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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전북 무주] 금산김씨(錦山金氏) 시조 김신(金侁)묘

장안봉(微山) 2015. 1. 12. 17:43

금산김씨(錦山金氏) 시조 김신(金侁)

 

금산이라는 이름을 시작하게 한 김 신(고려)

<국제적으로 활약하다>

효자 김신은 경덕제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문과에 급제하였다. 좌정언,추밀원 부사 등의 벼슬을 하다가, 원종이 원나라에 들어갈 때에 수행하였다.

원종이 그를 신임하여 데리고 갔던 것이다. 그는 고려 임금에게만 신임을 얻었던 것이 아니라, 원나라 황제에게도 신임을 얻었다.

김신은 몇 년 뒤에 원종을 따라 고려로 돌아왔는데, 원나라 장군의 부탁 때문에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다.
원나라가 고려와 힘을 합하여 일본을 정벌하다가 실패했는데, 원나라 도원수 홀돈이 자기 죄를 덜기 위하여 김신을 데리고 가서 황제에게 천거했던 것이다.

황제는 김신에게 자주 자문을 구했으며, 요양성의 참정이라는 높은 벼슬까지 내렸다.

당시 고려의 임금이나 세자는 절반쯤 원나라에 들어가 살아야 했으며, 국내 정치도 많은 간섭을 받아야 했다. 김신은 이런 시절에 원나라 조정에 있으면서 조국 고려를 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김신이 고국에 돌아가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싶어하자, 원나라 성종황제가 김신에게 "만리황풍"이라는 글을 써서 주며 귀국시켰다."만리 밖까지 황제의 은혜가 끼친다"는 뜻이다.

충렬왕은 그 이듬해(1305년)에 김신의 고향 진예현을 금주군으로 승격시키고, 가까이 있는 다섯 고을을 소속시켰다. "금의환향"했다는 뜻으로 그의 고향을 "금주"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지금 우리 고장을 "금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첫번째 군수가 바로 김신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금산군수를 지금주사라고 하였다.

<어머니의 뼈를 찾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올 무렵에 왜구들이 금산에 쳐들어와,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집들을 불태웠으며 재산을 약탈해갔다. 김신의 어머니도 함께 죽었는데,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방은 온통 흰 눈으로 뒤덮여, 찾을 수가 없었다. 시신이라도 찾아서 편히 장사지내야 해마다 제사도 드릴 수 있을 텐데, 시신을 찾아내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다.

그래서 단을 쌓고, 하늘에 기도 드렸다. 이레 동안 꼬박 밤마다 기도를 드렸더니, 이튿날 아침에 한 줄기 눈이 녹으면서 좁은 길이 나타났다. 그 길을 따라 가보았더니, 과연 수많은 해골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시신이 불타 버려, 과연 어느 것이 어머니의 시신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하늘을 우러러 기도 드렸다.

"하느님! 이것이 만약 내 어머니의 시신이라면 이 뼈가 곧 변색되게 하소서."

그러자 맑은 하늘에 구름과 안개가 덮이더니, 천둥 벼락이 쳤다. 기도를 마치고 눈을 뜨자, 과연 흰 뼈가 푸른색을 변하였다. 그래서 이것이 정말 어머니의 시신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김신은 곧 그 뼈를 거두어 정성껏 장사 지냈다.

<일본을 치는데 앞장서다>

김신은 왜구들에게 어머니의 원수를 갚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런데 몇 년 뒤에 고려 조정에서 원나라와 함께 일본을 정벌하기로 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김신은 어머니의 원수를 갚을 날이 왔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전쟁에 나가겠다고 자원하였다. 도원수는 김방경 장군이었다. 그는 좌군 병마사가 되어, 일본땅 이끼시마에 남보다 먼저 도착하였다. 그러나 풍랑이 크게 일어나, 배가 위험하게 되었다. 그러자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는 뱃머리에 서서 하늘에 빌었다.

"하느님! 오늘 풍랑이 크게 이는 것은 제가 사람을 많이 죽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찌 제 한 몸을 아끼느라고 수많은 군사를 죽이겠습니까? 스스로 목숨을 바치겠으니, 이 부하들을 살려 주소서."

그리고는 곧바로 바닷물에 몸을 던져서 죽었다. 그러자 풍랑이 멎었다. 그는 충성과 효성으로 한 평생을 살았으며, 충효를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나라에서도 그의 충효를 기려, 충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금산문화관광자료인용]

 

 

금산김씨 시조 묘소 입구

 

금산김씨 시조공 신도비

 

 

 

시조 묘소 전경

 

 

 

 

 

고려평장사금자광록대부참정김공지묘

 

 

시조 묘 옆에 잇는 4세 10위 제단 비

 

 

금산군 남일면 황풍리에 있는 만리황풍비

충열왕 30년(1304)에 원나라에서 귀국하실 때 원나라 세조가 석별의 정으로 하사한 친필
"萬里皇風" 만리 밖에 헤어지나 이정을 잊지 말라는 뜻의 어필을 하사하여 이곳으로
돌아오니 그 지명이 "황풍정" 이라 명명되며 그 마을에 만리황풍비가 수립되어 있다.

[금산김씨대종회자료인용]

충간공김선생유적비문

 

 

황풍사와 황풍당 건물-만리황풍비각 근처에 있다

황풍사

황풍당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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