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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전남 광양]죽음으로 경술국치에 항거한 애국지사 ?매천 황현(梅泉 黃玹)?선생-장수황씨

장안봉(微山) 2013. 12. 17. 09:41

한말 4대 시인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 12. 11 ~ 1910. 9. 10)선생은 장수 황씨 황시묵을 아버지로, 풍천 노씨를 어머니로 하여 세도 정치기가 한창인 1855년(철종 6) 12월 11일 전라도 광양현 봉강면 서석촌에서 태어났다. 자는 운경(雲卿)이다. 선생의 선조 중에는 세종대왕 시절 명재상으로 잘 알려진 황희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황진과 병자호란 때 의병장을 지낸 황위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몰락한 황씨 가문은 그가 태어난 시절에 이르면 정계에 유력한 인사를 배출하지 못하여 그는 시골의 유생으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고, 11세가 되는 해에 서당에서 천사(川社) 왕석보(王錫輔)를 스승으로 하여 시와 문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후 20대가 되어서부터 많은 시를 짓기 시작하였다. 왕석보는 1816년에 태어나 1868년 사망한 학자였다. 그의 문인으로는 황현 선생을 비롯하여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 대한제국 시기 계몽운동가 해학 이기 등이 유명하다.

선생은 후일 스승에 대하여 평하기를, “호남 동쪽에 봉성현이 있는데 전 성 중에 탄환만한 작은 고을이다. 천사 왕선생이 나온 이후로 전 성이 봉성을 시향(詩鄕)으로 추켜 올렸다. 지금 선생이 돌아가신 지 이십여 년에 선생을 추종하는 시파(詩派)의 흐름이 점점 넓어져 차차 작가의 대열에 오르게 되었다. 천사 같은 분이야말로 한 지방의 풍기(風氣)에 관계되는 분이라고 할 만하다”라 하였다.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역사서 저술에 몰두 

 

선생은 서울로 올라와 과거를 보았다. 1888년 34세로 성균관 생원이 되었으나 당시 과거장의 폐해를 직접 목격한 그는 낙향하여 더 이상 관직에 연연하지 않았다. 정부관리가 되기를 포기한 선생은 이후 처사형 선비로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비판적 지식인의 모습으로 황현은 거듭 태어났다. 그는 서울에서는 추금(秋琴) 강위(姜瑋)를 스승으로 하여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창강(滄江) 김택영(金擇榮) 등과 교유하였다. 그는 이들과 정신적인 교류를 지속적으로 가졌다. 선생의 동생 황원은 “평생 문학적인 사귐은 영재, 창강 두 분이 제일이었지만 영재에게 더욱 쏠리어 꿈에도 1년에 늘 수십 번을 만났다. 늙어서는 조금 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생은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을 학문적으로 흠모하였다. 그는 “내 평소에 선생의 문장을 좋아하였다”고 하면서 “아! 조선조의 문장은 선생에 이르러 볼 만한 것이 그쳤다”라 하여 ‘경세치용’의 연암 학문이 당대까지 이어지지 못함을 늘 아쉬워하였다. 한편 다산 정약용의 서적도 탐독하였다. 그는 다산의 [목민심서], [흠흠신서], [방례초본], [전제고] 등을 우리나라에서 전무후무한 작품이라고 평하였다.

 

선생은 1886년 구례군 간전면 만수동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에서 16년 여 살면서 선생은 많은 시와 [매천야록] 등을 저술하는 데 몰두하였다.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은 그가 저술한 대표적인 역사서로 19세기 후반 흥선대원군 집권기부터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침탈되기까지 47년간의 정치, 경제를 비롯한 전 분야에 걸친 내용을 자신의 주관적 입장에서 서술한 근대사 관련 중요 자료이다. 매천야록은 당시의 역사전반을 서술한 것이라면 오하기문은 특히 자신이 보고 들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 중점을 두어 기술한 것이다.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자결한 순국지사들을 애도하다

 

선생은 1902년 구례군 광의면 월곡리로 다시 이주하였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 직후 만영환, 조병세, 홍만식 등 관리들이 잇달아 자결하자 그는 [오애시(五哀詩)]를 지어 이들을 추모하였다. 조병세에 관해서는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겼다.

대신이 국난에 죽는 것은
여러 벼슬어치들 죽음과는 다르네
큰 소리내며 지축을 흔드니
산악이 무너지는 것 같아라
(…)
인생은 늦은 절개를 중히 여기고
수립하는 일은 진실로 어렵고 삼가야 한다
낙락장송은 오래된 돌무더기에서
송진 향기 천 년을 가리라

1906년 작성한 다른 시에서는 일제의 앞잡이가 된 친일인사들이 준동하는 모습을 풍자하였다. 반면, 같은 해 민영환을 추모하는 [혈죽(血竹)]이라는 시를 지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민영환의 숭고한 생애와 혈죽으로 환생하는 모습을 표현하면서 후손들에게 나라를 사랑할 것을 강조하였다.

 

죽음으로 경술국치에 항거하다

 

이와 함께 선생은 신학문을 배워 나라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향리의 뜻있는 사람들과 의기투합하여 1907년부터 1908년에 걸쳐 의연금을 모집하여 구례군 광의면 지천리에 호양학교(壺陽學校)를 설립한 적도 있었다. 이후 중국에 망명했던 친구 김택영이 잠시 서울에 돌아오자 그를 만나기 위해 1909년 서울로 올라온 그는 [입도(入都)]라는 시에서 망해가는 나라의 현실을 표현하였다. “남산에 올라 한 번 굽어 본 서울 땅/보는 것마다 더욱 처량하고 혼미해라/큰 거리는 수레바퀴로 가을 먼지만 그득하고/두 대궐은 침침해서 대낮도 짧은 듯하다/폐백으로 맹세했던 벼슬아치들 잘 못 되어가고/서울거리 탈이 없지만 판국이 벌써 글렀구나/예전에 망한 나라가 다 이 모양이었던가/망한 것이 분명하니 슬플 수도 없구나.”

 

시골에서 올라온 촌부의 입장에서는 화려한 서울로 보이겠지만 그 뒷모습에는 일제 침략이 노골화되는 과정이 보였기에, 선생은 이에 대한 두려움을 표시하였다.

 

그는 죽음으로서 시대의 아픔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동생 황원(黃瑗)에게 한 말]에서 “세상 꼴이 이와 같으니 선비라면 진실로 죽어 마땅하다. 그리고 만일 오늘 안 죽는다면 장차 반드시 날로 새록새록 들리는 소리마다 비위에 거슬려 못 견뎌서 말라빠지게 될 것이니 말라빠져서 죽느니보다는 죽음을 앞당겨 편안함이 어찌 낫지 않겠는가”라 하여 이미 자신이 순국을 결심하고 있음을 내비쳤다. 그는 더 이상 국권회복의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위로는 상도(常道)의 아름다움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글을 저버리지 않는다”

 

결국 그가 우려한 바대로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맞게 되었다. 그는 9월 8일 [절명시]와 유서를 쓰기 시작하였고, 9일 소주에 아편을 타서 마시고 다음날인 10일 사망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56세였다. 선생은 [자식들에서 남기는 글]에서 “나는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국가에서 500년이나 선비를 길러왔는데, 나라가 망할 때에 국난을 당하여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어찌 원통치 않은가? 나는 위로는 황천(皇天)이 상도(常道)를 굳게 지키는 아름다움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글을 저버리지 않는다”라 하였다. 결국 황현은 다음과 같은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亂離滾到白頭年[난리곤도백두년] 난리 통에 어느새 머리만 희어졌구나
幾合捐生却未然 [기합연생각미연]  몇 번 목숨을 버리려 하였건만 그러질 못하였네
今日眞成無可奈[금일진성무가내]  하지만 오늘만은 진정 어쩔 수가 없으니
輝輝風燭照蒼天[휘휘풍촉조창천]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만이 아득한 하늘을 비추는구나.

 

妖氛晻翳帝星移[요분엄예제성이]  요사한 기운 뒤덮어 천제성(天帝星)도 자리를 옮기니
九闕沉沉晝漏遲[구궐침침주루지]  구중궁궐 침침해라 낮 누수(漏水)소리만 길고나
詔勅從今無復有[조칙종금무부유]  상감 조서(詔書) 이제부턴 다시 없을 테지
琳琅一紙淚千絲[임랑일지루천사]  아름다운 한 장 글에 눈물만 하염없구나.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새 짐승도 슬피 울고 산악 해수 다 찡기는 듯
槿花世界已沉淪[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삼천리가 이미 영락되다니
秋鐙掩券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가을 밤 등불아래 책을 덮고서 옛일 곰곰이 생각해 보니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이승에서 지식인 노릇하기 정히 어렵구나.

 

曾無支廈半椽功[증무지하반연공]  일찍이 조정을 버틸만한 하찮은 공도 없었으니
只是成仁不是忠[지시성인불시충]  그저 내 마음 차마 말 수 없어 죽을 뿐 충성하려는 건 아니라
止竟僅能追尹穀[지경근능추윤곡]  기껏 겨우 윤곡(尹穀)을 뒤따름에 그칠 뿐
當時愧不躡陳東[당시괴불섭진동]  당시 진동(陳東)의 뒤를 밟지 못함이 부끄러워라.

 

선생의 시에서 언급한 윤곡은 몽고 침입 때 자결한 사람이고, 진동은 참형을 당한 사람이다.

그는 무장투쟁 내지 항거 등 적극적 저항을 하지 못하고 자결하는 소극적인 형태로 스스로 죽어감을

아쉬워하였던 것이다.

경재(耕齋) 이건승(李建昇)은 다음과 같은 시로서 선생의 자결을 애도하였다. “의를 이룸이 예로부터 전공보다 높거니와/이 시(詩)야말로 겨레의 충성심을 깨우쳤다네/과연 벌족들은 너무도 잠잠한데/한 포의(布衣) 마침내 해동(海東) 이름 드높였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매천 황현선생 생가

 

 

 

 

 

 

 

 매천역사공원 전경

 

 매천황현선생 추모시비

 매천역사공원-매천선생을 비롯한 가족묘역이다

 

 

 매천선생 조부 황직(黃樴)(후)-부친 황시묵(黃時默(좌)-매천황현선생(중)-아들 황암현(黃巖顯)(우)의 묘이다

 

 매천선생의 조부모 황직(黃樴)/남원윤씨 묘

 

 매천선생의 부모 황시묵(黃時默)/풍천노씨 묘

 매천 황현선생/배위 해주오씨 합장 묘

 

 

 

 매천선생의 아들 황암현(黃巖顯)/진양정씨 묘

 

 

 

 정자-창의정

 

 

 

 

 

 매천선생 사당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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