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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목은 이색과 삼봉 정도전

장안봉(微山) 2013. 5. 28. 23:39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의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이며, 경북 봉화 사람이다. 출생지는 외가였던 충청도 단양으로 알려져 있다. 단양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천하명승 단양팔경이고, 그 중에서도 으뜸은 도담삼봉(島潭三峰)이다. 도담삼봉은 소백산 자락을 휘감아 돌던 남한강이 매포읍 도담리에 이르러 강 한가운데 봉긋하게 일궈낸 봉우리 세 개를 일컫는다.

이 지방에는 정도전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여럿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에 의하면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1304~1366)이 젊었을 때 관상쟁이를 만났는데, 10년 후에 결혼하면 재상이 될 아이를 얻을 수 있다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정운경은 이 말을 믿고 10년 간 금강산에 들어가 수양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도담삼봉에 이르러 비를 만나 길가 어느 초막집에 유숙하게 되었는데 우씨 소녀를 만나 정도전을 낳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전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정도전의 출생지가 도담삼봉 근방일 가능성을 암시해준다.

그러나 외가가 단양이라는 사실과 구전만으로 정도전이 도담삼봉에서 출생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를 증명할 역사적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출생지에 대한 별다른 기록이 없다는 것은 정도전이 본향인 봉화에서 태어났을 가능성도 말해준다. 본향에서 태어났기에 굳이 출생지를 따로 기록할 필요가 없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정도전의 본가는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치면 경북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로, 영주에서 봉화로 가는 지방도로 중간쯤에서 왼쪽으로 꺾어져 들어간 벽촌이다.

정도전에 대한 당대인들의 평가는 극과 극이다. 조선조의 공식기록인 『태조실록』에서는 정도전을 극도로 비하하고 있지만, 그 이외에는 정도전을 비판하는 당대인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반면 이성계와 몇몇 선비들은 정도전을 극찬한 기록들을 남기고 있다.

조선의 창업자 이성계가 정도전을 어떻게 평가했는가는 정도전의 역사적 역할을 옳게 자리매김 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대목이다. 이성계야말로 조선 창업공신들의 논공행상에 대해 가장 책임 있게 평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1395년 1월 25일 삼사판사 정도전이 정당문학 정총과 함께 『고려사』를 지어 바치자 이성계가 이를 치하하며 정도전에게 내린 글이다.

“경의 학문은 경서와 역사의 깊은 문제까지 파고들어갔고 지식은 고금의 변천을 꿰뚫고 있으며 공정한 의견은 모두 성인들의 말에서 출발하고 명확한 평가는 언제나 충실한 것과 간사한 것을 갈라놓았다. 나를 도와 새 왕조를 세우는 데 공로가 있을 뿐 아니라 좋은 계책은 정사에 도움이 될 만하고 뛰어난 글재주는 문학관계의 일을 맡길 만하다. 거기다가 온순한 선비의 기상과 늠름한 재상의 풍채를 갖고 있다. 내가 왕위에 오른 첫날부터 경이 유용한 학식을 갖고 있어 재상으로 임명하고 또한 역사를 맡은 관직까지 겸임하게 하였더니 재상의 직책을 다하면서도 책을 만드는 데서까지 업적을 나타내었다.”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후 술이 거나하게 취할 때마다, “삼봉이 아니면 내가 어찌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정도전의 공을 치하했으며, 정도전 역시 술이 취하면 이성계와 자신의 관계를 한 고조 유방과 참모 장량의 관계에 비유하며 “유방이 한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장량이 나라를 세운 것”이라 했다 한다.

정도전의 스승이자 정적이요, 고려말 3은(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를 이른다. 길재 대신 도은 이숭인을 넣기도 한다)의 한 사람으로 조선 개국을 끝내 반대했던 이색은 정도전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남겼다.

“벼슬에 나가면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하고, 어떤 일을 당해서도 회피할 줄 몰랐으니 옛날의 군자도 우리 정도전과 같은 사람은 많지 않다. 하물며 지금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그를 존경하고 존경하는 바이다.”

세종 때의 명신 신숙주도 정도전에 대해 “개국 초기에 실시된 큰 정책은 다 선생이 찬정한 것으로서 당시 영웅호걸이 일시에 일어나 구름이 용을 따르듯 하였으나 선생과 더불어 견줄 자가 없었다”고 했다. 심지어『태조실록』도 개국 초기 그의 업적에 대해서만큼은 “그의 힘으로 도울 수 있는 데까지는 힘쓰지 않은 것이 없어서 결국 대업을 이루게 된 만큼, 정말 으뜸가는 공신이었다”는 평을 남기고 있다.

정도전과 함께 이색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후에 이방원측에 가담했던 당대의 명유 권근은 「삼봉선생 진찬」이라는 글을 남겼다. 다소 칭찬이 지나친 듯하지만, 삼봉의 풍모와 기백, 학문과 화술을 짐작할 수 있는 여러 문장들을 접할 수 있다. 우선 정도전의 외모에 대한 기록이다. 정도전은 과연 어떻게 생긴 인물이었을까.

“온후한 빛과 엄중한 용모는 쳐다보면 높은 산을 우러러보는 듯, 다가서면 봄바람 속에 앉은 듯하다. 그 얼굴이 윤택하고 등이 펴진 것을 보니 온화함과 순함이 속에 있음을 알겠다.”

얼굴이 윤택하다거나 높은 산을 우러러보는 듯하다는 것은 정도전의 풍채가 매우 좋았다는 것이다. 정도전은 유배 시절에 지은「농부에게 답하다」에서 스스로의 용모를 “뺨이 풍요하고 배가 나왔다”고 묘사한 바 있다. 『태조실록』에 전하는 정도전의 신체적 특징에 대한 유일한 기록도 “배가 나왔다”는 것이다. 정도전은 비만형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등이 곧게 펴졌으며, 온후하면서도 엄중한 기운을 풍긴다는 것은 단순 비만형이 아니라 풍채 좋고 늠름한 인상이었음을 말해준다. 권근은 정도전의 기백에 대해서도 격찬했다.

“빛은 만 길이나 솟아오르고 기는 무지개를 뱉어놓은 듯, 바야흐로 곤궁할 때도 그 뜻이 꺾이지 않고, 귀하게 되어서도 그 덕은 더욱 높기만 하도다. 이것은 그 마음이 넓고 스스로 만족한 때문이니 정의를 집결하여 속을 채운 데서 오는 것이리라.”

정의를 집결하여 속을 채웠다는 것은 맹자가 의로운 자의 징표로 얘기했던 호연지기를 연상케 한다. 그것은 위엄이기도 하고 기백이기도 하고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기도 하다. 권근은 정도전에게서 그러한 의기를 느꼈던 모양이다.

정도전은 또한 뛰어난 화술의 소유자였다. 혓바닥 하나로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을 휘어잡았던 유세가들처럼 정도전 역시 핵심을 찌르는 빼어난 설득력으로 당대의 논객들 위에 우뚝 솟았다.

“시서를 강의함에 있어서는 능히 알기 쉬운 말로써 지극한 이치를 형용하여 배우는 자가 한 번 들으면 바로 의(義)를 깨달았으며, 이단을 물리침에 있어서는 능히 그 글에 정통하여 먼저 그 연유를 자세히 설명하고서 마침내 그른 점을 지적하므로 듣는 자가 다 굴복하였다. 이 때문에 경서를 들고 배우려는 자가 골목을 메웠으며, 일찍이 따라 배워서 현관의 자리에 오른 자도 어깨를 나란히 하여 늘어설 만큼 수가 많았고, 비록 무부(武夫)와 속사(俗士)라고 그 강설을 들으면 재미를 붙여 싫증을 내지 않았으며, 부도(불교)의 무리들까지도 교화된 자가 있었다.”

정도전의 이야기는 알기 쉽고 재미있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남아 있는 그의 글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논리정현한 글에 속한다.

성종 때의 선비 서거정은 정도전의 성격을 짐작케 해주는 몇 가지 일화를 전하고 있다. 그가 쓴 『필원잡기』에 따르면 어느 날 정도전이 말을 타고 출근하려는데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본 말구종이 신발이 서로 다르다고 지적하자, 태연하게 “한 쪽 신을 본 사람은 반대편 신을 볼 수 없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며 그대로 출근했다는 것이다. 정도전의 다소 덜렁대는, 그러나 여유로운 성격을 알려주는 일화다.

역시 서거정의『태평한화』에 따르면 하루는 정도전이 이숭인․권근과 더불어 각자가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바에 대해 얘기했는데, 이숭인은 조용한 산방에서 시를 짓는 것을 평생의 즐거움이라 했고, 권근은 따뜻한 온돌에서 화로를 끼고 앉아 미인 곁에서 책을 읽는 것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꼽았다. 이에 정도전은 “첫눈이 내리는 겨울날 가죽옷에 준마를 타고, 누런 개와 푸른 매를 데리고 평원에서 사냥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 했다 한다.

유학하는 우리 나라 선비들 치고 눈 내리는 벌판에 말달리며 개와 매를 데리고 사냥하기를 즐겨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개국 이후 직접『진도』를 지어 병사들에게 강의하고 군사훈련을 지휘하고도 했다. 이 또한 정도전의 호방한 성격을 전해주는 일화다.

그러나 성격이 여유롭고 호방하였다 해서 정도전이 마냥 호인풍의 인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일상사가 아니라 정치투쟁의 영역으로 넘어가면 정도전만큼 깐깐하고 집요한 인물도 없었다. 정도전은 자신의 반골기질을 거평 부곡 시절에 지은 「농부에게 답하다」에서 농부의 입을 빌어 이렇게 평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그대의 죄목을 알겠노라. 그 힘의 부족함을 헤아리지 않고 큰 소리를 좋아하고, 그 시기의 불가함을 알지 못하고 바른 말을 좋아하며, 지금 세상에 나서 옛 사람을 사모하고, 아래에 처하여 위를 거스른 것이 죄를 얻은 원인이로다.”

옛 사람을 사모한다는 것은 요순시절의 이상주의를 지향한다는 말이요, 아래에 처하여 위를 거스른다는 것은 그의 혁명아적 기절을 말하는 것이다.

그가 권력을 잡은 것도 이 때문이었고, 목숨을 잃은 것 또한 이 때문이었다. 맨주먹밖에 없던 낭인시절에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재상시절에나 그는 이 길에서 결코 흐트러짐이 없었다.


「정도전을 위한 변명」에서...


2. 정 도전의 출세와 시련

청소년기의 정 도전에게 학문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이 색(李穡)이었다. 정 운경은 이 색의 아버지 이 곡(李穀)과 학우(學友)관계를 가져, 자연 정도전은 이 색과 친밀하게 되었다. 이 색의 문하에는 정 몽주(鄭夢周)․이 숭인(李崇仁)․이 존오(李存吾)․김 구용(金九容)․김 제안(金齊顔)․박 의중(朴宜中)․윤 소종(尹紹宗) 등과 같은 인사가 모여들어 그들과도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공민왕 11년(1362)에 급제한 그는 충주 사록(忠州司錄)․전교주부(典校注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 등 하급 관직을 역임하다가 공민왕 15년(1366)에 부모가 모두 돌아가자 고향 영주(榮州)에 내려가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공민왕 19년에 성균관이 중영(重營)되자 성균 박사에 임명되어 이 색․정 몽주․이 숭인․이 존오․김 구용․박 상충(朴尙衷)․박 의중 등과 더불어 성리학을 강론하면서 자신의 학문적 이해를 깊이하였다. 이때는 바로 대륙에서 원(元)․명(明)이 교체되는 시기로서 공민왕은 안으로 유교를 부흥하여 중앙집권적 관료정치를 재정비하고, 밖으로는 반원 친명(反元親明) 정책을 표방하면서 몽고로부터의 완전 독립을 꾀하고 있었다.

정 도전을 비롯한 신진 성리학자들은 아직 뚜렷한 정치세력을 형성하진는 못하였으나 공민왕의 개혁 정치에 소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미래의 경륜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러나 1374년에 우왕(禑王)이 즉위하고 이 인임(李仁任) 일파가 집권하면서 정세는 크게 바뀌고 신진 유학자들에게는 새로운 시련이 안겨졌다. 이 인임 일파의 친원 반명정책에 반대하던 정 도전은 마침내 개경에서 쫓겨나 고달픈 유적(流謫)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 나주(羅州) 부근의 회진현(會津縣)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고향에 4년간 복거하다가 다시 삼각산(三角山)․부평․김포 등지를 전전하면서 학문과 교육에 종사하였다. 우왕 9년에 함주(咸州)로 찾아가 이 성계와 만날 때까지 10년간에 걸친 유배․유랑생활이 정 도전에게 있어서는 가장 고달프면서도 가장 의미 있는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회진현에서 소재동(消災洞)의 부곡민(部曲民)과 생활하면서 그는 농촌 현실을 몸소 체험하고 그 체험을 많은 시문(時文)으로 남겨 놓았다. 금남잡영(錦南雜詠)과 금남잡제(錦南雜題)로 이름붙인 글들이 그것이다. 심문․천답(心問天答)․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와 같은 성리학 관계 저서, 팔진삼십육변도보(八陣三十六變圖譜)․태을칠십이국도(太乙七十二局圖) 등과 같은 병서(兵書)가 저술된 것도 가ㅡ의 10년간에 걸친 유배 시기였다.

개국후에 저술된 일련의 저서들도 그 기본구상은 이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삼봉집」에서...

출처 : ▒ 한 산 草 堂 ▒
글쓴이 : 천하한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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