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안동권씨(安東權氏) 퇴재(退齋) 권민수(權敏手)선생의 자리로 혹은 잉어명당 혹은 조선 8대 명당이라 일컫는다고 한다. 선생은 1494년(성종25년)에 급제하여 중종때 대사헌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경북 상주시 공검면 율곡리에 있다.
마을어귀에 들어서니 비교적 넓은 들판이 펼쳐지고 포장도로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내당(內堂)이 넓게 트여 감춰지지 못하니 안산(案山)이 너무 멀리에 있는듯 하였다. 후룡(後龍)이 병풍처럼 솟아 환포하고 좌우로 감싼 국세(局勢)에 중출(中出)로 뻗어 나와 개면(開面),개수(開手)하였으니 멀리서 바라본 형태는 교과서적으로 안정되어 보였다.
묘소 아래에 도달하여 혈성(穴星)을 올려다보니 비교적 풍만하게 솟아 오른 혈장(穴場)과 순전(脣氈)이 인상적이었다. 양 옆으로는 양각(兩脚)이 혈장을 감싸듯 뻗어 내려 개각(開脚)하였으니 이곳이 호종사(護從砂)가 아닌 혈(穴)을 맺을 수 있는 주인(主人)의 형태를 갖추었다.
이윽고 혈장에 올라 보니 아래서 올려다보고 상상했던 모습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고 혈장의 조건중 하나인 토질(土質)이 단단하고 밝은 형태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혈장의 토질은 탱탱하고 윤택하며 밝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여 아쉬웠다. 그리고 묘가 양각(兩脚)보다 높아 완전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혈성(穴星) 머리에 올라 보니 일부 훼손된 흔적이 보였고 뒤로 연결된 입수룡(入首龍)이 속기(束氣)한 뒤에 비룡입수(飛龍入首)형태로 솟아 올라 연결되었다. 입수룡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니 좁고 길게 뻗어 왔고 지각(枝脚)이 뚜렷하지 못하였다. 기복(起伏)의 높낮이가 미미(微微)하고 굴곡(屈曲)의 좌우 이동폭도 좁아 거의 일직선 형태로 내려왔다.
입수룡 발맥처(發脈處)에 이르니 넓게 내려오다 좁게 묶이어 깔대기 모양으로 출맥(出脈)하니 부모산의 일부가 아닌 전체의 기운을 이곳으로 빨아들일 듯한 형태는 좋았으나 그위에 고려 권척(權倜) 장군의 단(壇)을 설치하여 훼손된 것이 아쉬웠다.
이곳 발맥처부터 혈장까지의 형태를 태식잉육(胎息孕育)의 관점에서 보자면 식(息)에 해당하는 부분은 보통 속기처(束氣處)가 되는데 여기서의 입수룡은 길고 좁은 맥이니 학슬(鶴膝)의 형태가 필요한데 이렇다할 모습이 없었다. 글에 이르기를 맥이 길면 지나가기 어려우니 반드시 중간에 물거품 같이 둥글게 맺힌 형태가 있어서 기운을 이끌어 주면 좋다(長則 氣脈難過 必中間 有泡引氣則 吉~)고 하였다.
즉 맥이 좁고 길게 뻗으면 이 맥이 살아있다는 증거로 중간에, 길고 가느다란 학의 다리에 학의 무릅이 있듯이 둥글고 높게 뭉친 곳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서행(徐行)하는 뱀의 형태를 띠었고 또 요도지각(橈棹枝脚)같이 옆으로 뻗은 줄기도 없었다. 이런 형태는 풍취수겁(風吹水刦)에 취약한 모습으로 단점이 아닐 수 없다. 입수룡이 짧다면 문제가 없지만 이와 같이 길면 가파른 후룡(後龍)의 살기(殺氣)를 완전히 벗는다는 점에서는 좋겠지만 입수룡이 약해 보였다.
다시 혈장으로 내려와 자세히 살펴 보니 혈(穴)과 혈장(穴場)이 겉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의 지기(地氣)가 최종적으로 어디에 뭉쳐있는가를 생각해야겠다. 혈성(穴星) 정상(頂上)에 인공적(人工的)으로 된 것인지는 모르나 비교적 넓고 평탄한 곳이 있었다. 이곳에 개법(蓋法)으로 돌혈(突穴)을 생각해 볼 수 있겠으나 적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혈성에서 좌우로 뻗어 내린 줄기가 현침사(懸針砂)와는 달리 앞쪽으로 감싸고 뻗어 나갔으니, 그속으로 내려가 품속에 안겨야 할 형태다. 마땅히 당법(撞法)으로 유혈(乳穴)을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따라서 유혈(乳穴)인 현재의 묘자리 쪽으로 내려와야 하는데 현재의 자리는 점혈법상 두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하나는 좌우 양각(兩脚)이 혈장보다 낮으니 풍취(風吹)를 면할 수 없으며, 둘째는 혈장의 상분(上分)이 완비된 아래 부분에 혈장의 계수(界水)가 명백한 곳에 점혈해야 하는데 상분(上分)이 시작될 무렵에 점혈하여 기운이 최종적으로 머물기 직전에 작혈(作穴)한 느낌이 든다.
인근에 있는 난재(懶齋) 채수(蔡壽)선생의 묘가 상분(上分)이 형성되기도 전에 평탄한 곳에 점혈하였는데 좀더 아래로 내려와 청룡쪽으로도 요철(凹凸)이 분명하게 드러나 계수(界水)된 지점으로 내려와야 하듯이 이곳도 아래로 확실하게 맺힌 곳을 생각해야 할 곳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위치보다는 더 아래로 더 밑으로, 즉 탄토부침(呑吐浮沈)법 중에 토(吐)법과 침(沈)법을 생각해야 될 곳이다. 모든 기운이 현재의 순전(脣氈) 속에 뭉친 형태이니, 현재의 위치보다 더 아래로 내려오고 더 밑으로 깊게 재혈(裁穴)해야 마땅한데, 그렇게 되면 혈전(穴前)이 좁으니 혈장 바닥을 크게 낮추던가, 아래의 순전이 끝난 지점에서 순전 속으로 굴을 파고 들어가듯 하는 공법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물론 이런 생각이 현실적으로는 어렵겠지만 혈과 혈장이 겉돌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한번 상상해 보았다.
특히 이곳과 같이 안산(案山)이 멀고 낮으면 순수국(順水局)에 원진수(元辰水)의 직출(直出)이 보이지 않아야 하므로 혈은 낮은 곳에 있어야 한다.
나경을 꺼내 보니 축입수(丑入首)에 계좌정향(癸坐丁向)이며 오수구(午水口)였다. 조산(朝山)은 곤방(坤方;殺砂)에서 조혈(照穴)하고 주변 사(砂) 중에는 경방(庚方;生砂)의 사(砂)가 우뚝하였다.
이곳은 후현무(後玄武),좌청룡(左靑龍),우백호(右白虎)가 유정(有情)하고 길(吉)하나 전주작(前朱雀) 즉 안산(案山)이 허(虛)하고, 입수룡이 장협(長狹)하여 약하며, 혈장의 토질이 허부(虛浮)한듯 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물론 전미(全美)한 자리는 없는 법이지만 조선 8대 명당으로 자리 매김하기에는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이상은 안목이 부족한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니 오해 없기를 바란다. 이곳 후손들의 무궁한 번창을 간절히 기원하며 하산(下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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