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書)
상 도당 서(上都堂書)
정도전
재상(宰相)의 직임(職任)은 그 나라의 모든 책임이 모인 곳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일찍이 석개보(石介甫)는 말하기를, “위로는 음양(陰陽)을 조화(調和)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안무(安撫)하여, 작상(爵賞)과 형벌(刑罰)이 경우하는 바의 관건이고, 정화(政化)와 교령(敎令)이 시작되어 나오는 바다.” 하였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도 재상의 직임은 이 네 가지보다 더 중대한 것은 없다 하겠고, 더욱이 그 중에서도 작상과 형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이른바 음양을 조화한다는 것은, 그 일이 없는데 음양이 스스로 조화되는 것을 말함이 아닙니다. 상을 주되 그 공로에 해당하게 한다면 선행(善行)을 한 자에게 권장(勸?)이 된 것이고, 형을 집행하되 그 죄에 해당하게 한다며 악행(惡行)을 한 자에게 징계(懲戒)가 될 것입니다.
생각하옵건대, 형 중에서 큰 것은 찬역(簒逆)하는 죄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 왕씨(王氏)를 저지(沮止)하고 창(昌)을 세운 것은 바로 신우(辛禑)를 영립(迎立)하여 왕씨를 단절시킨 자들인데 찬역의 죄가 이보다 더 큼이 없는 난적(亂賊)의 괴수(魁首)입니다. 그런데도 구차히 천벌을 면함이 이제 이미 여러 해입니다. 또 그는 얼굴빛을 좋게 꾸미고 그 도종(徒從)을 성대하게 딸리고 궁중과 궁외를 출입하되 조금도 기탄(忌憚)함이 없이 하고 있으며, 그 자제(子弟)와 생질(甥姪)들도 요직(要職)에 들어 세워 놓고 있으나 아무도 그들에게 시비를 못하고 있으니, 지금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 상형의 권병(權柄)을 지키는 자는 그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의당히 그 죄상(罪狀)을 낱낱이 논하여 전하(殿下)께 아뢰고 백성과 함께 대묘(大廟)에 고하고 그 죄를 세어서 처 죽인 뒤에야 하늘에 있는 영령이 위로 될 것이요, 신하와 백성의 울분이 씻어질 것이요, 천지의 바른 기강(紀綱)이 설 것이요, 재상의 책임이 메워질 것입니다.
만약 말하기를, “사람의 죄악은 내가 알 바 아니오, 사람을 살리고 죽이며, 없애고 폐하고 놓아두는 권한은 임금이 맡은 것인데 재상이 어떻게 이에 관여하겠는가”고 한다면, 동호(董狐)가 어찌하여 조순(趙盾)이 임금을 시해(弑害)한 역적을 처 죽이지 않은 것으로써 그에게 악명(惡名)을 짊어지게 했습니다.
춘추(春秋)시대에 진(晋) 나라 조천(趙穿)이 임금을 시해함에 직사관(直史官)인 동호가 기록하되, “조순(趙盾)이 임금을 시해하였다.” 하자 조순이 말하되, “임금을 시해한 사람은 내가 아니다.” 하였습니다. 직사(直史)가 말하되, “그대가 정경(正卿)이 되어 가지고 망명해서는 국경을 넘지 못하였고, 돌아와서는 역적을 처 죽이지 못하였으니 임금을 시해한 자는 바로 그대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하였습니다.
공자(孔子)께서 말하기를, “동호는 훌륭한 사가(史家)요, 조순은 훌륭한 대부(大夫)인데 법을 위해 악명을 받았다.” 하시었습니다. 무릇 조순이 정경(正卿)으로 임금을 시해한 역적을 토벌하지 못함으로써 시역하였다는 악명을 씻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뒤에 도적을 토벌하는 의리가 엄중하여져서 난적의 무리가 천하에서 용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남의 군부(君父)가 되어 《춘추》의 의리에 통달하지 못하면 반드시 최악의 이름을 얻을 것이요. 남의 신자(臣子)가 되어 《춘추》의 의리에 통달하지 못하면 반드시 찬역과 시해의 죄에 빠진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라 하겠습니다. 내 비록 재주가 없으나 내가 재상의 뒤를 따라, 나라 정사에 참여하여 듣고 있는데 이 훌륭한 사가의 의논을 감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만약 말하기를, “이른바 죄인이 유종(儒宗)이 있고, 거듭 왕실에 혼인한 자가 있어서 그 법을 의논하기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면, 옛날 임연(林衍)이가 원왕(元王)을 폐하고 동복 동생 (?)을 영립(迎立)할 적에 연(衍)이 먼저 모든 계모(計謀)를 꾸며 놓고 나중에 시중(侍中) 이장용(李藏用)에게 알리자 이 일을 당한 장용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오직 예, 예, 하는 대답으로 이에 따를 뿐이었습니다. 그 뒤에 원왕이 반정(反正)함에 장용이 그 지위가 재상에 있으면서도 능히 그 계모(計謀)를 누르지 못하고 그 반란을 진정시키지 못하였다는 것으로 그의 직위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었습니다.
지금 이색(李穡)의 유종(儒宗)됨이 장용과 더불어 어떻다고 보시며 그가 먼저 간악한 계교를 일으켜서 왕씨를 저지하고 창(昌)을 영립한 것이 장용이 다만 임연의 모역(謀逆)에 예, 예, 라고 대답한 것뿐인 것과 더불어 누가 낫다고 보십니까. 호씨(胡氏)가 말하기를, “옛날에 문강(文姜)이 노환공(魯桓公)을 시해하는 데 참여하였고, 애강(哀姜)이 두 임금을 시해하는 데 관여하였으나, 성인께서 준례로 ‘손(遜)’이라고 써서 그는 가고 돌아오지 않은 것같이 하였음은 깊이 끊어 버리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은정(恩情)은 가볍고 의리는 무거움을 나타낸 것이다.” 하였습니다.
무릇 환공(桓公)을 시해한 사람은 양공(襄公)이요, 두 임금을 시해한 사람은 경보(慶父)입니다. 그러니 문강과 애강은 의심컨대 죄 없는 것같이 보이나 여기 성인께서 문강과 애강 두 부인에게 그 일을 참여하여 들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깊이 끊어버리고 이와 같이 심하게 주토(誅討)한 것입니다.
무릇 사군(嗣君)은 부인이 출산한 바이나 자식과 모친의 사사 은정으로서 임금과 신하의 큰 의리를 폐하지 못하는 것인데, 하물며 그 아래에 있는 사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혹자는 말하기를, “이색(李穡)이, ‘우(禑)가 비록 돈(旽)의 아들이긴 하나 현릉(玄陵)이 자기의 자식으로 삼아서 강녕군(江寧君)에 봉하였고, 또 천자(天子)의 고명(誥命)을 받아 임금이 되었다. 이미 신하가 되었다가 임금을 몰아냄은 크게 옳지 못하다.’ 하는데 그 말이 옳지 않으냐.”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은, 왕위(王位)는 태조(太祖)의 왕위요, 사직(社稷)은 태조의 사직입니다. 현능이 진실로 사사로이 하지 못할 일입니다.
옛날에 연(燕) 나라의 왕자지(王子之)가 연 나라를 정승 자쾌(子?)에게 주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연 나라를 가히 정벌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맹자 말하기를, “옳지 못한 일이다. 자지가 자쾌에게 연 나라를 주지 못할 것이며, 자쾌도 스스로 연 나라를 자지에게서 받지 못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성현의 마음이 이와 같으시니, 땅과 백성은 먼저의 임금께 받은 것입니다. 임금이 사사로이 남에게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주 나라 혜왕(惠王)이 사랑함으로써 세자를 바꾸자 제(齊) 나라 환공(桓公)이 제후(諸侯)를 거느려 왕세자를 수지(首止)에서 회견하여 그 지위를 정하게 하였습니다. 이때에 적자(嫡子)와 서자(庶子)의 분수는 비록 달랐으나, 그 혜왕의 아들됨은 한 가지입니다. 그러나 천왕의 존귀함으로서도 그 나라는 사사로이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제후는 그의 낮은 몸으로서도 제후의 무리를 거느려 천자의 명령에 항거하였으나 성인께서는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세자가 아버지의 명령을 항거하였고, 제환공(齊桓公)이 임금의 명령에 항거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천하의 의리가 크기 때문입니다. 현릉이 어찌 태조(太祖)의 왕위와 태조의 백성을 저 역적 신돈(辛旽)의 자식에게 사사로이 준단 말입니까.
또 천자께서 고명(誥命)하신 것은 한때 권신(權臣)이 우를 현릉의 아들이라고 속여서 얻어진 것입니다. 그 뒤에 천자께서 명하여 말씀하기를, “고려 임금의 지위는 후사(後嗣)가 끊어져서 다른 성을 빌려서 왕씨를 대신하였으나, 이것은 삼한(三韓)이 대대로 지켜오던 좋은 계모(計謀)가 아니다.” 하고 또 이르되, “과연 어질고 지혜로운 배신(陪臣)이 있어 인군(人君)과 신하(臣下)의 지위를 정하였다.” 하였는데 이는 앞에 명령한 과오를 천자도 또한 알고서 말씀하신 것인데 어찌 감히 천자의 고명(誥命)이 있었던 것으로 핑계한단 말입니까.
그 신하가 되었다는 말도 변명됨이 있습니다. 이는 주자가 〈강목(綱目)〉의 앞에는 이기(食其)가 제(帝)의 큰 스승이 되고, 주발(周勃)과 진평(陳平)이 승상(丞相)이 되었다고 썼고, 뒤에는 한(漢) 나라 대신이 아들 홍(弘)을 목 베고 대왕항(大王恒)을 영입하여 황제의 지위에 나아갔다 하였습니다. 그를 제(帝)라 하고 승상(丞相)이라고 쓴 것은 신하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또 말하여 대신이라 하고 자홍의 목을 베었다 함은 적을 주토(誅討)하였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뿐만이 아닙니다. 무재인(武才人 측천무후)이 황제를 칭호한 지가 오래였습니다마는, 적인걸(狄仁傑)이 장간지(張柬之)를 천거하여 재상을 삼았는데 간지가 무재인을 폐위하고 중종(中宗)을 영립하였습니다. 그를 천거하여 재상을 삼은 것은 어찌 신하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재인을 폐한 것은 또한 역적이 된 것을 주토한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백세를 두고 내려오면서 주발(周勃)과 진평(陳平)은 유씨(劉氏)를 편안하게 하였고 장간지가 당(唐) 나라를 다시 회복한 공로가 있다고 칭송은 할지언정 여러 공들(주발(周勃) ㆍ 진평(陳平) ㆍ 적인걸(狄仁傑) ㆍ 장간지(張柬之))이 신하가 되어서 옛 임금을 폐하였다고 하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색과 다못 현보가 비록 인의롭다고 하기에는 부족하나, 모두 글을 읽어 옛일을 통한 선비인데 어찌 이런 말들을 듣지 못하였을 것이겠습니까마는 그 미혹(迷惑)됨에 사로잡혀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사특(邪慝)한 말을 만들어 내서 민중의 총명을 흐리게 하고 있음을 이에서 가히 보겠습니다. 선왕의 법에 말을 조작하여 민중을 현혹시킨 자는 있는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야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간악한 말을 불러 일으켜서 난적(亂賊)의 일을 꾸미는 죄에 있어서야 무엇을 더 말할 수 있겠습니까. 혹은 말하기를, “신우(辛禑)를 영입하여 왕씨를 절사(絶嗣)시켰다고 하는 것은 그 죄를 더 가중되게 하기 위한 말이다.”라고 하기도 하나, 이때를 당하여 충신과 의사가 천자의 명령을 받들어 이성(異姓)을 폐출(廢黜)할 것을 의결하여 왕씨를 부흥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위왕(僞王) 신우의 무리가 먼저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얻어, 천자의 명이 있음과 충신의 의결이 있음을 알고도 창(昌)이 어리고 약하니 그 부(父)를 영립하여 그 사사로운 일을 이루기도 도모하였으니, 이는 신우를 영입하여 왕씨를 사절시킨 것이 아니겠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색(穡)과 현보(玄父)는 그대에게 있어 항렬(行列)이 선배가 되고, 사문(斯文)의 구의(舊誼)와 고구(故舊)의 정(情)이 있을 것인데, 그대가 힘써 공격함이 이와 같으니, 너무 각박한 것이 아닌가.”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옛날 소식(蘇軾)은 주문공(朱文公)의 전배(前輩)였지만 식(軾)이 감히 괴이한 논의를 하여 예악(禮樂)을 없애고 명교(名敎)를 파괴하니 그를 깊이 꾸짖고 힘써 헐뜯되 조금도 가차(假借) 없이 하면서 곧 말하기를, “감히 옛사람을 공격하여 꾸짖음이 아니라, 옛 성탕(成湯)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내가 상제(上帝)를 두려워 하기에 감히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하였는데 나도 또한 상제를 두려워하기에 감히 논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무릇 식의 죄가 이론(異論)을 세우고 예법을 멸하기에 이르자 주자(朱子)의 인자하고 관용스런 덕으로도 그를 공격하기를 성탕(成湯)이 걸(桀)을 주(誅)하는 말로써 아울러 말씀하셨는데, 하물며 이성(異姓)에 작당하여 왕씨를 저지하였다는 것은 조종(祖宗)의 죄인이요, 또 명교(名敎)의 적괴(賊魁)인데 어찌 선배의 인연으로서 용서할 수 있는 일이라 하겠습니까.
하물며 저의 말에 “무진(戊辰)년 폐위하고 영입하는 때에 사문에 이의가 있었다.” 합니다. 이른바 이 이의한 것은 왕을 세움을 의논한 것입니다. 또 민중에게 제창(提倡)하기를 “제장(諸將)이 왕씨를 영입하는 일에 대해 의논할 때, 우리 아버지가 이를 저지시켰으니 우리 아버지의 공이 크다.” 하였습니다. 이 말은 우와 창의 귀에 깊이 흘러 들렸던 것입니다. 우 창으로 하여금 뜻을 얻었을 것 같으면 사문과 제장이 과연 그의 머리를 보존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의 경박한 처사를 어떻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스스로 왕씨를 세우는 일에 이의(異議)를 하고, 왕씨를 저지한 것을 자기의 공을 삼았으니, 이제는 거짓 신우를 영입한 것에 이의를 하고, 왕씨를 저지한 것을 중죄를 삼음이 또한 옳지 않겠습니까.
또 혹은 말하되, “그대가 이미 편지를 올려 사면(辭免)하고는 글을 전하(殿下)께 올려 죄인을 잡아서 묘당에 고할 것을 논하고 있으니 이는 너무 심한 일이 아니냐.” 하였습니다.
반드시 이 말과 같음이 있을진대, 옛날의 제(齊) 나라 일로 말해 보겠습니다. 진항(陳恒)이 그 임금을 시해(弑害)함에 공자께서 목욕하시고 조회(朝會)하여 말씀하시되, “진항이 그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청하건대 주토(誅討)하시옵소서. 또 삼자(三子)에게 고하여 말씀하시되 진항이 그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청하건대 주토하소서.” 하시었습니다.
임금을 시해한 사람은 제 나라에 있으니 노(魯) 나라와는 관련됨이 없을 것 같은 일이요, 공자가 대로(大老)에게 고한 것은 이것도 노 나라의 성사에는 관련됨이 없을 것 같은 일이요, 또 공자께서는 임금에게 진항을 주토할 것을 청하였음에 반드시 삼자에게는 고하지 않아야 할 것 같은 일들입니다.
그러나 또 성인이 그의 넓고 큰 겸용(謙容)한 마음을 지니고서도 들어와서는 임금께 청하였고, 나와서는 삼자에게 고하여 반드시 그 죄인을 주토한 뒤에 말고자 하였음은 진실로 시해하는 역적(逆賊)은 사람마다 주토하기를 원하는 것이오니 천하가 미워함은 한결같다 하겠습니다.
또 노 나라에 살면서도 제 나라에 있는 역적을 보고 참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그 나라에 살면서 그 나라의 역적을 보고 참을 수 있겠습니까. 공자께서는 대부의 뒤에 쫓아서도 이웃 나라의 정사에 참지 못하였거니와 하물며 공신(功臣)의 반열(班列)에 있으면서 왕실(王室)의 역적을 보고 참을 수 있겠습니까.
《춘추》에 “위인(衛人)이 주우를 죽였다[殺州?]”라 썼습니다. 이에 대해 호씨(胡氏)는 “인(人)은 여러 사람이라는 말이요, 그 주우(州?)를 죽임은 석작(石?)이 도모(圖謀)한 것이니, 우재추(右宰醜)로 하여금 그를 죽이는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 하였습니다. 글자를 고쳐서 사람이라 말하였으니, 이것은 사람들이 모두 그를 주토(誅討)하는 마음을 두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 사람마다 주토할 일이었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또 변란(變亂)을 일으키는 신하와 적해(賊害)하는 자식은 사람마다 주토하는 것인데 재상이 주토의 의거를 행하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 하겠습니까. 하물며 석작이 주우의 연고(緣故)로써 그 자식인 후(厚)를 죽였으니, 군자는 말하기를 “석작은 순수한 신하다. 큰 의리는 친척도 없게 한다.” 하였습니다. 이로써 말할 것 같으면 난적(亂賊)한 사람은 친하고 멀고 귀하고 천하고를 막론하고 모두 주토해 버리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까.
누가 말하기를, “진항(陳恒)과 주우(州?)는 자신이 시해와 역모를 감행한 자이다. 그러나 색(穡)과 현보(玄父)는 일찍이 시해한 일이 없는데 자네는 둘을 비교하여 같다고 하니 이는 또한 지나친 말이 아니냐. 또 어찌 그의 죄악을 무고(誣告)하여 그릇되이 죄악을 입었음을 알겠느냐”고 하나, 이것은 이미 호씨(胡氏)의 말이 있지 아니합니까. 임금을 시해하고 임금을 영입하는 것은 종묘(宗廟)는 오히려 멸망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종묘를 옮기고 그 국성(國姓)을 고치면 이것은 그 나라를 멸망시킨 것인데 어찌 시군하는 것보다 중죄가 아니겠습니까. 이제 이성(異姓)에 당여가 되어 왕씨의 종사(宗祀)를 끊어지게 한 것은 실상 호씨가 말한 그 종묘를 옮기고 동성을 멸망시킨 것이 그 죄도 시해함에 그친 것이 아닙니다.
옛날의 대신도 그의 죄를 고하는 사람이 있으면 죄수복(罪囚服)으로 갈아입고 그 죄를 청하였습니다. 한(漢) 나라의 곽광(?光)은 무제(武帝)의 고명대신(顧命大臣)으로서 소제(昭帝)를 옹립(擁立)하였으니 그 공덕이 지극히 컸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상서하여 그 죄를 고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그는 감히 금중(禁中)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자기의 죄를 기다렸습니다. 이런 일로써 볼지라도 진실로 죄를 고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 마땅히 체읍(涕泣)하여 절실하게 자기의 죄를 청하여야 될 것인데 몸소 유사(有司)에 대하여 그 죄를 변명한 후에라야 그 마음이 편안하게 될 것입니다. 처자를 권유하여 글을 올리고 병들었음을 핑계삼아 의원을 외사(外舍)에 불러 놓고 어찌 그 죄를 밝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자기에게 죄가 있음을 알려 줌이니 기필코 말이 막히어 변명하지 못함에서입니다. 춘추(春秋)의 난적을 주토하는 법에 비록 그 사람의 죄상이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오히려 그 뜻을 찾아 주토하였던 것입니다. 하물며 이미 그 자취가 드러남이 이와 같은 사람이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고종(高宗)이 무재인(武才人)을 책봉(冊封)하여 황후(皇后)를 삼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수량(?遂良) ㆍ 허경종(許敬宗)은 같은 재상직에 있을 때입니다. 수량은 임금께 그 처사가 옳지 못함을 힘써 간하다가 마침내 살육의 화를 입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종은 고종의 뜻에 순응하여, “이 일은 폐하(陛下)의 집안일일 뿐이옵니다. 재상이 알 바가 아니옵니다.”라고 말씀을 올렸던 것입니다. 이에 고종은 경종의 말을 인용하여 마침내 무재인을 황후(皇后)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경종은 평생 동안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았습니다. 또 5왕자들이 함께 반정(反正)을 협의하다가 다같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지금에 와서 살펴보면, 경종의 계모(計謀)는 성취되었고, 수량(遂良)과 5왕자는 실책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종이 한때 부귀를 누렸다는 것은 몹시 빠른 것이어서 회오리바람이 귀바퀴를 지남과 같이 그 자취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수량과 5왕자의 영특한 성예(聲譽)와 정의의 열백(熱魄)은 역사 기록에 휘황찬란하게 우주를 관통하여 우리와 함께 존재하고 있습니다.
내 비록 비천(鄙賤)하고 졸렬(拙劣)한 몸이오나 경종을 수치로 여기고 수량을 사모하는 바입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처음에 더불어 같이 도모(圖謀)하였으면 마침내 더불어 같이 죽는다.” 하였습니다.
임금께서는 이 어리석고 졸렬한 몸을 버리지 아니하셔서 반정의 의거에 참여함을 얻었습니다. 간흉한 도당의 화해(禍害)를 두려워하여 내 어찌 감히 묵묵히 구차하게 지나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춘추》의 난적을 주토하는 법을 법받아서 공자 석작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는다면 종사가 퍽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여행이야기(가정 이곡.목은 이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명(銘) 한산백 청심당 명(韓山伯淸心堂銘) -이첨(李詹)- (0) | 2013.05.28 |
---|---|
[스크랩] 주의(奏議) 논 이색 소(論李穡疏) -오사충(吳思忠) - (0) | 2013.05.28 |
[스크랩] 무학대사 소점한 목은 이색 선생 기린형국-이경순- (0) | 2013.05.28 |
[스크랩] 신륵사와 목은 이색 (0) | 2013.05.28 |
[스크랩] 권근신도비(權近神道碑) (0) | 2013.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