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충공 괴마 임백령(文忠公 槐馬 林百齡)
?∼1546(명종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순(仁順), 호는 괴마(槐馬). 해남 출신. 득무(得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수(秀)이고, 아버지는 우형(遇亨)이며, 어머니는 박자회(朴子回)의 딸이다. 억령(億齡)의 아우이다.
형 억령과 함께 박상(朴祥)에게 수업하였다. 박상은 그에게 ≪논어≫를 가르치며 관각(館閣)의 문장에 능하리라고 했다 한다. 1516년(중종 11) 진사시에 합격하고, 1519년(중종 14) 식년 문과에 갑과 3등으로 급제해 상서원직장에 서용되었다. 다시 예문관검열이 되었다가 이듬 해 홍문관저작으로 전임하였다.
1524년 홍문관부교리가 되어서는 고향의 어머니를 위해 귀양(歸養 : 돌아가서 봉양함)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527년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를 역임하고, 영광군수로 나가 치적을 쌓았다. 1532년 사헌부로 다시 옮겨 장령·집의를 역임하고, 1537년 승정원도승지가 되었다. 이듬 해인 1538년 공조참판·사헌부대사헌·한성부좌윤·이조참판을 역임했으며, 1539년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가 공조·병조·이조의 참판을 두루 지냈다.
이듬 해 사은사(謝恩使)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형조참판을 거쳐 경기도관찰사가 되어 민폐의 시정에 힘썼다. 1542년 내직으로 옮겨 한성부의 우윤·좌윤을 지내고, 다시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 해 세 번째로 대사헌이 되었다가 한성부좌윤을 지냈다. 1544년 이조참판이 되었다가 네 번째로 대사헌이 되고, 호조판서로 승진하였다.
이어서 이조판서가 되어 윤원형(尹元衡)·이기(李芑) 등과 모의해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尹任)·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사사시켰다. 이 사건을 주도한 공로로 정난위사공신(定難衛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숭선군(崇善君)에 봉해졌으며, 자품은 보국숭록대부에 올랐다.
그 해 삼의정이 병약해 그가 우찬성의 지위로 사은사에 선발되어 다시 명나라에 갔다. 그러나 1546년 공무를 마치고 귀국 도중 영평부(永平府)에서 돌연 병사하였다. 시호를 처음에는 소이(昭夷)라 했다가, 문정왕후가 좋지 않다고 하여 문충(文忠)으로 고쳤다.
[을사사화]
중종비 신씨는 즉위 직후 폐위되어 후사가 없었고,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尹氏 : 윤여필의 딸)는 세자 호(岵 : 뒤의 인종)를 낳은 뒤 죽었다. 그 뒤 왕비 책봉 문제로 조신간의 일대 논란이 벌어졌으나, 1517년(중종 12)에 윤지임(尹之任)의 딸이 제2계비 문정왕후로 책립되어 경원대군(慶源大君 : 뒤의 명종)을 출산하였다.
이에 문정왕후의 형제인 윤원로(尹元老)·윤원형(尹元衡)이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꾀하면서 세자의 외숙인 윤임(尹任 : 장경왕후의 아우)과 본격적인 대립·알력이 시작되었다.
윤임 일파를 대윤, 윤원형 형제 일파를 소윤이라고 했는데, 이로써 조신·사림은 서로 갈리게 되고 외척을 중심으로 궁·정 내부의 갈등이 촉발되면서 정계가 양분되었다. 그러던 중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외척인 윤임을 중심으로 하는 대윤파가 득세하였다.
인종은 유관(柳灌)·이언적(李彦迪) 등 사림의 명사를 신임하고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은 자파의 사림을 많이 등용하였다. 이 결과 사림은 기묘사화 이후 다시 정권에 참여하게 되었으나,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사림들은 소윤파에 가담하게 되었다.
인종은 원래 중종의 반목·갈등 속에서 성장한 유약한 군주로 문정왕후의 뜻을 얻지 못함을 항상 상심하던 중 병을 얻어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인종의 뒤를 이은 명종은 12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정치를 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정권은 소윤파인 윤원형에게로 넘어갔다.
윤원형의 형인 윤원로를 탄핵해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시작된 대윤파의 반격이 실패로 돌아간 가운데, 윤원형은 윤임 및 그 일파인 영의정 유관·유인숙 등과 그 배경을 이루는 사림을 배제하기 위해 평소 이들에게 원한을 가진 정순붕(鄭順朋)·이기(李芑)·임백령(林百齡)·허자(許磁) 등을 심복으로 삼아 계책을 꾸미는 한편, 자신의 첩 난정(蘭貞)으로 하여금 문정대비에게 대윤 일파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무고하게 하였다. 그 결과 대윤 일파는 역모죄로 몰려 윤임·유관·유인숙 등을 비롯해 계림군(桂林君) 김명윤(金明胤)과 이덕응(李德應)·이휘(李輝)·나숙(羅淑)·나식(羅湜)·정희등(鄭希登)·박광우(朴光佑)·곽순(郭珣)·이중열(李中悅)·이문건(李文楗) 등이 처형되어 하루아침에 몰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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