적으로 존중할 것을 설파하면서 주군에게 조금이라도 반론을 제기하는 태도는 둘도 없는 대죄임을 강조하고, 사항이 무사도의 근간과 관련된 문제일 경우에는 적절한 절차를 밟은 후에 경위를 철저히 해명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이 점도『하가쿠레』와 동일하다.
말할 필요도 없이 유교는 법이나 무력과 같은 강제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예악禮樂(넓은 의미의 文)이나 시詩(좁은 의미의 文)로 사람들의 도덕심을 향상시켜 사회의 질서와 조화를 실현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이 사상의 근본은 ‘힘’에 대한 철저한 기피일 것이다. 따라서 ‘무’나 ‘무인’은 경시되었다. 힘의 권화權化인 ‘무’는 덕의 반대물이고, 무인은 ‘의리(도의․절조)를 모르는 존재’로서 거칠고 세련되지 못하며 교양도 부족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의 정치라는 것이 이利를 좇느라 교양을 쌓을 틈이 없어서 덕을 체득하지 못한 서민 또는 이적夷狄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이상, 무위無爲․무정부無政府는 유학자가 취할 길이 아니다.
천자의 지휘 아래 중앙과 지방에 엄연히 정부가 조직되고 백관유사百官有司가 완비되어 있는 것은 성인이 정한 장전章典에 따른 것이다. 또한 힘을 대표하는 형刑이나 병兵도 결여되어서는 안 된다. 군자의 덕에 기초한 치국평천하의 핵심은 형이나 병을 설정하되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점에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 세계의 주변에 있었던 일본에서는 고대 이후 중국대륙이나 한반도로부터 율령제라는 국가지배제도는 물론이고 고도의 사상․문화․과학기술에 이르기까지 실로 많은 것을 배웠다. 하지만 아직 미개를 극복할 수 없었던 일본에서는 씨족제가 온존하였고, 이어서 귀족제가 오랫동안 그 생명력을 유지하였다.
고대 일본의 관료제에서 귀족에게는 조상의 지위에 따라 자손이 일정한 위계(또는 품계)를 얻을 수 있는 음위蔭位의 특전이 있었다. 당나라나 고려의 음서제도에 비해 그 적용범위는 좁지만, 수여된 음위는 매우 높았다. 관료등용법으로서의 과거科擧는 마지막까지 채용되지 않았고, 유교에 대한 이해나 보급도 충분히 이뤄지지 못했다. 일본 고전․고대 문화의 번창기로 일컬어지는 헤이안(平安)시대(8세기 말~12세기 초)의 지배층이었던 문인관료귀족을 보더라도 유교를 정신의 기초로 삼았다고 평가할 만한 고위 귀족은 몇 되지 않는다.
일본의 고대․중세 사회에서 유교는 유학, 그것도 주로 박사가博士家의 가업이라는 형태로밖에 존재하지 않았고, 개인과 사회를 규율하는 강고한 규범까지는 되지 못했다.
무나 무사를 기피하지 않았던 일본사회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후 무가武家가 정치권력으로 발전하는 것이 두드러져서, 마침내 무사가 명실상부한 치자治者로 군림하는 근세사회를 맞이한다.
4대 쇼군 이에쓰나(家綱) 때부터 이른바 문치정치로의 전환이 발생하고, 대외적으로는 쇄국, 대내적으로는 ‘도쿠가와의 평화’(Pax Tokugawa)가 실현되어 군사집단은 무력을 동결당했다.
치자로서 실제 정치를 담당하는 것은 일찍이 ‘겁쟁이’라 경시되어 왔던 ‘문관’ 즉 실무행정관료들이었는데, 근세는 무사의 정권이므로 치자의 주된 역할을 무사가 담당하게 된다. 이것은 전투자가 기본이었던 지금까지의 무사의 존재양태에 심각한 수정을 요구했다. 그리고 근세 후반 이후는 유교가 모든 학문 및 사상과 습합習合하면서도 어느 정도 사회에 침투한 시기이다. 이에 따라 본래 무의 대립물이었던 유교가 아이러니하게도 무사가 치자임을 자각하도록 재촉하는 교양체계로 변화해 갔다.
이런 의미에서 유교를 통해 스스로를 엄하게 규율하는 무사의 모습은 실상이라기보다는 역사의 요청이 만들어 낸, 그들이 추구해 가야할 목표였다. 예를 하나 들자면, 야마가 소코나『무도초심집』은 모두 무사된 자는 밤낮으로 항상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유교에서는 군부君父에 대한 어떤 깊은 애통이 있더라도 그것을 예禮로 억제하고 ‘성性을 흐트러뜨리지 않도록’ 가르친다.
멱라汨羅에 몸을 던진 중국 굴원屈原의 자살이 종종 유감스럽게 여겨지는 이유는 이러한 생각에 따른 것이다. 유교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려思慮, 그리고 사려를 통해 중용을 지키는 것이다(불교에서도 동일하지만). 죽음을 서두르는 것은 가장 직정경행直情径行한 것으로, 융적戎狄의 미학에 불과하다.
“사士는 자신을 알아주는 자를 위해 죽는다”라는 것은 협자俠者(협객, 仁侠의 무리)의 세계에서나 통용되는 문구에 불과하다(俠과 儒는 대극적 개념). 사실 역사를 되돌아보더라도 사직社稷(국가)을 위해 순직한 신臣이라 일컬어질 만한 인물을 찾아내기란 매우 어렵다.
한편 전투자로서의 마음자세에 뿌리를 둔 무사도는 근세의 사회적 현실에 뿌리를 둔 것이었을까? 사실 무사도란 용어를 사용한 예는 근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그리고『하가쿠레』가 윤리사상으로 폭넓게 퍼지지는 못했다는 것도 이미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다.
무사도를 윤리사상의 대상으로 삼아 엄밀하게 학문적으로 논한 연구자로는 후루카와 데쓰시(古川哲史) 씨가 있는데, 그는 “이 시대(근세)에 이 용어는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 사용했다”라고 단정하였다. 용어 사용의 많고 적음 자체가 개념이나 실천으로서의 보급이 넓고 좁다는 것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중요한 지적이다.
문제는 무사도가 근세 무사사회에 현저하게 퍼지지 않았다는 점만이 아니다. 과연 본래 근세 이전 전투자의 기풍과 마음자세가 『하가쿠레』나 『무도초심집』의 이해와 동일한 것이었을까. 무사가 9세기에 귀족사회의 외진 곳에서 등장하여 마침내 스스로의 독자적인 삶의 방식을 자각했을 때, ‘쓰와모노(兵)의 도’, ‘활과 화살을 지닌 자의 관례’ 같은 언어가 만들어졌다. 전자는 직업인으로서의 무사가 지녀야 할 능력과 관련된 언어이지만, 후자는 “대장군의 앞에서는 아버지가 전사하고 자식이 죽더라도 주저하지 않고 나아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다”라는 의미이다.
이후에도 오랜 전란의 시대가 이어졌고, 무사는 죽음과 함께했다. 죽이는 것뿐만 아니라 죽임을 당하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이상, 죽음에 대한 각오가 무사의 자기단련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실제로 센코쿠시대 이전의 무사는 이利를 밝히는 탐욕으로 인해 발생하는 배신적인 행동 또는 도의적으로 퇴폐한 발언을 얼마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센코쿠다이묘(戦国大名) 아사쿠라 씨(朝倉氏)의 일족이었던 한 역전의 무장은, 무사는 이기지 못하면 아무것도 안 되므로 ‘개’라 불리든 ‘짐승’이라 불리든 상관없이 이기기 위해서는 뭐든지 하라고 말한다. 『무도초심집』의 야마모토 조초의 할아버지는 “주저하지 말고 거짓말을 해라. 도박을 걸어라”라고 말했고, 조초의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항상 “1조(町: 109미터) 걷는 사이에 일곱 번 거짓말하는 것이 남자”라고 설교했다고 한다. 근세에는 “사람을 찔러죽이고 금품을 빼앗는 것은 무사의 관습”이라는 속담조차 있었을 정도이다.
"일본의 무도武道는 유학자들과 같이 인의충신仁義忠信의 도와 같은 그럴듯한 것을 말해서는 안 된다.
거짓으로 상대를 속이지 않으면 싸움에 이길 수 없다. 쓰와모노(兵)는 위도僞道이므로, 경우에 따라 같은 편을 속여서라도 공을 빼앗거나 적국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빼앗는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이것이 일본의 무도이다. 일본은 무국武國이므로 중국처럼 정직한 방법으로는 공을 세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풍속에도 맞지 않다."
"마음이 솔직하지 않고 재빨라 방심하지 않고 타인이 세운 공을 빼앗아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방식이 일본의 무도이다."
한동안 잊혀졌던 무사도라는 용어가 되살아나 새로운 내용으로 제기된 것은 무사 신분이 폐지된 근대에 들어서였다. 1885년 무렵부터 조금씩 그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은 신문기사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20세기의 직전이 되자 순식간에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은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의 『무사도, 일본의 혼』(Bushido, The Soul of Japan)이다. 니토베는 농업경제학자였으나 나중에는 교육자로 활약하였고, 국제적으로는 국제연맹 사무국 차장 등을 역임했다.
니토베는 이것이 서양의 기사도와 흡사하다고 했는데, 그의 무사도가 기사도를 유추하여 만들어진 것이므로 어쩌면 당연한 평가라고도 할 수 있다. 니토베의 무사론에서 무사도의 덕목을 의義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도 그리스도교의 ‘의義의 도’와 중첩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도나 그리스도교와 중첩시켜 설명하는 것은 내외적으로 일본인이 서양인에 필적하는 우수한 문명민족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구미를 뒤쫓아서 종국에는 앞서가는 것을 목표로 했던, 근대 일본의 지식인이 지녔던 심성(mentaliy)과 무의식의 콤플렉스를 읽어낼 수 있다.
열렬한 퀘이커(Quaker)교도였던 니토베는 퀘이커가 취했던 입장, 즉 만인에 내재하는 빛에 대한 묵상의 입장이 우주의 생명과의 일체를 설파하는 동양사상과 통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사도를 유추하여 만들어 낸 무사도를 일본의 바람직한 정신적 전통으로 삼고, 그리스도교를 통해 이것을 육성시키는 동서 문명 교류의 방법을 생각했다. 니토베의 무사도론을 “무사도의 탈을 쓴 그리스도교”라고 평가하는 것(菅野覺明)은 그 논리가 구미인에 대한 아첨임과 동시에 그리스토교가 충군애국의 도덕에 반反한다는 국가주의자들의 공격에 대처하기 위함이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니토베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는 결코 무사도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었다.
한편, 니토베의 저서와는 다른 방향에서 무사도의 융성을 추적해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쪽이 근대 무사도의 주류였다. 주지하다시피 근대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권위주의적 군국국가로서, 대외팽창을 위해 전쟁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군인의 본분은 천황에게 충절을 바치는 것에 있다고 한 군인칙유(1882년)나, 국민도덕의 기본인 충은 효 이하의 모든 덕목과 일치한다고 가르친 교육칙어(1890년) 등이 군대와 학교를 통해 국민에게 주입됨으로써 충군애국과 진충보국의 사상이 퍼져 갔는데, 그 과정에서 무사도가 이용되었다.
본래 무사도에서는 주군인 봉건군주와의 사적 관계였던 ‘충’의 덕목이 국가(이것의 인격화가 천황)와 모든 군인 및 국민의 공적인 관계로 치환되고 나아가 천황에 대한 심정적 일체화의 연결고리로 이용되었으며, 사신捨身이나 죽음의 각오를 강조하는 것도 국가나 천황을 위한 멸사봉공, 전사戰死의 미화 등으로 이용되어 갔던 것이다. 특히 중일전쟁 이후 이러한 경향은 현저해졌다.
이 훈유는 서문과 3부의 본훈本訓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훈의 제1부에서는 ‘황군’(천황의 군대)의 올바른 자세, 제2부에서는 군인이 지켜야 할 도덕, 제3부에서는 전쟁터에서의 유의사항을 적고 있다.
필승에 대한 신념, 복종심, 사생관死生觀,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것 등 『하가쿠레』에서 제시한 무사도정신에 가까운 내용으로 되어 있어, 군인칙유의 ‘전쟁판’이라고도 일컬어졌다.
특히 “살아서는 포로의 수치를 겪지 말고, 죽어서는 죄화罪禍의 오명을 남기지 말라”라는 구절은 절대시되어, 포로가 된 장병은 귀환 후 반드시 자결을 강요당했다. 이와 같은 포로 금지와 전사 강요가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각지에서 발생한 일본군의 무의미하고 비참한 ‘옥쇄玉碎’(문자 그대로 ‘전멸’의 미화)를 불러일으켰다.
이상, 무사도의 내용과 역사에 대해 개괄적으로 알아보았다. 처음에 언급하였듯이 필자는 무사도를 국민도덕이나 일본인의 정신적 토대인 것처럼 평가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무사도는 무사사회 내에서만 통용되는, 보편성을 지니지 않은 사상이고, 근대의 무사도는 E. 홉스봄이 말한 ‘만들어진 전통’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시기를 포함한 대일본제국의 전시기에 걸쳐 균질적이면서 절대적으로 모든 일본인을 구속했던 것이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은 전전戰前의 무사도와 거의 동일시되었던 ‘야마토 정신’(大和魂)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당연하게도 무사도는 전후 일본에서 다시 망각된 사상이 되었다. 필자와 비슷한 세대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전쟁의 포기와 주권재민,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일본국헌법이 정신의 핵심이 되고, 필자보다 젊은 사람들 중의 일부에게는 또한 별도의 가치관이 대두하고 있는 듯하다. 필자는 무사도나 ‘야마토 정신’만이 아니라, 일본사 전체를 관통하며 일본인 전체의 정신적 기둥이 되어 온 어떤 사상이나 윤리를 제시할 수 없다.
본래 인구가 많고 계급에 의한 이해대립이 노골화된 고도로 발달한 사회에서는 특정한 계층․집단․세대를 위한, 또는 어떤 한 시기에만 통용되는 가치관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시대를 통해 모든 사회가 공유하는 가치관이 존재한다는 것은 국민국가가 만들어 낸 환상이자, 국가지배층이나 여기에 추종하는 이데올로그집단이 그러길 바라는 것 이상의 것이 아니다. 결국 근세의 무사도나 근대의 무사도도 그러한 사례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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