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홍(朴守弘)
1588(선조 21)∼1644(인조 2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언유(彦裕). 할아버지는 증 좌승지 희민(希閔)이고, 아버지는 정실(鼎實)이며, 어머니는 현령 이민선(李敏善)의 딸이다. 6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선산 외가에서 자랐다.
1618년(광해군 10)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承文院權知副正)에 보임되었으며, 전적(典籍)을 거쳐 예조정랑으로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강화로 호종하였으며, 난 후에 자진하여 금구현령(金溝縣令)으로 나가 민심을 수습하고 전쟁 복구에 힘썼다.
그 뒤 예조참의·평양부서윤·지평(持平)·장령(掌令)·온성부사를 역임하고 다시 병조참지·좌부승지·형조참의를 지낸 뒤 경주부윤으로 부임, 임기를 마치고 상주에서 죽었다.
신도비와 재실 봉곡재
묘역 입구에 세워져 있는 경주부윤 박수홍신도비(좌)와 충청도관찰사 박천형신도비(우)
경주부윤박수홍신도비
묘역전경
박진환의처선산김씨묘-뒤로 경주부윤 박수홍의 묘및 박수홍의 아버지 박정실(朴鼎實)묘가 보인다
경주부윤박수홍 묘 전경
조선국통정대부수경주부윤경주진병마절제사밀양박공휘수홍지묘/배증정부인연일정씨부좌
박수홍의 묘갈은 청음 김상헌선생이 찬하고 수북 김광현이 전서하였으며 효종의 사위 청평위 심익현이 썼다
박수홍 묘갈명-청음 김상헌 撰
경주 부윤(慶州府尹) 박공(朴公)이 어사(御史)가 되었을 때 나는 대부(大夫)가 되어 대각(臺閣)에 모여 만나보게 되었다가 차질이 생겨 만나보지 못하였다. 그 뒤 10년이 되어 공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고 또 3년이 되어 그의 손자 박중휘(朴重輝) 등이 양양 부사(襄陽府使) 이상일(李尙逸)이 저술한 행장(行狀)을 가지고 나에게 찾아와 묘갈명을 써달라고 요청하였다. 아! 내가 비록 공을 만나보지 못하였으나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생사간(生死間)에 달리 볼 수 있겠는가?
삼가 살펴보니, 공의 휘(諱)는 수홍(守弘)이고 자(字)는 유언(裕彦)인데, 신라(新羅)의 후손으로 밀성(密城, 밀양(密陽))에서 관적(貫籍)을 두었다가 후대에 선산(善山)에서 살았다. 고려(高麗) 때에 상서 복야(尙書僕射) 박언인(朴彦仁)이 있었고 그 뒤 대대로 의관(衣冠)이 나왔다. 증조 박응종(朴應宗)은 연안 도호부사(延安都護府使)를 지내고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의 벼슬을 추증(追贈)받았으며, 할아버지 박희민(朴希閔)은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고, 아버지 박승실(朴昇實)은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으니, 양대(兩代)에서 이루지 못한 것이 자손으로 돌아가 이루어졌다. 어머니 성주 이씨(星州李氏)는 현령(縣令) 이민선(李敏善)의 딸인데, 만력(萬曆) 무자년(戊子年, 1588년 선조 21년) 윤6월 3일에 공을 낳았다.
공이 숙성하여 6세에 아버지를 여의었을 때 스스로 슬퍼할 줄 알아 어리다는 이유로 상례(喪禮)를 폐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따라 비안현(比安縣) 관사(館舍)에 사는 외가에 가서 의지하고 살았다. 명(明)나라에서 왜적(倭賊)을 정벌하러 나온 병력이 비안현의 주변에 이르렀을 때 마침 현감이 있지 않아 명나라 군사들이 난폭하게 약탈을 자행하자, 사람마다 두려워서 몸을 숨기었다. 공은 그때 나이 어리고 외가의 아이는 세 살이었다. 그런데 공은 두려워하지 않고 찾아가 현감이 없다고 고하니, 명나라 장수가 어린 공이 민첩한 것을 보고 매우 기특하게 여기어 칭찬하기를, “후일 귀인(貴人)이 될 것이다.” 하고 곧바로 영을 내려 금지하였다. 이윽고 외가가 비안현을 떠나자 공이 선산 옛집으로 돌아왔다. 이보다 앞서 승지공(承旨公, 박희민)의 아우 직장(直長) 박희증(朴希曾)이 아들이 없어 그의 부인 노씨(盧氏)와 같이 참판공(參判公, 박승실)을 아들처럼 길렀으므로 공도 어려서부터 그 집에서 자랐다. 이때에 이르러 할머니 안인(安人) 노씨(盧氏)가 생존하여 어머니 성산 부인(星山夫人)과 같이 살았으므로 공이 어른 두 분을 모시었다. 병란(兵亂)을 겪은 뒤에 몸소 집안 살림을 맡아 웃어른을 받들고 아랫사람을 어루만지며 생활이 쪼들리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남은 힘으로 과거 공부를 하였는데, 그의 뜻은 부모를 영광스럽게 못하면 그만두지 않으려고 하였다.
정사년(丁巳年, 1617년 광해군 9년)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도성의 과장(科場)에 나갔는데, 간당(奸黨)들이 국모(國母)를 폐위하는 의논에 빌붙어 생도들을 협박하여 상소를 올려 협조하도록 하였으나 공이 동지 몇 사람과 같이 굳게 참여하지 않고 종적을 숨겨 돌아보지 않았다. 무오년(戊午年, 1618년 광해군 10년)에 문과(文科) 을과(乙科)에 합격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보임되었는데, 어버이를 위하여 외직을 요청해 성현 찰방(省峴察訪)이 되었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에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시묘(侍墓)살이를 하면서 상례를 극진히 지켰다. 상복을 벗자 관례에 따라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다가 다시 예조 좌랑(禮曹佐郞)이 되었고 그 이듬해에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여 사관(史館)의 기주관(記注官)을 겸임하였다.
정묘년(丁卯年, 1627년 인조 5년)에 호란(胡亂)이 일어나자 어가(御駕)를 호위하고 강도(江都, 강화(江華))로 들어갔다가 화의(和議)가 이루어지자 조정에 있는 것이 즐겁지 않아 금구 현령(金溝縣令)으로 나가 부임해 본즉, 정사가 어지럽고 백성이 흩어져 고을의 모양이 말이 아니었다. 공이 마음을 쏟아 다스려 폐단이 제거되자 백성들이 돌아왔으므로 결국 회복되었다고 보고하였다. 그사이 학궁(學宮)에 나가 보고 허물어진 것을 민망히 여겨 좋은 곳으로 이건(移建)하여 깨끗하게 일신(一新)한 다음 고을 자제들 중에 준수한 자들을 선발하여 방도 있게 가르치자 찬란하여 볼만하였다. 부임한 지 4년 만에 아들의 상(喪)을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가자, 백성들이 추모하여 송덕비를 세웠다. 그 이듬해 다시 예조(禮曹)로 들어갔다가 복잡한 업무를 잘 다스린다고 하여 평양부(平壤府) 서윤(庶尹)으로 발탁되었다. 평양은 서쪽 관문의 대로(大路)에 위치해 있어 전령과 사신의 왕래가 빈번하여 응접하기에 겨를이 없었는가 하면 간교한 관리와 송사를 맡은 관원이 법을 교묘하게 꾸며 서로 속이고 엄폐하였으므로 가장 다스리기 어렵다고 소문이 났다. 공이 마음을 가다듬어 분석하고 판단을 내려 쌓인 문건이 씻은 듯이 처리되어 억울하게 적체된 일이 없어지자, 인정이 만족스러워하였다. 그런데 공을 좋아하지 않은 봉사(奉事)의 모함을 받아 의금부(義禁府)로 붙잡혀 갔다가 일이 밝혀져 곧바로 풀려났다. 이보다 앞서 평양의 관리와 백성들이 공이 붙잡혀 간다는 말을 듣고 길가에 서서 울면서 옥중(獄中)에서 쓸 비용을 후하게 보냈는데, 공이 풀려나와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되돌려 주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관리와 백성이 준 것은 할 말이 있는데 왜 꼭 받지 않는단 말인가?”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사양하거나 받을 때 의리가 있는데, 일이 처음과 달라졌으므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오래 되지 않아 다시 예조로 들어갔다가 이윽고 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로 승진하였고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전직하였다.
이때부터 항상 현요직(顯要職)에 있었다. 그사이 잠시 송도 경력(松都經歷)으로 나갔다가 열흘이 채 안 되어 소환하여 장령(掌令)으로 승진시키자 누차 사양하고 누차 임명되어 대각(臺閣)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는데, 법을 견지하고 일을 논하여 자못 옛날 어사(御史)의 기풍이 있었다. 시강원(侍講院)에서는 문학(文學), 필선(弼善)을 역임하고 성균관(成均館)에서는 직강(直講), 사성(司成)을 역임하고 시(寺)에서는 종부시 정(宗簿寺正), 태복시 정(太僕寺正)을 역임하고 사간원(司諫院)에서는 정언(正言)을 역임하였다. 그때 마침 변방의 우려가 있었는데, 추천한 사람의 말을 받아들여 온성 부사(穩城府使)에 임명되어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다. 공이 관직의 내외(內外)와 임지(任地)의 난이(難易)로 뜻을 변치 않고 강력하게 스스로 가다듬어 군정(軍政)을 쇄신하는 한편 상환하지 못한 묵은 곡물을 탕감하고 외로운 백성을 보살피니, 군사와 백성이 모두 기뻐하였다. 이에 공자(孔子) 사당을 알현하고 몸소 제전(祭奠)을 드리면서 비루한 풍속을 일신(一新)한 다음 기울어지고 허물어진 곳을 수리하지 않은 전각(殿閣)이나 옛날의 제도에 맞지 않는 제기(祭器)를 모두 새롭게 단장하거나 바꾸니, 온성이 일시에 변방 고을의 으뜸이 되었다. 무인년(戊寅年, 1638년 인조 16년)에 임기가 차 돌아오자 금구현을 떠날 때처럼 백성들이 비석에 글을 새겨 미덕을 칭송하였다.
병조(兵曹)로 들어와 재차 참지(參知)가 되었다. 그리고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이르기까지 주야로 게을리하지 않았고 휴가를 청하여 스스로 안일을 취한 적이 없었으므로 하교(下敎)하여 칭찬하였다. 그 이듬해에 형조 참의(刑曹參議)를 거쳐 경주 부윤(慶州府尹)에 임명되었는데, 그 품계는 2품이었다. 이에 은전(恩典)을 미루어 3대에게 벼슬을 추증(追贈)하였으므로 고장의 사람들이 영광스럽게 여기었다. 그때 마침 거듭 흉년이 들어 굶어 죽은 백성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으므로 공이 공사간(公私間)에 저축된 곡식을 모두 풀어 힘을 다해 구휼하여 살린 사람이 매우 많았다. 부임한 지 3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낙동강(洛東江) 위에다 초가를 지어 놓고 여생을 보내려고 하였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몸이 야위기 시작하여 판결사(判決事), 좌승지(左承旨)에 임명하는 명이 있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고 의원을 찾아가 치료를 받다가 결국 상주(尙州)의 객사(客舍)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때는 숭정(崇禎) 갑신년(甲申年, 1644년 인조 22년) 3월 10일이었고 향년은 57세였다. 이해 5월 13일에 선산(善山) 금오산(金烏山) 북쪽 다복동(多福洞) 남쪽으로 향한 자리에다 장례를 치렀는데, 부인 정씨(鄭氏)는 같은 자리에 따로 묻혔다.
부인의 관향은 연일(延日)이고 아버지는 정유성(鄭維成)인데, 고려(高麗)의 명신(名臣)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이고 군수(郡守) 덕수(德水) 이우(李瑀)의 외손녀이다. 군수는 바로 율곡 선생(栗谷先生, 이이(李珥))의 아우로서 법도 있는 가문으로 이름이 났다. 부인이 부덕(婦德)을 잘 닦았으므로 종족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였다.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박진환(朴震煥)이고 딸은 정원심(鄭元諶), 조상변(趙相抃)에게 시집갔다. 서출(庶出)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박진욱(朴震煜)이고 딸은 어리다. 박진환은 교관(敎官) 김선(金宣羽)의 딸에게 장가들어 6남 2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박중휘(朴重輝)는 진사(進士)이고 둘째 아들은 박증휘(朴增輝)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정원심은 1남 2녀를 두고 조상변은 1남을 두었다. 박중휘는 현령(縣令) 조정융(曺挺融)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고, 박증휘는 군수(郡守) 김수창(金壽昌)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다. 안팎의 손자 손녀는 약간 명이다.
공은 사람됨이 풍만하고 장대하며 국량이 넓은데다가 특히 정사를 보는 데 뛰어나 가는 곳마다 은혜와 사랑을 베풀었다. 스스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어머니를 봉양하는 날이 짧았다’고 하여 고량 진미(膏粱珍味)를 씀바귀의 독처럼 여기어 종신토록 변함이 없었다. 벼슬할 적에 명예에 급급하지 않아 풍부하거나 유명한 고을에 부임해도 선비 때 지조를 바꾸지 않았으니, 여기에서 공에 대한 개략적인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공에 대해 무어라 명명할 수 없고 행장(行狀)에서 이와 같이 얻었으므로 대략적인 것만 기술하였으니, 다하지 못한 것이 부끄럽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금오산(金烏山)의 북쪽에 묘소가 융성하도다. 높이 선 이 비석에 명(銘)이 게시되었도다. 벼슬은 2품이고 공적은 재능이 있는 신하였도다. 이를 불후(不朽)라고 하는 것이니, 끝없이 찬란하게 빛나리도다.
경주부윤 박수홍의 아버지 군자감 판관 박정실(朴鼎實) 묘 전경-박수홍 묘후에 위치한다
증가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행군자감판관밀양박공휘정실지묘
배증정부인벽진이씨부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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