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전라도)

[스크랩] [전북 정읍]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장안봉(微山) 2014. 6. 1. 04:26

동학농민혁명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은 부임하자마자 만석보(萬石洑)의 수세(水稅)를 비롯하여 온갖 부당한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등 농민에 대한 착취를 일삼았다. 이에 분노한 1천 명의 농민들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들고일어나 94년 2월 15일(이하 양력) 관아를 습격, 세미(稅米)를 빈민에게 나누어주고 만석보 저수지를 파괴한 후 해산했다.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李容泰)가 봉기한 농민을 동학의 폭도로 몰아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자 다시 분격한 농민들은 4월 하순 <보국안민(輔國安民)> <척왜척양(斥倭斥洋)>의 기치를 내걸고 백산(白山)으로 진격, 인근 농민 수천 명의 호응을 얻었다.

 

농민군은 전봉준을 총대장, 김개남(金開南)·손화중(孫和中)을 장령(將領)으로 삼고, 규율과 체제를 엄격히 하는 동시에 ①사람을 죽이지 말고 제물을 손상치 말 것, ②충효를 다하여 제세안민(濟世安民)할 것, ③왜병을 몰아내고 성도(聖道)를 밝힐 것, ④서울로 쳐들어가서 권력자들을 소탕할 것 등의 4대강령을 선포했다. 그런데 동학교주 최시형은 이러한 혁명군의 움직임에 대해 접주(接主)들에게 통문을 보내 「도(道)로써 난(亂)을 지음은 불가한 일」이라며 전봉준 등을 공격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농민전쟁은 이미 동학교단의 상층부와 상관없이 광범한 민중의 지지를 받으면서 발전해 나갔다. 이때. 전봉준의 통문을 받고 태안·무장·금구·부안·고창·홍덕 등의 동학 접주(接主)들이 각기 병력을 끌고 백산으로 모여들었는데, 그 수가 1만 명에 가까웠다.

농민군은 5월 11일 전주에서 온 관군과 보부상군(褓負商軍) 수천 병력을 황토현(黃土峴) 싸움에서 깨뜨리고, 무장·영광으로 진격하여 부패관리들을 숙청했으며, 5월 31일에는 전주를 점령했다. 그러자 정부의 요청으로 6월 8일 청나라 원군이 아산만에 도착하고, 뒤따라 일본천진조약을 내세워 출병을 결정했다. 이에 혁명군은 정부와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고 폐정개혁안 12개조를 타협한 후 전라도 53군에 농민적 자치기관이라 할 수 있는 집강소(執網所)를 세워 폐정개혁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 휴전은 혁명군에게 불리하여, 정부는 강화조약을 이행하지 않는 한편, 청나라의 원군을 불러들임으로써 마침내 청·일전쟁의 계기를 스스로 만들었다.

이에 동학군은 10월 12일 삼례집회를 시발로, 전봉준을 위시한 강경파는 최시형 등 북접교단 온건파의 타협론을 거부하고 북상(北上)을 결정함으로써 전국적인 농민전쟁으로 발전했다. 전봉준의 10만 호남군과 끝내 호응한 북접의 손병희가 이끄는 10만 호서군은 3로(路)로 나누어 논산에 집결한 후 대본영(大本營)을 설치하고, 10월 21일 공주의 우금치 고개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과 결전, 분투를 거듭했으나 근대적인 훈련과 장비를 갖춘 일본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혁명군은 곧 전라도로 후퇴하여 재기를 꾀했으나 11월 순창에서 전봉준이 체포됨으로써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

 

 

 

동학농민혁명의 최초 집결지 말목장터

 

 

 

말목장터 감나무

말목장터유지비

 

만석보혁파선정비

 

 

 만석보혁파선정비(우)와 군수김우현휼민선정비(좌)

 만석보혁파선정비(우)와 군수김우현휼민선정비(좌)

 만석보혁파선정비-만석보를 철거한 고부군수 안후길의 혁파 선정비이다

 비문은 마모되어 알아볼 수 없다

 군수김후우현민휼선정비

 만석보터 전경

 

 

 만석보유지비

 

 

 만석보유지정화기념비 

 

 만석보 시비

 고부관아터 입구

 고부관아터-건물은 철거되어 흔적은 없고 현재는 고부초등학교가 세워져 있다

 

 고부초등학교전경

 

 고부츠등학교옆 향교건물

고부향교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