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죽으면 누구나 명당에 들수가 있는 가?...
격암 남사고 선생의 선친묘 간산기
얼마전 함께 공부하는 풍수학회 회원들과 경북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 대현산에 있는 격암 남사고 선친 남희백공의 산소를 간산하고 거기서 나눈 일화를 겸하여 여기에 올려 봅니다..
격암 남사고 선생은 격암유록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당대 풍수지리에 있어 명사 소리를 들을 정도의 실력자로 우리는 알고 있지요...그래서 그가 선친의 묘를 구천십장을 하고 내려 오는 데 ...지나는 초립동이라고도 하고 ...밭가는 농부라고도 하는 데 어찌됐던 그 중의 한 사람이.....
"천하명사 남사고야...구천십장 좋아마라"....비룡상천은 고사하고...고사괘수가 아니더냐"...(이외에도 여러 문구가 전해오고 있음)라고 읊어 다시 올라가 보니 과연 비룡상천 생룡이 아닌 사룡이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억지로는 안되는 구나....하고 대성 통곡을 했다하여 "구천 통곡지지"라고도 한다더군요..
그런데 희안한 게 그 산소(남사고의 선친 남희백의 묘) 아래 불과 20여미터 거리에 진짜 정혈처인 명당자리가 있고 그런데 왜 그 자리에 쓰지를 못했는 지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는 수수께끼라는 것이지요..
(혹자는 남희백공의 산소 위쪽에 산소가 1기 있는 데 그 자리가 원 명당자리라고 하나..우리가 보기에도 그 윗자리 보다는 아래 자리가 정혈처의 명당자리로 보이고... 부락 주민들의 말로도 아랫쪽 산소자리가 명당자리라고 전해 온다하고 남사고 선생이 애초에 취점한 자리도 그 자리라 하며 그 자리에 산소를 쓴 후손들이 대대로 크게 발복했다는 걸 취합해 보더라도 그게 훨씬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됨)
한편 당시 함께 산에 올라온 주민들의 전해오는 말을 빌면 사실은 격암이 그 정혈처의 명당자리를 잡아 놓고 거기에 산소를 이장하려고 올라 갔는 데.. 당시는 아름들이 소나무가 불과 몇미터 앞도 안보일 정도로 울창하게 우거져 있는 데다가...때마침 오전에 안개까지 자욱하여 착오로 그 위 엉뚱한 곳에 썼다는 군요..
역시 그말이 맞을 것 같습니다....천하명사가 그 명당자리를 몰라보고 불과 몇 미터 떨어진 지근거리의 졸지를 엉뚱하게 취점했을 리는 만무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거기서 저는 의문이 들었습니다...산 밑에서 부터 능선을 따라 정상을 향해 자리를 찾아 올라갔을 터인 데 ..어찌 그곳 명당자리를 그냥 지나쳐 올라가 불과 20여미터 위로 착각해 거기에 산소를 쓸수가 있겠는 가 하는 것이지요..
혹여 반대로 산 정상에 올라갔다가 밑으로 내려 오면서 찾았다면 먼저 보이는 현 산소자리를 발견하고 착오로 그곳에 썻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정혈처인 명당자리와 현 남희백공의 묘는 모두 능선이자 정상쪽에 가까이 올라있는 자리로... 산 아랫쪽이 아닌 ..당시 명당자리가 위치한 능선이 아닌 다른 길로 산 정상에 까지 올랐다가 다시 밑으로 능선을 따라 내려오며 자리를 찾는 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를 않거든요..
그렇다면 이는 참으로 괴이한 일로 그 고인이 그 명당에 들수 없는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지요..
한편, 명당자리에 들려면 1. 첫째,고인이 살아 생전 적덕을 쌓았어야 하고..2. 둘째, 효성이 지극한 후손을 두어야지 ...그래야 조상을 좋은 명당에 편히 모시고자 하는 효성으로 명당을 찾아 나서지..그렇지 않으면 죽은 백골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무관심할 것이고...3. 셋째, 자리를 잘 보는 실력있는 명지관을 만나야 한다.....
즉, 이렇게 3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비로소 명당에 들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위 2. 둘째 조건인 효성이 지극하여 구천십장(아홉번에 걸쳐 명당자리를 찾아 이장하고 그러니 열번 장사를 지냈다는 뜻임)을 할 정도이니 그 효성은 가히 따를 자가 없을 정도이고...3.세번째 조건인 명지관을 만나야 한다는 것도 그 효자 자신이 명지관이니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그렇다면 1. 첫째 조건인 고인 본인이 살아 생전 적덕을 쌓지 못해서 그런 사태가 난게 아닌 가 하는 데...하긴 비문을 읽어보니 ...격암의 선친 남희백공은 살아 생전 고을 원님 밑에서 그를 보필하는 "이방" 벼슬을 한것으로 보아 크게 적덕을 쌓았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설이 있더군요....아마도 그게 명당자리에 들수 없는 운명이었을 거라고..
어쨓든 그 일대가 모두 남씨 종산임에도...또 명당자리를 찾아 놓고도 ...지근 거리의 엉뚱한 곳에 묘를 쓴 이런 해괴한 사건은 아무리 생각해도...고인이 그 명당에 들수 없는 운명이라고 밖에는 도저히 달리 해석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풍수지리의 전래설은 9천10장이 끝이고, 더 이상 천장하면 집안이 패절패망한다는 설에 따라 격암선생은 “구천통곡”을 하고 더 이상 진짜 명당자리에는 다시 이장을 못하고 말았으며....
이에 그 진짜 명당자리에는 타인들이 쓸까 두려워 서둘러 그해에 곧바로 같은 남씨로 격암과는 파가 다른 “기감파”에서 선조의 묘를 설치하여 그후 그들이 대대로 고관대작에 오르는 등 크게 발복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는 군요..
그래서 그런지 위 기감파에서 썼다는 정혈처의 명당자리 산소는 윗 자리의 격암 선친인 남희백공의 산소보다 묘소가 더 크고... 지금도 후손들이 잘 관리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후손들이 대대로 발복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가 있더군요...
그런데 남사고 선생은 위와 같이 선친을 비혈지에 모셔서 그런지 위 기감파와는 반대로 격암선생은 남매를 두었는 데 아들마져 후사를 두지 못하고 요절하여 절손되었는 데 다행히 딸은 출가하여 외손을 두게 되어 외손에 의해 지금껏 봉사되고 있는 비참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군요..
그런걸 보면 억지로 명당에 들수 있는 것은 아닌 가 봅니다...
이상 격암 남사고 선생 선친 남희백 묘소 간산기를 간략히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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