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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전북 정읍]?? 문경공 일재 이항(文敬公 一齋 李恒)선생 묘-성주이씨

장안봉(微山) 2014. 6. 1. 04:25

문경공 일재 이항(文敬公 一齋 李恒)

 

1499(연산군 5)∼1576(선조 9).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항지(恒之), 호는 일재(一齋). 아버지는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인 이자영(李自英)이며, 어머니는 전주최씨(全州崔氏)로 소경전참봉 최인우(崔仁遇)의 딸이다. 박영(朴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30세가 되었을 때 백부로부터 깨우침을 받아 스스로 학문을 시작해 성현의 글을 섭렵하였다. 주희(朱熹)의 「백록동강규(白鹿洞講規)」를 읽고는 더욱 분발해 도봉산 망월암(望月庵)에 들어가서 수년을 독학해 깨달은 바가 컸다. 그 뒤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태인으로 돌아가 스스로 농사지으면서 어머니를 봉양하고 위기(爲己)의 학문에 전념하였다.

당시의 학자 백인걸(白仁傑)은 이항의 학문이 조식(曺植)에게 비길만하다고 칭찬하였다. 당시의 대학자인 기대승(奇大升)·김인후(金麟厚)·노수신(盧守愼)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의 질을 높였다.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어 이기(理氣)를 논함에 있어 이와 기, 태극과 음양을 일체라고 주장해 이황(李滉)의 비평을 받기도 하였다.

1566년(명종 21) 명경행수(明經行修)하는 선비를 뽑을 때 첫 번째로 추천되어 사축승전(司畜承傳)에 임명되었다. 왕에게 진학(進學)과 치지(致知)하는 방법을 진언하여 칭찬을 받았다. 이후 의영고령(義盈庫令)을 지내고 임천군수가 되었는데, 부임할 때 왕이 귀마개를 하사해 노고를 위로하였다. 1567년 5월에 병으로 사퇴하고 돌아오니 왕이 의원을 보내어 문병을 하기도 하였다.

선조 초년에 의빈경력을 지내고 선공감부정·사옹원정을 역임하였다. 1574년(선조 7) 사헌부장령을 거쳐 장악원정을 지냈으나 병이 악화되어 사퇴하고 돌아왔다. 그 뒤 5도의 찰방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했고, 왕이 네 차례나 의원을 보내 치료하게 했으나 결국 완쾌되지 못하였다.

홍직필(洪直弼)은 글에서 호남의 5학(學)을 설명한 바 있는데 그 가운데 이항이 포함되어 있다. 저서로는 『일재집』이 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태인의 남고서원(南皐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묘소 입구-좌측에 재실이 보인다

 

재실 보산재와 신도비

문경공 일재선생 신도비

 

 

 

 

재실 보산재

 

 

문경공 일재선생 묘소 전경

 

 

 

 

 

 

 

 

중훈대부장악원정일재선생이공지묘

일재선생 묘갈명-노수신(盧守愼) 撰

 

만력(萬曆) 4년(1576년 선조 9년) 6월 22일에 일재 선생(一齋先生, 이항)이 태인(泰仁) 분동리(粉洞里)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임금이 부의(賻儀)를 명하고 이어 감사(監司)에게 장례를 관(官)에서 돕도록 명하였다. 윤8월 6일 문도(門徒)들과 읍재(邑宰) 유연(柳埏)이 받들어 그 선부군(先府君)의 무덤 옆에 장사지내고, 그 이듬해 5월 초당(草堂) 허군(許君) 태휘(太輝, 허엽(許曄)의 자(字). 초당은 그의 호)가 그 문도 유몽학(柳夢鶴)ㆍ변사정(邊士貞)ㆍ김천일(金千鎰)이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광산(光山) 노수신(盧守愼)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우리 선생을 공처럼 믿는 분이 없으니, 어찌 명(銘)을 짓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나 노수신이 일찍이 보건대, 세상의 학자(學者)들 그 누가 사장(詞章)을 암송하는 것이 학문이 아니요 허적(虛寂)과 공명(功名)이 도(道)가 아니라는 말을 듣지 못했겠는가? 그러나 돌아보건대, 그 습성이 끝내 귀로 들어가 입으로 나오는 천박한 문자(文字) 가운데서 떠나지 않아서 알고 있는 이치(理致)와 행하는 일이 도리어 불교(佛敎)ㆍ노자(老子)ㆍ관자(管子)ㆍ안자(晏子) 아래에서 나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개 그 이른바 공부(工夫)와 이 마음이 전혀 교섭(交涉)함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선생 같은 분은 마음을 맨 먼저 하수(下手)하는 바탕으로 삼았기 때문에, 치지(致知)의 실제와 역행(力行)의 돈독함이 참으로 자득(自得)하는 곳이 있으니, 그 또한 특이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표(表)하여 알리지 않으면 후일 상고할 데가 없어 유감되는 바가 있을까 두렵다. 비루한 나 노수신이 어찌 거기에 미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종생(從甥)으로서 왕복한 서신(書信)이 이미 많은데다가 평소 하루라도 모신 적이 있음에랴? 더군다나 허군(許君)이 ‘위 세 사람이 쓴 행장의 내용이 거짓이 아니다.’라고 하는데, 무슨 말로 사양하겠는가? 이에 그 행장을 펴서 나의 소견을 붙여 서술한다.

선생의 휘(諱)는 항(恒)이요, 자(字)는 항지(恒之), 성(姓)은 이씨(李氏)로, 성주인(星州人)이다. 고려(高麗) 성산 부원군(星山府院君) 이장경(李長庚)의 후손이요, 병조 판서(兵曹判書) 평간공(平簡公) 이발(李潑)의 현손(玄孫)이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이유(李洧)의 증손(曾孫)이다. 할아버지 건공 장군(建功將軍) 이주(李湊)가 아들 넷을 낳아 그중 세 아들 모두 관위(官位)가 2품(品)으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이조 판서와 참판에 추증(追贈)하게 하였다. 아버지 이자영(李自英)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의영고 주부(義盈庫主簿)로 마쳤으며, 어머니 완산 최씨(完山崔氏)는 소경전 참봉(昭敬殿參奉) 최인우(崔仁遇)의 딸인데 홍치(弘治) 기미년(己未年, 1499년 연산군 5년)에 한성(漢城)에서 공을 낳았다.

자품(資稟)이 굳세고 기우(氣宇)가 굉걸(宏傑)하여 호걸스러움이 남다르고 용기와 힘이 절륜(絶倫)하였다. 어려서부터 마을에서 놀면 여러 아이들이 두려워 복종하였으며, 자라서는 유협(遊俠)을 좋아하여 만리(萬里)를 달릴 뜻이 있었다. 씨름과 궁마술(弓馬術)이 당시 제일이었는데, 사나운 도둑이나 반노(叛奴)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가서 제압하였다. 일찍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남치욱(南致勗)ㆍ남치근(南致勤)ㆍ민응서(閔應瑞) 무리들이 오직 선생의 지휘(指揮)를 따랐다. 사람들이 비록 광황(狂荒)하다고 지목했으나 그가 비상한 사람임을 알았으니, 이때 나이 28, 9세였다. 백부(伯父) 판서공(判書公, 이자견(李自堅))이 불러 꾸짖고 경계하자 후회하는 마음이 생겨 놀라고 두려워하여 즉시 그 무리들을 사절하고 무예(武藝)를 버리고 ≪대학(大學)≫을 읽기 시작했는데 구두(句讀)를 아는 곳은 주야(晝夜)로 그치지 않고 읽었다.

하루는 이웃에 사는 고한좌(高漢佐)의 집을 지나다가 벽(壁)에 주자십훈(朱子十訓)과 백록동규(白鹿洞規)가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망연히 깨닫고는 왜 걸어두었느냐고 물으니, 기묘 학자(己卯學者)들의 과정(課程)이라 말하고는 그 내용을 대략 해설해 주었다. 선생은 개연히 말하기를, “하마터면 일생을 헛되이 살 뻔하였다.” 하고는, 이에 분발 격려(奮發激勵)하여 마음을 단단히 차려 구도(求道)하였다. 도봉산(道峯山) 망월암(望月庵)으로 올라가 마음을 모으고 무릎을 꿇고 앉아 혹 글을 외거나 사색(思索)하여 반드시 체인(體認) 심득(心得)한 연후에야 그만두었다. 옆에 좌선(坐禪)하는 자가 있어 함께 고통을 참기를 세 철 동안에 이르렀는데 선승(禪僧)은 간혹 낮잠을 잤으나 선생의 눈에서는 정채(精采)가 더욱 또렷하였다. 이때 중들이 시끄럽게 떠들면서 일어나 보고는 문득 스스로 반성하기를, “마음이 형체의 부림을 받으면 어떻게 공부를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무릇 손을 씻지 않고 예복(禮服)을 입지 않으면 감히 책상을 대하지 않았으며 길을 가다가 쉬는 여관(旅館)에서도 이런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한번은 말을 타고 가면서 책을 들고 사색에 잠겨 갑자기 벽제(辟除)를 범하였다. 하인이 가는 말을 끌어당겼으나 공은 끝내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각고(刻苦)와 집착이 대개 이와 같았다. 간혹 윤정(尹鼎)ㆍ종성령(鍾城令, 이구(李球))ㆍ민기(閔箕)ㆍ나식(羅湜)과 종유(從遊)하였다. 스스로 말하기를, “젊어서 충암(冲菴, 김정(金淨))을 보니, 조회가 파하면 손에 ≪대학(大學)≫이 있고 걸으면서 노천(老泉, 송(宋)나라 학자 소순(蘇洵)의 호)을 배웠는데, 더군다나 나는 만학(晩學)인데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늦추겠는가?”라고 하였다.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와서 살림이 영락(零落)하자 말하기를, “힘써 농사를 짓지 않으면 상제(喪祭)의 밑천을 마련하고 어머니를 봉양하고 자식을 기를 길이 없겠다.”고 하였다. 마침내 손에 경서(經書)를 들고 농사일을 감독하여 한결같이 힘을 쏟았는데, 이렇게 몇 년을 하자 묵은 부채(負債)를 다 갚고도 살림에 여유가 있게 되었다. 이에 말하기를, “이제 충분하다. 일을 할 만한 하인에게 맡기면 되겠다. 규제(規制)가 이미 정해져 있으니, 한 해 동안 생활에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는, 그 측실(側室)에게 간섭하여 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이처럼 부지런히 농상(農桑)에 힘써 풍부하게 되자 화식(貨殖)을 마침내 금지시켰다. 송당(松堂) 박 선생(朴先生, 박영(朴英))이 도학(道學)이 있다는 말을 듣고 발이 부르트도록 일선(一善)으로 찾아가 오랫동안 배우고 돌아왔는데, 본령(本領)이 부합되었다. 항상 말하기를, “동지(同志)를 찾아가도 도움이 없으니, 방안에 단정히 앉아서 긴요한 대목을 음미하며 노력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제사 때를 당해서는 모든 일을 반드시 몸소 하고 기명(器皿)과 집물(什物)을 매우 깨끗하게 하였다. 아우와 조카들에게 우애(友愛)를 다하여 가르치고 독려했기 때문에 아우는 행실과 학업이 모두 드러났다. 아랫사람들을 장중함으로 거느리고 노복(老僕)이나 첩(妾)에게 과실(過失)이 있으면 반드시 고치게 하였는데, 고치지 않으면 매를 때리기까지 하여도 감히 원망하는 자가 없었다. 남쪽 10리 보림산(寶林山) 가까운 기슭에 집터를 잡았는데, 그곳은 경내가 그윽한 데다가 더욱 선영(先塋)에 성묘하기가 편리했다. 거기에다 급히 작은 정사(精舍)를 지어 학습하고 휴식하는 장소로 삼아, 일재(一齋)라 편액(扁額)하였다. 또 이르기를, “자식으로서 어버이에 대한 생각은 무궁하다. 내가 이 정사를 짓게 된 것은 매우 다행이다.” 하고는, 스스로 제사에 참여하는 외에는 일찍이 여기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스스로 불행하게 공부할 때를 놓쳐서 아마도 정력(精力)이 분산되었다고 하여 범연하게 보고 기억하는 일을 힘쓰지 않았으며, 정주서(程朱書) 보기를 아주 좋아하였지만 그 뜻은 오로지 공자(孔子)와 맹자(孟子)를 표준으로 삼았었다. 만년에는 ≪주역(周易)≫ 읽기를 좋아하여 시간가는 줄을 모르고 날이 밝았으며 겨울에 화롯불을 쪼이지 않고 여름에 부채질을 하지 않아 여러 아우들은 견디지 못했으나 선생은 편안하게 여기고 시원하고 즐거워하였다. 기꺼이 따르는 선비를 보면 스스로 사도(師道)를 세워 가르치고 계칙(戒飭)하여 먼저 기질(氣質)을 변화시켰다. 선생이 향당(鄕黨)에 있으면서 사람을 만나면 서로 예의로 대하고 악인(惡人)을 만나면 반드시 알도록 일러주고 곧바로 배척하였다. 매양 백성들의 덕(德)이 순후(醇厚)하지 못함을 한탄하여 정성스럽고 간절하게 인도하니,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사당(祠堂)을 세웠다. 세속에서 생일(生日)에 성대하게 차리고 손님 부르는 것을 미워하여 “생일에 성대하게 차리고 제사는 지내지 않으면 마음이 편한가?” 묻고, 역시 서로 약속하여 바로잡았다.

송 규암(宋圭庵, 송인수(宋麟壽))이 감사(監司)로 와서 맨 먼저 공을 방문하여 강도(講道)하고 말하기를, “실천(實踐)하는 것이 어찌 장 횡거(張橫渠, 송나라 유학자 장재(張載))만 못하다고 하겠는가?”라고 하여, 마침내 존경하여 섬겼다. 영천(靈川) 신군(申君, 신잠(申潛))이 수령(守令)이 되어 찾아와 학문에 대해 묻고 치도(治道)를 논하고 매우 경중(敬重)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연이어 남쪽으로 내려가는 진신(搢紳)ㆍ후생(後生)ㆍ방백(方伯)들이 다투어 선생의 문하(門下)를 늦게 찾아가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래서 귀한 사람 천한 사람 할 것 없이 선생이 계신 것을 모르는 자가 없었으며, 일컫는 자들은 반드시 ‘일재(一齋)’라고 하였다.

병인년(丙寅年, 1566년 명종 21년)에 명종(明宗)이 경학(經學)에 밝고 덕행(德行)이 뛰어난 선비를 급하게 구하니, 조정에서 맨 먼저 선생을 천거하였다. 7월에 사축서 사축(司畜署司畜)으로 제수되어 역마를 타고 한양(漢陽)으로 가 마침내 입대(入對)하여 학문하는 방법을 진달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얼마 후 의영고 영(義盈庫令)으로 제수하였고, 10월에 임천 군수(林川郡守)를 제수하고 특별히 이엄(耳掩)을 하사하였다. 정묘년(丁卯年, 1567년 명종 22년) 5월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자, 임금이 의관(醫官)을 보내 문병하였다.

금상(今上, 선조(宣祖))이 즉위하여 의빈부 경력(儀賓府經歷)ㆍ선공감 부정(繕工監副正)ㆍ사옹원 정(司饔院正)을 제수하였다. 갑술년(甲戌年, 1574년 선조 7년)에 장령(掌令)으로 부르자 상소하여 사은(謝恩)하면서 진언(陳言)하니, 임금이 아름답게 여겼으며, 후일 경연(經筵)에서 “그 정학(正學)은 상(賞)을 주어야 한다.”는 전교(傳敎)가 있었다. 7월에 장악원 정(掌樂院正)을 제수하였는데 이때부터 병이 더욱 심해져서 무릇 다섯 번이나 역마를 보내어 불렀으나 나아가지 못하였다. 임금이 네 번이나 의관을 보냈지만 치유(治癒)되지 않았으니, 애석한 일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의 도학(道學)은 자신을 검속(檢束)하고 뜻을 성실하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경(敬)을 주장으로 삼아 이치를 연구하는 것을 요점으로 하였다. 그래서 덕(德)을 쌓는 도구(道具)로는 사서(四書)만으로 충분하였고, 성인(聖人)이 되기를 바라는 공부는 ‘일(一)’ 한 글자만으로 부족하지 않았다. 공은 학문에 정통하여 광휘(光輝)가 일용(日用)하는 사이에 나타났다. 그래서 그 의표(儀表)를 바라보면 걸출하여 오만한 자라도 무릎을 꿇게 되고, 그의 담론(談論)을 접하면 참소하고 꺼려하는 자도 심취(心醉)되게 마련이요, 그의 유도(誘導)를 받게 되면 취향(趣向)이 다른 자도 정성으로 복종하였으니, 이는 인지(人智)나 인력(人力)으로 미칠 바가 아니었다. 저술(著述)에 나타난 것을 보면 답습(踏襲)하고 중첩(重疊)되는 바가 전혀 없이 자가(自家)의 설(說)이 많았다. 그래서 선유(先儒)들의 설과 더러 어긋난 것이 있기 때문에 박흡(博洽)한 것이 항상 적지만 그 귀취(歸趣)의 요점은 합치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사물을 떠나 실행하기 어려운 것을 고상하게 여기거나 예사롭고 쉬운 것을 낮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겉을 꾸미기에 힘쓰는 자들은 좋아하지 않았으니, 덕(德) 있는 자를 아는 자가 드물다는 말이 미덥다고 하겠다. 비록 그러하나 기묘년(己卯年, 1519년 중종 14년)의 사화(士禍)로 도학(道學)이 막힌 세상이었지만 그 사이에 반드시 행의(行義)가 문학(文學)으로 추중(推重)을 받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며 마음을 다스려 끝내 평실(平實)하게 하여 성취한 분은 바로 선생이 그런 사람이라 하겠다.

배위(配位) 영월 신씨(寧越辛氏)는 도총부 경력(都摠府經歷) 신백수(辛伯粹)의 딸이다. 아들은 둘인데, 장남은 이덕일(李德一)이요, 차남은 이수일(李守一)이며, 후에 아우 이상(李常)은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에 제수되었다. 장녀는 김종룡(金從龍)에게 시집갔으니 하서 선생(河西先生, 김인후(金麟厚))의 사자(嗣子)인데 일찍 죽었으며, 다음은 사인(士人) 김복인(金復仁)에게 시집갔다. 서출(庶出) 아들은 이수근(李守根)이요, 딸은 박견천(朴堅千)에게 시집갔다. 또 아들 둘이 있으니, 이수직(李守直)과 이수인(李守仁)이며, 두 딸이 있으니, 장녀는 과부(寡婦)가 되었고 다음은 어리다. 손자는 9명, 손녀는 2명이며, 외손(外孫)은 2명이다. 아! 이 역시 많다고 하겠으니, 대현(大賢)의 후손이 다시 흥하게 되려나보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선생의 재능은 탁월하기 으뜸이었네. 한번 변하여 지극하게 되어 재처(裁處)할 필요 없었네. 선생의 학문은 재주가 아니었으면 어찌 깨달았으랴? 힘써 탐구하고 맹렬히 성찰(省察)해서, 여러 음상(陰象)을 해석하고 변정하였네. 선생의 행실은 배울수록 더욱 바르게 되고, 미덥고 근신함도 그 성품을 따른 것이었네. 선생의 덕은 행할수록 더 얻어져 그 온전함 회복해서 확실하고 쉼 없었네. 이는 어디에 근본한 것인가? 오직 마음에서 우러나왔네. 마음에 두고 간약(簡約)을 지키니 만화(萬化)의 문(門)이며, 이를 유진(儒眞)이라 하고 왕자(王者)의 신하라 하네. 자기에게 있으면 자신을 위하고 남에게 있으면 남을 위하였네. 가까운 고을 풍속 격려하고, 먼 곳에서 벗들이 찾아왔네. 아름다운 난초 골짜기에 있어 그 향기 임금께 알려졌네. 궁궐에 한번 입대(入對)하자 영명한 임금 모습을 고쳤네. 갑자기 일어나지 못하니, 그 자취 외롭게 되어 막막하네. 수립(樹立)함 날로 배양(培養)되고 전장(典章) 날로 따르네. 도(道)는 경륜(經綸)하는 데 굽혔고 뜻은 전대의 성인을 계승하고 후생을 계도하는 데 쌓았네. 골라서 정하지 않은 유택(幽宅)이나 생사(生死)간 싫어함이 없겠네. 이곳에 와서 본받을 일들 이 비석에 있지 않은가?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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