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경

[스크랩] 천부경과 수심정기 5 - 천부경의 `한`

장안봉(微山) 2015. 1. 13. 07:11

    4.  천부경의 이해

 

 1) 지심대도술

 

  무극대도의 한 갈래인 태을교의 신앙대상인 증산 선생은 "지심대도술(知心大道術)이라  하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마음을 아

는 것이 큰 도술 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천도교의 핵심 가르침의 하나가 수심정기이니, 결국 무극대도가 추구하는 진리의 핵심은 마음을 아는 것으로 귀결된

다.  마음을 알고 지키고 다스려 고치는 모든 과정이 무극대도에서 추구하는 도성덕립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마음 중심 사상은 천부경의 기본 입장이다.  내가 풀이한 천부경은 삼재 사상 오행 팔괘 구궁의 생성원리를 모두 담

고 있으면서도 그 생성 원리가 마음의 조화를 벗어나지 않고, 더 나아가 삼재 사상 오행 팔괘 구궁의 원리들이 마음의 본질을 찾

아가는 도구로 제시되고 있다.

  어쩌면 천부경의 진리가 바로 지심대도술인지도 모른다.  그런 관점에서 지금부터 천부경의 진리를 찾아보자.

 

   2) 일시무시일의 '한'

 

    ⑴ 한과 하느님

 

   '한'은 천부경 여든한 글자 중에서 처음과 끝에 배치되어 있는 '一(일)'로 이해된다. 천부경의 첫구절과 끝구절은 각각 "一始無

始一(일시무시일)"과  "一終無終一(일종무종일)" 인데,  최재충 선생은 맨 첫글자인 '一'은 반드시 '한'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

고 있으며, 글쓴이의 생각도 같다.

  우리말의  '한'이라는 낱말은 수천년간 한겨레와 함께 살아 숨쉬는 동안, 수많은 뜻을 담게 되었다.  안호상(安昊祥) 선생은 우

리말에서 '한'이 무려 22가지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밝혔는데, 김 상일 선생은 이 뜻들을 몇가지 관점으로 나누어 중요한 개

념들을 정리하고 있다.
  그 첫째는 역사 . 문화적 관점으로서 ① 우두머리를 <한>으로 부른데서 [임금]의 뜻이 나왔고, 이 뜻은 '간', '칸', '찬' 등의 음

으로 세계각지에 퍼져있다고 하며  ② 태양숭배의 풍습에서 유래한 [밝음], [해]의 뜻이 있다.
  둘째는 종교적 관점으로서 ①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환하다>고 표현한 데서 유래한 [크고 밝음]의 뜻과  ② 땅을 덮은 큰

울타리라는 뜻의 [하늘]과  ③ 위의 ① 및 ②의 뜻에 인격이 부여된 [하느님]의 뜻이 있다.
  셋째는 철학적 관점으로서 ① 수리적 개념으로서 [낱]으로서의 [하나]와 [온]으로서의 [전체]가 모두 '한'이라는 말로 표현

되므로서 양면적 의미를 가지게 되고 ② 이 관념이 철학에 응용되어 [비시원적(Nonorientable)]이라는 뜻을 가진다.

 * 비시원적 이란 김 상일 선생의 독자적 철학용어로서, "시공간의 어느 원점에서 생각을 출발시키는 것을 반대하는 말"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한철학>, p. 37.)
 종교적으로나 철학적으로 
 이 '한'은 그 어떤 규정도 용납하지 않는 초월적 절대진리의 상징으로서, 우리 전통사상에서 하느님,

 신(삼신일체의 신) 등의 별칭이며, 다른 종교들에서 부르는 절대존재와 일맥상통한다.

  노자 도덕경의 첫머리에 나오는 '도'는 그대로 '한'의 설명이다. "도를 도라고 할 수 있다면 참된 도가 아니니(道可道 非常道),

이름지어 부를 수 있다면 올바른 이름이 아니다(名可名 非常名)"라는 말은 '한'의 초월적 측면에 대한 가장 적당한 해설이다. 

  유교의 경전에 수없이 등장하는 '天(천)'은 '한'으로 읽어도 된다. '天'은 본래 태양신을 나타내는 글자였고, 뒤에 하늘(허공)의

뜻이 더해졌으며, 하늘과 태양신의 신격이 더해져 윤리도덕의 주관자인 상제(上帝)의 뜻으로 정착 된 것이다. 이런 뜻들은 우리

말 '한'의 뜻과 완전히 일치한다. 
 불교에서 최고진리의 표상으로 말해지는 '공(空)'도 '한'과 뜻이 통한다. '공'은 '하늘', '빔' 또는 '없음', '구멍' 등의 뜻을 가진

다.  하늘(한)은 비어(空)있고,  환히 틔어(空) 있으며, 아무것도 없지만(空), 만물이 그 구멍(空) 속에서 생겨나니 큰(大)]근원이

된다.
'공'을 초월적 진리로 이해할 때에도 '한'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공'의 초월적 측면을 체계화한 용수보살(龍樹菩薩; 나가

르쥬나)의 중도론(中道論)에서는 "양변을 여읜 곳이 중(中)"이라고 한다는데,  이는 말을 바꾸면 "안(이쪽) 에도 있지 않고, 밖(저

쪽) 에도 있지 않으면서, 둘을 모두 포용한다" 는 뜻이 된다.
[안]에 있지 않으면 [한 데(밖)]에 있을 것이요, [밖]에 있지 않으면 [안]에 있을 것이다. '안'은 '한'의 약한 발음이며,  '한',

'안', '칸', '환'등은 같은 말에서 분화한 말이라고 한다.  안과 밖을 하나로 뭉뚱그려 한 가운데(大中)로 들어가는 것이 중도(中

道)이니, 중도도 '한'과 다른 점이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행세하는 기독교의 '하나님', 즉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자신이 '한' 임을 스스로 밝힌 경우에 해당한다.
이상한 말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하며 모든 역사에 관여하는 하나님이, 성경을 번역하는 것 같은 중요한

사업에 역사하지 않았을 리가 없으며, 이미 역사하는 마당에 다른 신의 이름을 도용하거나 가명을 썼을 리도 없다. 따라서 기독

교의 하나님은 '한'이다.

  지금까지 서교(그리스도교)와 풍류와의 관계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는데, 논의의 중점이 풍류와 무극대도였기 때문에 서교에

대립하며 형성된 무극대도는 소홀히 취급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서교가 풍류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고학적 자료에 따르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모체는 수메르 문명이다. 수메르 유적에서 출토된 점토판 중

에 길가메쉬 서사시란 것이 있는데, 거기에는 성경에 나오는 에덴동산 이야기와 비슷한 내용이 있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은 이

내용이 히브리인들에 의해 다듬어져 성경의 창세기가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바는, 고고학자들의 관점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모체문명이라고

 하는 수메르 문명의 주인공들인 수메르인들이 섬기던 신(神)들 중에서 최고신의 이름이 '안(AN)'이라는 사실이다. 이 '안'이

'한'과 같은 계열의 말일 가능성은 김 상일 선생이 여러모로 제시하고 있다.
  기독교는 유대인들의 민족신앙이 예수에 의해 발전적으로 승화되어 형성된 종교라고 할수 있겠는데, 유대인의 민족명은 히브

리(Hebrew)이다. Hebrew는 '헤브류'로도 읽을 수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의 고구려 본기 첫머리에 나오는 '부여왕(夫餘王) 해부

루(解夫婁)'와 같은 소리로 볼 수 있다. 
  무슨 헛소리냐고 생각할 사람들을 위해 한가지 증거를 더 제시하자면, 부여(夫餘)가 바로 역(易)의 원조인 복희(伏羲)씨와 바

꾸어 쓸 수 있는 이름이며, 복희씨의 짝이 바로 '여와(女渦)' 또는 '여희(女羲)라는 사실이다.  박용숙 선생이 한국의 시원사상이

란 책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동이족의 건국방식으로 창세기의 천지창조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면, 유대인의 시조가 먼 옛날 우

리 동이조선에서 갈라져 나간 갈래일 가능성은 아주 높다. 
   더우기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도 '한'의 뜻과 일치한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고, 빛을 내어 만물을 창조하였으며, 오

직 한 분이다. 결국 하나님은 본명이 '한'이었으며, 객지를 떠돌아 다니는 동안 쓴 별호가 '엘로힘', '야훼', '갇(God)' 등이었고,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본명을 되찾았다고  말할 수 있다.
  '한'이  천도교나 태을교의 한울님과 연걸됨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결국 천부경은 한울님이 말씀하신 한울님에 대한

가르침이  된다.  해월 선생이 "마음으로써 마음을 다스리고, ......  한울로써 한울을 받드는 것이니라" 한 것과 묘하게 통하는 점

이 있는 것 같다.

 

      ②  한과 마음

 

      한과 마음은 무극대도의 입장에서는 같은 것이다.  지금까지의 여러 설명에서  밝힌 대로 한은 한울이요, 한울이 곧 마음이

라고 보는 것이 무극대도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이나 마음을 현실세계와 연결시키려면 어렵기 한이 없다.  절대자 또는 절대진리와 합일된 마음을 나타내는 대표적

인 말이 "이름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올바른 이름이 아니라"는 노자의 말이다. 

  그래서 노자는 절대진리인 도를 가리키는 자연(自然)이라는 말을 썼고, 이 말은 불교에서도 받아들여져 널리 쓰였으며, 과학에

서도 인간과 우주를 동시에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자연(自然)'은 글자대로 풀어서 "저절로 그러함"이다. '저절로' 라 함은 어느 누구에 의해 어떻게도 되어지지 않았음이요,  '그

러함' 은 모든 됨됨을 대신할 수 있는 말이다. 
  '저절로'는 '나' 까지도 '나'를 '나'라고 생각해 보지 않은 절대무규정 상태이다. '내'가 규정되지 않았으니 당연히 '너(나 이외의

것)'도 규정되지 않는다.  '저절로'란 원인을 알 수 없을 때 쓰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여기서는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 아예

 원인이 없을 때 쓰는 말이 '저절로'인 것이다.
  이런 상태가 있는가? 있다. 서양철학에서는 헤겔에 의해 단 한 번 도달된 자리가 여기이고, 그 때문에 헤겔이 자신에게서 철학

이 완성되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양의 도가에서는 한 소리 했던 사람(득도했다고 인정받은 사람)이라면  다 가본 자리

이다.  

'그러하다' 가 가리키는 됨됨이는 모든 틀, 즉 모든 생김새와 쓰임새이다.  있고 없고, 크고 작고, 차고 비고, 오고 가고, 움직이고

머물고, 춥고 덥고, 맑고 흐리고, 밉고 곱고, 달고 쓰고, 좋고 싫고, 늘고 줄고, 되고 말고, 살고 죽는  이 모든 됨됨이 들이 '그렇

다' 는 말로 나타내어진다. '그렇지 않다' 까지도 "안 [그렇다]"로 나타내어지는 '그렇다'의 한 상태인 것이다.
 '자연'은 이런 '저절로'와 '그렇다'를 묶어 만들어진 말이다. 그러나 이미 생각되고 말해졌기 때문에, 이 말에 묶였다 하면 그 순

간에 "개미 쳇바퀴 돌기"가 시작된다.  그렇게 되는 것은  결코  나의 의도가 아니고, 그런만큼 이 말에 묶이더라도 나에게는 책임

이 없음을 미리 말해둔다.
 

 이 '저절로 그러함'은 최 제우 선생이 이미 도학적 의미를 부여해 놓은 말이기도 하다.  동경대전(東經大全)의 {불연기연(不然

其然)}은 배우는 마음자세를 상세히 지적하고 있는 수심정기의 큰 길잡이로서, '있음(有)'과 '없음(無)'이라는 철학적 주제를 통

해 '자연'을 이해한다. 

 

  "노래하기를 천고의 만물이여, 각각 이름이 있고 각각 형상이 있도다.
   보는 바로 말하면 그렇고 그런 듯 하나, 그 부터 온 바를 헤아리면 멀고도 심히 멀도다. 이 또한 아득한 일이요, 헤아리기 어려

   운 말이로다.
   나의 나된 것을 생각하면 부모가 이에 계시고, 뒤에 뒤될 것을 생각하면 자손이 저기 있도다. 오는 세상에 견주면 이치가 나의

   나된 것을 생각함에 다름이 없고, 지난 세상에서 찾으면 의심컨대 사람으로서 사람된 것을 분간키 어렵도다.
   아! 이같이 헤아림이여, 그 그러함을 미루어 보면 그 그러함이 그 그러한 것 같으나, 그렇지 않음을 찾 아서 생각하면 그렇지

   않고 또 그렇지 않도다.
   왜 그런가. 옛날에 천황씨는 어떻게 사람이 되었으며, 어떻게 임금이 되었는가. 이 사람의 근본됨이 없음이여, 어찌 불연이라

   고 이르지 않겠는가. 세상에 누가 부모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 선조를 상고 하면 그렇고 그렇고 또 그런 까닭이니라. ...... 임

   금은 맨처음 자리를 전해준 임금이 없건마는 법강을 어데서 받았으며, 스승은 맨처음 가르침을 받은 스승이 없건마는 예의를

   어데서 본 받았을까. 
   모를 일이로다.  모를 일이로다. ...... 무릇 이와 같은즉 불연은 알지 못하므로 말하지 못하고, 기연은 알 수 있으므로 이에 기

   연을 믿는 것이다. 이에 그 끝을 헤아리고 그 근본을 캐어본 즉, 물건이 물건되고 이치가 이치된 큰 일이 얼마나 먼 것이냐.

   ...... 이러므로 기필키 어려운 것은 불연이오, 판단하기 쉬 운 것은 기연이라. 먼데를 캐어 견주어 생각하면, 그렇지 않고 그렇

  지 않고 또 그렇지 않은 일이오, 조물자에 붙여보면 그렇고 그렇고 또 그러한 이치인저.

 

  이 {불연기연}은 만물의 시초에 대한 의혹을  인류의 첫 조상에 대한 고찰을 이용하여 추적해 나가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내

가 있음은 부모가 있기 때문이지만, ...... 천황씨는 부모도 없이 사람이 되고, 뿌리없이 임금도 되고 스승도 되었다.  (이 문제를)

생각하여 밝히고자 하면 그렇지 않음만 나오지만(不然不然又不然之事), 조물주에 갖다 붙여보면 그렇고 그런 이치가 된다(其然

其然又其然之理)"는 것이다.
  여기서는 '존재의 근거가 있음(有)'을 '그럼(其然)'이라 하고,  '근거가 없이(無) 존재함'을 '안그럼(不然)'이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유무'라는 철학적 주제를 인간의 시초에 적용시켜 살피는 것이다.
  여기서 '기연(其然)'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자연'이다. 自(자)를 其(기)로 바꾸었으되 그 뜻에는 실질적인 변화가 없다. 이는 노

자의 '자연'을 재해석하여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기연'이 '자연'과 같은 말이 되는 것은 맨 마지막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조물자에게 붙여보면, 그렇고 그렇고 그러하다(付之

於造物者卽 其然其然又其然)" 라는 구절에서 주의할 부분은 "붙이다(付)"이다.  왜냐하면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모르는 부분을

조물자의 소관으로 돌리고 적당한 수준에서 의문을 포기하는 것으로 보기 쉬운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붙이다'는 '조물자에게 가서 붙는다'는 뜻, 즉 '천지창조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뜻' 이라는 것이다.  그 때 나

(自)와 남(他)을 동시에 초월하는 '그것(其)'이 그저 '그렇게(然)', 또는 '규정되지 않은 상태(然)'로 있다는 것이 이 구절의 참 뜻

이다.
  조물자와 내가 하나로 붙을 때, 모든 '안그럼(不然)'이 '그럼(其然)'으로 바뀐다는 것이니,  '조물자와 하나됨으로써'  '불연'과

'기연'의 유무(有無) 시비(是非)를 종합통일한 '절대적 긍정'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상태에 이른 것을 수운 선생은

"시천주"라고 말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살펴본 내용을 통해, 동학이 단지 유교와 불교 및 도교를 융합한 정도가 아니라, 기독교의 창조론까지도 발전적으

로 조화시켜 두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자연'은 미개발 상태로 방치된 자연이나, 정복하고 이용해야할 생존경쟁 장소로서의 자연들과는 격이 틀리는 자연이다.

이 자연은 심리적 내면세계까지도 포함하는 인간적인 자연이며, 주관적 자아와 객관적 외부세계로 갈라진 틈새를 어디서도 찾

을 수 없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자연이다.
   더욱이 이 합일상태는 주관의식조차도 형성되지 못하여 환경에 피동적으로 복종된 상태가 아니라, 주관의식이 성립한 후 스

스로의 왜소하고 무기력함을 절감한 다음, 그 왜소하고 무기력한 자신이 바로 대우주를 창조하여 운영하고 있는 절대자임을 재

확인한 합일상태이다.
이를 의식적 측면에서 살피면, 주체의식(主體意識; 육체를 주관하는 동물적 의식)이 주관의식(主觀意識; 대상을 인식하고 사고

까지 하는 의식)의 단계를 거쳐, 주재의식(主宰意識; 자기우주를 자기가 다스리는 의식)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 주재의식이 인지

(認知)하고 있는 [주객관 통합세계]가 여기서 말하는 '자연'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의 다른 이름인 '자연'은 가장 원초적 자연인 동시에 가장 발전된 자연이요, 또한 가장 인간적인 자연이다. 학문

의 초점을 이 자연에 맞출 때, 환경문제나 소외문제 등은 저절로 해결될 수 있으며, 지금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자연법 사

상이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맥빠진 구호가 새로운 활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③  한의 특성

 

    한은 어떤 성질이 있는가?  그야말로 특별한 성질이 있다. 그래서 성질이라고 말하면 이상하지만, 특성이라고 하면 그런대로

 말이 된다.

  한의 첫째 특성은 초월성이다.  언어를 초월하고 사고(생각)까지도 초월해 버린다.  그러니 특성이라고 하는 말조차도 붙일 자

리가 없다. 그래서 이 설명에 집착하는 순간 당신은 한을 알 수 없게 된다.  생각을 넘은 심령으로만 이해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말라는 뜻으로 초월성이라 설명한다.

한의 둘째 특성이 자유성(自由性)이다. 자유(自由)란 '스스로 말미암음' 인 동시에 '스스로에 말미암음' 이니, '저절로(自)'를 다

른 말로 나타낸 것이다. 저절로에 대해서 이미 설명했으니 여기서 더 보충할 내용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신학(神學)에서 신성(神性)으로 말하는 것들 가운데 자기원인성(自己原因性), 시원성(始原性), 창조성(創造性), 본체성(本體

性)등으로 말해지는 것이 모두 이 자유성이다.
  한의 세째 특성으로서 자연을 이해하는데  중심이 되는 것이 완전성(完全性)이다. 사람이 스스로의 한계를 느끼면서, 흠없는

존재를 동경하여 부여한 신성이 완전성이라 할 수 있는 만큼, 가장 강조될 수밖에 없는 측면이다. 전일성(全一性), 영원성(永遠

性), 항구불변성(恒久不變性), 전지전능성(全知全能性), 무소부재성(無所不在性), 지선극미성(至善極美性) 등은 모두 이 완전성

의 다른 표현들이다. 
 한의 넷째 특성으로 들 수 있는 것이 절대성(絶對性)이다.  절대성은 바로 초월성의 일부인 비상대성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므로 맞설 수도, 맞설 것도 없기 때문에 '마주함(對)이 끊어졌다(絶)'고 하는

것이다.
  이 절대성은 상대세계에서는 존재할 수조차도 없는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이 전해내려 온다는 것은 상대세계를 벗어난

비상대성이 발견되었음을 뜻한다.
  그 발견은 일반적인 원리, 법칙이 아니기 때문에 '발견'이라는 표현 보다는 '이르름'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어쨌든 이 비상

대성을 경험하는 것이 진정한 "자연으로 돌아가기"요, 그 순간 사람은 신(神), 즉 절대자가 된다.

     ④ 한의 모습

 

    한에 모습이 있을까?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모습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한의

모습을 들고 나온 이유는 자연을 이해시켜 보고 싶어 억지를 써 보는 것이다.

  자연의 모습에 가장 가까운 모습, 다시말해서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자연의 가장 원초적 모습은 '맑음(淸)'이다. '맑음'이란 '들

여다 보임' 이니, 다른 말로 나타내자면 투명(透明) 또는 허명(虛明)이다.
  이 '맑음'은 '빔(空)', '참(充)', '밝음(明)'의 세 측면이 어우러진 모습이다. 어려운 철학적 논의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도움이 될 실용적 설명이 필요하다는 입장에서, 현대과학의 관점을 이용하여 설명해 보자.
  우주란 시간과 공간 모두가 빅뱅(Big- Bang)의 잔해(殘骸)이다. 즉 시간이나 공간이란 것들이 원초의 대폭발 에너지가 성질과

모습을 바꾼 것으로서, 빛의 다른 모습에 불과하다고 한다. 빛 에너지가 물질을 만들기 전의 상태를 우리말로 나타내면 그냥 '빛

이다'로 표현 된다. 이는 곧 '빛임'이다.
  이 '빛임'은 '비침'이나 '빈님'으로도 표기할 수 있는 것이 우리말의 음운법칙이다. '빛임'이 '빋임'을 거치면서 '빈님'으로 바뀌

고, 다시 '비임'을 거쳐 '빔'이 되는 것은 다만 시간문제일 뿐이다. 달리 말해 우리말에서 '빛임'과 '비침과 '빔'을 같은 뿌리의 말

로 보더라도 크게 틀리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빛임'과 '빔'이 한덩어리로 있는 상태를 '비침'이라 할 수 있다. 속이 훤하게 비쳐 보이는 상태가 '비침'이기 때문이다.

이 '비침' 상태를 나타내는 다른 말이 '맑음'이다. '밝음'은 '빈 곳'을 채운다.' 빛으로 찬 공간(빈 곳)'은 밝다. 그리고 밝은 허공을

맑다고 한다.
이런 논리를 바탕으로 하면  '맑음'을 진리의 새로운 표상으로 내세울 수 있다. 그리고 '맑음'의 세 측면을 빔, 참, 밝음은 무극대

도에서 자주 거론되는 마음의 덕목이다.

  한에 가장 가까운 두번째 모습이 둥금이다.  '맑음'이 형상 이전의 원초적 모습이라면, '둥금(圓)'은 형상있는 모든 것들의 기본

형태이다.
'둥금', 곧 '원(圓)'은 유교에서의 천원지방(天圓地方), 불교의 원만구족(圓滿具足), 도교에서의 주천(周天)등에서 보는 바와 같

이, 여러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최고진리의 표상으로 쓰이고 있다.
 이런 사정은 우리 전통사상인 풍류에서도 마찬가지이며, <단군세기>에서는 "무릇 삼신이 하나라는 이치는 '대원일'에 그 뜻이

있으니 ......(夫三神一體之道 在大圓一之義)"라고 하여 삼신과   동그라미(大圓一)를 동격에 두고 있다.

  원을 진리의 상징으로 삼은 이유는 작도법의 원리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하나의 원을 작도법의 측면에서 분석하면 세가지 요소

의 종합형식으로 이해된다. 즉 중심 . 반지름 . 원주가 종합되어야 하나의 원이 성립하며, 이 중에 어느 하나를 변경하면 같은 크

기의 원은 그려지지 않는다.
 이렇게 세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하나의 의미체계를 이루는 원의 특성은 '삼한신(三韓神)'의 표상으로서 가장 적합한 도형인 것

이다. 이와같은 원의 특성은 원을 진리의 상징으로 삼는 풍습이 풍류에서 시작되었을 가능성을 높여주는 근거가 된다. 
  한의 마지막 모습은 '꼬임(糾.索)'이다. 이 '꼬임'의 뜻을 가장 확실하게 밝혀낸 학자가 김 상일 선생이다. 선생이 <한철학>에서

 밝혀낸 [자루와 뫼비우스 고리와의 관계]는 철학의 새 지평을 열어낸 쾌거이다. (그림은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 합니다. 그림

파일을 잃어버렸어요)

  우리나라의 전래 자루를 만드는 방법은, 한폭의 베(그림의 a)를 비틀어 붙여(그림의 b) 바느질하게 되는데, 이렇게 하면 양쪽

의 바느질선은 자루의 몸통을 나선형으로 감싸게 된다(그림의 c).
  이 나선형은 생명과학의 최고봉인 D N A 분자구조와 일치하는 형태이다. 우리 주변의 평범한 전통문화 속에까지 이렇게 심오

한 진리가 숨어있었던 것이다.

  뿐만아니라  한자의 '동녘 동(東)'의 상형문자가 자루의 모습인데, 자루를 동쪽의 뜻으로 쓴 이유를 모른다고 한다. 그런데 이

자루가 동이족의 물건 경전의 하나였다고 생각하면 그 이유가 밝혀지는 셈이다.
  '한'의 '꼬임'은 여기서 머물지 않고, 뫼비우스 고리의 입체 모델인 클라인 원통(클라인 병)과 한복바지의 재단원리에 까지 이

어진다. 김 상일 선생에 의하면, 한복바지는 클라인 원통을 잘라내어 얻어지는 조각들을 이어붙여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선생은 다시 이 자루와 한복바지의 재단원리가 복희팔괘와 정역팔괘의 배치원리에 까지 연결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원리에

의하면 현대과학에서 어떻게 접근해 볼 엄두도 못내고 있는 '공간의 굽은 형태' 까지도 밝혀진다. 그것을 응용하여 미래의 시공

간 초월문명을 건설하는 것은 전적으로 전통문화의 부활에 달려있다.

 

      ⑤  한의 힘

   한은 어떤 능력을 가질까?  한의 능력은 무한하다.  하늘과 마음과 신의 능력에 대한 모든 묘사가 한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한에서는 있음과 없음이 무의미해 진다.  이를 유무상통이라 한다.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도 있는 것이

다. 있고 없음이 사람의 제한된 감각능력과 사고능력이 만들어 낸 관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한에서는 안팎이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한은 안팎을 마음대로 넘나든다. 안팎의 구별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무내

외성(無內外性)이다. 이 무내외성은 앞의 자연의 모습에서 설명된 '한'의 '꼬임(비틀림)'에서 파생되는 능력이다. 그리고 그럴 가

능성을 우리는 클라인 병의 모형에서 볼 수 있다.
  자연의 셋째 능력이 무소부재(無所不在), 없는 곳 없이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무소부재성은 어렵게 생각하면 끝

이 없지만, 앞의 유무상통을 이용하면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물의 유무는 공간에 초점을 맞출 때 통합된다. 어떤 물체가 있는 것은 그 공간이 물체라는 성질을 띤 것이며, 물체가 없어지는

것은 공간의 성질이  물체라는 모습에서 빈 모습으로 바뀐 것에 불과하다.  사물이란 것도 이 공간의 단계까지 분석하고 나면, 사

물의 개체성이 소멸되고 만다.

  물질의 최소단위인 전자와 양전자라는 소립자도 빈공간에서 쌍창생되므로, 결국 모든 사물의 바탕은 진공(眞空)인 것이다. 전

자와 양전자(입자와 반입자)로 분할되기 이전의 공간에서는 사물의 개체성이 없어지므로서 만물의 통일성만 남게된다.

  바로 이런 공간이 유무의 대립개념을 해소시켜 준다. 이 때에는 우주 전체가 [나]이다.
  한은  바로 이 공간과 같은 것이다.  이 공간은 쪼개지는 법이 없이 한 덩어리이며, 대우주 전체가 한 자리일 뿐이다. 그 한 자리

를 나누어 보고 쓰는 것은 사람의 생각일 뿐이다.
  이 하나인 자리를 이해할 때, 사람은 자기자신이 모든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어느 한 자리에 집착하여 그 자리에만 머

물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와같이 특정한 자리에서 자기가 보고자 하는 것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물질을 통해 확인한 것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인 것이다.

      ⑥  한의 작용

 

  지금까지 살펴본 한의 특성과 다양한 측면들은 자연현상에서 관찰되는 여러 작용 중에서 가장 한에 가까운 것들이 어떤 작용

인지 찾아낼 수 있게 한다.

  그 첫째가 자유성과 둥금이 섞여서 나타나는 중심작용이다.  스스로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내가 자연의  주인이 되려하고, 자연

의 모습인 원에서 찾아진 주인 자리는 중심이다.

  원의 중심이 가지는 성질이 중심성(中心性)이다. 원의 다른 구성요소들은 여러 개의 부분으로 쪼갤 수 있음에 비해, 원의 중심

은 하나의 원에서 오직 하나의 점으로 나타난다.
  반지름은 무수히 많이 그려낼 수 있고, 원주도 하나이지만 여러 개의 호(弧)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중심은 둘 이상을 그릴 수

도 없고, 둘 이상의 조각으로 쪼갤 수도 없다. 이 유일성(唯一性)이 특정사물에 나타나면 자기중심성(自己中心性) 또는 주체성

(主體性)이 된다.
  이 중심성이 동양사상에서 최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가운데 중(中)이다. 유교의 집중(執中)과 중용(中庸), 불교의 중

도(中道), 도교의 황정(黃庭)등이 모두 이 중심성의 별칭인 것이다.
 모든 사물이 스스로가 중심이 되어 우주를 주재하는 것이 한의 중심작용이다. 원은 아무리 크기를 키워도 중심이 변하지 않는

다.  이런 속성은 모든 개체에 나타나며, 모든 개체가 우주를 자신의 주변으로 소유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모든 존재는 다른 모든 존재에게 주변으로 취급된다.   여기서 만물의 절대적인 존엄성과 평등성의 근거가 찾아진

다. 자기중심성이 동시에 다른 존재에 의해 주변성으로 전환된다는 사실, 이것이 상호공존의 이유이기도 하다.

 

 

 자연의 둘째 작용은 완전작용으로 표현된다. 완전작용(完全作用)이란 동시에 일어나는 완전한 상호작용이라는 뜻이다.
 자연은 시공간 통합체이며, 전체적으로 파악될 때에는 시간이나 공간이 모두 그 일부로 포함되어 버린다. 자동차를 말할 때, 차

체나 엔진이 모두 자동차의 구성요소로 취급되는 것이지, 독립된 개체로 취급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자연작용에는 시간의 선후가 성립될 수 없고, 모든 작용이 지금 현재에 일어난다. 또 자연작용은 기준지점이 설정되지

않으므로, 공간적 방향이나 거리 등의 개념이 성립되지 않고, 모든 작용이 전체에서 한꺼번에 일어난다.  따라서 어느 한 지점을

잡았을 때, 그곳에서 일어나는 어떤 변화는 다른 모든 곳에서도 일어나 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자연이 완전하여 더 이상 더할 것도 뺄 것도 없기 때문에 일어난다. 굳이 변화라는 개념을 도입해

야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완전한 상태에서 완전한 상태로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완전작용이라 하는 것이다.

  동그라미 위를 달리는 자동차는 앞으로 간 만큼 이미 출발점에 와 있다.  여기서 주는 대로 받는 인과응보의 법칙이 생겨난다. 

 자연작용의 가장 큰 특징은 이 상대작용(相對作用)이다.  작용에 대한 반작용이 반드시 존재하기에 자연은 완전한 상태를 유지

하고, 하지 않고서도 모든 것을 이루는 무위이화가 가능해진다.
완전한 상호작용이란 바로 이 작용과 반작용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뜻이다. 물론 여기서의 동시(同時)란 인식된 동시가 아니라

원칙적 동시이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여기서 자세히 다룰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자연의 셋째 작용은 회전작용이다. '한'의 '꼴' 중의 하나인 '둥금'의 특성이 자연작용에 반영된 것이 회전작용(回轉作用)이다.

이 회전작용은 회전운동과 주회운동(周回運動)을 총칭하는 것이다.
  회전운동은 전자에서부터 은하계에 이르기까지 발견되는 자전현상에서 자연작용의 기본형태임을 알 수 있고, 주회운동 또한

지구의 공전운동에서부터 인체내의 혈액순환과 같은 변형형태까지 고려한다면 그 비중을 무시할 수 없는 자연작용이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작용들은 이 세가지 기본작용의 변형에 불과하다.  모두가 우주의 주인이요, 모두가 나의 일부이기

 때문에 모두에게 나를 대하듯이 대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풍류의 모든 윤리법칙이 제시되는 근본 이유이다.

출처 : 미륵세상
글쓴이 : 구름따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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