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주역의 대가인 김일부와 함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인물이 바로 也山 李達이다. 두 사람의 특징을 굳이 구분한다면 김일부가 후천개벽에 초점을 둔 巨視的 周易에 능통하였다면, 상대적으로 이야산은 일상사에 주역의 원리를 적용하는 微視的 周易에 능통하였다고 볼 수 있다. 경제학에도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이 있듯, 주역에도 微視周易과 巨視周易이 성립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하는데, 미시주역의 전범을 보여준 인물이 야산 이달이다. 김일부를 보면 웅혼한 우주사의 변천이 느껴지는 반면 이야산을 보면 시계바늘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 같은 정밀함이 감지된다.
- 주역, 변혁을 꿈꾸는 자들의 바이블 -
사서는 도덕적 실천에 관한 문제가 중요하다. 논어를 두고 보더라도 얼마나 군자답게 사는가. 어떻게 처세하며 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주를 이룬다. 한마디로 도덕 교과서다. 우주와 인간의 심오한 비밀을 탐구하는 내용은 아니다. 대학이나 중용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대동소이하다고 본다. 이러한 책들은 몇 번 읽어보면 이해가 가는 책들이다. 문제는 실천이 잘 안돼서 그렇지 지적으로 파악이 불가능한 내용들은 아니라는 말이다. 삼경 가운데 시경이나 서경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본다.
그러나 주역만큼은 차원이 다르다. 요즘 식으로 표현한다면 주역을 제외한 나머지 경전들이 문과(文科)에 관한 책들이라면, 주역은 이과(理科)에 관한 책이다. 사서는 암기하면 되지만, 주역은 응용과 분석을 요한다. 더 들어가면 이과이면서도 다시 문과로 되돌아온다.
주역을 이해하려면 하도(河圖)와 낙서(洛書), 그리고 팔괘와 육십사괘의 수많은 조합을 파악해야 한다. 나아가 이를 실전에 적용하기까지에는 대단히 많은 시간과 정력을 투자해야 한다. 설령 투자한다고 해도 쉽게 파악되지도 않는다. 한 고개 넘었는가 싶으면 또 한 고개 나오고, 또 나오고 하는 식이다.
주역 고수들의 고백을 들어보면 한 30년 정도 여기에만 골몰해야 무엇이 좀 보인다고 한다. 타고난 자질이라도 있어야 30년 동안이나 골몰하지, 그렇지 못한 범부는 중도탈락이 대부분이다. 골치 아프니 적당히 하다 중도에 그만두는 것이다. 주역을 했다는 사람은 많아도 이를 실전에 적용하는 사람은 매우 희소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선 중기를 지나 후기로 갈수록 포부가 있고 머리가 있는 선비들은 주역을 파고들었다고 보인다. 공부를 얼마나 했느냐의 최종 테스트는 주역에 대한 이해의 정도에 따라 구분되었다. 실력의 차이는 주역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조선후기로 갈수록 부패한 현실정치에 절망한 재야의 뜻 있는 선비들은 주역으로 시대의 변화를 미리 예측하고, 변화에 미리 대비하고자 하였던 것 같다.
주역은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의 바이블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민족종교에 투신하였던 주요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대부분 주역 전문가들이었다. 평생 주역만 한 사람들이라고 할 만큼 이 분야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지나치리만큼 주역에 많은 투자를 하였다. 정감록과 함께 주역은 19세기 변혁을 꿈꾸는 재야 선비들의 전공필수 과목이었다. 그런가 하면 주역은 당시(唐詩),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함께 한자문화권 식자층의 3대 공부 과목이었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주역은 철학이고, 사기는 역사이며, 당시는 문학이다. 소위 문․사․철(文史哲) 삼박자를 대표한다. 이 삼박자 섭렵 없이는 식자층 노릇을 하기 힘들었다. 아직도 이 3과목은 전통적 교양으로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는데, 어떻게 안 씹을 수 있겠는가. 여기에 맛들이면 골치아프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야산(也山) 이 달(李達․1889~ 1958)은 근세 한국주역사(韓國周易史)에서 특출한 존재다. 주역이란 무엇인가, 주역을 공부하면 어떤 능력을 갖게 되는가에 대한 대답을 주고 간 분이다. 아울러 주역이란 과연 공부할 만한 학문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간 인물이 아닌가 싶다. 그러한 위력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일반인들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해방 이후 서구화, 산업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이 분야는 지하 단칸방에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화려한 고층 빌딩에는 결코 나와본 적이 없다. 비록 지하 단칸방에 파묻혀 있었지만 필자는 야산(也山) 만한 인물은 그리 흔하게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也山, 정밀한 생활주역의 세계
근대 주역의 대가인 김일부와 함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인물이 바로 야산이다. 양자의 경향성을 굳이 구분하여 본다면 김일부가 후천개벽에 초점을 둔 거시적 주역에 능통하였다면, 상대적으로 야산은 일상사에서 주역의 원리를 적용하는 미시적 주역에 능통하였다고 보인다.
경제학에도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이 있듯 주역에도 미시주역(微視周易)과 거시주역(巨視周易)이 성립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하는데, 미시주역의 전범을 보여준 인물이 야산 이달이다. 김일부를 쳐다보면 웅혼한 우주사의 변천이 느껴지고, 이야산을 바라보면 시계바늘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 같은 정밀함이 감지된다.
일부는 망원경 주역이고, 야산은 현미경 주역이다. 물론 음양중(陰中陽)이고 양중음(陽中陰)이듯, 망원경 속에 현미경이 포함되어 있고, 현미경 속에 망원경도 있는 법이다.
야산도 민족의 진로와 같은 거시적 전망에 탁월한 안목을 보여주었지만,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상사에 주역을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일반대중이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인물은 일부보다 야산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야산이라는 인물에 대한 최초의 정보를 입수한 시기는 5년 전쯤이다. 중국의 선종(禪宗) 사찰들을 답사하면서 건국대 이 준 교수와 동행한 적이 있었다. 자연과학을 전공한 이 준 교수와 중국 장시(江西)성의 시골 허름한 여관방에 같이 묵으면서 뜻밖에도 불교의 고승들과 도교의 도사들에 대한 해박한 이야기들을 귀동냥할 수 있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가 야산이 남긴 일화였다. 해방되던 해인 1945년 4월 무렵부터 야산은 대한독립만세를 중얼거리고 다녔다. 영낙없이 미친 사람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중얼거리고 다닌 야산은 일본 경찰에 의해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유치장에서도 횡설수설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흥얼거리니 일본 경찰은 미친 사람의 헛소리로 판정하고 방면하였다. 유치장 문을 나가면서도 야산은 경찰관을 향해 대한독립만세여!하고 중얼거리며 나갔다고 한다.
8월13일 경남 청도의 화계리(花溪里) 오씨(吳氏) 집에 머무르던 야산은 따르던 제자들에게 갑자기 경사스러운 일을 들으러 가자!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나서 서둘러 14일 경북 문경군(聞慶郡) 문경면(聞慶面) 문경리(聞慶里)로 십수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갔다.
영문도 모른 채 따라간 제자들에게 야산은 잔치를 벌이라고 하였다. 문경리의 촌로들을 모아놓고 닭고기와 술을 대접하는 잔치판을 벌인 것이다. 야산은 오늘같이 기쁜 날 내가 닭춤을 한번 추겠다하면서 잔치마당에서 덩실 덩실 춤을 추는 것 아닌가. 속을 모르는 제자들은 우리 선생이 요즘 정신이 약간 이상한 것 같더니 정말 돌았는지 모르겠다.면서 걱정스럽게 야산의 닭 춤을 구경하였다.
8월14일 저녁 가져간 돈으로 문경리의 촌로들에게 술과 닭고기를 대접하면서 흥겹게 논 다음날, 15일이 되었다. 제자들은 그 날 36년간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해방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야 제자들은 광인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스승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야산은 민족의 해방이라는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기 위하여 장소도 비상한 곳을 물색하였던 것이다. 비상시에는 비상한 장소에서 비상한 인물이 비상한 일을 한다고 했던가. 비상한 장소, 그게 바로 문경(聞慶)이었다.
경사스러운 일을 듣는다는 뜻 아닌가. 문경군 문경읍 문경리는 그 경사스러움이 트리플로 겹치는 곳이다. 해방 하루 전인 14일 잔치판을 벌여 놓고 닭고기를 먹으면서 닭 춤을 추었으니 절묘한 무대연출 아닌가. 닭은 바로 새벽이 왔음을 알리는 메신저(messenger) 아니던가. 1980년대 암울한 시절 누가 그랬던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지금 생각해보니 이보다 더한 퍼포먼스가 어디에 있겠는가 싶은 생각이 든다.
- 靑雲의 굴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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