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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무사도(武士道)란 무엇인가: 그 역사에 대해

장안봉(微山) 2016. 6. 4.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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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도란 무엇인가: 그 역사에 대해


다카하시 마사아키*



목 차

Ⅰ. 시작하며

Ⅱ. ‘사도士道’에 대해서

Ⅲ. ‘무사도’에 대해서

Ⅳ. 동아시아와 역사의 문맥에서 본 무사의 사상

Ⅴ. 근대 무사도의 탄생


* 高橋昌明. 고베대학 명예교수.


Ⅰ. 시작하며


동아시아 각국에서 국가의 정신적 기둥역할을 한 것은 무엇일까 라는 주제를 일본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면, 그것은 무사도라고 답하는 자가 있을 것이고 이에 동의하는 자도 상당수일 것이다. 필자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데, 그 이유를 말하기 전에 무사도라 불리는 것이 어떠한 윤리사상적 내용을 지닌 것인지에 대해 일단 검토해 둘 필요가 있다.


무사도를 고찰하기 전에 외국 연구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예비지식으로, 무사도가 제창된 당시 일본사회의 특징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무사도가 제창된 시대는 근세(에도[江戶]시대 또는 도쿠가와[徳川]시대)로, 에도(현재의 도쿄)에 정치의 중심인 막부幕府(에도막부)가 설치되어 있던 시대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이하 쇼군[將軍]이라 칭함)이 된 1603년부터 제15대 쇼군이 정권을 천황의 조정에 반납한 1867년까지의 265년 동안이다. 이 시대 이전에는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후반에 걸쳐 하위자가 상위자를 공격하는 ‘하극상’과 서로 싸우는 ‘전쟁’을 통해 전국 각지에 강력한 봉건제후(戦国大名)가 등장했다.

그들은 강고한 지배영역을 형성하고 다른 다이묘(大名)와 권력투쟁을 계속했다. 이것을 일본의 센코쿠(戦国)시대라 한다. 이 전쟁의 시대에서 살아남아 일본 전국의 통일을 이뤄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정권이 탄생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도요토미 정권은 조선에 대한 침략전쟁(임진왜란, 정유재란)에 의해서 스스로 피폐해져 도쿠가와 정권으로 교체되었다. 이것이 근세라는 시대로, 세계사나 일본사에서도 이례적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평화가 지속된 시대이다.


도요토미 정권이 마련한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전개된 근세의 지배형태를 막번幕藩체제라 한다. 이것은 중앙정권인 막부와 그 산하에 있으면서도 독립적인 지배영역을 지니는 번藩(크고 작은 번이 전국에 약 270개였는데, 이 중 大藩은 20개 정도이다)을 정치단위(통치기관)로 한 체제로, 병농兵農분리에 의거하여 무사집단이 직접생산자인 하쿠쇼(百姓)집단(무라[村])으로부터 쌀 등을 현물연공으로 수취하는 사회관계에 기초한다.


병농분리란, 센코쿠시대 말기에서 에도 초기에 걸쳐 무사(兵)와 하쿠쇼(農)의 사회적․신분적 구별을 명확히 함으로써 하쿠쇼에 대한 무사의 신분적 지배를 확립한 과정 및 그 정책을 말한다.

센코쿠시대의 무사는 농촌의 야시키(屋敷) 내부에 고용된 예속민을 사역하여 농업과 개발을 실시함과 동시에 주변의 하쿠쇼를 지배하고, 전쟁이 발생하면 그들을 종자従者로 삼아 출진하였다. 이러했던 것이 전국통일 과정에서 가신단家臣團․상인․직인職人(수공업자)의 조카마치(城下町: 다이묘가 거주하는 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로 집주하는 정책이 진행되면서, 영국領国 내에 형성된 조카마치의 군사적․정치적․경제적 거점화에 의해 도시와 농촌의 분화가 촉진되었다. 그리고 막번체제를 구성하는 지배기구 또는 지배영역인 번을 소유한 근세 다이묘 밑에 병농분리를 거친 후의 무사가 다수 결집함으로써 다이묘와 무사 사이에 봉건적인 주종관계가 형성되었다. 이 무사집단(家臣團)이 다이묘의 군대가 되는 동시에 번의 행정을 담당했다.


에도시대에는 영주(士, 武士), 하쿠쇼, 조닌(町人), 최하층의 천민과 같은 신분편성이 있었다. 일반 민중 중에서 하쿠쇼와 조닌, 즉 농민과 상인․직인이 직업적 신분으로 나뉘어 있었던 것은 근세사회가, 도시가 농촌으로부터 분리된 사회적 분업 단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Ⅱ. ‘사도士道’에 대해서


센코쿠시대 이전부터 무사세력은 고대의 궁정귀족에서 봉건영주로 바뀐 중세의 귀족세력을 압도하여 경제적으로 우세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무사는 단순한 전투원이 아니라 위정자적 성격도 함께 지니기 시작했다. 하극상을 이겨내고 지위를 유지하려는 자들, 또는 하극상의 분위기를 틈타 주군 대신 주군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자들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지도자적 덕성을 갖추고자 했다.

이리하여 전란이 마무리된 근세의 무사사회에서도 전투원으로서의 기풍과 마음가짐을 지키려는 전통, 치자(지도자)로서의 덕성을 중시하는 전통이 이어졌다.


치자로서의 덕성을 중시하는 전통은 근세에 이르러서 유교와 결합되어 갔다. 이러한 무사의 자세를 설명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사도士道라 일컬어졌는데, 이것은 근세의 무사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에 대해 전투원으로서 지녀야 할 마음자세의 전통을 잇는 것은 무사도라 일컬어졌다.

사도도 무사도도 무사의 마음자세이자 삶의 방식으로 자각된 것이기 때문에 무사의 사상이라는 공통성을 지니지만, 학문적으로 무사도라는 용어는 많은 경우 후자에 한정하여 사용된다. 그리고 현실은, 물론 양자가 혼용되었겠지만, 유학자는 무사도를 센코쿠가 남긴 관습이라고 규정하며 부정적인 논조를 전개하였고 무사도를 논하는 자들 또한 유교적인 사도에 대해 맹렬하게 반발하였다.


앞으로 사도, 그리고 무사도에 대해 설명하게 될 터인데, 필자의 전공은 일본의 윤리사상사가 아니기 때문에 이 방면의 최고 권위자인 사가라 도루(相良亨) 씨의 해석을 주로 참고하고자 한다.


근세의 사도론士道論을 대표하는 것은 에도 전기의 유학자이자 병학자인 야마가 소코(山鹿素行)이다. 『야마가어록』(山鹿語類, 1665)은 그의 학설을 제자들이 모은 것인데, 이 책의 권21 「사도士道」에 그의 사도론이 체계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여기에서 소코가 강조한 것은 “자신의 직분(직업의 존재 이유)을 아는 것”이었다. 농민은 농사를 짓고 공인工人은 물건을 만들고 상인은 교역에 종사하며 각기 열심히 생활하고 있다.

무사는 “농사짓지 않고 물건을 만들지 않으며 물건을 팔지 않는 사士”인데, 만약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살려고 한다면 그것은 ‘유민遊民’이자 ‘천민’이다. 따라서 무사의 직분이 무엇인지는 무사 스스로 물어보아야 한다. 이때 타인이나 서적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무사의 직분을 자각해야 한다.

이를 통해 자각되어야 할 무사의 직분이란, 인륜(부자, 군신, 부부, 장유 등과 같은 인간관계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인도적 질서)의 도를 천하에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는 무사의 시키(職)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사의 직분은 주인을 얻어 봉공의 충忠을 다하고 친구를 사귀어 신信을 두텁게 하며 자신을 낮추어 오로지 의義를 실천하는 데 있다. 모든 인간은 그 자신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인륜도 존재할 수 없지만, 농공상은 그 일이 바쁘기 때문에 평소 도를 실천할 수 없다.

따라서 무사는 농공상을 대신하여 인륜을 실현하는 데 노력하고, 삼민三民 중에 인륜을 저버리는 자가 있으면 신속히 처벌하여 천하에 천도天道가 바르게 시행될 수 있도록 한다. 이로써 무사는 삼민의 위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무사는 문무의 덕과 지를 갖추어야 한다.


무사의 직분이 인륜의 지도자라는 자각은 당연히 스스로에게 도의적 인격의 형성을 요구한다. 제일 먼저 요구되는 것은 ‘대장부의 기상氣象’, 도의道義의 내면적 자각이다. ‘대장부의 기상’이란 경거망동하지 않는 신중함,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는 강인함, 만물을 뒤덮는 기개의 장대함이다. 이와 같은 기상을 기르는 것은 내면의 마음을 바르게 하기 위한 것이지만, 내면을 바르게 했을 때야말로 이러한 기상이 발휘되어 정착한다.

내면을 바르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근본은 이利를 버리고 의를 위해 사는 것, 다시 말해서 의연하게 도를 실천하고 정욕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청렴, 정직, 강조剛躁를 그 각론으로 제시한다. 즉 경제적인 결벽, 친소귀천親疎貴賤에 관계없이 의가 있는 바를 지키며 변하지 않는 것, 그 도의적인 강인함이다.


소코는 무사에게 도의적 인격을 요구하면서 그것을 ‘대장부의 기상’으로 표현하였다. 그가 좋아하는 표현으로 말하자면, 대장부의 기상은 ‘탁이卓爾’(우뚝하게 뛰어남)한 기상이기도 하다. 그가 제시하는 도덕적 인격이란, 자신의 정욕에 대해, 또 세속적인 것에 대해, 나아가 세상의 여러 사물에 대해 우뚝하게 뛰어난 것이었다.

이러한 탁이한 기상의 표방은 소코가 제시한 인격형성의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하루하루의 사소한 동작이나 행동에 ‘위의威儀’(위엄 있는 몸가짐)를 지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위의’는 예가 바깥으로 드러나는 형태이지만, 소코에 따르면 ‘위의’를 바르게 했을 때에는 내면의 덕성도 서서히 길러진다고 한다. ‘위의’를 바르게 하는 것에 의해서 형성되는 이상적인 도의적 인격이란, 엄숙하고 외경할 만한, 모범으로 삼을 만한 인격이다. 탁이한 기상, 엄숙하고 외경할 만한 인격이야말로 그가 이상으로 삼은 무사상武士像으로, 바꿔 말하면 고귀성의 존중이었다.


무사는 긍지, 즉 자신의 능력을 믿음으로써 생기는 자부심을 중시한다. 무사는 농공상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무사들 사이에서도 긍지를 지니고 살아가려고 했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뒤처지는 것을 싫어했던 무사들은 그 인격에 있어서도 고귀성을 표방하게 되었다.


‘위의’는 모든 행동을 조심스럽게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상생활의 모든 것에 ‘위의’ 있는 자세가 관철되어야만 한다. 보고 듣는 것, 말하는 것, 음식을 먹는 것에서부터 용모나 안색, 걷는 자세에 이르기까지 ‘위의’를 실현해야만 한다. 직분을 자각하고 인륜의 도를 자각하여 그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무사는 일상의 사소한 것에서도 ‘위의’를 무너뜨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무사된 자가 천하에 도를 실현하려는 뜻을 지녔다면, 쇼군이나 다이묘가 아닌 이상 신하로 출사하여 주군의 치국제민의 방책을 보좌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이 점에 관한 소코의 견해는 ?야마가어록? 권13~14의 「신도臣道」편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소코는 무사의 출사에 대해 4가지 유형을 들고 있다.

첫 번째는 ‘도를 행하기 위해’ 출사하는 경우로, 이 경우에는 천하․국가․인민을 위해 출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스스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인군人君이 경敬과 예를 다한 후 나서야 한다.

두 번째는 반드시 도를 실현하기 위한 것은 아니지만, 예를 다하여 부름을 받아 거절하기 어려울 경우이다.

세 번째는 부모처자를 보살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출사하는 경우이다.

네 번째는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봉공해 온 내력과 이유로 출사하는 경우이다.


그의 출사론이 이러하기 때문에 출사 후의 진퇴 또한 이에 따라 정해진다. 특히 도의 실현을 위해 출사한 첫 번째의 경우에는, 가령 주어진 지위가 높고 봉록이 많더라도 군君에 도가 없고 정치에 법이 없다면 전력을 다해 간언하여 군의 깨우침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도저히 변화가 없을 경우에는 군자된 자라면 그곳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소코가 이상으로 삼은 사도론에서 출처진퇴出処進退란 이러한 것이었다.



Ⅲ. ‘무사도’에 대해서


‘사도’가 인륜의 도를 자각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것에 비해, 떳떳한 죽음이나 죽음의 각오를 근본으로 삼는 사상의 흐름이 무사도이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하가쿠레』(葉隠)가 있다. 편저자는 미상이지만, 사가나베시마(佐賀鍋島) 번의 야마모토 조초(山本常朝)의 사상적 영향을 받아 성립하였다. 『하가쿠레』의 권1과 2는 야마모토 조초가 말한 무사된 자의 마음자세를 누군가가 1710년 이후에 기록한 것이다.


죽음에 대한 ‘사도’와 ‘무사도’의 자세를 비교해 보면, 소코는 항상 죽음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하가쿠레』는 “무사도란 죽는 일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양자는 일견 동일한 생각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소코의 경우는 무사로서 행해야 할 바 앞에서는 죽음도 피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인륜의 도를 자각하는 것을 근저에 깔고 그 실현 앞에서는 죽음도 불사해야한다고 가르치는 것으로, 이것의 전제조건으로는 죽어야 할 때에는 마땅히 그 모습에 맞게 바르고 또한 정황에 맞게 적절해야 한다는 발상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개죽음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하가쿠레』는, 사람은 누구나 생명에 대한 극복하기 힘든 집착이 있어서 마음에 빈틈이 있으면 반드시 “무사로서 해야 할 일” 등의 이유로써 자신을 속이고 행동을 정당화하면서 죽어야만 하는 순간에도 살 길을 선택하므로, 인간은 자신에게 한순간이라도 추락의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문제는 결과가 아니므로 틈을 주지 않고 죽음에 돌입하거나 항상 죽음과 밀착하여 ‘죽는 마음’으로 일관할 것을 말한다. ‘죽음을 각오하고 격하게 싸우는 것’으로 일관했을 때 부끄러움으로부터 자신을 구해 내고 충도 효도 자연스럽게 갖춰진다는 것이다. ‘사도’에서는 이비사정理非邪正을 가리는 것이 중요하지만, ‘무사도’에서는 이것을 사심私心을 숨기기 위한 구실로 보면서 오직 죽는 것으로만 순수함이 유지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도’와 ‘무사도’는 주종관계에 대해서도 서로 다르게 파악한다.

‘사도’는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아 도를 실현할 가능성이 없는 주군으로부터는 떠나라고 말한다.

이에 비해 ‘무사도’에서는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더욱더 주군 편이 되어 주군의 나쁜 점이 외부로 드러나지 않도록 하고, 주군의 나쁜 점을 자신의 책임으로 되돌리며 간언을 지속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사도’에서 주군․주가主家와의 관계는 정의적情誼的이자 절대적이다.


이와 같은 관계의 절대성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하가쿠레』의 시대에 전란의 흔적으로 남아 있던 것은 ‘겐카’(喧嘩: 무사사회에서 서로의 명예를 걸고 충돌하는 무력행위, 분쟁해결을 위한 사적인 싸움[私戰] 즉 자력구제의 관습) 정도밖에 없다. 그 원인이 길거리의 시비이든, 정치상의 의견 대립이든, 지행지知行地(가신에게 주어진 영지)의 경계를 둘러싼 것이든, 무릇 명예에 손상을 입었다고 느끼는 것에서 발생하는 여러 분쟁에 대해 무기를 사용하여 결론지으려는 행위가 ‘겐카’이다.

『하가쿠레』는 겐카에 대해서도, 아니 겐카이기 때문에 오히려 궁극적으로 ‘승패를 생각하지 않고’ ‘무턱대고 죽을 것’(死狂)을 추구하였다. 하지만 사적인 싸움은 주인에 대한 봉공과 모순된다. 사적인 싸움은 번의 질서를 흐트러뜨리고 주군의 명령에 따라야 할 목숨을 전쟁이 발생하기도 전에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주군에 대한 중대한 불의이자 불충이다.


근세에서는, 사회집단 스스로의 판단에 기초하여 실력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것은 상관(막부, 번 등과 같이 정치를 행하는 기관)을 무시하고 경시하는 행위이었고, 특히 무기를 사용하여 집단간에 겐카를 하는 것은 반역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무사 이외의 집단은 자력구제(권리를 침해당했을 경우, 법에 따른 절차를 밟지 않고 자신의 실력으로 권리를 회복하거나 실현하는 것)의 수단인 무기의 일상적 휴대와 그 사용을 금지당했다(지니는 것은 묵인). 센코쿠시대 이전과 동일하게 무장武裝에 드는 비용을 자신이 부담하는 전투자였던 무사에게도 개인적 전투행위가 금지되어 ‘겐카료세이바이 법’(喧嘩両成敗法: 겐카를 한 경우 이유를 불문하고 쌍방을 모두 처벌하는 법)이 적용되었다. 다이묘도 막부의 명령 없이 군대를 영외로 내보낼 수 없었다.


하지만 전투자로서의 무사가 존재하는 한, 한 장의 법령으로 그들의 반反단체적, 반규율적 정신이 소멸될 리 없었다. 자력구제의 능력이 있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에 무장을 허가받은 무사는 분쟁이 발생했을 때 ‘료세이바이 법’을 어기면서라도 그 능력을 실증해 보일 의무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무사사회에서는 받은 굴욕에 대해 할복을 해서라도 갚아 주지 않으면 비겁하다고 비난받는다.


야마모토 조초는 나베시마 번의 무사가 지녀야 할 마음자세로서 4개의 서원誓願을 들었다.

그 첫 번째는 ‘무도武道로서, 타인보다 뒤떨어지지 않도록 할 것’이고 두 번째는 ‘주군이 요구하는 일에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것’인데, 이 양자 사이의 모순이 바로 겐카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하가쿠레』에는 서로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논의도 적지 않은데, 겐카의 경우 마지막 순간에 우선시될 수밖에 없는 것은 전투자의 윤리이므로, 결국 첫 번째가 우선시된다.


이렇듯 때때로 모순을 드러내는 봉공인(주군을 따르는 종자, 가신)으로서의 무사와 전투자로서의 무사의 삶의 태도에 대해, 조초 자신은 죽음에 대한 광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이를 관념적으로 통일하였다. 봉공하는 경우나 겐카의 경우 모두 죽음에 대한 광적인 태도와 관련된다. 이처럼 죽음에 대해 앞뒤 가리지 않는 광적인 태도가 봉공인으로서의 무사라는 측면에서 추구될 때에는 사私를 철저히 부정하는 무사無私․무상無償의 헌신(남몰래 애태우는 짝사랑으로 비유된다)으로 나타났고, 전투원으로서의 무사라는 측면에서 추구될 때에는 생명에 대한 집착을 단호히 극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궁극적인 것은 무사無私, 순일무잡純一無雜(불순물이 없이 순수함, 올곧아 거짓이 없음)이다. “무사도란 죽는 일을 찾아내는 것”의 추구는 무사無私의 헌신, 순일무잡성의 추구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무사도도 무사된 자의 위엄을 중시했다. 센코쿠시대의 무장은 각기 하나의 성城을 경계로 대치하였는데, 이것이 무사 일반의 기본적인 자세로 되었다. 같은 편에 대해서도 무사는, 말하자면 정신적으로 자신의 성에 들어앉아 타자를 상대했다. 무사도가 긍지를 중시한 것도 무사의 이러한 자세에서 유래한다. 서로에게 조금도 뒤처지지 않으려는 것에 무사가 중시한 긍지의 근본이 있었던 것이다.


항상 승부를 준비하며 살아가는 무사에게는 타자에 대한 승리가 요구되는데, 이것은 반드시 무력이나 완력으로 타자를 압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무사가 중시한 것은 정신적인 우위였으며, 더욱이 자신을 극복하는 자야말로 비로소 타자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도’에서는 인륜의 도를 철저히 자각했을 때, 무사도에서는 죽음의 각오를 철저히 했을 때, 자연스럽게 타자를 압도하는 강인함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무사도에서도 이 강인함은 용모, 언어, 행동거지의 측면에서 자연스럽게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예의바름도 무사의 강인함이 표현되는 것 중의 하나이다. 무사사회에서 예의의 존중은 단순히 봉건사회의 계층적 질서에 대한 순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가쿠레』에는 전체적으로 죽음이나 광狂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고, 무사無私의 헌신이 광적으로, 때로는 어두운 정념으로 주장되고 있다. 일단 읽어 보면 괴이하다는 인상을 받는데, 그 사상의 유포는 사가나베시마 번의 범위를 넘지 못하는, 당시에 있어서는 고립된 주장이었다.


무사도에 대해 언급한 서적 중에는 소코의 제자였던 병학자 다이도지 유잔(大道寺友山)의 만년작 『무도초심집武道初心集』이 있는데, 유교적인 사도士道의 입장을 취하면서도 센코쿠시대 무사들의 기풍을 되살려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이 책의 영향이 오히려 더 컸다.

이 책은, 무사된 자는 정월초하루 아침부터 섣달그믐날 밤까지 밤낮으로 항상 죽음을 준비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으로 시작하고, 결론에 이르러서는 무사도에 관한 세상 사람들의 평가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충(주군에 대한 忠勤), 의(節義의 지조), 용(용맹한 기상)의 세 가지로 집약된다고 하면서 이 세 가지 덕을 겸비한 자야말로 최고의 무사라고 적고 있다. 또한 주군의 명을 절대적으로 존중할 것을 설파하면서 주군에게 조금이라도 반론을 제기하는 태도는 둘도 없는 대죄임을 강조하고, 사항이 무사도의 근간과 관련된 문제일 경우에는 적절한 절차를 밟은 후에 경위를 철저히 해명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이 점도『하가쿠레』와 동일하다.



Ⅳ. 동아시아와 역사의 문맥에서 본 무사의 사상


이상, 주로 사가라 씨의 해석을 참고로 하여 대표적인 사도론과 무사도론의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이제 논하려는 것은 전자를 동아시아, 후자를 일본의 통사라는 보다 넓은 문맥 속에서 보았을 때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이번 심포지엄에 참가한 한국과 중국의 선생님들에게는 무사도의 기괴함은 물론이고, 유교에 기초한 ‘사도士道’라는 무사의 윤리사상도 매우 이상하여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말할 필요도 없이 유교는 법이나 무력과 같은 강제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예악禮樂(넓은 의미의 文)이나 시詩(좁은 의미의 文)로 사람들의 도덕심을 향상시켜 사회의 질서와 조화를 실현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이 사상의 근본은 ‘힘’에 대한 철저한 기피일 것이다. 따라서 ‘무’나 ‘무인’은 경시되었다. 힘의 권화權化인 ‘무’는 덕의 반대물이고, 무인은 ‘의리(도의․절조)를 모르는 존재’로서 거칠고 세련되지 못하며 교양도 부족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의 정치라는 것이 이利를 좇느라 교양을 쌓을 틈이 없어서 덕을 체득하지 못한 서민 또는 이적夷狄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이상, 무위無爲․무정부無政府는 유학자가 취할 길이 아니다.

천자의 지휘 아래 중앙과 지방에 엄연히 정부가 조직되고 백관유사百官有司가 완비되어 있는 것은 성인이 정한 장전章典에 따른 것이다. 또한 힘을 대표하는 형刑이나 병兵도 결여되어서는 안 된다. 군자의 덕에 기초한 치국평천하의 핵심은 형이나 병을 설정하되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점에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 세계의 주변에 있었던 일본에서는 고대 이후 중국대륙이나 한반도로부터 율령제라는 국가지배제도는 물론이고 고도의 사상․문화․과학기술에 이르기까지 실로 많은 것을 배웠다. 하지만 아직 미개를 극복할 수 없었던 일본에서는 씨족제가 온존하였고, 이어서 귀족제가 오랫동안 그 생명력을 유지하였다.

고대 일본의 관료제에서 귀족에게는 조상의 지위에 따라 자손이 일정한 위계(또는 품계)를 얻을 수 있는 음위蔭位의 특전이 있었다. 당나라나 고려의 음서제도에 비해 그 적용범위는 좁지만, 수여된 음위는 매우 높았다. 관료등용법으로서의 과거科擧는 마지막까지 채용되지 않았고, 유교에 대한 이해나 보급도 충분히 이뤄지지 못했다. 일본 고전․고대 문화의 번창기로 일컬어지는 헤이안(平安)시대(8세기 말~12세기 초)의 지배층이었던 문인관료귀족을 보더라도 유교를 정신의 기초로 삼았다고 평가할 만한 고위 귀족은 몇 되지 않는다.

일본의 고대․중세 사회에서 유교는 유학, 그것도 주로 박사가博士家의 가업이라는 형태로밖에 존재하지 않았고, 개인과 사회를 규율하는 강고한 규범까지는 되지 못했다.


따라서 일본처럼 문文(또는 儒)이 미확립된 사회에서는 무사나 무武를 명확히 마이너스 가치로 규정하여 유연하게 체제 내로 흡수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기 힘들었다. 물론 일본의 헤이안시대도 중국을 본뜬 일종의 문관우위사회로서, 살생에 대한 기피도 있어서 무가 활개를 펼쳤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를 즐기는 귀족이 나타나기도 하고, ‘살생계殺生戒’를 제창한 불교나 사원사회에서조차 무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서 무력을 보유하고 행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중국처럼 무를 천한 것으로 보는 정신이 정착되거나 당연시되지 않았다.


무나 무사를 기피하지 않았던 일본사회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후 무가武家가 정치권력으로 발전하는 것이 두드러져서, 마침내 무사가 명실상부한 치자治者로 군림하는 근세사회를 맞이한다.

4대 쇼군 이에쓰나(家綱) 때부터 이른바 문치정치로의 전환이 발생하고, 대외적으로는 쇄국, 대내적으로는 ‘도쿠가와의 평화’(Pax Tokugawa)가 실현되어 군사집단은 무력을 동결당했다.

치자로서 실제 정치를 담당하는 것은 일찍이 ‘겁쟁이’라 경시되어 왔던 ‘문관’ 즉 실무행정관료들이었는데, 근세는 무사의 정권이므로 치자의 주된 역할을 무사가 담당하게 된다. 이것은 전투자가 기본이었던 지금까지의 무사의 존재양태에 심각한 수정을 요구했다. 그리고 근세 후반 이후는 유교가 모든 학문 및 사상과 습합習合하면서도 어느 정도 사회에 침투한 시기이다. 이에 따라 본래 무의 대립물이었던 유교가 아이러니하게도 무사가 치자임을 자각하도록 재촉하는 교양체계로 변화해 갔다.

이런 의미에서 유교를 통해 스스로를 엄하게 규율하는 무사의 모습은 실상이라기보다는 역사의 요청이 만들어 낸, 그들이 추구해 가야할 목표였다. 예를 하나 들자면, 야마가 소코나『무도초심집』은 모두 무사된 자는 밤낮으로 항상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유교에서는 군부君父에 대한 어떤 깊은 애통이 있더라도 그것을 예禮로 억제하고 ‘성性을 흐트러뜨리지 않도록’ 가르친다.

멱라汨羅에 몸을 던진 중국 굴원屈原의 자살이 종종 유감스럽게 여겨지는 이유는 이러한 생각에 따른 것이다. 유교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려思慮, 그리고 사려를 통해 중용을 지키는 것이다(불교에서도 동일하지만). 죽음을 서두르는 것은 가장 직정경행直情径行한 것으로, 융적戎狄의 미학에 불과하다.

“사士는 자신을 알아주는 자를 위해 죽는다”라는 것은 협자俠者(협객, 仁侠의 무리)의 세계에서나 통용되는 문구에 불과하다(俠과 儒는 대극적 개념). 사실 역사를 되돌아보더라도 사직社稷(국가)을 위해 순직한 신臣이라 일컬어질 만한 인물을 찾아내기란 매우 어렵다.


이상과 같은 유교의 기본 성격은 실제로 역사․사상사를 전공하는 일본인들에게 그다지 자각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소코와 같은 최고의 유학자가 주창한 사도론조차도 유교의 설교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무사가 지배세력으로 되어 간 일본 역사의 특수성을 전제로, 위정자로서의 마음가짐과 행동을 평화의 시대답게 유교적으로 정제精製(refine)한 것이었다고 위치지어야만 한다.


한편 전투자로서의 마음자세에 뿌리를 둔 무사도는 근세의 사회적 현실에 뿌리를 둔 것이었을까? 사실 무사도란 용어를 사용한 예는 근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그리고『하가쿠레』가 윤리사상으로 폭넓게 퍼지지는 못했다는 것도 이미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다.

무사도를 윤리사상의 대상으로 삼아 엄밀하게 학문적으로 논한 연구자로는 후루카와 데쓰시(古川哲史) 씨가 있는데, 그는 “이 시대(근세)에 이 용어는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 사용했다”라고 단정하였다. 용어 사용의 많고 적음 자체가 개념이나 실천으로서의 보급이 넓고 좁다는 것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중요한 지적이다.


최근 무가사회사의 전문가 가사야 가즈히코(笠谷和比古) 씨는 후루카와 씨의 단정을 상대화하기 위해 무사도라는 용어의 용례를 보다 넓고 많은 근세의 저작물 속에서 채록하였고, 그 결과 무사도라는 용어의 용례가 많이 나오는 시기는 17․8세기이고 근세 후기에 이르러서는 덕의徳義적 성격을 함께 지니게 되며 무사도론은 사도론 속으로 병합되어 가면서 쇠퇴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근세 중기 무렵에 들어, 현실적으로는 전투에 의한 죽음의 위험이 사라지고 무사사회는 안일해졌다. 따라서 무사임을 자부하고 세간의 풍조를 걱정하는 자들은 전란기 무사들의 삶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가쿠레』의 “무사도란 죽는 일을 찾아내는 것”이라는 선언은 태평시대이기 때문에 오히려 떳떳한 죽음이 한층 과격한 형태로 모든 무사의 마음자세와 삶의 자세로 제시되었음을 말해 준다. 하지만 이러한 이의제기도 결국은 수레 앞에 맞서는 사마귀처럼, 무력을 동결당한 상태가 지속되는 한 지속되지 못하고 쇠퇴해 버리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문제는 무사도가 근세 무사사회에 현저하게 퍼지지 않았다는 점만이 아니다. 과연 본래 근세 이전 전투자의 기풍과 마음자세가 『하가쿠레』나 『무도초심집』의 이해와 동일한 것이었을까. 무사가 9세기에 귀족사회의 외진 곳에서 등장하여 마침내 스스로의 독자적인 삶의 방식을 자각했을 때, ‘쓰와모노(兵)의 도’, ‘활과 화살을 지닌 자의 관례’ 같은 언어가 만들어졌다. 전자는 직업인으로서의 무사가 지녀야 할 능력과 관련된 언어이지만, 후자는 “대장군의 앞에서는 아버지가 전사하고 자식이 죽더라도 주저하지 않고 나아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다”라는 의미이다.

이후에도 오랜 전란의 시대가 이어졌고, 무사는 죽음과 함께했다. 죽이는 것뿐만 아니라 죽임을 당하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이상, 죽음에 대한 각오가 무사의 자기단련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투자로서의 명리名利에 관심이 없는 무사는 거의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무사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가장 큰 동기는 명리에 대한 갈망이다. 명리의 ‘명名’은 세상으로부터 일컬어지는 명예나 평판이고, ‘리利’는 이욕이나 이득이다. 전쟁터에서 발군의 수완을 발휘하여 주군으로부터 그 활약에 걸맞은 은지恩地나 하사품을 받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몸값이 어느 정도인지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낸 것, 이것이 바로 명名과 일체화된 리利이다.


긍지나 자시自恃의 기개로 가득 찬 무사가 바라는 것, 이것이 명리이다. 무사가 명리를 초월한 경지에 도달해 버렸다면 이미 무사라는 존재양태를 벗어나 버린 것이다. 사욕을 부정하고 무사無私를 바랐던 야마모토 조초조차 『구켄슈』(愚見集)라는 저서에서 “명리를 생각하는 봉공인은 봉공인이 아니고, 명리를 생각하지 않는 봉공인은 봉공인이 아니다”라는, 예로부터 전해 온 경구를 소개하고 있다.


실제로 센코쿠시대 이전의 무사는 이利를 밝히는 탐욕으로 인해 발생하는 배신적인 행동 또는 도의적으로 퇴폐한 발언을 얼마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센코쿠다이묘(戦国大名) 아사쿠라 씨(朝倉氏)의 일족이었던 한 역전의 무장은, 무사는 이기지 못하면 아무것도 안 되므로 ‘개’라 불리든 ‘짐승’이라 불리든 상관없이 이기기 위해서는 뭐든지 하라고 말한다. 『무도초심집』의 야마모토 조초의 할아버지는 “주저하지 말고 거짓말을 해라. 도박을 걸어라”라고 말했고, 조초의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항상 “1조(町: 109미터) 걷는 사이에 일곱 번 거짓말하는 것이 남자”라고 설교했다고 한다. 근세에는 “사람을 찔러죽이고 금품을 빼앗는 것은 무사의 관습”이라는 속담조차 있었을 정도이다.


조초의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일부러 과장되게 말했는지도 모르지만, 이렇듯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언설은『하가쿠레』시대에도 여전히 많았다. 저명한 유학자 가이바라 에키켄(貝原益軒)은『하가쿠레』가 준비되는 시기와 거의 동일한 시기에 출판된 『문무훈文武訓』에서 당시 병법가의 언설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일본의 무도武道는 유학자들과 같이 인의충신仁義忠信의 도와 같은 그럴듯한 것을 말해서는 안 된다.

거짓으로 상대를 속이지 않으면 싸움에 이길 수 없다. 쓰와모노(兵)는 위도僞道이므로, 경우에 따라 같은 편을 속여서라도 공을 빼앗거나 적국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빼앗는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이것이 일본의 무도이다. 일본은 무국武國이므로 중국처럼 정직한 방법으로는 공을 세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풍속에도 맞지 않다."


"마음이 솔직하지 않고 재빨라 방심하지 않고 타인이 세운 공을 빼앗아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방식이 일본의 무도이다."


에키켄도 작전 중 하나인 모략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전쟁의 방식, 즉 용병과 전투의 방법만 배우고 유학 등 제대로 된 한적漢籍을 배우지 않은 자들이 도리를 제대로 모르는 것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무도武道’는 무武와 관련된 행위나 동작 또는 그 기능을 의미하는 언어와 도道가 합쳐진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무사의 심적 태도도 포함한다. 때문에 그 내용은 당시 무사가 지녀야 할 도리 중의 하나를 제시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무사들에게 죽음은 과연 어느 정도까지 윤리적인 자각을 수반하는 것이었을까?



Ⅴ. 근대 무사도의 탄생


한동안 잊혀졌던 무사도라는 용어가 되살아나 새로운 내용으로 제기된 것은 무사 신분이 폐지된 근대에 들어서였다. 1885년 무렵부터 조금씩 그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은 신문기사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20세기의 직전이 되자 순식간에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은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의 『무사도, 일본의 혼』(Bushido, The Soul of Japan)이다. 니토베는 농업경제학자였으나 나중에는 교육자로 활약하였고, 국제적으로는 국제연맹 사무국 차장 등을 역임했다.


이 책은 1899년에 우선 미국에서 출판되었다. 무사도의 원천, 의義, 용기, 인仁, 예禮, 성誠, 명예, 충의, 교육, 극기, 자살, 도刀, 부인의 교육, 무사도의 감화와 미래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무사도는 오로지 ‘무인 계급 및 신분에 걸맞은 의무’, ‘무사의 도덕체계’로 설명되고 있다.


니토베의 영문 저서는 무사에 대한 구미인의 호기심에 부응하였고, 그 결과 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갔다. 이와 동시에 『무사도, 일본의 혼』이라는 제목으로 1900년에 일본어로 번역되어 쇄를 거듭하였다. 이 책은 유럽의 역사와 문학을 다수 인용하면서 무사도를 해명했기 때문에 서구와 일본의 비교문화론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덕목은 사도와 다소 비슷해 보이기는 하지만, 근세에 존재했던 사도나 무사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본래 그는 일본의 역사나 문화에 대해 그다지 잘 알지 못했다. 『하가쿠레』를 읽은 흔적도 전혀 없다. 니토베가 주장하는 무사도는 하잘것없는 사실史實과 습관, 윤리․도덕의 단편들을 그러모아서 머릿속에 있는 무사상을 과장하여 만들어 낸 일종의 창작이다. 무사의 사상과 본질적으로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니토베는 이것이 서양의 기사도와 흡사하다고 했는데, 그의 무사도가 기사도를 유추하여 만들어진 것이므로 어쩌면 당연한 평가라고도 할 수 있다. 니토베의 무사론에서 무사도의 덕목을 의義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도 그리스도교의 ‘의義의 도’와 중첩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도나 그리스도교와 중첩시켜 설명하는 것은 내외적으로 일본인이 서양인에 필적하는 우수한 문명민족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구미를 뒤쫓아서 종국에는 앞서가는 것을 목표로 했던, 근대 일본의 지식인이 지녔던 심성(mentaliy)과 무의식의 콤플렉스를 읽어낼 수 있다.


열렬한 퀘이커(Quaker)교도였던 니토베는 퀘이커가 취했던 입장, 즉 만인에 내재하는 빛에 대한 묵상의 입장이 우주의 생명과의 일체를 설파하는 동양사상과 통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사도를 유추하여 만들어 낸 무사도를 일본의 바람직한 정신적 전통으로 삼고, 그리스도교를 통해 이것을 육성시키는 동서 문명 교류의 방법을 생각했다. 니토베의 무사도론을 “무사도의 탈을 쓴 그리스도교”라고 평가하는 것(菅野覺明)은 그 논리가 구미인에 대한 아첨임과 동시에 그리스토교가 충군애국의 도덕에 반反한다는 국가주의자들의 공격에 대처하기 위함이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니토베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는 결코 무사도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었다.

 

니토베의 책은 반反서구화주의시대를 지나 청일전쟁 후 내셔널리즘이 발흥한 시대이자 호전적인 풍조가 만연한 시기에 간행되어,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청국 및 세계의 대국 러시아에 승리한 이유를 알기 위한 서책으로 국내외에서 널리 읽혔다. 갑작스럽게 일본이 크게 보이기 시작한 이 시대적 배경이야말로, 이 책의 내용에 어떤 한 종류의 진실성을 부여하고 외국인에게는 ‘일본인’을 이해시키고 일본인에게는 자긍심을 만족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한편, 니토베의 저서와는 다른 방향에서 무사도의 융성을 추적해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쪽이 근대 무사도의 주류였다. 주지하다시피 근대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권위주의적 군국국가로서, 대외팽창을 위해 전쟁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군인의 본분은 천황에게 충절을 바치는 것에 있다고 한 군인칙유(1882년)나, 국민도덕의 기본인 충은 효 이하의 모든 덕목과 일치한다고 가르친 교육칙어(1890년) 등이 군대와 학교를 통해 국민에게 주입됨으로써 충군애국과 진충보국의 사상이 퍼져 갔는데, 그 과정에서 무사도가 이용되었다.

본래 무사도에서는 주군인 봉건군주와의 사적 관계였던 ‘충’의 덕목이 국가(이것의 인격화가 천황)와 모든 군인 및 국민의 공적인 관계로 치환되고 나아가 천황에 대한 심정적 일체화의 연결고리로 이용되었으며, 사신捨身이나 죽음의 각오를 강조하는 것도 국가나 천황을 위한 멸사봉공, 전사戰死의 미화 등으로 이용되어 갔던 것이다. 특히 중일전쟁 이후 이러한 경향은 현저해졌다.


그 극치는 1941년 1월, 전쟁을 독려하기 위해 도조 히데키(東条英機) 육군대신이 통달通達한 훈유訓諭인데, 이것을 전진훈戦陣訓이라 한다. 중일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전쟁종결의 전망이 보이지 않자 중국을 점령한 일본군 장병의 사기가 저하되어 간 것이 그 작성 동기였다.


이 훈유는 서문과 3부의 본훈本訓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훈의 제1부에서는 ‘황군’(천황의 군대)의 올바른 자세, 제2부에서는 군인이 지켜야 할 도덕, 제3부에서는 전쟁터에서의 유의사항을 적고 있다.

필승에 대한 신념, 복종심, 사생관死生觀,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것 등 『하가쿠레』에서 제시한 무사도정신에 가까운 내용으로 되어 있어, 군인칙유의 ‘전쟁판’이라고도 일컬어졌다.

특히 “살아서는 포로의 수치를 겪지 말고, 죽어서는 죄화罪禍의 오명을 남기지 말라”라는 구절은 절대시되어, 포로가 된 장병은 귀환 후 반드시 자결을 강요당했다. 이와 같은 포로 금지와 전사 강요가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각지에서 발생한 일본군의 무의미하고 비참한 ‘옥쇄玉碎’(문자 그대로 ‘전멸’의 미화)를 불러일으켰다.


이상, 무사도의 내용과 역사에 대해 개괄적으로 알아보았다. 처음에 언급하였듯이 필자는 무사도를 국민도덕이나 일본인의 정신적 토대인 것처럼 평가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무사도는 무사사회 내에서만 통용되는, 보편성을 지니지 않은 사상이고, 근대의 무사도는 E. 홉스봄이 말한 ‘만들어진 전통’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시기를 포함한 대일본제국의 전시기에 걸쳐 균질적이면서 절대적으로 모든 일본인을 구속했던 것이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은 전전戰前의 무사도와 거의 동일시되었던 ‘야마토 정신’(大和魂)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야마토 정신’이라는 용어가 처음 나타난 것은 11세기 초기의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로, 여기에서는 한재漢才에 대한 화혼和魂, 즉 학문(漢學)적 지식에 대해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기지機智, 세상 살아가는 재능, 실생활상의 지혜 등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후 약간의 저서를 제외하고는 ‘야마토 정신’이라는 용어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근세에서도 중반 정도가 되어서야 새삼스럽게 가모 마부치(賀茂真淵)나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에 의해 ‘야마토 정신’(야마토 마음[やまとごころ])이 언급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자연 그대로의 솔직하고 쉬우며 온건한 심정, 연약한 분위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노리나가의 유명한 “사람들이 시키시마(敷島)의 야마토 마음(大和心)을 묻는다면, 아침 해(朝日)에 풍기는 산벚꽃(山櫻花)이라 답하리”라는 시구도 원래는 그가 생각한 우아하고 순일한 민족성을 노래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침내 이 시에서는 빠르게 지는 벚꽃만이 강조되었다. 에도막부 말기에 존왕양이론이 힘을 얻어 가는 과정에서 ‘야마토 정신’은 무단적인 국수사상으로 이용되어, 메이지시대부터 1945년 패전에 이르는 동안 일본국민은 ‘야마토 정신’이라고 하면 일본민족 고유의 정신, 천황제 국가를 지탱하는 정치사상의 근저를 이루는 것이라고 배웠으며, 전쟁터에서는 무사도에 입각하여 용맹하게 싸우다 순결하게 죽으라고 배우고 이것을 최고의 정신가치로 받아들였다.


당연하게도 무사도는 전후 일본에서 다시 망각된 사상이 되었다. 필자와 비슷한 세대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전쟁의 포기와 주권재민,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일본국헌법이 정신의 핵심이 되고, 필자보다 젊은 사람들 중의 일부에게는 또한 별도의 가치관이 대두하고 있는 듯하다. 필자는 무사도나 ‘야마토 정신’만이 아니라, 일본사 전체를 관통하며 일본인 전체의 정신적 기둥이 되어 온 어떤 사상이나 윤리를 제시할 수 없다.


본래 인구가 많고 계급에 의한 이해대립이 노골화된 고도로 발달한 사회에서는 특정한 계층․집단․세대를 위한, 또는 어떤 한 시기에만 통용되는 가치관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시대를 통해 모든 사회가 공유하는 가치관이 존재한다는 것은 국민국가가 만들어 낸 환상이자, 국가지배층이나 여기에 추종하는 이데올로그집단이 그러길 바라는 것 이상의 것이 아니다. 결국 근세의 무사도나 근대의 무사도도 그러한 사례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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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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