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성군 만계 채신보(邵城君 彎溪 蔡申保)
1420(세종 2)~1489(성종 20)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자휴(子休), 호는 만계(彎溪). 아버지는 사예(司藝) 채륜(蔡倫)이고, 아들은 나재(懶齋) 채수(蔡壽)이다.
채신보는 1438년(세종 20) 18세에 진사(進士)가 되고 함창현감(咸昌縣監)을 거쳐 1458년(세조 4)부터 1465년(세조 11년)까지 7년간을 음성현감으로 재직했다. 그 후 경산현감(慶山縣監)·평해군수(平海郡守)를 거쳐 1482년(성종 13)에 남양도호부사(南陽都護府使)를 지냈다. 이후 1484년(성종 15) 64세부터 처가가 있던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물언덕에 소산정사(梳山精舍)를 짓고 산수와 벗하며 유유자적하게 여생을 보냈다.
강희맹과 교분이 두터운 사이라서 강희맹이 『소산정사기(梳山精舍記)』를 썼다고 한다.
채신보가 함창현감을 퇴직한 후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강희맹과 우연히 만났는데 강희맹은 채신보를 보고 “채만계가 평소에 화려한 것을 싫어하고 문아(文雅)를 좋아하며 몸은 관직에 있었으나 산림을 그리워하며 숭상하는 것이 진실로 세속 선비와 상대가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이미 세상일을 하직하고 한가히 살게 되었으니 반드시 좋은 산수가 있어 지극한 낙(樂)을 삼아서 세상 생각을 잊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채신보의 사고방식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 다음에 채신보가 또 편액을 지어달라고 부탁하니, “그 산을 소산(梳山)이라 하고 물을 만계(灣溪)라 하는 것이 좋겠다”고 답하였다. 강희맹이 또한 말하기를 “이 사람이야말로 군자다. 후에 역사가가 국사를 편수하게 되면 장차 그대를 은일전(隱逸傳) 가운데 둘 것인지 또한 장차 어진 사대부의 예(例)에 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벼슬을 하고 못하는 것은 운명이니 구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만계는 더욱 마땅히 자신의 처한 바를 살펴야 할 것이다”라고 하여 만계의 인품을 짐작하게 한다.
저서로는 『만계집(灣溪集)』이 있다.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물언덕에 묘소가 있으며 묘역은 약 200평으로 묘비와 상석, 사각(四角) 망주석을 갖추고 있다. 1964년에는 다시 문인석·망주석을 추가로 세웠고 신도비도 마련하였다. 아래로는 영의정 유척기(兪拓基)가 지은 묘비가 있는데 ‘소성군채신보지묘정부인문화유씨묘정덕삼년구월일자인천군수입석(邵城君蔡申保之墓貞夫人文化柳氏墓正德三年九月日子仁川君需立石)’이라고 새겼다.
중중 때 아들 채수가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오르면서 인천군(仁川君)에 봉해지자 채신보는 이조판서에 증직(贈職)되고 소성군(邵城君)으로 추봉되었다.
* 채신보(蔡申保)의 아들인 난재 채수(懶齋 蔡壽)선생은 관시(館試), 회시(會試), 전시(殿試)에 장원하였는데 ,
이렇게 삼장(三場)연속 장원한 사람은 저헌 이석형선생(포은 정몽주의 사위)과 난재 채수선생 두사람 뿐이다
소성군 채신보 묘 원경
우측에 묘비명 비석이 있고 뒷산에 묘가 있다
묘비명과 묘소
우의정 유척기가 찬한 소성군 채신보의 묘비명
소성군채신보지묘/정부인문화류씸ㅅ/정덕삼년구월 일/ 자인천군수(아들인 난재 채수)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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