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충청도)

[스크랩] [대전]계족산 등산길에서 만난 동춘당선생 관련자료(동춘당생애길~비래사)

장안봉(微山) 2013. 11. 30. 23:22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이 고장이 낳은 인물로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송준길이 있다. 송준길의 호는 동춘당(同春堂)인데, 이는 자신의 집 별당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서울 정릉동에서 태어나 3세 때 아버지 송이창을 따라 회덕 송촌으로 거처를 옮겼고, 9세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공자와 주자, 율곡의 학문을 익혔다. 이종 형제인 송시열과 함께 공부했는데 이때 비롯된 송준길과 송시열 두 사람의 우의는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거의 한길을 걸었다고 볼 수 있다.

18세 때부터 사계(沙溪) 김장생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김장생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에게서 배웠다. 김장생은 송준길의 생활과 학문적 태도를 보고 “이 사람은 훗날 반드시 예가(禮家)의 종장이 될 것”이라 칭찬했다고 한다. 인조 2년(1624) 19세 때 진사가 된 송준길은 25세 이후로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거의 부임하지 않고 주로 송시열 등과 교우하면서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송준길은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는데도 부임하지 않다가 효종 8년 조정으로 나아갔고 호조참판, 대사헌, 이조참판을 거쳐 효종 10년에 병조판서가 되면서 효종과 함께 북벌 계획을 준비한다. 그러나 효종이 일찍 죽자 북벌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관직에서 물러난 송준길은 이곳에서 그의 이름을 듣고 나라 안 곳곳에서 찾아온 유림들에게 북벌론을 강론하다가 현종 13년 동춘당에서 67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동춘당은 조선시대의 별당을 표준으로 삼은 건물로 ‘살아 움직이는 봄과 같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나직한 기단과 아담한 몸체, 조붓한 툇마루, 단정한 지붕 매무새 등 곳곳에서 선비다운 얌전함과 간소함을 풍기는 집이다. 조선 후기 별당 건축의 한 표본으로 꼽을 만하여 보물 제209호로 지정되었다. 동춘당 뒤편에는 ‘일(一)’자 사랑채와 ‘ㄷ’자 안채, 두 개의 사당으로 이루어진 송준길의 고택이 있다. 인조 20년(1642)에 건립된 이 고택은 안채의 구성 등에 처음 지어졌을 때의 모습이 잘 간직되어 있다. 사랑채 뒤편과 안마당 사이에 야트막한 담을 두어 서로의 공간을 독립해놓은 점이 재미있다. 따로 떨어진 두 사당 중에서 별묘(別廟)에 송준길을 모시고 가묘(家廟)에 다른 선조들을 모셨다. 조선시대 양반집의 전형을 보여주는 송준길의 고택은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신정일의 다시쓰는 택리지-대전이 낳은 인물들에서 인용]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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