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 묘(서울시 유형문화재 8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 사육신 공원내 사육신 묘역 전경 |
사육신묘는 사육신 공원 안에 있습니다. 공원 입구에는 이 곳이 사충서원 터였다는 표석이 있으며, 조금 위로 올라가면 홍살문이 있고, 정면에 사당이 보입니다. |
▲ 사육신 공원 입구 |
▲ 홍살문 |
▲ 사당 입구(불이문) |
사당 입구의 외삼문은 불이문(不二門)이라 불리며, 문은 잠겨 있어서 담장 너머로 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사당 내부 정면에는 사육신을 모신 의절사가 있으며, 왼쪽에는 비각과 안에는 신도비가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1955년에 세웠다는 사육신비가 있습니다. |
▲ 의절사(사당) |
▲ 신도비(사당 왼쪽) |
▲ 사육신비(사당 오른쪽) |
사당 왼편 앞에는 공원 관리실이 있어서 허락을 받고 사육신 묘로 향했습니다. 사당 뒷편으로 가면 묘역이 보입니다. 묘역 입구는 낮은 철책으로 둘러져 있으며, 안으로 들어가면 3기의 묘가 눈에 들어 옵니다.
맨 앞에는 하위지의 묘, 중간에 약간 앞으로 나온 성삼문의 묘, 그 옆에는 유성원의 묘가 있으며, 이 세 분의 묘소가 한 군을 이루고 있습니다. 오른쪽의 묘지군에는 맨 앞에 이개의 묘, 다음이 유응부의 묘, 그 옆에 박팽년의 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박팽년의 묘 옆에 또 한 기의 묘가 있습니다. 사육신 묘역이면 묘가 6기가 있어야 하는데, 7기가 있다니... 이 묘는 누구의 묘이고,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
▲ 하위지 묘소 |
▲ 성삼문 묘소 |
▲ 류성원 묘소 |
▲ 이개 묘소 |
▲ 유응부 묘소 |
▲ 박팽년 묘소 |
마지막 묘소로 접근하는데, 묘소 앞에 남녀 두 사람이 따뜻한 양지에 앉아서 데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오십대 후반의 아저씨는 훼방꾼인 저에게 겸연쩍어 하시며, 이 묘가 김재규의 조상인 김문기의 묘이며, 1970년대 사육신 묘역 정화사업때 김재규의 권력으로 사육신 묘역에 들어 왔는데, 이 곳에 묻혀서는 안된다고 하시더군요.
사육신 묘역에 있는 묘의 묘비(묘갈)에는 하씨지묘(河氏之墓), 성씨지묘(成氏之墓)와 같이 성씨(姓氏)만 새겨져 있습니다. 묘역 뒤로 돌아가보니 8각의 주춧돌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있었으며, 옛날에 이곳에 건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
▲ 김문기 묘소 |
▲ 묘소 뒤편의 사충서원터 |
☞ 돌아와서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보니
"사육신 묘역에는 현재 여섯이 아닌 일곱 분의 묘가 조성되어 있는 경위는 다음과 같다. 세조 2년 단종복위사건 가담자들의 참혹한 죽음 이후, 어느 스님이 성승ㆍ박팽년ㆍ유응부ㆍ성삼문ㆍ이개 다섯 분의 시신을 현재의 위치에 모셨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조 2년 6월 병오(丙午)조에는 성삼문ㆍ하위지ㆍ이개ㆍ유성원ㆍ김문기ㆍ박팽년을 비롯한 성승ㆍ유응부 등의 이름이 보이고,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에는 성삼문ㆍ박팽년ㆍ이개ㆍ유성원ㆍ하위지ㆍ유응부를 사육신이라 하였다. 그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성승의 묘를 찾을 수 없어 네 분의 묘만 있었으나, 여전히 사육신묘라 불려졌다.
김문기는 단종복위 모의 주역으로서, 모의당시 직책이 공조판서 겸 3군 도진무로서 군동원의 책임을 맡은 내용과 성상문ㆍ박팽년 선생에게 연화장내의 모의를 차질없이 실행하라는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함께 기재되어 있다. 거사계획이 발각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입을 다물고 불복하고, 사지를 찢기는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아들 현석(玄錫)도 처형되었다.1731년에 신원(복권)되고, 1778년에 관직이 회복되고 좌찬성을 승직받았다. 1977년에 국사편찬 위원회에서 조선왕조실록에 의거하여 세조때 가려진 원 사육신이라고 판정되었다.
성승(成勝)은 사육신의 한 사람인 삼문(三問)의 아버지이다.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선위(禪位)를 받자, 조정에 나가지 않으면서 아들 삼문과 뜻을 같이하는 집현전 학사들과 일부 무신을 포섭하여 단종복위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56년 창덕궁에서의 명(明)나라 사신을 위한 잔칫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일을 추진하였으나, 밀고로 잡혀 능지처사(陵遲處死)되었다. 아들 삼문·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과 손자 셋이 모두 죽음을 당하여 후사가 끊겼다. |
▲ 묘소 뒷 모습(좌로부터 김문기,박팽년,유응부, 이개) |
▲ 묘소 뒷 모습(좌로부터 류성원, 성삼문, 하위지) |
사육신묘(死六臣墓)는 조선 세조 2년(1456) 조선의 6대 임금인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목숨을 바친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6명의 신하 즉 사육신(死六臣)을 모신 곳이다. 이들은 단종 3년(1455)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뒤의 세조)이 왕위를 빼앗고 단종을 몰아내자 이에 분개하여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사육신의 충성심과 의기를 추모하기 위해 숙종 7년(1681)에 이곳에 서원을 세우고, 정조 6년(1782)에는 신도비를 세워 두었다. 1955년에는 사육신비를 세우고, 이후 묘역을 확장하여 새롭게 정비하여 충효 사상을 기리고자 하였다. 원래의 묘역에는 박팽년·성삼문·유응부·이개의 묘만 있었으나 후에 하위지·유성원·김문기의 허묘도 만들어 함께 모시고 있다. |
사육신묘 위치도 |
소재지 : 서울 동작구 노량진1동 185-2
빨간 깃발이 있는 곳에 사육신 묘역이 있습니다.
지하철 1호선 노량진역 1번 출구에서 한강대교 방향으로 500 여 미터 정도 내려가면 도로 왼쪽에 사육신 공원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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