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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記) 여흥군 신륵사 대장각기(驪興郡神勒寺大藏閣記) -이숭인-

장안봉(微山) 2013. 5. 28. 23:13

기(記) 이숭인
 
 
여흥군 신륵사 대장각기(驪興郡神勒寺大藏閣記)
 

판삼사사(判三司事) 한산(韓山) 목은 선생(牧隱先生)이 숭인(崇仁)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대덕(大德) 경술년 7월 초 3일에 나의 조부 정읍부군(井邑府君)이 병으로 돌아가셨다. 선군(先君) 가정문효공(稼亭文孝公)께서 당시 13세였으나 초상과 장사를 잘 치르셨다. 지정(至正) 경인년 10월 2일에 조모께서 병으로 돌아가셨다. 선군이 예(禮)를 다하여 장사하고 중을 청하여다가 시골의 절에서 불경(佛經)을 읽었다.
선군이 항상 탄식하기를, ‘나는 이제부터 어디에 의지하고 어디에 의지할 것인가.’ 하셨는데, 좌올남산총공(坐兀南山聰公)이 선군에게 말하기를, ‘공이 지금 진실로 우리 불법으로써 선고(先考)와 선비(先?)의 명복을 빌고자 한다면, 어찌 1부 장교(藏敎)를 간행하지 않으십니까. 우리 불법의 모든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였다. 선군이 즉시 부처의 초상(肖像)을 향하여 기원을 세웠다.
다음해 신유년 정월 초하룻날 선군이 불행하게도 어머님의 상복을 입은 가운데서 돌아가셨다. 내가 중국에서 분상(奔喪)하여 와서 총공(聰公)을 청하여 불경을 읽었다. 선군의 입원(立願)을 언급하였으나, 내가 상중에 있으므로 그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미 상복을 벗은 뒤에 요행히 세과(世科 조상의 은덕으로 얻는 벼슬)에 들어 이름이 관원의 명단에 실리게 되었다. 오직 직무에 충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선군이 입원(立願)한 불사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총공(聰公)이 여러번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선대인의 입원(立願)을 어찌 어길 수 있습니까.’ 하였으나, 일찍이 답장은 하지 않고 스스로 상심할 뿐이었다.
홍무(洪武) 신해년 9월 26일에 선비 김씨(先?金氏)가 또 병으로 돌아가셨다. 상기(喪期)가 겨우 끝났을 때에는 내가 병이 나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갑인년 9월 23일에 현릉(玄陵)이 모든 신하들을 버리고 승하하셨다. 내가 삼가 생각하니 우리 선군(先君)은 현릉(玄陵)께서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의 옛 신하로서 오랜 세월을 섬겼으며, 나는 현릉 초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드디어 재상의 관부(官府)에 올랐으니 우리 부자가 입은 은택은 지극히 넉넉하였지만 일찍이 터럭만한 보답도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승하하셨으니 어찌 슬픔을 이길 수 있겠는가.
기미년에 총공(聰公)이 마침 산중에서 내려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이제 나의 나이가 벌써 74세가 되었습니다. 다행히 죽지 않고 공과 더불어 서로 만나보게 되었으니 어찌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선대인(先大人)의 말씀이 또렷이 귀에 남아 있습니다. 공은 기억하십니까.’ 하니, 내가 더욱 마음으로 아파하여 말하기를, ‘위로는 선왕의 명복을 빌고, 아래로는 선고(先考)의 뜻을 계승하는 일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하였다. 나의 병이 나았을 때, 왕명을 받들어 나옹(懶翁)의 탑명(塔銘)을 지은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스스로 계획하여 보니 내 힘으로는 부족하였다. 힘입어서 이 일을 성취할 수 있는 자는 오직 나옹(懶翁)의 무리뿐이기에 즉시 편지를 보내어 의사를 말하였다. 호(號)가 무급(無及), 수봉(琇峯)이라고 하는 두 중이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격려하였다.
경신년 2월부터 인연을 따라 희사(喜捨)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각참(覺?)은 순흥(順興)에서, 각잠(覺岑)은 안동에서, 각홍(覺洪)은 영해(寧海)에서, 도혜(道惠)는 청주에서, 각연(覺連)은 충주에서, 각운(覺雲)은 평양에서, 범웅(梵雄)은 봉주(鳳州)에서, 지보(志寶)는 아주(牙州)에서 선행을 권장하였다. 닥나무가 변하여 종이가 되고 검은 것을 녹여 먹을 만들었다. 신유년 4월에 이르러 《경률론(經律論)》을 인쇄하여, 9월에 표지(表紙)를 꾸미고, 10월에 각주(覺珠)가 이금(泥金)으로 제목을 쓰고 각봉(覺峯)이 누런 책가위를 만들었으며, 12월에 성공(性空)이 함(函)을 만들었다. 아침저녁으로 몇 되, 몇말의 곡식을 빌어다가 여러 중들을 밥 먹이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게을리하지 않은 사람은 국신리(國?里)에 사는 노파 묘안(妙安)이었다. 임술년 정월에 화엄종 영통사(靈通寺)에서 거듭 교열하고 4월에 배에 싣고 여흥군(驪興郡) 신륵사에 이르니 나옹(懶翁)이 입적한 곳이다. 화산군(花山君) 권공희(權公僖)가 제목(題目)을 주관하여 다시 여러 시주(施主)들과 더불어 시재(施財)하고, 동암(同庵) 순공(順公)이 공사를 감독하여 드디어 절의 남쪽에 2층 집을 세우고 크게 단청을 장식하였다. 준공하자 인쇄한 《경률론(經律論)》을 그 안에 넣어 간직하였다.
5월에 전경(轉經)하고, 9월에 전경하였으며, 금년 들어 계해년 정월에 또한 전경하였다. 대략 1년에 세 번 전경하는 것은 일정한 규정으로 한다. 가운데에 꽃동산을 만들고 사람의 키만큼 큰 비로자나(毗廬遮那) 불상 한 위(位)를 두었다. 당성군(唐城君) 홍공 의룡(洪公義龍)이 죽은 딸을 위하여 지은 보현보살상(普賢菩薩像) 한 위(位), 강부인(姜夫人) 화연(化緣)이 지은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 한 위가 있어서 사중(四衆)의 무리들에게 우러러보고 예배하는 존경심을 일으키게 한다. 아, 30여년의 오랜 세월을 지난 뒤에 선군(先君)의 입원(立願)이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다. 어찌 경축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그 큰 공(功)을 미루어 영원히 임금의 장수(長壽)와 나라의 복(福)을 비는 데 바칠 수 있는 것이다. 여러 중들이 비석을 세워 장래에 가르침을 보이려 한다. 그대가 나를 대신하여 기문을 쓰라.” 하였다.
숭인(崇仁)이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곧 기문을 써서 말하기를, “부처의 도(道)가 청정(淸淨)하고 고묘(高妙)하여 한 점의 티끌도 묻지 않고 만물에 초연하게 뛰어났으므로, 현자와 지자(智者)들은 본래부터 이를 즐거워하였다. 그 말에는 또 소위 복전이익(福田利益)이라는 설(說)이 있다. 여기에서, 충신이나 효자로서 임금이나 어버이의 은혜를 갚으려는 자라면 그 극진한 방법을 쓰지 않는 자가 없기 때문에 그 귀의(歸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불서(佛書)가 세상에 크게 전파되는 것은 당연하다. 가정 선생(稼亭先生)이 이미 일으키고 목은 선생이 계승하여 마침내 이 법보(法寶)를 이루어 임금과 어버이에게 복(福)을 받드는 이것이 곧 충신ㆍ효자가 임금이나 어버이를 위하여 극진한 방법을 쓰지 않음이 없다는 것인가. 아, 누가 신하 아니며, 아들 아니겠는가. 지금으로부터 천만세에 이르기까지, 그 하늘같이 존경하는 분에 대하여 사모하고 발원(發願)하려는 자는 반드시 여기에서 얻을 수 있을 것임을 의심하지 아니하니, 내가 감히 즐겁게 글을 쓰지 아니하겠는가. 저 사중(四衆)의 무리 중 재물을 바쳐 조력한 자는 그의 성명을 모두 비석의 뒷면에 적어둔다.” 하였다.


[주D-001]복전이익(福田利益) : 밭에 곡식을 심으면 몇 배의 수확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부처를 공양하면 복을 받는다는 설.

출처 : ▒ 한 산 草 堂 ▒
글쓴이 : 천하한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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