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奏議)
논 이색 소(論李穡疏)
오사충(吳思忠)
판문하(判門下) 이색(李穡)은 우리 현릉(玄陵)을 섬겨서 유종(儒宗)으로써 그 지위가 보상(輔相)에 이르렀더니, 현릉께서 돌아가시자 사속(嗣續)이 없으니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이 스스로 권세를 독차지하려 하여 어린 임금을 세울 제 이색이 그 의논에 방조하여 우(禑)를 세웠더니, 모든 장수가 군사를 돌리어 왕씨(王氏)를 세우자는 의논을 하는 즈음에, 대장(大將) 조민수(曺敏修)가 이인임의 인친(姻親)으로써 그의 아들 창(昌)을 세워서 그 사사로운 꾀를 계속하려 하여 이색에 꾀를 물었더니 이색 역시 창으로 세울 것을 마음에 정하여 드디어 의논해서 세웠고, 그의 아들 종학(鍾學)은 외척(外戚)에게 선언하기를, “여러 신하가 종실(宗室)을 세울 것을 의논했으나, 마침내는 세자(世子)를 세우게 되었으니, 이것은 우리 아버지의 힘이다.” 하였습니다. 이색이 서울로부터 돌아올 때에 이숭인(李崇仁)ㆍ김사안(金士安) 등과 약속하여 우를 여흥(驪興)에서 뵈었는데 이색은 앞서서 홀로 만나보았으니, 그 홀로 만나볼 즈음에 그의 말한 것이 공사였던가, 또 사사였던가는 알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급기야 천자(天子)가 명하기를, “비록 왕씨로 거짓하고 다른 성으로 임금을 삼은 것은 삼한(三韓)의 대대로 지키는 아름다운 꾀가 아니다.” 하였으므로, 충신과 의사(義士)들이 다시 왕씨를 세울 것을 의논하여, 천자의 명령에 따르려 할 제 적신(賊臣) 변안렬(邊安烈)은 기이한 공훈을 세워서 부귀를 도둑하려 하여, 이색과 신우의 외숙 이림(李琳)과 김저(金佇)ㆍ정득후(鄭得厚) 등과 더불어 신우를 맞이하기로 꾀하여 다시 왕씨를 세울 의논을 저해하였으니, 만일 이르기를, “15년동안을 몸을 맡겨 신하가 되었으니 다시 다른 마음이 있을 수 없다.” 한다면, 어찌 5백 년의 왕씨를 저버리고 15년의 신씨에게 충성하여야 하겠습니까. 이색은 대대로 왕씨에게 벼슬을 하여 공민왕의 망극한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인임에게 붙어 신우를 세워서 왕씨를 끊어버리고, 모든 장수들이 왕씨를 세우려 하였을 제는 민수에게 붙어서 신우를 쫓아내고는 신창(辛昌)을 세웠으며, 충신 의사가 왕씨의 자리를 회복하려고 하였을 제는 안렬에게 붙어서 창을 쫓아내고는 우를 맞이하였으니, 그는 우와 창에게도 역시 반측(反側)하는 신하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족히 논할 것 없이, 대대로 왕씨의 신하로써 적신(賊臣)에게 아부하여 왕씨의 종사(宗社)를 길이 끊어지게 하였으니, 그 죄악은 종사(宗社)에서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 왕망(王莽)이 한(漢) 나라를 빼앗는 것이 장우(張禹)에게서 이룩되었으니, 그것은 장우가 그 꾀에 참여하여 그 힘을 썼던 것이 아니었고, 다만 장우가 유종(儒宗)으로써 본디부터 중망을 지녔으므로, 왕망에게 붙게 되니 왕망은 꺼릴 것이 없었고, 온 나라 사람이 그를 신종(信從)하였으며 왕망에게 붙지 않은 자가 도리어 죄인이 되었는데, 능히 주운(朱雲)이 베어 죽이자고 청한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며, 능히 스스로 후세의 공론도 피하지 못했거늘, 이색은 우와 창에게 붙어서 나라 사람에게 죄를 지은 것이 장우보다 중하고 또 이색이 인임의 대우를 받아서 그 부귀를 보수하였으며, 인임이 그의 무리 견미(堅味)와 흥방(興邦)과 더불어 탐욕을 자행하여 벼슬을 팔고 죄인을 놓아 뇌물을 공공연히 행하고 백성의 농토를 빼앗아 점유하되 원망이 쌓이고 죄악이 충만하여 마침내는 패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색은 그 그릇됨을 말하지 않았으며, 우의 스승이 되어서 여러 차례 보상을 받아서 젖내[乳臭] 나는 자제들이 모두 높은 과거에 올라서 요직에 깔렸고, 우가 그 포악함을 멋대로 하여 죄없는 자를 살육하였으나, 이색은 그 허물을 바로잡지 않고 우가 망령되이 군사를 일으켜 장차 중국의 경계에 침입하여 동방의 무궁한 재화를 시작하려 함에도 이색은 또 말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국가에서 사전(私田)으로써 공가(公家)를 여위게 하고 민생을 해쳐서, 송사를 일으키며 풍속을 헐어버리니, 이를 개혁하여 전법(田法)을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이색은 상상(上相)으로써 옳지 않다고 고집하여, 그의 아들 종학(種學)으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말을 퍼뜨려 거실(巨室)의 원망과 비방의 단서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림(李琳)이 탐욕스럽고 변변하지 못함은 나라 사람이 모두 아는 바인데 이색은 또 외척(外戚)과 교제하여 보존하기를 도모하되, 이림을 추천하여 스스로 그 자리에 대체시켰고, 또 그가 유종(儒宗)임에도 불구하고 대장경(大藏經)을 인출하였으므로, 온 나라가 다투어가면서 본을 받아 오히려 미처 못할까 저어하여 풍속을 그르치게 하고는 그의 아들을 시켜서 사람들에게 선언하기를, “이것은 우리 아버지의 뜻이 아니요, 할아버지 곡(穀)의 뜻을 이룩한 것일 뿐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아비를 이단(異端)에다 빠트려도 돌아보지 않음이었습니다.
또 신창을 받들어 조회할 때에 신우를 맞이하여 세울 꾀가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드디어 이숭인(李崇仁)에게 위촉하여 탄핵을 입고는 장단(長湍)으로 돌아가 사변을 관망하더니, 전하께서 위에 오르니 공공연히 와서 판문하(判門下)의 벼슬을 받아 백관의 위에 앉았으나,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빛이 없고 배운 것을 굽히어 세상에 아부하되 거짓을 꾸며 이름을 낚시질하였으니, 청하건대, 유사에게 내려서 이색 부자와 민수(敏修)의 죄를 논하여 후세의 남의 신하로써 충성하지 못하는 자에게 경계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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