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연구논문및사례

[스크랩] 구산선문(九山禪門)과 사리탑(舍利塔)

장안봉(微山) 2013. 11. 25. 22:42
 

구산선문(九山禪門)과 사리탑(舍利塔)

장  충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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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 미술사학과 교수)


Ⅰ.

불교의 독특한 신앙 가운데 하나인 사리신앙은 곧 교주 석가모니와 그 제자들의 신골(身骨)에 대한 믿음이다. 전자는 불사리 신앙으로서 불교가 전파되는 여러 지역에 널리 유행하였고, 후자는 일종의 조사신앙(祖師信仰)으로서 종파에 따르는 종주(宗主)에 대한 숭모(崇慕)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사리를 봉안하는 조형물인 탑파(stūpa․塔婆) 역시 오늘날에 와서는 전자의 경우 불탑이라 하고, 후자를 승탑(僧塔), 또는 부도(Buddha․浮屠)라 하여 구분하고 있으나 음사(音寫)의 차별일 뿐 본래는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불탑과 조사부도가 양식적으로 현격한 차이를 지니고서 전개되었는데, 불탑은 인도와 달리 중층의 층탑을 형성하였고, 부도 또한 팔각을 기본으로 하는 원당형(圓堂形)으로서 그 본색을 삼았다.

이러한 승탑으로서의 부도는 신라 하대 9세기에 이르러 선종의 흥기와 함께 조사신앙에 힘입어 널리 유행되었는데 󰡔삼국유사󰡕에는 이미 7세기 전반에 원광(圓光) 법사 부도의 실재 사실을 말하고 있으나1) 현지에 전해지는 부도는 9세기 경의 건립으로 추정되는 일반 불탑형식의 석탑이다. 따라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확실한 부도는 문성왕 6년(844)의 염거화상(廉居和尙)부도로 알려져 있다.

신라 석조부도에 대하여는 그 발생으로부터 변천에 이르기까지 각론을 포함하여 자세한 고찰2)이 있거니와 이곳에서는 우리나라 선불교의 대표적 위치에 있는 구산선문의 조사부도에 대하여 조성 배경 내지 양식적 추구에 치중하려 한다. 구산선문의 성립에 대하여는 아직까지 그 연원과 성립이란 양면성의 문제가 남아 있지만, 구산문의 조사(祖師) 부도로 볼 때는 신라 말 9세기 후반에서부터 고려 초기까지 이어지고 있으므로 구산선문에 해당되는 부도만으로서도 양식적 대비가 이룩되리라 본다. 이에 대하여는 다행히 선사들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塔碑․浮屠碑)가 있는 경우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으나 사리탑으로서의 부도에 대한 고찰은 그 한계를 선문구산의 종주(宗主)에 한정할 것이냐 아니면 그 법손(法孫)에까지 연장시킬 것이냐 하는 문제가 있다. 다만 이곳에서는 그 선문의 개창과 전개에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개창자에 국한하여 제한하고자 하며, 그 법손에 대하여는 다시 확대하여 조사되어야 하리라 본다.

그러므로 이곳에서는 기왕의 조사 내용을 토대로 하여 구산선문의 개창자와 그 부도에 국한하여 이들 사리탑의 형식 및 양식적 고찰을 시도하려 한다. 다만 일차적으로 그 한계를 개창자의 부도로서 확인된 것에 국한하고 그 법손에 대하여는 차후로 미루기로 하겠다.

Ⅱ.

대체로 우리나라 구산선문의 개창 시기에 대하여는 이론이 분분하거니와 구태여 이 문제를 이곳에서 천착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는다. 그러나 종파로서의 산문(山門) 성립과 관계 없이 이미 그 종파의 종주가 되는 조사의 부도가 조성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대체로 구산선문은 김영수(金映遂)의 신라 성립설3) 이후 이에 대하여 정면으로 반박하고 고려 성립설을 주장하면서 “구산(九山)이란 선종의 구산이 모두 성립된 다음에라야 구산선문이라는 하나의 명칭이 가능하다”고 전제하고 “구산이라는 말은 고려 초기에 형성된 선문의 총칭이라 할 수 있다.”4)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장의 가장 뚜렷한 근거로는 고려 태조 15년(932)에 진철(眞澈)대사 이엄(利嚴 : 870~936)이 황해도 해주군 수미산에 광조사(廣照寺)를 세우고 선풍을 천양한 이후 구산문의 하나인 수미산문이 되었고, 또 봉암사(鳳巖寺)의 희양산문(曦陽山門)만 하여도 지증(智證)대사 도헌(道憲 : 824~882)이 개산창사(開山創寺)하였으나 정진(靜眞)대사 긍양(兢讓 : 878~956)이 적화(賊火)로 폐허가 된 봉암사를 재건하여 선문을 다시 창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5)

그러나 선종불교의 중심은 사자상승(師資相承)의 실천불교의 전형이므로 산문이 이미 신라시대에 개창되었다면 그 산문을 중심으로 일종의 선파(禪派)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므로 대부분의 선문이 신라시대에 개창되었고, 또 전법(傳法)의 종주(宗主)가 엄존하는 한 이를 구태여 후대에까지 내려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김영태 교수도 지적한 바와 같이 연원과 성립의 문제로 남는다 하더라도 이곳에서 문제 삼아야 할 조형예술품으로서의 사리탑, 곧 조사부도나 부도비가 이러한 산문의 개산에서 멀지 않은 시기에 조성되었고, 나아가 이들 개산조(開山祖)가 신라의 인물이란 점은 일단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구산선문이란 용어가 고려 초에 들어와서 성립되었다 하더라도 이미 대부분의 선파(禪派)가 신라시대에 개산되고 있다는 점을 일단 염두에 두어야겠다. 대체로 우리나라의 선종은 중국 선종의 남종계(南宗系)인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수제자 서당지장(西堂智藏 : 735~814)의 심인을 얻어 헌덕왕 13년(821)에 귀국한 도의(道義)에서 비롯되고 있으므로 그는 중국 제4조 도신(道信 : 580~651)의 법을 받고 귀국한 법랑(法朗)의 초전이나 신행(信行 : 704~779)의 북종선 전래에 관계 없이 신라 선법의 초전자로 찬양되고 있다.6) 그러므로 보조선사비(普照禪師碑)에서도 언급된 바와 같이 우리나라 선문의 제1조는 도의(道義)대사이고, 제2조는 염거(廉居), 그리고 제3조는 보조선사 체징(體澄)으로 기록7)되고 있으므로 도의선사는 신라에 선법을 최초로 전한 중국의 초조 보리달마(菩提達磨)에 비교되고 있다.

이에 비하여 신라 선문의 최초 개창자는 지리산 실상사의 선문을 개창한 홍척(洪陟)대사에서 비롯된다. 홍척대사는 도의의 귀국으로부터 5~6년 뒤에 역시 서당의 법을 잇고 흥덕왕 초 826년 경에 귀국하여 남악(南岳) 지리산에 신라 최초의 선문을 개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도의 이후 당나라에서 구법하다 홍척과 거의 같은 시기에 귀국한 혜철(慧徹), 혜소(慧昭), 현욱(玄昱), 도윤(道允), 범일(梵日), 무염(無染) 등의 선승들이 마조계의 선법을 받아 줄지어 귀국하여 전국의 심산에서 독자적인 선문을 개창한다.8)

이제 이와 같은 신라 선종불교의 백화난만한 분위기 속에서 구산선문 개창자의 사리 부도탑에 대한 고찰에 앞서 선문의 명칭과 개창자, 그리고 절이름을 간단히 정리해야겠다.


1. 실상산문(實相山門)

홍척대사가 흥덕왕 원년(826)에 당으로부터 귀국하여 전라북도 남원의 실상사(實相寺)에서 실상산문을 개창하였으며, 제자 수철(秀澈 : 817~893)이 계승하였는데 구산선문 가운데 가장 먼저 개창되었다.


2. 동리산문(桐裡山門)

혜철(慧哲․惠哲 : 895~861)대사는 도의, 홍척과 마찬가지로 서당지장의 법을 받아 문성왕 원년(839)에 귀국하여 전라남도 곡성의 태안사(大安寺)에서 선문을 열었는데 그 개창은 보다 늦은 문성왕 9년(847)으로 알려져 있고, 제자에는 도선(道詵 : 827~898) 등이 있다.


3. 성주산문(聖住山門)

무염(無染 : 801~888)대사는 마조의 제자 마곡보철(麻谷寶徹)의 법을 받고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동왕 9년(847)에 충청남도 보령의 성주사(聖住寺)에서 성주산문을 개창하였다. 나말여초에 크게 번창하여 제자에 여엄(麗嚴), 대통(大通), 심광(深光), 자인(慈忍) 등 2천 여인이 있다.

4. 가지산문(迦智山門)

도의→염거→체징(體澄 : 804~880)으로 이어지는 가지산문은 헌안왕 3년(859)에 왕의 청을 받은 체징이 장흥 보림사(寶林寺)에 이주하여 김언경(金彦卿) 등의 후원을 받아 가지산문을 개창하였으므로 도의를 개산조(開山祖)로, 체징을 개창자로 보기도 한다. 체징의 제자로는 형미(逈微 : 864~917), 영혜(英惠) 등이 있다. 

5. 사굴산문(闍崛山門)

범일(梵日: 810~889)이 문성왕 13년(851) 강릉의 굴산사(崛山寺)에서 사굴산문을 개창하였는데 문하에 행적(行寂 : 832~916), 개청(開淸 : 854~930) 등이 있다. 사굴산이란 불경에 등장되는 기사굴산(耆闍崛山), 곧 영축산(靈鷲山)을 뚯한다.

6. 희양산문(曦陽山門)

지증(智證)대사 도헌(道憲 : 824~882)이 헌강왕 5년(879) 문경 봉암사(鳳巖寺)에서 희양산문을 개창하였는데, 그는 구산문중 유일하게 중국에 들어가지 않고 선문을 개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정진(靜眞)대사 긍양(兢讓 : 878~956)이 적화(賊火)로 폐허가 된 봉암사를 재건하여 선문을 다시 창설하였음은 앞서 언급하였거니와 긍양은 도헌의 법을 이은 양부(楊孚 : ?~906)의 법을 받았다.


7. 사자산문(師子山門)

도윤(道允 : 798~864)대사는 헌덕왕 17년(825)에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남전보원(南泉普願)의 법을 받고, 문성왕 9년(847)에 귀국하여 풍악(楓岳)에서 선법을 전하였는데 제자 절충(折中 : 826~900)이 헌강왕 8년(882)에 강원도 영월의 사자산 흥령사(興寧寺), 곧 법흥사(法興寺)에서 도윤의 선풍을 떨쳤으니 도윤은 사자산문의 개산조이고 절충은 개창자가 된다.

8. 봉림산문(鳳林山門)

현욱(玄昱 : 787~868)은 여주의 고달사(高達寺)에 주석하였지만 그의 제자 심희(審希 : 855~923)가 효공왕 5년(901)에 경남 창원의 봉림사(鳳林寺)에서 선문을 개창하여 스승의 선풍을 대진하였다. 따라서 현욱은 봉림산문의 개산조, 심희는 개창자로 알려져 있다.

9. 수미산문(須彌山門)

구산문 가운데 가장 늦게 성립된 수미산문은 이엄(利嚴)대사가 고려 태조 15년(932)에 황해도 해주의 광조사(廣照寺)에서 개창하였는데 제자에는 처광(處光), 도인(道忍) 등이 있다.


이상은 구산선문의 개산 또는 개창에 따라 정리한 것이지만 이들 가운데는 저 유명한 최치원의 사산비(四山碑)9)를 지닌 사찰이 있어 주목되기도 한다. 즉 성주사(聖住寺)의 낭혜화상탑비(朗慧和尙塔碑)와 봉암사(鳳巖寺)의 지증대사탑비(智證大師塔碑)가 그것인데 이들은 선사의 부도탑 고찰에 참조되나 낭혜화상부도는 파손되어 그 파편만 전해질 뿐이다.

또 하동의 쌍계사(雙磎寺) 진감선사비(眞鑑禪師碑) 역시 우리나라 금석문의 백미에 해당되는데 진감선사 혜소(慧昭)는 도의선사 보다 조금 늦은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하여 지리산 쌍계사에서 독자적인 선문을 개창하였으나 구산선문의 범주에는 빠져 있으므로 이곳에서는 제외하기로 하겠다.

이제 이들 선문과 관계된 부도를 건립 연대에 따라 살펴보기로 하겠다.


1) 廉居和尙塔(문성왕 6년, 844년, 현고 1.7m, 국보 104호)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부도 가운데 가장 앞선 것은 신라 문성왕 6년(844)의 조성으로 알려진 염거화상(廉居和尙) 부도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형태를 팔각원당형부도(八角圓堂形浮屠)라 하는데, 그 구조는 불국사 다보탑에 나타난 방주(方柱)의 기단 위에 올려놓은 탑신의 형태와 같은 것로 보고, 이는 9세기 이후 선종 미술의 근간이 되는 팔각원당형 부도의 선구가 바로 다보탑의 형태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다.10)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부도는 기본적으로 다보탑의 상부 구조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먼저 염거화상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 선문의 제1조라고 한 도의(道義)대사로부터 법을 받은 제2조 염거(廉居)라는 점이 주목되는데, 이 부도는 신라 부도 가운데 연대가 확실한 가장 오래된 부도이지만 그 전래 장소가 확실치 않다. 과거 일인(日人)들에 의하여 처음 원각사지(圓覺寺址)인 탑동공원내(塔洞公園內)에 옮겨졌다가 현재의 경복궁으로 이전되었으나, 원위치라고 하는 강원도 원성군 지정면 안창리 흥법사지(興法寺址)에서는 그 근거를 찾기 어렵다.

부도는 상륜부가 결실되어 현고 약 1.7m이나 지대석 위의 팔각하대석에는 각각 형태를 달리하는 사자를 양각하였고, 그 위에는 3단의 받침을 둔 중대석 팔면에 각기 안상(眼象)을 두었으며, 안상 안에는 향로와 화문 등을 조각하였다. 그 위에도 아래와 마찬가지로 3단의 상대 받침과 함께 이중의 단판앙련(單瓣仰蓮)을 새기고 2단의 8각 괴임으로 탑신을 받치도록 하였는데 연판은 고식(古式)이다. 그러므로 이들 상하대의 기단부분은 일종의 장구형으로서 모두 한 돌로 조각되었다. 상대석 위에는 높은 탑신 받침이 있는데 각면에는 안상을 두고 안상 안에는 비천상 1구씩을 조각하였다. 그 위에 놓인 팔각의 탑신은 전후면에 문비(門扉)를 두고 좌우면에 사천왕을 교대로 조각하였으며, 나머지 2면은 공백으로 남아 있다. 옥개는 지붕의 형태가 완전히 골기와인데 8개의 우동(隅棟)을 지니고 그 끝에는 잡상(雜像)이 조각되었으며, 옥개의 밑은 배가 부른데 한 칸씩 건너서 비천상을 조각하였고 그 위에 서까래가 있다.

이 부도는 소속 사원이 확실치 않으나 구산선문에서 본다면 체징에게 전법한 염거화상이란 점에서 가지산문에 귀속시킬 수 있겠고, 내부에서 발견된 금동탑지(金銅塔誌)11)에 의하여 회창(會昌) 4년, 즉 신라 문성왕 6년(844)의 제작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신라부도의 기준작이 되고 있다.

2) 大安寺 寂忍禪師照輪淸淨塔(경문왕 원년, 861년, 높이 3.1m, 보물 273호)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소재의 이 부도는 상륜부까지 갖춘 완형으로서 상하의 비례가 적절하여 안정감을 주는 수작이라 하겠다. 이 부도의 주인공 적인선사의 탑비는 망실되었으나 다행히 화엄사에 전래된 사본에 의하여 그 전모를 알 수 있다.12)

선사의 휘(諱)는 혜철(慧徹)이요 자는 체공(體空)이며, 속성은 박씨이고 경주인라 하였다. 일찍이 도의․홍척과 같이 서당지장(西堂智藏)의 법을 얻어 문성왕 원년(839) 3월에 귀국하였는데 이적(異蹟)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성왕이 혜철의 명성을 듣고 절의 사방에 살생을 금하는 당(幢)을 세우게 하고, 사신을 보내어 치국의 요지를 묻거늘 시정의 급무를 논하기도 하였다. 경문왕 원년(861) 2월 6일 세수 77세로 병없이 좌하(無疾坐化)하니, 사지와 몸이 흩어지지 않고 얼굴빛이 평상시와 같았다. 곧 8일에 절의 근처 송봉(松峰)에 안치하고 석조 부도를 세웠다.13) 이후 경문왕 8년(868)에 시호를 내려 적인(寂忍)이라 하고, 탑호는 조윤청정(照輪淸淨)이라 하였다.

부도탑은 기본적으로 염거화상탑과 같은 형식이나 이미 기단부에 큰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넓은 4각의 지대석 위에는 얇은 8각 받침을 두었는데 각 면에 2좌씩의 안상이 조각되었다. 8각 하대석에 사자를 등장시킨 것은 염거화상 부도와 같은 형식이지만 각면에 심한 엔타시스 수법이 적용된 것은 완전히 다르다. 이렇게 부도에 사자가 등장되는 것은 특히 선문에서 부처님을 인중사자(人中獅子)에 비유함으로 해서 이들 선문의 조사가 곧 불심(佛心)을 전수한 상족(上足)이라는 뜻에서일 것이다. 층단 위에 놓여 있는 중석은 얕은 편이며, 각 면에 1좌씩 안상이 조각되었고, 원형의 상대석은 3중의 단판 양련인데 연판에는 화문이 조각된 것도 염거부도와는 다르다. 탑신 밑에는 각면에 2좌씩 안상을 지닌 받침이 있는데 8각의 모서리마다 우주(隅柱)의 모각(模刻)이 있으며, 문비와 사천왕을 조각하였다. 옥개석은 밑부분에 서까래와 부연을 나타내었고, 지붕에도 기왓골과 함께 그 끝에는 막새기와를 정교하게 표현하였다. 상륜부는 앙화와 복발 위에 보륜과 보주를 정교하게 갖추어 부도형식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비문에 따라 부도의 건립은 경문왕 원년 경(861년)으로 짐작된다.


3) 雙峰寺澈鑑禪師澄昭塔(경문왕 8년, 868년, 높이2.3m, 국보 57호)

전라남도 화순군 이암면 중리에 위치하는 쌍봉사는 직접 구산선문에 해당하는 절은 아니지만 철감선사 도윤(道允)이 사자산 흥령사(獅子山興寧寺)를 개창한 징효(澄曉) 대사에게 법을 전함으로써 사자산문의 실질적인 개산조가 되는 철감선사의 부도가 있는 절이다. 비록 이 부도가 사자산문에 위치해 있지는 않지만 철감선사는 사자산문의 전법 개산조이므로 먼저 다루는 것이 순서라 하겠다.

철감선사에 대하여는 선사의 부도와 탑비가 전해지는 쌍봉사에서는 일찍이 탑비의 비신(碑身)이 망실되어 그의 제자 징효(澄曉)대사 절충(折中)의 보인탑비(寶印塔碑)14)와 󰡔조당집󰡕15) 권17에서 자료를 얻을 수 있을 뿐이다. 특히 󰡔조당집󰡕에서는 「雙峰和尙嗣南泉」이라 한 그의 약전에 대하여 “최치원이 도윤을 ‘雙峰雲’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쌍봉은 아마도 그가 머문 풍악(楓岳)의 별칭이 아닌가 생각된다.”16)고 하였으나 여기서의 쌍봉화상이라 함은 그의 부도와 탑비가 존재하였던 화순의 쌍봉사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그러나 󰡔조당집󰡕에 기록된 그의 약전 역시 비문에 의거한 것으로 보이지만 비문이 전하지 않아 유감이다. 다만 󰡔조당집󰡕에 따르면, 쌍봉화상의 휘는 도윤(道允)이고, 속성은 박씨이며, 18살에 출가하여 귀신사(鬼神寺)에서 화엄과 선법을 배우고, 헌덕왕 17년(825) 사신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가 남전보원(南泉普願)선사를 찾아 제자의 예를 드리니 첫눈에 법기임을 알고 “吾宗의 法印이 東國으로 돌아가는구나”라고 찬탄하였다. 문성왕 9년(847) 4월에 다시 신라에 돌아와 풍악(楓岳)에 선법을 펴니 학인이 운집하였다. 이때 경문왕이 소식을 듣고 귀의하였으며, 동왕 8년(868) 4월 18일 홀연히 유훈을 남기고 입적하니 춘추가 71세, 승납이 44세였다. 왕은 시호를 내려 ‘철감선사징소지탑’(澈鑑禪師澄昭之塔)이라 하였다.

제자 절충이 헌강왕 8년에 강원도 영월 사자산 흥영사에 선문을 개창하여 도윤의 선풍을 드날리니 구산선문의 하나로 계승되었다. 따라서 도윤은 개산조가 되고 절충은 선문의 개창자가 되었음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철감선사의 부도는 우리나라 부도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부도로 알려져 있다. 상하 전면 어디에도 빈틈없이 정교한 조각이 있으며, 비례가 아름다워 안정감을 지닌 명품이라 하겠다. 일제 강점기에 도괴되었다가 광복 후 다시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상륜부가 결실되었을 뿐 나머지는 완형이다.

부도의 형태는 기본적으로 팔각원당형이면서 기단부의 제일 아래 부분에는 8각의 지대석이 있고, 그 위에 2단의 하대석이 있는데 그 하단은 8각이면서도 모서리에 구애 받지 않고 전면에 돌아가면서 구름무늬 속에 쌍룡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모습을 매우 생동감 있게 깊이 양각하였다. 약간 좁아진 상단에는 각 모서리마다 연꽃 봉오리를 조각하였으며 각면에는 자세를 달리하는 사자 한 마리씩을 양각하였다. 그 위에는 각과 원을 적절히 안배한 아름다운 각선을 나타낸 여러 단의 받침을 두어 중대석을 받치고 있다. 중대석에는 각 모서리마다 화려한 화문을 장식한 각면의 안상 속에 가릉빈가가 1구씩 양각되었다. 상대는 원형이고 16엽의 화문이 장식된 앙련을 조각하였다.

 탑신 밑에는 높은 받침이 있는데 각 면에는 안상을 2중으로 깊이 파고 그 안에 가릉빈가 1 구씩을 조각하였는데 악기를 연주하는 등 그 형태가 각기 다르다. 그 위에는 다시 작고 얕은 복련대(伏蓮臺)를 돌려서 탑신을 바쳤다. 8각의 탑신은 얕은 편이고 모서리마다 배흘림이 있는 기둥이 있으며, 기둥 위에는 주두(柱頭)받침과 그 사이에 소루가 하나씩 조각되었는데 전후 양면에는 자물쇠가 있는 문비형(門扉形)과 그 좌우 사면에 사천왕상, 나머지 2면에는 공양비천상 2구가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8각인데 낙수면에는 기왓골과 우동(隅棟)이 있고 막새기와에는 실제 건물의 와당처럼 8엽의 연화문과 화문을 지니고 있어 놀라운 사실적 표현 의지를 엿보게 한다. 옥개석 밑에는 서까래와 부연이 있고, 그 안쪽에는 4개소에 비천, 2개소에 향로, 나머지 2개소에 화문이 조각되었다. 상륜은 안타깝게도 모두 결실되었으나 옥개 상부의 중앙에 원형의 찰주공이 있어 상륜을 고정하였음을 알게 한다.

따라서 이 석조부도는 당시 고도로 발달된 석조예술의 기량을 짐작케 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며, 동시에 9세기 한국 석조부도의 백미라 할 것이다.


4) 寶林寺 普照禪師彰聖塔(헌강왕 6년, 880년, 높이 4.1m, 보물 157호)

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보림사의 보조선사창성탑은 이웃한 보조선사창성탑비(884년, 보물 158호)17)에 의하여 다소나마 그 내력을 알 수 있다. 선사의 휘는 체징(體澄)이고 속성은 김씨이며 웅진(熊津․公州)사람이다. 그는 도의선사로부터 법을 받은 염거선사의 심인(心印)을 얻어 헌안왕 3년(859)에 왕의 청을 받아 장흥 보림사에 가지산문을 개창하였다. “선제(宣帝) 14년(860, 헌안왕 4년) 2월에 부수(副守) 김언경(金彦卿)이 일찍이 제자의 예를 표하며 선사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청봉(淸俸)을 덜고 개인의 재산을 내어 철 2,500근을 사서 노사나불 1구를 주조하여 선사가 거처하는 절을 장엄했다.”18)고 한 것은 보림사에 현전하는 철조비로자나불상(국보 117호)을 지칭하는 것이고, “또 왕이 망수택(望水宅)․이남택(里南宅 : 35金入宅에 해당) 등에게 금 160분(分), 조(租) 2,000곡(斛)을 내게 하여 절을 장식하는 공덕의 비용에 충당토록 하고 사찰을 선교성(宣敎省)에 예속시켰다.”19)고 한 것은 모두 선사의 교화력을 짐작케 하는 일들이다.

선사는 헌강왕 6년(880) 3월 9일 문인들에게 유계를 남기고, 13일에 입적하니 세수 77세, 승납 52세였다. 이에 헌강왕이 시호를 내려 보조(普照)라 하고, 탑호를 창성(彰聖), 절이름을 보림(寶林)이라 하였다.

보조선사의 부도는 앞의 염거부도나 적인선사 부도에 비하여 상하 비례가 불안정하며, 양식 전개에 있어서도 새로운 시도가 엿보이기는 하나 총체적으로는 퇴화를 나타낸 작품이라 하겠다. 하대석에 손상이 많아 조형의사가 명확치 않은 부분이 있으나 안상과 사자상이 조각되었음을 겨우 알 수 있을 뿐이다. 중대석 받침에는 전면에 운문(雲文)을 양각한 것이 이후 고려시대의 장식적 부도의 선행 양식으로 짐작된다. 중대석 각 면에는 안상이 2중으로 조각되었고, 상대석에는 중판(重瓣)의 앙련을 조각하였는데 꽃잎에는 장식이 있다. 탑신은 전후면에 문비가 있고 그 좌우에 사천왕상을 배치하였으며, 8각의 옥개석은 기왓골이 있고, 밑에는 서까래가 모각되었으나 처마가 두껍고 폭이 좁아 앞의 부도에서와 같은 장중한 느낌은 없다. 상륜부에는 복발, 보륜, 보주 등이 다소 손상된 채로 남아 있다.

 이 부도의 전체적인 양식은 중대석과 상하대석에서 큰 변화를 찾을 수 있으나 이들 대석에 비하여 탑신이 크고, 옥개부가 빈약하여 오히려 조화가 깨뜨려지고 있는 9세기 말의 시대적 양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5) 鳳巖寺 智證大師寂照塔(헌강왕 9년, 883년, 3.41m, 보물 137호)

경상북도 문경군 가은읍 원복리에 위치한 이 부도는 지증(智證)대사 도헌(道憲 : 824~882)의 사리탑이다. 도헌은 앞서 엄급한 바와 같이 구산문 가운데 중국에 들어가지 않고 선문을 개창한 유일한 인물인데 그를 가리켜 “별도로 대문과 방문이 없고도 대도(大道)를 보며, 산과 바다에 가지 않고도 최상의 보배를 얻음이라. … 서역이나 중국에 가지 않고도 도에 이르고, 이 땅 또한 엄하지 않음에도 자비로써 다스려졌다.”20)고 하였다. 속성은 김씨요 호는 도헌(道憲)이며 헌강왕 8년(882)에 입적하니 법랍 43세, 세수 59세이다. 시호를 지증(智證), 탑호를 적조(寂照)라 하였다.

부도는 방형지대석 위에 놓였는데 하대석 측면의 안상 속에는 각기 다른 자세의 사자를 양각하였다. 중대석의 괴임은 2단이며, 하단에는 구름문양을 조각하고 상단에는 권운문(卷雲文)이 조각된 원주(圓柱) 사이 각 면에는 정교한 가릉빈가를 조각하였다. 높은 중대석의 8각 각면의 안상 내에는 사리기와 함께, 무릎을 꿇고 이를 공양하는 합장공양상과 주악상 등이 조각되었다. 상대석에는 화문이 장식된 앙련과 함께 그 위에는 난간을 돌린 탑신받침이 있다. 탑신은 우주가 모각되었는데 앞뒤면에는 문비, 그 좌우에 사천왕상, 나머지 2면에는 보살입상이 조각되었다. 옥개석은 넓은 편이고 파손되었던 것을 다시 복원하였는데 서까래만 모각되었을 뿐 위의 기왓골은 없다.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보주 등이 남아 있다.

이 부도는 대사의 입적 다음 해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21) 양식적 변화는 중대석이 높아지면서 사리기(舍利器)와 함께 사리기 공양상이 등장된 점이라 하겠는데 중대석의 괴임에 나타난 구름문양, 또는 권운문(卷雲文)이 조각된 원주(圓柱)와 가릉빈가의 등장은 모두 아직까지 앞의 양식에서 보지 못하던 변화라 할 것이다. 이러한 장식적 문양은 위치는 다르나 이후 연곡사의 부도, 또는 고려시대 부도 양식의 전형이라 하겠다.


6) 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890년, 破損)

충청남도 보령군 미산면 성주리의 절터에는 성주산문의 개창자 낭혜화상 탑비가 있어 그 유래가 소상하거니와 불행히도 화상의 부도는 한말에 파손되어 절터의 서쪽 속칭 부도골에는 그 유허지가 있고, 별도의 부도 파재가 수습되었다.22)

탑비에 따르면 대사의 법호는 무염(無染), 속성은 김씨이고, 경주인으로 무열왕은 8대 조가 된다. 12살 때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출가하고, 법성(法性)선사에게 능가의 법문을 배웠으며, 부석사의 석징(釋澄)대덕으로부터 화엄교학을 배웠다. 그를 일러 동방의 대보살이라고 불렀다.

특히 그는 문성왕을 비롯하여 헌안, 경문, 헌강, 정강 등 역대왕의 청으로 자문에 응하기도 하였으며, 진성왕 2년 11월 27일 목욕재계한 뒤 가부좌한 채 입멸(入滅)하였다. 세수 89세요 구족계를 받은 지 65년이었다. 왕은 대낭혜화상(大朗慧和尙)으로 시호하고 탑호를 백월보광(白月葆光)이라 하였으니, 입적 2년 후에 건탑하였음을 알 수 있다.23)

낭혜화상 부도는 「崇巖山聖住寺事蹟」24)에 따르면 “大朗和尙白月光塔 安于西麓”이라 하였는데 부도는 파손된 채로 부재가 절의 서록(西麓), 이른바 부도곡(浮屠谷)과 민가에서 일부는 변형된 상태로 수습되었다. 이들에 따르면 부도의 형태는 신라 이래의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석조부도인데, 확인된 자료에 의하여 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25)


팔각지대석 1매 : 각면에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으나 아래에 놓이는 방형지대      석은 확인되지 않았다.

연화문 하대석 : 12매의 파편으로서 위의 팔각 지대석 위에 놓였던 것으로서      복련(複蓮) 16엽이며, 상부에는 중대석 받침이 여러단으로 남아 있는데 팔각이      다.

연화문 상대석 : 팔각 완형으로서 16옆의 단판 앙련인데 아래에는 중대석 위에      놓였던 각형과 사분원호(四分圓弧)의 몰딩이 있고, 윗면에도 탑신을 받기 위한      3단의 받침이 있다.

탑신 : 원형으로 변형된 채 동리의 연자방아로 사용됨으로써 팔각의 형태는 보      이지 않는다.

옥개 : 첨하 부분이 파손되어 팔각의 정상부만 남았는데 상부에는 단판의 복련      (伏蓮)이 새겨져 있고, 기와골과 같은 것은 아니 보인다.


이상에서 중대석과 상륜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부도의 형태는 거의 추정할 수 있는데 그 형태는 오히려 단순화되었고, 언뜻 보아서 석등의 형식을 연상할 수 있으나 보고서의 추정 도면에 나타난 것처럼 중대석을 그렇게 높일 수는 없을 것이고, 지금까지 보아 왔던 부도의 중대석과 같이 낮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최치원의 성주사낭혜화상비문26)에 기록된 바와 같이 입적 2년 후인 진성왕 4년(890)에 건립된 이 부도는 앞서 건립된 여타 조사(祖師) 부도와는 양식적으로 크게 다름을 지적할 수 있다. 즉 팔각지대석에 등장되던 사자의 조각이 사라졌고, 상하대석의 연화문 내부에는 장식문양이 없는 것을 추종하였으며, 탑신의 조각은 알 수 없다 하더라도 골기와의 모각이 사라진 옥개석은 큰 변화라 하겠다. 그러므로 이는 9세기 말기 부도의 새로운 한 양식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7) 實相寺證覺大師凝寥塔(893년 경, 3.0m, 보물 38호)

전라북도 남원군 산내면 입석리 실상사 경내에 위치한 이 사리탑은 불행히도 탑비의 비신이 망실되어 증각대사의 자세한 행장을 알 수 없다. 탑비(보물 39호)는 귀부와 이수만 남았는데, 이수에는 ‘凝寥塔碑’의 제액이 있어 실상사의 개산조인 증각대사의 탑비임을 알게한다.

증각대사 홍척(洪陟)은 도의(道義)의 귀국 5~6년 뒤에 역시 서당(西堂)의 법을 얻어 흥덕왕 초 826년 경에 귀국하여 지리산 실상사에서 신라 최초의 선문을 개창하였으나 기록의 미비로 보다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다. 다만 󰡔조당집󰡕 권17에 “동국 실상화상(東國 實相和尙)은 서당의 법을 이었고, 휘는 홍직(洪直) 시호는 증각대사(證覺大師), 탑호는 응적(凝寂)이다.”27)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원래 그의 비문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또 󰡔전등록󰡕 권9에도 ‘홍직’(洪直)이라 표기하였으며, 권11의 목록에도 ‘신라홍직선사법사’(新羅洪直禪師法嗣)로 기록하여 표기에 다름이 있으나 금석문의 내용을 추종함이 보다 옳을 것으로 보인다.28) 다만 비문이 전래되지 않아 자세한 사실을 알 수 없으나 홍척의 실상산 선문은 제자 수철(秀澈)이 계승하였고, 이후 고려시대에는 구산선문의 하나로 발전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부도는 지대석과 하대석을 한 돌로 조성하였는데 지대석은 방형이고 하대석은 8각인데 구름문양을 조각하였으며, 그 위에 2단의 무문 8각 층단이 있다. 다시 별석으로 우주와 탱주처럼 윤곽을 돌린 중석 받침이 놓여 있다. 중대석에는 각 면에 안상을 조각하고 그 안에 공양비천상과 보살좌상 등을 조각하였다. 상대석은 원형에 3중의 앙련이 16엽으로 돌아가면서 조각되었고, 그 위에는 8각의 높은 탑신받침이 모서리마다 고복형(鼓腹形)의 동자주(童子柱)를 세운 난간형을 두었다. 탑신석에는 우주가 있고 위에는 주두받침이 있으며 그 사이에 소루를 하나씩 조각하였는데 전후면에는 자물쇠와 문고리가 있는 문비형으로 이러한 형식은 앞의 염거탑이나 보조탑에서도 나타난 바 있다. 다만 좌우의 사천왕상은 무기력하고 형식에 지우친 느낌이 있어 시대의 하강을 나타내고 있다. 옥개석은 밑에 서까래와 함께 위에는 기왓골이 표시되었으며, 상륜부에는 앙화, 복발, 보륜 등이 있는 일반적 형식이다.

이 부도의 양식은 홍척의 개산으로부터 거의 반세기가 지난 9세기 말경에 놓일 것으로 보여 아마 그의 입적 후 제자 수철, 또는 그의 문도 등에 의하여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양식적으로는 수철의 부도에 접근하고 거의 같은 시기의 제작으로 추정된다.


8) 鳳林寺眞鏡大師寶月凌空塔(경명왕 7년, 923년, 2.9m, 보물 362호)

본래 이 부도는 경남 창원군 상남면 봉림사지에서 탑비(보물 363호)와 함께 현재의 서울 경복궁으로 옮겨왔는데, 진경대사의 휘는 심희(審希 : 855~923)이다. 즉 진경대사는 고달사(高達寺)의 현욱(玄昱 : 787~868)으로부터 법을 받아 효공왕 5년(901)에 경남 창원의 봉림사(鳳林寺)에서 선문을 개창하여 구산선문의 하나로 되었다.

진경대사비문29)에 따르면, 대사의 휘는 심희(審希)이고 속성은 김씨이며, 문성왕 17년(855) 12월 10일에 탄생하여 9세에 원감대사(圓鑑大師) 현욱(玄昱)을 찾아 귀의하였다. 경문왕 8년(868) 비로소 스승 현욱으로부터 심인(心印)을 받아 널리 교화를 떨치다가 경명왕 2년(918)에 부름을 받아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방법을 설하였다. 경명왕 7년(923) 4월 24일 이른 아침에 제자들에게 마지막 설법을 하고 봉림선당(鳳林禪堂)에서 오른쪽으로 누워 돌아가시니 세수 70이요, 승랍 50이었다. 이에 시호를 진경대사(眞鏡大師) 탑명을 보월능공지탑(寶月凌空之塔)이라 하였다.

부도의 형식은 비교적 간략화되었는데 지면의 8각 지대석 위에 팔각의 하대석이 놓였고 각 측면에는 안상을 조각하였다. 안상은 꽃의 상단이 뾰족해지면서 서로 연결되었고, 상면에는 복련의 조각 없이 여덟 개의 작은 귀꽃만 표시된 위에 중석받침으로는 작은 연화문이 한 줄 돌려 있을 뿐이다. 중석은 중앙에 화문이 있는 횡대를 돌린 복발형이고, 상대석은 단판 앙련으로 꽃잎 사이에 간엽(間葉)을 조각하였다. 탑신석은 다른 조각이 없이 우주만 있으며, 옥개석은 낙수면에 우동과 귀꽃을 나타내었을 뿐 앞의 부도처럼 기와골 같은 것은 안 보인다. 상륜부에는 앙화와 보주만 남았는데 보주의 형태도 처음 나타나는 형식으로 이후 고려시대 부도의 상륜에 나타나는 보주의 선구가 된다 하겠다.

따라서 부도의 조성은 진경대사의 입적한 해인 경명왕 7년(923)에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30) 양식적으로도 앞의 9세기의 석조부도와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이후 고려부도의 양식이 반영되고 있다 하겠다.

이상 살펴본 구산선문의 개산조 또는 개창자 부도의 기본 형식은 다보탑의 탑신부에서부터 출발되었음은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이러한 형식은 구산문에 소속된 신라부도를 비롯하여 이후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양식으로 전개되었음을 알게 하였다. 다만 그와 같은 형식 속에서도 시대에 따라 부분적 양식변화를 보여 온 것은 이것이 조사의 묘탑(墓塔)이란 점에서 그 궤(軌)를 같이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양식 변화를 보이는 것은 9세기 말기에 제작된 성주사의 낭혜화상부도 양식인데, 이는 종래까지 팔각지대석에 등장되던 사자의 조각이 사라졌으나 상하대석의 연화문 내부에는 오히려 장식문양이 없어지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옥개석에 나타나던 골기와의 모각이 사라지는 등 큰 변화를 가져왔음을 알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는 9세기 말기 부도의 새로운 양식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철감선사 도윤을 지칭하여 최치원은 쌍봉운(雙峰雲)이라 하였고, 이 쌍봉은 그가 머문 풍악(楓岳)의 별칭이라 하였으나 이는 곧 전라남도 화순의 쌍봉사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현장에 전해지는 우리나라 조사 부도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쌍봉사 철감선사 부도의 실재(實在) 사실에서도 더욱 그러하다.

또한 봉림사 진경대사부도의 경우 옥개석의 기왓골 같은 것은 이미 사라지고 있으나 낙수면에 나타난 귀꽃이나 상륜부에 보이는 앙화(仰花)와 보주(寶珠)의 형태는 처음 나타나는 형식으로 이후 고려시대 부도의 상륜부(相輪部)에 보이는 보주의 선구가 된다 하겠다.

따라서 이상 살펴본 구산선문의 조사 부도가 우리나라 조사 사리탑의 대표적 위치에 놓이는 것 역시 한국 선종의 개창에 따르는 대표적 선문(禪門)이 거의 구산(九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음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 외  이엄의 수미산 선문이나 범일의 사굴산 선문에 대하여도 언급되어야겠으나 현장 유물에서 개산조의 부도라고 확정할 만한 물적 근거가 약하므로 일단 이곳에서는 제외하기로 한다.

이와 함께 구산선문의 중요 사리탑에 대하여는 개산으로부터 개창에 이르는 몇몇 중요한 선사의 부도, 이를테면 태안사 광자대사탑(大安寺廣慈大師塔 : 경문왕 원년, 861년, 보물 274호, 전남 곡성군), 실상사 수철화상릉가보월탑(實相寺秀澈和尙楞伽寶月塔 : 진성여왕 7년, 893년, 보물 33호, 전북 남원군), 흥령사 징효대사보인탑(興寧寺澄曉大師寶印塔 : 고려 혜종 원년, 944년, 강원도 영월군), 봉암사 정진대사원오탑(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 : 고려 광종 16년, 965년, 보물 171호, 문경군 가은면)에 대하여도 별도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출처 : 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
글쓴이 : 초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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