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스크랩] 서애유성용공 유사(西厓柳成龍公遺事) 및 詩

장안봉(微山) 2014. 11. 1. 05:23

 

 

서애유성용공 유사(西厓柳成龍公遺事) 및 詩

1) 西厓 公 行錄

지난 2011년 3월 24일 울산에서 천안 함 피폭 1주년을 앞두고

새로 건조된 이지스(Aegis; 헬라 語로 '최고의 방패'를 뜻함)

구축함 명명식에서, “993함 서애 류성룡함”으로 선포되었다.

때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이 시대의 난국을

극복하려면 뜻있는 명명이라고 생각한다.

西厓공의 字는 이현(而見)이고 휘(諱)는 成龍이다.

중종 32년(1542) 음력 시월 초하룻날 경상도 의성현 사촌리 외가에서 출생하여,

6세에 大學, 6세 때 孟子를 배웠고, 16세에 향시에 급제하였고,

21세 때 도산에 가서 退溪 선생을 뵙고 학문을 닦았다.

25세(1566년) 때 文科(丙科)에 급제하여 崇文院 權知副正字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아갔다.
  

43세(1582)에 예조판서, 47세에 형조판서 겸 대제학, 48세에 병조판서-

이때 부인이 별세-, 이어 이조판서로 다음해 우의정 겸 이조판서가 되었다.

선조 24년(1591)에 좌의정 겸 이조판서에 오르자, 국방을 위하여 장재를 골라

추천하게 되어, 병조정랑(정5품) 권률(權慄)을 의주목사(정3품)에,

정읍현감(종6품) 이순신(李舜臣)을 전라 좌수사(정3품)로 천거하여

제수케 하여 국난을 대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임명되어 군무를 총괄하게 되고

 그해 5월그믐날 피난가게 된 임금을 扈從하여 개성에서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그날로 파직되고 백의 호종하게 된다.

그러나 임금은 곧 부원군(府院君)으로 서용되어 명나라 장수의

접대와 군량의 보급에 임하게 하였다. 그로부터 영의정에 도체찰사를 겸하며

군국의 정무를 맡아 수행하면서 전란에 신음하는 백성의 구휼에 힘쓰며,

마침내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국권을 수호하였다.

그러나 정적은 공을 시기하여 모함하며, 선조 32년(1599) 동짓달 열 아흐렛날,

파직 시키니 그 날 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전사하였다. 기이한 인연이다.

이 두 분의 만남은 조선을 ‘역사에서 살아남도록 한’“위대한 만남”이었다.

그 뒤 왕이 여러 번 조정으로 불렀으나 출사하지 않고 향리에서 지난 세월의

 잘 잘못을 자성하며 많은 저술을 하였다.

그 중에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징비록(懲毖錄)이 있다.
 그간에 있었던 중요한 일들을 옛 문전에서 소개한다.

2) “西厓公遺事”(抄) ;

 2-1) <白沙集>
임진년의 변란 초기에 적(賊)이 상주(尙州)에 가까이 닥아 오므로,

공이 도체찰사로 명을 받아 내려가려고 하는데,

미처 떠나기도 전에 충주(忠州)의 패보(敗報)가 올라오자,

임금께서 그 날로 하교(下敎)하고 서쪽으로 몽진(蒙塵)하게 되었다.

이때에 나는 도승지(都承旨)로 정청(政廳)에 있다가 명을 듣고

정원(政院)에 들어가니, 대궐 안이 이미 소란스러워져서 관료(官僚)의 질서가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동료들과 의논하고 정원을 나와 선정문(宣政門) 밑에 나아가서 형편에 따라 건의하였다.

이윽고 내교(內敎)가 있었는데, 바로 (서애)공에게 경성(京城)을 지키게 하는 명이었다.
그래서 내가 ... 노사형(盧士馨)공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대가 대기 명령이 내리자 궁중이 텅 비다시피 되었으므로,

성을 나가는 날에는 수행할 자가 반드시 적을 것이다.

그런데 서쪽의 행차가 중도에 그치지 않고 국경지대까지 가서 멈춘다면

강물 밖은 바로 상국(上國)의 강토이니, 여기에 이르러서는

응당 상국 사람과 서로 수작(酬酌)하여 그때그때 변(變)에 대처해야 할 일이 있을 터인데,

지금 조신(朝臣) 중에 일에 밝고 재빠르며 옛 법도를 잘 알고 응용하여 외교를 맡아

잘 처리해 낼만한 사람은 오직 류모(柳某) 한 사람뿐이다. ...

류모를 여기에 머물게 한다면 실패한 신하로 만드는데 불과할 터이고,

 대가를 호종(扈從=임금을 모시고 따라 감)하게 한다면 유익한 일이 반드시 있을 터이니,

계청(啓請=건의)하여 대가를 수행하게 함이 어떻겠는가?”
상이 즉시 윤허하고 이양원공(李陽元公)으로 유수(留守)하도록 고쳐 명 하였다. 

대가가 동파(東坡)의 객사(客舍)에 거동했는데,

이튿날 아침, 대신들을 불러서 아계(鵝溪) 이 상공(李相公)과 공이 들어가 모셨고,

나는 도승지로서 입회하였다. 대신이 어전에 이르자, 임금이 손을 이끌어

 가슴을 치면서, 울먹이고 차례로 이름을 불으며 괴로움을 호소하기를,

“이모(李某)야, 유모(柳某)야,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감추거나 피할 것 없이 꺼리지 말고 각각 솔직히 말하라.

내가 어디로 가야겠는가?” 하고는 또 묻기를,

“윤두수(尹斗壽)는 어디에 있는가?

그는 본래 생각이 깊은 사람인데 함께 보고 싶구나.”하였다.

내가 명을 받들고 나와 오상(梧相)을 불러들였다.

오상이 어전에 나아가자 임금께서 또한 같은 말을 하니,

이때 여러 신하들이 엎드려서 목메어 울며

감히 임금을 쳐다보지 못하고 선뜻 대답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돌아보고 (나에게)이르기를,
“승지의 생각은 어떠한가?”하므로, 내가 즉시 대답하기를,

“우선 어가가 의주(義州)에 가셨다가 만일 형세가 어려워서 힘이 부치고

팔도(八道)가 모두 함락되어 안정된 땅이 조금도 없을 경우에는

임시로 천조(天朝)에 호소하는 것이 괜찮겠습니다.”하니,

梧相이 말하기를,
“북도(함경도)는 기마 군사가 날쌔고 강하여,

함흥(咸興)과 경성(鏡城)이 모두 천연의 요새로 되어 있어

그 험고함이 버틸 만하니, 대관령(大關嶺)을 넘어서

북쪽으로 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하였다.
그러자 임금께서 이르기를,
“승지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하니,

(서애)공이 말하기를,
“안 됩니다. 임금님 타신 말이 조선에서 한 걸음만 벗어나면

조선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不可 大駕離東土一步地 朝鮮非我有也"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내부(內附)하는 것은 본디 나의 뜻이었다.” 하니,

공이 또 말하기를,
“안 됩니다.” 하였다.

 

그래서 내(白沙;이항복)가 말하기를,
“신(臣)이 말한 것은 곧바로 강을 건너가려는 것이 아니라,

대단히 핍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경우를 말한 것입니다.

불행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여 몸 둘 곳이 없고 발을 들여놓을 곳이 없게 되어,

오히려 일각이라도 늦추어 가지고 후일의 거사를 도모하자는 것입니다.”하니,

 

공이 말하기를,  “안 됩니다.” 하면서,

나와 십수(十數) 차의 논박을 거듭하며, 둘은 서로 구차하게 합의하려 하지 않았다.

이때 임금은 수시로 나를 편들고 공을 반박했는데,

아공(鵝公)은 다만 어전에 엎드려서 울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최후에는 공이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지금 동북(東北)의 여러 도(道)는 여전하고,

호남(湖南)의 충의로운 사람들이 불일간에 봉기할 터인데,

어찌 성급하게 이런 일을 논해서야 되겠는가.”하므로,

내가 그제야 공의 뜻을 깨닫고,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뒤에 공이 판서 이공 저(李著公)를 만나서 말하기를,

“만일 이모(李某)를 만나거든 내 뜻을 말해 주오.

어찌하여 나라를 버리자는 논의를 지레 내놓는단 말인가.

이모가 비록 치맛자락을 찢어서 발을 싸매고 길에서 따라 죽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부시(婦寺)의 충성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말이 한 번 알려지면 사람들 마음이 모두 와해(瓦解)될 터인데,

누가 그 일을 수습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그 뒤 영변(寧邊)에 이르러 양궁(兩宮=임해군, 순화군)이

비로소 길을 나누어 가게 되자 유언비어가 크게 퍼져서

서관(西關)의 인심을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
“황급한 즈음에, 한 번 실수를 저질러서 대세(大勢)를 그르쳤으니,

뉘우치고 따르고 있어도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었습니다.”하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 또한 그때 밝게 분변치 못하고 겨우 안 된다는 말만 하였으니,

실수가 없지 않다.” 고 하였다.  … (후략)
              
2-2) <敬菴集>  

선생은 타고난 바탕이 매우 높아서 일반 사람보다 훨씬 뛰어났으며

다정하고 위엄 있고 무게가 있으시며, 온화하면서도 곧고 엄격하시어

총명하고 영특하시며, 긍지가 있는데다가 맑고도 깨끗하시며

과단성 있게 결정하시고 흔들리지 않으시며, 겸손하고 공순하면서도

 소탈하시며, 말을 구차하게 하지 않으시고, 행동을 구차하게 움직이지 않으시며,

뵈올 때마다 안정되고 단정하게 팔짱을 끼고서 눈을 감고 바르게 앉아 계시니

멀리서 보면 두려운 마음이 생기고 가까이서 보면 공경하는 마음이 생긴다.

 앉는 자리 오른 편에 “항상 과묵한 것이 가장 오묘하다(常嘿最妙)”라는

네 글자를 써 두시고,  낮에는 반드시 의관을 정돈하시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목소리는 맑고도 낭랑하며 얼굴은 희고 깨끗하며 눈은 광채를 발하여 마치 별처럼 빛났다.

  평생 돈 버는 일을 하지 않았고, 매일같이 경서(經書)와 역사서(歷史書)를 대하시며,

앉거나 눕거나 또는 자리를 깔 때에 옷은 겨우 몸을 가릴 정도로 검소하였으며,

아침저녁 끼니꺼리가 끊어질 때가 있어도, 오히려 태연하게 대처하시었다.
남들의 잘못을 보았을 때 이를 꼬집어서 말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스스로 두려워하였다.

육십 세에 친상(親喪)을 당하셨는데도 곡(哭)하는 것과 제사지내는 것을 한결같이

의례(儀禮)를 따랐으며, 대상(大祥)이 지나 사당(祠堂)에 부묘(祔廟)를 할 적에는

사당 문에 이르러서는 흐르는 눈물이 비 오 듯하니

보는 사람 중에 눈물을 삼키지 않는 이가 없었다.

조정에 섰을 때에 대범하고 중후하며 청렴결백하여

다른 사람이 감히 사사로운 마음으로 접근하지 못하였다.

경연의 자리에 들어갈 때마다 논의하는 말이 정확하고도 간결하고

이치에 맞으니 좌우에서 귀를 기울여 듣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계사(癸巳=1593)년 겨울에 중국 천자의 칙명을 받들고

행인(行人) 사헌(司憲)이 입국하였는데

이는 우리의 형세를 살펴보고 대처할 방도를 새우기 위한 목적이었다.

선생이 명을 받들고 가서 접대하며 의연하고 당당한 자세로

 “군신부자(君臣父子)의 관계에 혹시라도 변고가 생기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소이까?” 하면서 말씨가 엄격하고도

정중하니 사신(使臣)이 감히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갔다.

환도(還都)한 뒤에 굶어죽은 시체가 성안에 가득하고

혼자 남은 백성들이 먹여 살려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이 때 선생은 새로 정승의 일을 맡아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며 온 종일 비국(備局)에 앉아 있다가 밤이 깊어서야 비로소

퇴청(退廳)하였다가 새벽닭이 울 때면 다시 들어왔는데 안색이 시커멓게 타있었고

뱉어낸 피가 벽에 가득하였다. 정성을 다 해 대책을 강구하여 간신히 양곡을 모아서는

장정들을 골라서 먹이고 이들을 훈련도감(訓練都監)에 보내어 삼수(三手)를 가르쳐서

도성(都城)을 지키게 하고 나머지 양곡으로 노약자와 연고 없는 사람들을

구휼(救恤)하였는데  그렇게 해서 살린 사람이 만(萬)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갑오(甲午=1594)년과 을미(乙未=1595)년 간에는 곳곳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남은 백성들 중에 의탁할 곳이 없는 사람들을 살게 하여 도적들이 약탈하는 것을 방비하고

여러 방면의 막혔던 길을 터놓고 나라에 군사일이 있을 때의 수요에 대비하여 쌓아두게 하였다.

또 각 도(道)의 물산(物産)의 능력을 참작하여 낮추거나 높이고 더하거나 줄이는 것을 한결

같이 공론에 따랐는데 부과한 공세(貢稅)와 부역(負役)이 모두 적당하였다.

당시 만약 이렇게 준비하지 않았다면 백성들이 모두 죽었을 것이다.

선생이 병들어 누어도 국사(國事)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문득 오열(嗚咽)하며

참지 못하고 유언(遺言)하는 상소문(上疏文)을 초하라고 말하였다.
돌아가시기 하루 전에 경서(經書)와 역사서(歷史書)를 모두 암송하였는데

한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선생은 영의정(領議政)을 두 번이나 지내셨고

또 두 번이나 공신록(功臣錄)에 올랐어도 청빈(淸貧)하고 검약(儉約)하기가

마치 한미(寒微)한 선비와 같았다. 조회에 입던 옷도 겨우 능라비단(綾羅緋緞)

한 벌 뿐이라 염(殮)할 때에 관(棺) 속을 메울 적에 조카들이 각각 옷을 걷어서 채웠다.

부음(訃音)이 이르자 많은 공경대부(公卿大夫)들이 영위(靈位)를 설치하고 곡하였으며,

관리들과 시정(市井) 사람들도 서로 이끌고 와서 영위를 만들어 놓고 곡하며 말하기를,

“공의 덕분으로 오늘이 있게 되었다.”고 하며 앞 다투어 부의(賻儀)를 보내왔고,

장례에 이르러서는 모인 사람들이 육ㆍ칠백 인이나 되었다. 

상국(相國) 이항복(李恒福)은 남의 칭찬을 적게 하는 분인데도,

선생에 대한 만시(輓詩)에    
 大道久淪喪  큰 도가 없어진지 오래인데 
 斯人今又亡  이제 이분마저 돌아가셨구나! 라고 하였다.

임진(壬辰)년에 어가(御駕)가 도성(都城)을 벗어나게 되자

이상국(李相國)이 말하기를

“조정의 신하 중에 옛 도리를 알아 사신의 임무를

잘 할 사람은 류모(柳某) 한 사람 뿐입니다.

사리를 조절하고 변화에 대응함에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됩니다.”고 아뢰었다.

모시고 가는 도중에 다시 논난하려는 사람이 있자 상국(相國)이 힘써 제지하였다.;

       < 張在釬 譯 >
    
3) 西厓公 詩 몇 수(首)

◎ 화석정 정자 이름을 율곡정이라고도 한다  

     (題花石亭 栗谷亭名)
                                     
 山形背立本同根(산형배립본동근)  산 형세 마주 섰어도 본디 한 줄기
 江水分流亦一源(강수분류역일원)  강물은 갈라졌어도 마찬가지 한 줄기
 花石古亭人不見(화석고정인불현) 화석정 옛 정자엔 사람이 보이쟎아 
 夕陽歸去重消魂(석양귀거중소혼)  석양에 돌아가는 이 다시 가슴 흔드네
  

위 詩는 龍灣(義州)로 왕을 따라 피난하고, 漢陽이 收復되어 귀환한 뒤.

파주에서 西厓公이 읊은 詩이다. 政治的 見解는 서로 달랐으나

우국충정(憂國衷情)은 마찬가지이었던 두 政治家가 幽明을 달리한 뒤

옛날 함께 조정에서 의논하며 일해 온 터이라, 난국 수습을 당하여,

아니 계신 선배를 그리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후세 일부 사람들은 栗谷이 壬亂을 예견하여 有事時 태울 수 있도록

花石亭을 지어서 西幸 때에 불 지르도록 한 ‘율곡의 慧眼을 감탄한다,’라고

미화하여 전하고 있다. 그러나 징비록의 기록을 보면,

태운 것은 화석정이 아니고 옛 역승의 사무실(舊驛丞廳)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재사에서 심회를 읊음;

   청송도계 권장중(호문)께 드림

   (齋居有懷錄 呈靑城道契權章仲好文)

 細雨孤村暮。가랑비 내리는 외딴 마을에 날은 저물고
 寒江落木秋。 차가운 강물에 낙엽 지는 가을이 왔네

 壁重嵐翠積   벽에는 겹겹이 푸르른 산기운이 쌓이는데             

 天遠鴈聲流。하늘 저 높이 기러기 우는 소리 흘러가네 
 學道無全力。젊은 시절 학문에 진력하지 못한 뉘우침이
 臨歧有晩愁。 삶의 길목에서 때 늦은 걱정으로 바뀌누나
 都將經濟業。 이제는 남의 삶 염려하는 벼슬길 그만 두고

 歸卧水雲陬。돌아가 물과 구름 벗하며 살아가리라


◎   遺戒詩  자제들에게 준 유언 시

 林間一鳥啼不息   숲속의 새 한 마리 쉬지 않고 우는데
 門外丁丁聞伐木  문밖에는 정정하며 나무 베는 소리 울리는구나.

 一氣聚散亦偶然  한 기운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도 우연이기에 평생 동안

 只恨平生多愧作   평생 동안 부끄러운 일 많은 것이 한스러울 뿐
 勉爾子孫須愼旃* 권하노니 자손들아 이를 꼭 따르라
 忠孝之外無事業   충효 밖에 할 일은 없다는 것을
        
선조 40년(1607) 66세가 되어 병이 무거워지자

하회 마을의 북쪽 7킬로미터 쯤에 있었을 학가산 속으로 草堂(弄丸齋)을 지어,

거처를 옮긴 뒤 문병 오는 손님을 글로써 사양하고,  

5월 초엿새 날, 懲毖錄에서 못 다한 말과 자손들의 앞날을 걱정하며 易簀하셨다.


자료 더보기

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기라성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