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적]왕릉과 풍수
조상의 묘터에서 후손들의 길흉화복이 발원한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풍수사상이다. 묘 중에서도 왕릉은 당대 최고의 지관들이 터를 잡아 왕실의 번영을 기원했을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하나 돋는다. 세종대왕은 조선조 최고의 성군이지만 그의 후손들은 불운했다. 큰아들 문종은 즉위 2년 만에 승하했고, 손자 단종은 왕위를 찬탈당하고 비명에 갔다.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종의 둘째아들 세조는 온몸에 부스럼이 나 살이 문드러지는 고통을 겪었고, 그의 큰아들 의경세자(덕종)는 가위눌림을 당하여 2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 역시 1년 만에 병사했다. 후손에게 흉사가 잇따랐으니 세종의 능은 명당이 아니었던가.
경기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의 영릉(英陵)은 명당 중의 명당으로 꼽힌다. 풍수가들은 영릉의 발복으로 조선왕조가 100년은 더 연장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종의 능은 원래 이곳이 아니었다. 세종에 앞서 소헌왕후가 죽자 아버지 태종이 묻힌 헌릉에서 멀지 않은 광주(廣州)에 쌍실의 능을 만들어 유택으로 삼았다. 지관들이 터가 안 좋다고 진언했으나 세종은 부모님 묘 근처보다 더 좋은 명당이 어디 있겠느냐며 듣지 않았다. 그후 왕실의 비극이 잇따르자 이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예종이 즉위하고 마침내 천장을 결심하니 세종 사후 19년(1469)의 일이다. 그동안 왕이 무려 5번이나 바뀌었는데, 묘를 옮기자 그 음덕인지 예종의 뒤를 이은 성종은 25년간이나 재위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풍수지리 연구가들에 따르면 영릉은 ‘회룡고조혈(回龍顧祖穴)’로서 수백리를 날아온 용이 머리를 돌려 자기가 출발한 조종산(祖宗山)을 바라보고 입수하는 혈이라고 한다. 풍수를 들먹이지 않아도 영릉에 들어서면 누구나 마음이 푸근해지며 후덕한 화기(和氣)를 느낄 수 있다. 영릉뿐만 아니라 조선왕릉들은 한결같이 분위기가 온화하다. 터가 좋아서인가. 519년 조선왕조의 무덤들은 하나도 훼손되지 않고 온전히 남아 있다. 최근에는 왕릉 40기 모두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확정되는 경사도 맞았다.
장의는 망자가 아니라 산 자의 몫이며, 분묘는 조상이 아니라 후손들의 보람이다. 잘 모신 선대의 묘는 조선왕릉처럼 두고두고 후대의 자랑이 된다. 명당은 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상을 모시는 마음은 그 자체로 복이 발원하는 명당이다.
<김태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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