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왕능)

[스크랩] 사육신 묘

장안봉(微山) 2012. 12. 27. 21:55

사육신 묘(서울시 유형문화재 8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사육신 공원내 사육신 묘역 전경

사육신묘는 사육신 공원 안에 있습니다. 공원 입구에는 이 곳이 사충서원 터였다는 표석이 있으며, 조금 위로 올라가면 홍살문이 있고, 정면에 사당이 보입니다.

▲ 사육신 공원 입구

▲ 홍살문

▲ 사당 입구(불이문)

사당 입구의 외삼문은 불이문(不二門)이라 불리며, 문은 잠겨 있어서 담장 너머로 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사당 내부 정면에는 사육신을 모신 의절사가 있으며, 왼쪽에는 비각과 안에는 신도비가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1955년에 세웠다는 사육신비가 있습니다.

▲ 의절사(사당)

▲ 신도비(사당 왼쪽)

▲ 사육신비(사당 오른쪽)

사당 왼편 앞에는 공원 관리실이 있어서 허락을 받고 사육신 묘로 향했습니다. 사당 뒷편으로 가면 묘역이 보입니다. 묘역 입구는 낮은 철책으로 둘러져 있으며, 안으로 들어가면 3기의 묘가 눈에 들어 옵니다.

 

맨 앞에는 하위지의 묘, 중간에 약간 앞으로 나온 성삼문의 묘, 그 옆에는 유성원의 묘가 있으며, 이 세 분의 묘소가 한 군을 이루고 있습니다. 오른쪽의 묘지군에는 맨 앞에 이개의 묘, 다음이 유응부의 묘, 그 옆에 박팽년의 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박팽년의 묘 옆에 또 한 기의 묘가 있습니다. 사육신 묘역이면 묘가 6기가 있어야 하는데, 7기가 있다니... 이 묘는 누구의 묘이고,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 하위지 묘소

▲ 성삼문 묘소

▲ 류성원 묘소

▲ 이개 묘소

▲ 유응부 묘소

▲ 박팽년 묘소

마지막 묘소로 접근하는데, 묘소 앞에 남녀 두 사람이 따뜻한 양지에 앉아서 데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오십대 후반의 아저씨는 훼방꾼인 저에게 겸연쩍어 하시며, 이 묘가 김재규의 조상인 김문기의 묘이며, 1970년대 사육신 묘역 정화사업때 김재규의 권력으로 사육신 묘역에 들어 왔는데, 이 곳에 묻혀서는 안된다고 하시더군요.

 

사육신 묘역에 있는 묘의 묘비(묘갈)에는 하씨지묘(河氏之墓), 성씨지묘(成氏之墓)와 같이 성씨(姓氏)만 새겨져 있습니다. 묘역 뒤로 돌아가보니 8각의 주춧돌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있었으며, 옛날에 이곳에 건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 김문기 묘소

▲ 묘소 뒤편의 사충서원터

☞ 돌아와서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보니

 

"사육신 묘역에는 현재 여섯이 아닌 일곱 분의 묘가 조성되어 있는 경위는 다음과 같다. 세조 2년 단종복위사건 가담자들의 참혹한 죽음 이후, 어느 스님이 성승ㆍ박팽년ㆍ유응부ㆍ성삼문ㆍ이개 다섯 분의 시신을 현재의 위치에 모셨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조 2년 6월 병오(丙午)조에는 성삼문ㆍ하위지ㆍ이개ㆍ유성원ㆍ김문기ㆍ박팽년을 비롯한 성승ㆍ유응부 등의 이름이 보이고,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에는 성삼문ㆍ박팽년ㆍ이개ㆍ유성원ㆍ하위지ㆍ유응부를 사육신이라 하였다. 그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성승의 묘를 찾을 수 없어 네 분의 묘만 있었으나, 여전히 사육신묘라 불려졌다.


이리하여 서울특별시가 사육신 묘역 일대를 성역화(1977∼1978) 하면서 육신에 대한 논란을 조정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사육신묘에는 일곱 분의 묘가 조성되게 되었던 것이다. 즉 본래 이 곳에 있던 박팽년ㆍ성삼문ㆍ유응부ㆍ이개의 묘에, 하위지ㆍ유성원ㆍ김문기의 가묘(假墓)도 함께 만들었다."

 

김문기는 단종복위 모의 주역으로서, 모의당시 직책이 공조판서 겸 3군 도진무로서 군동원의 책임을 맡은 내용과 성상문ㆍ박팽년 선생에게 연화장내의 모의를 차질없이 실행하라는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함께 기재되어 있다. 거사계획이 발각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입을 다물고 불복하고, 사지를 찢기는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아들 현석(玄錫)도 처형되었다.1731년에 신원(복권)되고, 1778년에 관직이 회복되고 좌찬성을 승직받았다. 1977년에 국사편찬 위원회에서 조선왕조실록에 의거하여 세조때 가려진 원 사육신이라고 판정되었다.

 

성승(成勝)은 사육신의 한 사람인 삼문(三問)의 아버지이다.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선위(禪位)를 받자, 조정에 나가지 않으면서 아들 삼문과 뜻을 같이하는 집현전 학사들과 일부 무신을 포섭하여 단종복위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56년 창덕궁에서의 명(明)나라 사신을 위한 잔칫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일을 추진하였으나, 밀고로 잡혀 능지처사(陵遲處死)되었다. 아들 삼문·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과 손자 셋이 모두 죽음을 당하여 후사가 끊겼다.

▲ 묘소 뒷 모습(좌로부터 김문기,박팽년,유응부, 이개)

▲ 묘소 뒷 모습(좌로부터 류성원, 성삼문, 하위지)

사육신묘(死六臣墓)는 조선 세조 2년(1456) 조선의 6대 임금인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목숨을 바친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6명의 신하 즉 사육신(死六臣)을 모신 곳이다. 이들은 단종 3년(1455)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뒤의 세조)이 왕위를 빼앗고 단종을 몰아내자 이에 분개하여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사육신의 충성심과 의기를 추모하기 위해 숙종 7년(1681)에 이곳에 서원을 세우고, 정조 6년(1782)에는 신도비를 세워 두었다. 1955년에는 사육신비를 세우고, 이후 묘역을 확장하여 새롭게 정비하여 충효 사상을 기리고자 하였다. 원래의 묘역에는 박팽년·성삼문·유응부·이개의 묘만 있었으나 후에 하위지·유성원·김문기의 허묘도 만들어 함께 모시고 있다.

사육신묘 위치도

소재지 : 서울 동작구 노량진1동 185-2

 

빨간 깃발이 있는 곳에 사육신 묘역이 있습니다.

 

지하철 1호선 노량진역 1번 출구에서 한강대교 방향으로 500 여 미터 정도 내려가면 도로 왼쪽에 사육신 공원이 있습니다.

[이규원 객원전문기자의 대한민국 통맥풍수]⑥ 사육신 묘와 나경 羅經보기

 

백두대간 한남정맥이 한강수 따라 내려오다 멈춰선 明堂

 ◇용산 쪽 강기슭에서 지켜본 한강의 낙조. 더욱 쓸쓸하고 가련하게 투영된다.
서울 동작구 노량진1동 155의 1번지. 용산 쪽에서 한강대교를 건너자마자 우측으로 보이는 작고 나지막한 산이 사육신 공원이다.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초등학교 때부터 역사 시간마다 외던 사육신 이름이다. 시험에도 자주 났다. 그들, 여섯 분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홍살문, 불이문, 신도비각을 차례로 거치면서 의절사(義節祠)에 이르니 일곱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1977년 김문기가 추봉(追封)된 까닭이다. 천추에 길이 남을 의절과 그 고통스러웠을 죽음에 두 번의 경배 예의로는 아무래도 부족한 듯싶다. 숙연해질 따름이다.

 

왼쪽으로 오르니 하위지 성삼문 유성원의 묘가 있고, 10여보 우측에 이개 유응부 박팽년 김문기 묘가 한강수를 등에 지고 풍진 세월을 누워 있다.

 

◇사육신 묘 뒤에서 바라본 한강대교와 서울의 남북을 가르는 한강수.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애달픈 죽음과 그들의 충의절개를 저 강은 알고 있다.

 

“대역죄로 처형당한 분들이어서 아무렇게나 용사되었을 것 같은데 의외로 괜찮은 자립니다. 전체 형국으론 묘 뒤의 만두가 잘 형성됐고 국립묘지 쪽에서 뻗은 내룡맥이 제대로 응결되었어요. 그러나 명당이면 뭘 합니까. 묘역을 돌볼 혈손이 끊어졌는데…. 풍수로 전국을 다니다 가도 이런 자리에 서면 가슴이 미어지고 때로는 한계에 부딪히기도 하지요.”

 

윤갑원 교수를 따라 만두 위에 오르니 오른쪽으로 한강대교가, 왼쪽으로 한강철교가 내려다보인다. 강 한가운데서 한강대교를 받치고 있는 노들섬은 망자들의 설한풍을 막아 주는 병풍인 듯싶으며 때로는 베개로도 생각하고 싶다. 모두가 애달픈 죽음이 안타까워서다.

 

오늘따라 ‘사람이 대를 잇고 산다는 것’에 대해 유별나게 강조한다. 왕릉같이 우람하게 잘 써 놓은 묘도 몇 년만 돌보지 않으면 잡초가 우거지고 평토화되어 간다. 하기야 시골집도 사람이 살면 풀이 못 자라는데, 빈집으로 방치하면 초목이 무성하고 담이 무너져 폐허가 되는 걸 수없이 보아온 터다.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오다 금강산 위에서 한북정맥으로 갈라지는 게 서울을 형성하는 용맥으로, 한강을 만나면서 멈춰 선다. 이른바 산진수회다. 반면 한수 이남의 강남은 태백산으로 내리닫는 백두대간이 속리산에 와 우뚝선 후 한남정맥으로 올라오는 맥이다. 같은 서울의 산이라도 남산은 한북정맥이요, 관악산은 한남정맥에 속한다. 사육신 묘는 한남정맥이 한강을 따라 내려오다 결인된 곳이다.

 

◇묘역 뒤에 솟아오른 만두 응결처. 한남정맥으로 속리산에서 올라와 국립묘지에 자리를 주고 이곳에 멈춰 섰다. 마치 가마솥을 뒤집어 놓은 듯 너부죽하고 봉곳하다.

 

“자, 우선 좌향부터 재 봅시다. 새 왕권파들이 무서워 마음대로 시신조차 거둘 수 없었던 만고충신들을 어떻게 모셨는가를….”

 

일곱 명의 문하생 모두가 나경을 꺼내 든다. 일행 중 몇몇이 사육신 묘가 여기인 줄 몰랐다며 뒤늦게 찾아온 걸 미안해 한다. 서울 도심에 있으면서도 지나치는 사람들이 많다는 자괴심도 든다.

 

▲하위지-묘좌유향 ▲성삼문-갑좌경향 ▲유성원-갑좌경향 ▲이개-갑좌경향 ▲유응부-갑좌경향 ▲박팽년-인좌신향 ▲김문기-축좌미향.

 

한 묘역에 모셔도 이렇게 달라지는 것이 좌와 향이다. 건너의 안산을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물형(物形)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사형(蛇形)을 앞에서 보면 달려드는 형국이요, 뒤에서 본다면 달아나는 국세(局勢)가 되고 만다. 흘러가는 물을 보지 말고 흘러오는 물을 바라 봐야 기를 받는다고 했다. 군자동침(君子東枕)이라 하여 잠을 잘 때 머리를 동쪽에 두었고 강의 상류 쪽이나 집 뒤의 동산을 향해 베개를 베고 잤다.

죽기를 작정하면 두려울 게 없는 법이다.

 

시뻘겋게 달군 쇠꼬챙이로 허벅지를 찌르고 팔을 자르는 모진 악형에도 표정 하나 변함없던 성삼문. 되레 국문하던 무사들이 기겁했다던가. 사육신의 참혹상이야 실록에 기록된 바 그대로지만 그 화가 당사자에 그치지 않았다는 데 역사는 더욱 비참해지고 만다. 성삼문은 아버지(성승), 동생 셋(삼빙·삼고·삼성)과 아들 넷(맹첨·맹년·맹종·갓난아기)까지 몰살당했고, 다른 사육신들도 거의 같은 꼴로 멸족당했다. 그들은 삼족이 멸하는 화를 뻔히 알면서도 굽히지 않았다. 다만 박팽년만이 유복자가 살아남아 후손이 봉사(奉祀)하고 있을 뿐이다.

◇의절사에는 일곱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참배객들은 ‘사칠신’이라 부르지 않는다.

 

“권력의 최정상이었던 왕릉이라 해서 모두 명당은 아닙니다. 사육신이 복위시키려던 영월의 장릉(단종대왕)과 남양주의 사릉(정순왕후·단종비)을 가 보세요. 세조대왕에 이르러 세상이 바뀌었는데 어느 풍수가 감히 대들어 명당 자리를 찾는다고 나섰겠습니까.”

 

사실 그렇다. 연산군 묘와 광해군 묘를 가 봐도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반정(反正)이 일어나 천하가 뒤집어졌는데 길지를 찾겠다고 나서는 풍수는 죽으려고 환장한 것이나 다름없다. 숙종 17년(1691)에 와서야 신원되고 치제(致祭)케 하며 벼슬을 증직받았지만 사람 죽여 씨조차 말려 놓은 뒤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래도 역사의 서슬은 시퍼렇게 살아 있다. 사육신을 포함한 100여명의 충의순절은 죽음을 두려워 않는 선비정신, 임진왜란의 의병, 최익현·안중근·김구로 이어지는 독립운동으로 길게 맥이 닿는다. 학자들은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죽음과 4·19의거, 6월민주화운동도 예사로 보지 않고 있다.

 

‘무덤 릉(陵)’자를 표기할 때, ‘능’과 ‘릉’의 구분을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아 두자.

 

단어의 첫 음절에 올 때는 두음법칙에 의해 ‘능원’ ‘능묘’처럼 첫소리를 ‘ㄴ’으로 쓴다. 그러나 첫 음절이 아니면 ‘ㄹ’을 그대로 살려 ‘릉’으로 표기해야 맞다. 예컨대 ‘서오릉’ ‘정릉’ ‘태릉’ ‘서삼릉’으로 써야 한다. 금곡에 있는 고종황제의 능은 ‘홍릉’, 순종황제 능은 ‘유릉’, 여주 세종대왕 능은 ‘영릉’, 구리시의 아홉 왕릉은 ‘동구릉’으로 표기해야 옳다. 우리 어법이 그렇다고 하니 전국 각지의 능 제향 시 이를 따라야 할 것 같다.

 

◇여러 종류의 나경. ‘풍수 공부의 꽃’으로, 좌향을 정하고 용맥과 하관 방향을 일치시키는 분금이 세밀하게 표시돼 있다. 나경 제작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10호로 지정돼 전수되고 있다.

 

사육신 위패에 참배하러 의절사 계단을 오르내리면서도 설명은 이어진다. 행보법(行步法)도 법도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연보합보(連步合步)라 하여 올라갈 때는 왼쪽 발을 먼저 디딘 후 오른발을 합친다.

 

반대로 계단을 내려올 때는 오른발을 먼저 딛고 왼발을 합쳐 같은 자세로 내려오도록 전례에서는 가르치고 있다. 선조들이 조상을 모시는 예의로 지켜온 예법들은 세월이 가도 존중되어야 할 문화 전통이다.

사육신 묘의 좌향을 찾게 해주는 나경(방위측정기구)은 도대체 무엇인가.

 

‘포라만상(包羅萬象) 경륜천지(經綸天地)’에서 ‘나’자와 ‘경’자만을 따온 것인데, 허리에 차고 다닌다 하여 패철(佩鐵) 또는 뜬쇠로도 불렸다. 부채 끝에 달면 선추(扇錘)였고, 둥근 원반 모양이어서 윤도(輪圖)로도 지칭한다. 현재 전통 윤도 제작은 전북 고창군 김종대(74)씨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10호로 지정돼 맥을 잇고 있다.

 

중국 한대(漢代)에는 나경이 점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는 1세기쯤으로 추정되는 낙랑고분에서 식점천지반(式占天地盤)이라는 나경이 출토되어 그 유래를 찾고 있다. 나경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풍수사상이 생활과 밀접해지고 일반화되면서부터다. 선조대왕 실록에 윤도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한다.

 

나경은 태극에 근거한다. 중국 문왕(文王)의 후천팔괘를 인용하여 만든 것으로, 우주 원리인 음양오행의 천지도수가 함축되어 있다. 정남북을 가리키는 자기력이 있어 바닥에 철분이 있는 곳에서는 오작동할 수도 있다. 몸 안의 시계나 열쇠꾸러미 등은 멀리하는 것이 측정의 정확성을 기할 수 있다. 가격도 천차만별이어서 1만원에서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것도 있다.

 

◇묘역 뒤편에 있는 폐묘.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의 묘로 추정되나 사료적 근거는 없다. 문인석이 반쯤 땅에 묻힌 채 돌아앉아 버렸다.

 

작은 것은 2, 3층(선이라고도 칭함. 나경에 새겨진 동심원 수)짜리에서 5층, 9층, 32층 등 다양하나 대개 9층이면 기본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1층은 황천살(팔요수)로, 표시된 방향에 물이 보이거나 산이 함몰되어 있으면 아주 고약한 흉살로 본다. 이 밖에 ▲2층은 팔요풍(황천풍살)으로, 표시된 방향이 허(虛)하거나 득수(得水)가 되면 바람의 침입으로 보아 혈처 안이 냉해지는 방위다. 이때 황천살과 팔요풍의 방향은 나경 4층을 기준으로 한다 ▲3층은 삼합오행을 보며 좌, 득수, 파구(破口·물 나가는 방향)가 정삼각형을 이루면 대길로 본다. 비석을 세울 때 사용한다 ▲4층 지반정침(地盤正針)은 나경의 기본 방향이며 24방위가 표시돼 있다 ▲5층 천산칠십이룡(穿山七十二龍)은 주산에서 만두까지 오는 용맥 방향을 결정한다 ▲6층 인반중침(人盤中針)은 좌와 사(砂)의 관계를 본다 ▲7층 투지육십룡(透地六十龍)은 땅속을 통해 들어가는 맥을 본다 ▲8층 천반봉침(天盤縫針)은 좌와 관계되는 득수·파구는 물론 호수 등 머무르는 물의 길흉 관계를 본다 ▲9층 분금(分金)은 마지막 입관 후 좌를 건드리지 않은 상태에서 용맥과 관의 방향을 맞춰 보는 선이다.

 

나경은 풍수가 평생을 공부해도 모자라는 신기(神器)다.

 

9370평의 묘역을 살피다 보니 만두 아래에 폐묘가 하나 눈에 띈다. 문인석이 돌아앉았다. 사료적 근거는 없지만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 묘로 전해 온다. 진위를 떠나 이왕에 묘역을 단장하면서 이래도 되는가 싶다. 알고 보면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의 묘도 추가로 봉안한 가묘이다.

 

살아남았으면 나라 위해 더 큰 일을 했을 아까운 인재들…. 사육신 도륙 이후 조선왕조는 세조대왕의 왕자와 그 후손이 대를 이어 통치했고 모의를 밀고했던 변절자들은 영화를 누리며 잘살았다. 살아서의 일신영달과 죽어서의 역사적 평가가 교차하며 시야를 뿌옇게 한다.

 

사육신 묘역에는 일곱 분이 모셔져 있어도 ‘사칠신’이라 부르지 않는다. 시인·온세종교신문 발행인

출처 : 한국의 능원묘
글쓴이 : 광나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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