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가정 이곡.목은 이색

[스크랩] 백사 이항복(李恒福) 의 목은 이색선생에 대한 기

장안봉(微山) 2013. 5. 28. 23:38

 

  옛날 무왕(武王)이 주(紂)를 정벌할 적에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은 왕업을 협찬하였는데,

백이(伯夷)는 서산(西山)에서 고사리를 캐어 먹었고,

광무제(光武帝)가 천명을 받을 적에 경감(耿弇)과 가복(賈復) 은 공훈을 세웠는데,

자릉(子陵) 은 창파(滄波)에서 낚시질만 하였다. 왕후(王侯)를 섬기지 않고 자신의 뜻만 지키거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거나 하여, 선비가 각각 뜻이 다른 것이니,

어찌 한 가지 관례로만 보아서야 되겠는가.


그러나 고죽(孤竹) 의 청풍(淸風)은 십란(十亂) 을 능가하기에 손색이 없고,

동강(桐江) 의 기절(奇節)은 운대(雲臺)의 공신(功臣)을 능가하여 광채가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혹 은자(隱者)가 도리어 드러나고, 달자(達者)가 도리어 궁하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은현(隱顯)과 궁달(窮達)은 몸에만 관계될 뿐, 이름에는 관계되지 않는 것인가?

혹은 그 모두가 하늘에 관계될 뿐이요 몸과 이름에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인가?


그러나 하늘의 뜻은 마치 주(周) 나라 조정에 풍절(風節)을 수립한 이는 반드시 상(商) 나라의 유로(遺老)이고, 지존(至尊)을 오시(傲視)하여 두려움이 없는 이는 반드시 미천하던 때의 친구인지라,

그러므로 주(周) 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고, 누워서 성상(星象)을 움직이어,

그 의리를 수립하고 그 고상한 뜻을 성취함으로써 비록 전조(前朝)에 절의(節義)를 바쳤다고는 하나,

실상은 또한 신국(新國)에 교훈을 내린 것이라고 한 듯하다.

 

그리하여 후세에 그들의 풍도를 들은 이로서 마치 유장(劉萇) 이로(二老)의 의리나 당고(黨錮) 제현(諸賢) 의 절의와 같은 경우는 모두 소종래(所從來)가 있어,

주(周) 나라와 한(漢) 나라의 빼칠 수 없는 공고한 기반이 되었으니,

그렇다면 혹 은(隱)하거나 현(顯)하여 자취는 비록 서로 다르더라도, 덕(德)을 수립하여 후세에 전해서 똑같이 국가를 유익하게 한 것은 한가지인 것이다.


이런 경우야말로 의당 십륜(十倫) 의 서열에서 두번째에 위치하고, 오사(五祀) 에 짝하여 아름다움을 나란히 해야 할 터인데, 서학(西學) 에 자리하여 영화를 누리고 보답을 받는 데에 대하여 그 누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는가.


우리 성조(聖祖)께서 천명에 응하여 도록(圖籙)을 장악함으로써 요(堯) 임금은 선위(禪位)하고 순(舜) 임금은 전해받았는데, 그 때에 목은(牧隱 이색(李穡(색))의 호) 이공(李公)이 있었으니, 그가 천승(千乘)의 군주에게 길이 읍(揖)하고 영원히 떠나 버린 것은 옛 친구가 왕의 배 위에 발을 얹은 것과 같은 고상함이요, 한 번 죽는 것을 마치 헌신짝 벗어 버리듯이 한 것은 상(商) 나라의 유로(遺老)가 굶어 죽은 것과 같은 의리인 것이다.


조선(朝鮮)은 열사(烈士)가 많다고 호칭하는바, 무릇 큰 위난(危難)이 있을 적에는 선비로서는 대부분 웅어(熊魚)를 취사(取舍)하는 분별을 알아서 매양 의리를 지키어 만사를 불고(不顧)했던 것이 바로 누구로부터 시작된 것이던가.

그렇다면 의당 그 덕을 수립하고 교훈을 내린 공으로 말할 때 고인(古人)에 견주어 누가 더 중(重)하고 경(輕)하겠는가?


지금 보록(譜錄)을 상고하건대,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호) 문효공(文孝公)이 목은(牧隱) 문정공(文靖公)을 낳았고, 목은 문정공이 인재공(麟齋公 이종학(李種學)의 호)을 낳았으며, 또 오대(五代)에 이르러 음애공(陰崖公 이자(李耔)의 호)이 탄생하여, 대가 장덕(大家長德)이 보록에 끊이지 않았으니,

세상에서 한산(韓山)에는 군자가 많다고 하는 말이 사실이로다.


목은의 묘(墓)가 한산군(韓山郡) 서쪽 기린산(麒麟山) 아래에 있는데, 상서(尙書) 이성중(李誠中)이 한산 군수(韓山郡守)로 있을 때에 그 묘 밑에 사당을 세우고 편액(扁額)을 문헌(文獻)이라 하였다.

 

그런데 임진년 난리통에 모두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그러자 현재 사대부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후손들 가운데 각각 그 선덕(先德)을 잇고 가업(家業)을 계승할 만한 이로서

즉 좌의정공(左議政公) 덕형(德馨)과 이부 우시랑공(吏部右侍郞公) 덕형(德泂(형))이 서로 이 폐해진 사당을 일으켜 중신(重新)시키기를 꾀하여 군의 서쪽에 있는 구택(舊宅)의 터에다 옮겨 세웠다.

 

그리고 이에 가정공은 서열이 높고 목은공은 덕이 높은 관계로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하게 하여 각각 그 높은 것을 오로지 하였고, 인재공과 음애공은 또한 그 서업(緖業)을 계승한 관계로 동쪽과 서쪽에 나누어 배향하였는데,

부자(父子)와 후손이 서로 계승하면서 더욱 드러나 덕행과 문장이 이에 절로 가전지물(家傳之物)이 되어서 열매를 이루고 꽃을 피웠으니, 누가 그 집안과 높낮이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서원이 이미 건립되자, 이 시랑(李侍郞)이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옛날에 범 무자(范武子)는 세록(世祿)을 썩지 않는 업적이라고 말했다가 목숙(穆叔)에게 기롱을 받았으나, 지금 이와 같은 유는 참으로 썩지 않는 것이라 하겠네.

 

내가 또한 자네들에게 부탁할 것이 있네. 지금 자네 두 사람은 능히 조묘(祖廟)를 일신시켰으니, 존조 경종(尊祖敬宗)의 의리를 잘 알았다고 하겠네. 비록 그러하나 전대(前代)에 광영을 입혀서 조선(祖先)을 드러내는 일이 이것만으로 다 될 수 있겠는가. 후손으로서 도(道)에 뜻을 둔 사람이 죽어서 이 당(堂)에 오르지 못한다면 그를 명하여 조선을 욕되게 했다고 할 것이니, 나는 그것을 취하지 않노라.”
하니, 시랑이 일어나서 말하기를,

“감히 해내지는 못할지라도 감히 힘쓰지 않겠습니까.”
하므로, 마침내 이것을 기문으로 삼는 바이다.

 


 

                                                                                                          (백사집)
출처 : ▒ 한 산 草 堂 ▒
글쓴이 : 천하한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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