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불교)

[스크랩] 월지

장안봉(微山) 2013. 5. 14. 12:15

 

 

                                                    월지                   月池

 

 

 

 

 

 

안압지(雁鴨池)의 본래 이름은 월지(月池)이었다고 한다. 안압지(雁鴨池)의 이름은 조선시대에 폐허(廢墟)가 된 안압지의 연못에 기러기(雁)와 오리(鴨)가 노니는 것을 보고 조선의 문인(文人)들이 지은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안압지의 본래 이름을 월지(月池)로 추정하는 근거는, 삼국사기(三國史記) '헌덕왕 본기'에서 헌덕왕(憲德王)이 새 세자(世子)를 월지궁(月池宮 ..東宮)에 머물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월지(月池)와 동궁(東宮)에 관련된 직관(職官)으로 태자관, 동궁아. 세택, 승방전, 월지전, 월지악전, 용궁전 등의 호칭(號稱)이 기록되어 있어, 이 가운데 연못과 관계되는 명칭으로 ' 월지(月池) '가 있으며,

 

 

안압지(雁鴨池)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목간(木簡 .. 나무 문서)에 ' 세택(세택)'이 적혀 있고, '용왕신심, 신심용왕 '등 용왕전(龍王殿)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土器) 조각이 발굴됨으로써 안압지(雁鴨池)의 본래 이름이 월지(月池)이었음을 추정하였다.    

 

 

 

 

 

 

 

 

 

 

 

                                                             삼국사기의 기록

 

 

 

 

 

안압지(雁鴨池)는 신라 제 30대 문무왕(文武王)이 삼국(三國)을 통일하고 674년에 왕궁 안에 만들어 놓은 궁원지(宮苑池)이다. 신라의 궁성(宮城)인 월성(月城) 동북쪽에 있으며, 임해전(臨海殿)터는 안압지 서편에 세운 동궁(東宮)의 정전(正殿)이있었던  곳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안압지에 관한 여러 기록이 나오고 있다.

 

 

문무왕 14년(674) 2월에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귀한 새와 기이(奇異)한 짐승을 길렀다. 문무왕 19년(679) 8월에 동궁(東宮)을 짓고 궁궐 안팎 여러 문(門)의 이름을 지었다. 효소왕 6년(697) 9월에 군신(君臣)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었다. 경덕왕 11년(752) 8월에 동궁아(東宮衙)를 설치하고 상대사 한 사람과 차대사 한 사람을 두었다. 

 

혜공왕 5년(769) 3월에 군신(君臣)들을 임해전(臨海殿)에 모아 잔치를 베풀었다. 소성왕 2년(800) 4월에 폭풍으로 임해(臨海), 인화(仁和) 두 문이 파괴되었다. 애장왕 5년(804) 7월에 임해전(臨海殿)을 중수하고 새로 동궁(東宮) 만수방을 지었다. 

 

헌덕왕 14년(822) 1월에 동생 수종을 태자(太子)로 삼고 울지궁(月池宮)에 들였다. 문성왕 9년(847) 9월에 왕이 임해전(臨海殿)에 군신(君臣)을 모았다. 경문왕 7년(867) 1월에 임해전(臨海殿)을 중수(重修)하였다. 헌강왕 7년(881) 3월에 군신(君臣)들을 모아 임해전(臨海殿)에 모아 향연을 베풀고, 주연(酒宴)이 한창일 때 왕(王)이 거문고를 타고, 좌우의 신하들은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놀고 파하였다. 경순왕 5년(931) 2월에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임해전(臨海殿)에 모셔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조선 성종 17년(1486)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으로는, ' 안압지는 천주사(천주사) 북쪽에 있으며, 문무왕(文武王)이 궁(宮) 안에 연못을 만들고, 돌을 쌓아 산(山)을 만들어 무산(巫山)12봉(峰)을 상징하여 화초(花草)를 심고 짐승을 길렀다. 그 서쪽에는 임해전(臨海殿)이 있었으나, 지금은 주춧돌과 섬돌만 남아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월지의 마지막 기록

 

 

 

 

통일신라 말의 어지러웠던 상황과 맞물려 정강왕(定康王)이후에는 50여년 동안 월지(月池)에 관련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純王) 때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이곳 월지(月池)에 초대하여 연회(宴會)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마지막 기록이다. 기울어가는 천년(千年) 왕국 신라왕조의 마지막 모습을 잘 그려놓고 있어 애잔한 마음이 일어난다.  

 

 

 

 

 

 

 

 

 

5년 봄, 태조(太祖)가 기병(騎兵)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울 근방에 와서 왕을 만나기를 요청하였다. 왕은 백관(百官)들과 함께 교외에서 영접하여 대궐로 들어 와서 마주대하며, 진정한 예우를 극진히 하였다. 임해전(臨海殿)에서 연회를 베풀어 술이 취하자 왕이 말했다.' 내가 하늘의 도움을 얻지 못하여 점점 환란(患亂)이 닥쳐오고 있다. 견훤(甄萱)이 불의의 행동을 자행하여 나의 나라를 망치고 있으니, 어떠한 통분이 이와 같을 것인가 ?  왕이 말을 마치고 눈물을 흘리자, 좌우에서 목이 메어 흐느끼지 않는 자가 없었고, 태조(太祖)도 또한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하였다. 이로부터 태조(太祖)가 수십 일 체류하다가 돌아가려 하므로 왕이 혈성(穴城)까지 나가서 송별하고, 종제(宗弟) 유렴(裕廉)을 볼로로 삼아 태조를 따라가게 하였다. 태조의 군사들의 규율이 엄정하여 조금도 규율을 위반하는 일이 없었으니, 서울에 사는 남녀가 서로 기뻐하면서 ' 이전에 견훤(甄萱)이 왔을 때는 마치 범이나 이리 떼를 만난것 같았는데, 오늘 왕공(王公)이 왔을 때는 부모를 만난 것 같았다 '라고 말하였다.  

 

 

 

 

                                           복원도                    復元圖

 

 

 

 

 

 

 

 

 

 

 

삼국통일(三國統一) 전쟁을 수행하던 문무왕(文武王)은 백제와 고구려(高句麗)의 궁성을 직접 보고 통일왕조의 위신을 과시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단행하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장인(匠人)들을 비롯한 인력들을 활용하였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월지(月池)에는 백제(百濟)의 조경사상(造景思想)이나 토목기술이 복합적으로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안압지 조성의 마스타플랜은 백제식(百濟式)으로 짜여졌고, 세부적 계획은 고구려식(高句麗式)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먼저 백제적인 요소를 살펴보면 조경사상(造景思想)이다. 연못을 파서 신선사상(神仙思想)을 나타내기 위한 계획이다. 백제의 정림사(定林寺), 미륵사지에도 연못이 있다. 즉, 월지(月池)의 전체 계획은 백제식이다. 백제는 진사왕 7년(391), 무왕 55년(634), 의자왕 15년(655)에 중국의 영향 아래 연못을 조성하였다, 

 

 

다음 고구려적인 요소는 호안석축(護岸石築)의 기운 정도가 거의 수직(垂直)인 점, 호안석축의 축조방법으로 산(山)의 돌과 가공석(加工石)을 동시에 사용한 점, 돌의 규모가 크다는 점, 연못 바닥에 돌을 고르게 깔았던 점, 물의 정화(淨化)를 위하여 입수부(入水部)의 형태가 매우 복잡한 점, 호안석축(護岸石築) 전방에 일정한 간격으로 괴임돌을 놓은 점 등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 속에는 중국, 고구려, 백제 등의 문화를 흡수하여 신라 특유의 독특한 문화를 재창조(再創造)한 것이 바로 월지(月池)와 임해전(臨海殿)이다.   

 

 

 

 

 

 

 

 

 

 

 

 

 

 

 

 

이곳 월지(月池)는 신라 천년의 궁궐인 반월성(半月城)에서 동북쪽으로 걸어서 십분 거리에 있다. 삼국통일 후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많은 부(富)를 축적한 왕권은 극히 호화롭고 사치(奢侈)한 생활를 누리면서 크고 화려한 궁전을 갖추는 데 각별한 관심을 두었다.

 

 

그리하여 삼국통일 직후 674년에 이곳 월지(月池)를 만들었으며, 679년에는 화려한궁궐을 중수(重修)하고 여러 개의 대문(大門)이 있는 규모가 매우 큰 동궁(東宮)을 새로 건립하였다. 안압지와 주변의 건축지들은 당시 궁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새 동궁(東宮), 곧 임해전(臨海殿)의 확실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다만 건물터의 초석(礎石)만 발굴되었다.       

 

 

 

 

                                           명칭 ... 월지 또는 안압지 ?

 

 

 

 

 

동궁(東宮)이자 왕과 귀족들의 연회장소이기도 했던 임해전(臨海殿)과 월지(月池)는 신라시대 왕궁터이었던 월성(月城) 동북편에 위치하고 있다. 임해전의 확실한 모습은 오늘날 확인할 길이 없지만 1975년과 1976년 사이에 발굴된 건물지(建物址)로 그 형태를 추정할 뿐이다. 이때 출토된 다종 다량의 유물들은 통일신라 궁중생활과 문화상의 일부를 알 수 있게 하였다.

 

 

월지(月池)의 명칭은 '동경잡기(東京雜企)'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김시습(金時習)의 시(詩)에는 안하지(安夏池)로 표현되어 있다.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은 조선시대에 와서 등장한다. 왕궁터가 폐허가 된 채 오리 떼와 기러기 떼가 떠있는 연못이라는 의미이다. 임해전(臨海殿)의 연못이 조성된지 700여년이 지난 뒤에야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태자궁인 동궁관(東宮官)에 속해 있던 '월지악전(月池嶽典)'은 조경(造景)을 관장하던 곳이며 여기서 말하는 월지(月池)가 바로 안압지이다. 또 월지를 발굴할 때 '세택(洗宅)'이라 적힌 목간(木間)의 묵서(墨書)가 나왔고, 용왕신심(龍王辛審)이라고 음각(陰刻)된 토기편(土器片)이 출토되었는데, 이들은 동궁관(東宮官)에 들어있는 세택, 월지전, 승방전, 월지악전, 용왕전 등의 관청명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안압지의 원 이름은 '월지(月池)'이며, 월지는 동궁 안에 있는 연못으로 동궁(東궁)은 월지궁(月池宮)으로도 불렀다. 학계에서도 대체로 동의하는 바이므로 중국풍(中國風)의 이름으로 적절치 않은 안압지(雁鴨池)라는 명칭 대신에 '월지(月池)'로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안하지구지                         安夏池舊址

 

 

 

                 착지위해장어라     鑿池爲海長魚螺      연못을 파서 바다 삼으니 고기와 우렁이 살고

                 인수룡후세급아     引水龍喉勢扱峨      물을 끌어들이는 용(龍)의 목은 기세가 높고 높네

                 차시신라망국사     此是新羅亡國事      이러한 모습이 신라가 망하게 된 일이고

                 이금춘수장가화     而今春水長嘉禾      지금 봄날의 연못 물은 좋은 벼를 기르는구나

 

 

 

 

위 시(詩)는 조선시대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이 이곳 안압지(雁鴨池)를 들려 시를 읊었다. 여기까지이 기록에서도 안압지(雁鴨池)라는 말이 나오지 않고 있다. 즉, 원래의 이름은 월지(月池)이었는데,  매월당 김시습 이후 즉, 조선 초기 이후에 월지(月池) 대신 안압지(雁鴨池)라는이름을 붙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는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을 기록하고 ' 문무왕(文武王)이 궁궐 안에 못을 파고 돌을 쌓아 산(山)을 만들었으니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을 본떴으며 ... '라고 기록하여 그  안압지의 조성이 신선사상(神仙思想)과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1975년 3월부터 1986년 12월까지 연못과 주변 건물터의 발굴조사가 있었는데, 이 때 석축호안(石築護岸)으로 둘러싸인 연못과 3개의 섬 그리고 연못 서쪽의 호안변(護岸邊)에서 5개의 건뭁와 서쪽과 남쪽으로 연결되는 건물터 등이 밝혀졌다. 

 

 

석축호안의 남안(南岸)은 거의 직선(直線)을 이루고 서안(西岸)은 가공(架工)된 장대석축(長大石築)의 기단형 방형지(方形址)가 그 일부를 연못 쪽으로 돌출시켜 5개의 건물터를 이루었으며, 동,북안(東,北岸)은 굴곡이 심한 곡선(曲線)을 이루고 있었다. 

 

 

동남쪽 모서리에서는 수로(水路)와 입수구(入水口)의 시설이, 북쪽 호안에서는 출수구(出水口)의 시설이 확인 되었다. 호안석축(護岸石築)의 길이는 1,005m로 전체 면적은 15,658㎡, 제일 큰 섬은 1,094㎡, 중간 크기의 섬은 596㎡, 제일 작은 섬은 62㎡이다.   

 

 

 

 

 

 

 

 

 

 

 

 

이곳 월지(月池)는 바라보는기능으로 만들어진 궁원(宮苑)이다. 지척에 있는 무산(巫山) 12봉(峰)이 아득하게 보이도록  협곡(峽谷)을 만들고, 삼신도(三神島)와 무산 12봉(巫山 12峰) 등 선경(仙景)을 축소하여 피안의 세계처럼 조성하였다. 지금도 외곽에 높은 담을 설치하여 경역을 아늑하게 만들고 갖가지 화초들과 새와 짐승들을 기르면 별천지 같은 깊은 원지(苑池)의 생생함이 살아날 터이다.   

 

 

 

 

 

 

 

 

 

 

연못의 생김새부터 현대인들이 놀랄 만한 구상이다. 호안 석축(石築) 길이가 1,285m이며 넓이가 4,738평에 이르고 연목 안에는 세 개의 섬을 조성하였다. 석축(石築)은 동곡서직(東曲西直)으로 서쪽의 전각에서 동쪽의 요철해아(凹凸海岸)이 아스름하게 보이도록 조화롭게 표현하였다. 

 

 

이곳 월지(月池)의 주건물인 동궁(東宮) 안에는 돌을 쌓고 산을 만들어 무산12봉(巫山12峰)을 본떴으며, 또 연못을 만들어 못 가운데에 세 개의 섬을 만들어 꽃나무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는기록이 있다. 무산(巫山)은 중국 사천성(四川省)의 동쪽에 있는 명산으로 산 위에 십이봉(十二峰)이 있다. 그리고 세 개의 서을 조성한 이유는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州) 등 옛 전설 속이 해중선산(海中仙山)을 상징하고 있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동궁(東宮) 안의 연못은 단순한 연못이 아닌 바다로 상징되었다고 보여지고 있으며, 따라서 임해전(臨海殿)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 같다.

 

 

연가의 호안(護岸)은 다듬은 돌로 쌓았는데, 동쪽과 북쪽은 절묘한 굴곡(屈曲)으로 만들고, 서쪽과 남쪽에는 건물을 배치하고 직선(直線)으로 만들었다. 서쪽 호안은 몇 번 직각(直角)으로 꺾기도 하고 연못 속으로 돌출시키기도 하였다. 따라서 연못가 어느 곳에서 바라보더라도 연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연못이 한없이 길게 이어진 듯 여겨지고 있다.

 

 

 

 

 

 

 

 

 

 

동,북,남쪽 호안의 높이는 2.1m 정도이고 궁정이 있었던 서쪽 호안은 5.4m로 좀더 높다.  이는 연못가의 누각(樓閣)에 앉아 원(苑)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배려한 높이이다. 연못 바닥에는 강회와 바다의 조약돌을 옮겨다 깔았는데, 연못 가운데 우물 모양의 목조물(木造物)을 만들어 그 속에 심은 연꽃 뿌리가 연못 전체로 퍼져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입수부와 배수부                            入水部와 排水部

 

 

 

 

 

 

 

 

 

 

물의 흐름 처리도 기묘하다. 지상의 노출 석구(石溝)를 통하여 흐른 물은 용(龍)이 새겨진 석조(石槽)를 통과하여 연못으로 흘러들면 폭포처럼  2단으로 떨어져 바로 앞 섬에서 양쪽으로 갈라진 뒤 출수구(出水口)로  흐른다. 물은 소리(聲)가 나야 하고, 흘러야 하고(流), 빛(光)이 나야 한다는 정원수의 기본 기능을 최대한 표출한 것이다. 출수구(出水口) 쪽에도 수위(水位) 조절석을 두어 물높이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  

 

 

 

 

 

 

 

입수부(入水部)는 물을 끌어 들이는 장치를 한 곳으로 연못의 동남쪽 귀퉁이에 있으며, 정원 연못에 연결되어 있다. 동남쪽의 계류(溪流)나 북천에서 끌어온 물을 거북이를 음각(陰刻)한 것 같은 아래 위 두 개의 수조(水槽)에 고이게 하였다가, 자연석 계단으로 흘러 폭포로 떨어져 연못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아래 위 수조(水槽)는 약 20cm의 간격을 두고 있으며, 그 주변에는 넘친물이 지표(地表)로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넓적한 저수조(貯水槽)를 만들었다.

 

 

위 수조(水槽)에는 용(龍)머리 토수구(吐水口)를 설치하여 용(龍)의 입으로 물을 토해서 아래 수조(水槽)로 떨어지게 만들었다. 이 용머리는 없어지고 지금은 용머리를 끼웠던 자리만 남아 있다. 아래 수조(水槽)에서 연못으로 떨어지는 폭포의 높이는 약 1.2m 정도이다.

 

 

또한물이 입수부(入水部)의 완충수조(緩衝水槽)를 지나 연못으로 수직 낙하(落下)하는 지점에는 판판한 돌을 깔았는데, 이는 연못 바닥의 침식을 막기 위한것이다. 이처럼 물을 끌어들이는 데도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입수부를 토해 들어온 물은 연못 안이 곳곳을 돌아 동북쪽으로 나 있는 출수구(出水口)로 흘러나가는데, 출수구에서는 나무로 된 마개로 수위(水位)를 저절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74년 11월 경주시 안압지(雁鴨池)의 바닥 준설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안압지(雁鴨池)는 통일신라시대인 7세기 후반 문무왕(文武王) 때에 만들어진 연못, 그런데 물이 맑지 않고, 날이 갈수록 주변의 논밭ㅇ서 흘러 들어가는 흙이 바닥에 쌓이고 있어 바닥을 긁어내는 준설(浚渫)작업이 필요했다. 

 

 

이 준설(浚渫)작업은  1971년 당시 박정희대통령의 지시로 청와대에서 직접 주관한 경주 고도(古都) 관광개발 10개년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실로 1,300여년 만에 연못 바닥을 청소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작업을 시작하자 바로 작업인부의 삽날에 통일신라시대 유물(遺物)들이 쏟아져 나와 작업은 즉시 중단되었다. 급히 조사계획이 마련되고 이듬해 3월부터 고고학적(考古學的)인 발굴조사를 서두르게 디었던 것이다.  

 

 

안압지 출토유물 중에는 와전류(瓦塼類)가 가장 많이 나와서 파편(破片)을 포함하여 24,000여 점이나 된다고 하며, 이 가운데 50여 점을 제외하고는 삼국통일(三國統一) 직후부터 통일신라가 망할 때까지 260여년 사이에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풍로와 시루                      風爐와 시루

 

 

 

 

 

 

 

 

 

 

위 사진의 '시루'는 입지름 39.4cm 높이 32.8cm의 크기로 양쪽에 손잡이가 달려 있다. 입 부분이 넓어진 이 시루는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음식이나 곡식 등을 찌던 그릇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시루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시대 초기 철기시대로 알려져 있고, 오늘날도 사용하고 있는데, 구조나 모양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위 사진의 토제(土製) 풍로(風爐)는 화구(火口)와 연통(煙筒)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윗쪽에는 다른 그릇을 걸어 끓일 수 있도록 크고 작은 두 개의 둥근구멍이 뚫려 있다. 화구(火口)에는 바깥 주연(周緣)에 점토대(粘土帶)의 띠를 덧붙여 화력(火力)의 낭비를 막았으며, 풍로 안쪽과 천정부에는 불에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다.   

 

 

 

 

                                        명문 기와                     銘文 기와

 

 

 

 

 

출토 유물(遺物) 가운데 ' 의봉4년개토 (儀鳳四年皆土) ... 679년 '이라 적힌 기와와 ' 조로2년 (調露二年) .. 680년) '이라 적힌 벽돌이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공사가 679년에 시작되어 680년에 완료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경우 674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680년에 이르러 관련공사가 모두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출토유물과 문헌기록을 고려할 때 공사기간이 7년 정도 소요된 대규모이 토목공사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완공된 이후 임해전(臨海殿)은 왕궁의 면모를 갖춘 채 통일신라 말까지 유지되었다.

 

 

 

 

 

 

 

 

 

 

 

 

 

                                                               금동용두                 金銅龍頭

 

 

 

 

 

 

 

 

 

 

 

 

 

 

 

 

                                                  금동봉황징식                    金銅鳳凰裝飾

 

 

 

 

주물(鑄物)로 제작된 봉황(鳳凰)의 몸체에 날개를 따로 붙인 장식구(裝飾具)이다. 봉황의 발 밑에 둥근 받침대가 붙어 있어 어떤 물체 위에 부착되도록 되어 있다. 봉황 머리의 뿔은 뒤로 젖혀져 있고, 입에는 둥근고리를 물고 있는데, 이 고리 아래에는 장식이 달렸던 것 같다. 가슴은 볼록하며 비늘 같은 것이 음각(陰刻)으로 새겨져 있고 날개는 바람이 불면 몸체의 뒷면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   

 

 

 

 

 

 

 

 

 

 

 

 

 

                                                                                귀면 문고리

 

 

 

 

 

 

 

 

 

 

                                           목제 주령구                       木製  酒令具

 

 

 

 

 

 

 

 

 

 

 

1975년 9월 안압지(雁鴨池)에서 기묘한 주사위 하나가 발굴되었다. 사각형면 6개, 육각형면 8개로 이루어진 14면체의 주사위이었다. 14면체라는 모양도 독특한 데다 각 면(面)에는 ' 삼잔일거 (三盞一去) ' 또는 ' 금성작무 (禁聲作舞) '등과 같은 흥미로운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각각 ' 술 석잔 한번에 마시기 ' 그리고 ' 술 마신 뒤 소리 내지 않고 춤추기 '라는 뜻이다.

 

 

이 주사위는 목간(木簡)이 나온 층위(層位)보다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이로 미루어 8세기 초의 통일신라 유물(遺物)임을 알 수 있다. 전문가들은 각 면에 새겨진 문구(文句)로 보아 이 주사위가 통일신라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사용했던 놀이기구라고 보고 있다. 이 주사위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품(眞品)이 아니다. 진품(眞品)은 1979년 전기오븐에서 건조하다 과열(過熱)로 불에 타버렸다. 그래서 사진과 실측도면을 토대로 복제품을 만들었다.  14면 주사위에 새겨진 문구는 다음과 같다.

 

 

 

 

                                  음진대소    飮盡大笑       술 한잔 다 마시고 큰소리로 웃기

                                  삼잔일거    三盞一去       한번에 술 석잔 마시기, 또는 술 석잔 마시고 한걸음 걷기

                                  자창자음    自唱自飮       혼자 노래 부르고 술 마시기

                                  금성작무    禁聲作舞       술 마신 뒤 소리 내지 않고 춤추기

                                  중인타비    衆人打鼻       여러 사람이 코 때리기

                                  유범공과    有犯空過       여러 사람이 덤벼들어 장난쳐도 가만히 있기

                                  추물막방    醜物莫放       더러워도 버리지 않기

                                  양잔즉방    兩盞卽放       술 두 잔이면 쏟아 버리기

                                  곡비즉진    曲譬卽盡       팔을 구부린 채 술 다 마시기

                                  임의청가    任意請歌       마음대로 사람을 지목해 노래 청하기

                                  농면공과    弄面孔過       얼굴을 간지려도 가만히 있기

                                  월경일곡    月鏡一曲       월경이라는 노래 부르기

                                  공영시과    空詠詩過       시 한 수 읊기

 

 

 

 

 

 

 

 

 

 

                                               명활산성작성비                    明活山城作城碑

 

 

 

 

 

 

 

 

 

 

 

 

이 비(碑)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976년 월지를 발굴조사할 때  석축(石築)에서 발견되었다. 이 비(碑)는 월지가 조성되면서 그 석축 안의 호안석(護岸石)으로 이용되었다. 일찍부터 물 속에 잠기고 또 월지가 매몰(埋沒)되었으므로 풍화작용(風化作用)을 거의 받지 않았기 때문에 글자는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월지 축조시 원비(元碑)는 몇 동강이 난 듯하며 현재 그 중 일부분만 발견된 것이다. 동강난 비의 다른 부분도 역시 석축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발굴 당시 조사되지 못하였으므로 그 향방은 알 수없다. 화강암으로 된 비편(碑偏)의 크기는 대략 기리가 30cm, 폭이 20cm 정도이며 현재 남아 잇는 비는 원비(元碑)의 하단 혹은 좌하단으로 추정되며, 4행(行) 26자(字)로써 해서체(楷書體)로 쓰여졌다.

 

 

글자의 판독(判讀)은 그리 어렵지 않으나 일부만 남아 있어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지는 못한다. 축성(築城)에 관한 기록으로 보아 명활산성작성비(明活山城作城碑)로 추정하고 있으며 시기는 대략 신라 6세기 중엽으로 추정하고 있다.   

 

 

 

 

 

 

                                                   명활산성                  명활산성

 

 

 

 

 

 

 

 

 

                                            금동판 불상 일괄                        金銅板 佛像 一括

 

 

 

 

 

안압지 발굴을 통하여 통일신라 직후에서부터 신라 말기에 이르는 각 시기의 불상(불상)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는데, 크게 금동판불(金銅板佛)과  원불상(圓佛像)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밖에도 완전한 불상으로서 형상은 갖추지 않았으나 다수의 광배(光背) 편(片..조각)과 불상의 광배 장식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화불(化佛) 및 보주(寶珠), 천개(天蓋) 등이 아울러 출토되었다.

 

 

특히 길이가 15cm나 되는 금동제(金銅製) 불이(佛耳 .. 불상의 귀)는 당시 안압지 불상 가운데 제일 큰 등신불(等身佛)이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자아낸다. 아울러 이 불상이 궁궐 내의 에배 중심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발견된 금동판불(金銅板佛) 들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보물 제1475호 일괄 지정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판불(板佛)이라면 금동(金銅)의 작은 판면(板面)에 불보살 등의 형상을 표현한것을 일컫는다. 대개 단독상(單獨像) 혹은 그보다는 복잡하게 삼존(三尊), 오존(五尊) 등이 혼합되어 나타나고 여러가지 장식성이 가미되는 경우도 있다.

 

 

안압지(雁鴨池) 금동판불 10점은 형식상 삼존상(三尊像) 2점과 보살 단독상(單獨像) 8점으로 대별할 수 있다. 전체적인형태는 보주형(寶珠形)의 거신광배(巨身光背)가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불신(佛身)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모든 모서리가 동일한 평면의 판형(板形)을 이루고 있다. 불상(佛像)은 0.3cm 정도의 얇은 두께로 조각되어 있으나 사실적인 입체감(立體感)이 살아 있다.

 

 

다만 세부적인 불상의 자세나 문양 배치, 조각 수법, 주조(鑄造) 처리 등이 부분적으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한 불상의 앉은자세에 따라, 왼발을 먼저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놓은다음 오른발로 왼다리를 누르고 앉는 길상좌(吉祥坐)는삼존상(三尊像) 1점과 보살상 6점이 있고, 그 반대 방법의 항마좌(降魔坐)는 삼존상 1점가 보살상 2점이 있다. 

 

 

삼존상(三尊像) 가운데 길상좌(吉祥坐)의 불상은 머리카락이 소발(素髮)이며 높은 육계를 가졌다. 목에는 삼도(三道)의 표현이 뚜렷하다. 얼굴은 비교적 통통한 편으로 눈은 가늘고 감은 듯하며, 눈썹은 반원(半圓)을 이루는데, 그 위에 음각선(陰刻線)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양 미간(眉間)을 따라 코가 시작되고 얼굴에 비하여 작은 입은 예리하게 각선(刻線)으로 처리되어 있다. 입술 끝이 약간 들어간 것이 미소를 느끼게 한다.

 

 

옷은 통견(通肩)이다. 목 깃에 반전(反轉)이 있는 굽타식의 U자형 옷주름이 배 부분에서 한결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배의 양감(量感)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대체로 옷자락 무늬가 세련되었을 뿐 아니라 당당한 몸의 굴곡(굴곡)을 강조하면서 긴장감을 느낄 수 있는 사실적인 조각기법을 대표하고 있다. 수인(手印)은 전법륜인(轉法輪印)을 결하고 있다. 전법륜인(轉法輪印)은 부처가 설법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수인(手印)이다.       

 

 

 

 

                                                           금동광배                    金銅光培

 

 

 

 

 

 

 

 

 

 

 

 

                                       금동불입상                 金銅佛立像

 

 

 

 

 

 

 

 

 

 

 

 

 

                                                  남근목                      男根木

 

 

 

 

 

 

 

 

 

 

안압지 출토유물 가운데 발굴조사 시 조사단을 놀라게 한 목제(木製)의 양물(陽物) 즉, 남근(男根) 모조품이 있었다. 특히 이 남근은 여성조사원에 의해서 발견이 되었다. 발굴조사가 끝난지 40년이 가까워 오지만 아직까지도 이 남근(男根)의 정확한 용도가 밝혀지지 않아 여러 설(說)만 무성하다.길이 17.5cm의 이 발기(勃起)된 형태의 남근(男根)은 그 크기에서 분만 아니라 너무나 사실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더욱 놀라웠다.  

 

 

믿기 어렵지만, 기록으로 보면 신라의 역대 임금 가운데 음경(陰莖)이  가장 길었던 왕은 지증왕(智證王)인데, 한자 다섯치이었다고 하니, 40cm가 넘어 단연 챔피언이었고, 다음으로 경덕왕(景德王)인데 여덟치이었다고 하니 20cm가 넘어 지증왕(智證王) 다음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데 안압지(雁鴨池)에서 출토된 이 남근(男根)은 17cm가 넘었으니, 이 남근을 다듬을 때 자신 스스로의 것을 모델로 한 것인지는 몰라도 신라시대 양물(陽物)로는 순위 3위인 셈이지만, 실물 모습으로 남은 것은 단연 참피온이다.  아무튼 이 양물(陽物)이 처음 출토되고 이어서 똑같지는 않지만 유사한 형태의 양물(陽物)이 2점 더 출토되었다.  

 

 

아직도 이 남근(男根)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누구 손에 만들어졌고, 누구의 것이 모델이었는지 또한 용도가 무엇이었는지 명쾌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다만 그 용도에 대해서만 몇몇 의견이 무성할 뿐이다. 신앙(信仰)으로서의 성기숭배(性器崇拜) 사상의 산물이라는 견해, 실제 사용된 것으로 보는 견해, 그리고 '놀이기구용'이라고 보는 견해 등이 바로 그 것이다.     

 

 

 

 

                                                   남근 숭배                  男根 崇拜

 

 

 

남근신앙(男根信央)의 기운은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로 볼 수 있다. 이 때는 다신신앙시대(多神信仰時代)로 남근신앙은 많은 신격(神格) 중의 하나인 성신신앙(性神信仰)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울산(蔚山) 반구대(盤龜臺) 바위에 새긴 암각화(巖刻畵) 가운데 커다란 남근(男根)을 노출시키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새겨진 위치가 가장 높은 위치이고, 무언가 주문(呪文)을 하는 모습에 고래, 거북 등의 동물들이 줄줄이 모여드는 형상이다.

 

 

이것을 보면 당시 수렵어로인(狩獵漁撈人)들의 의식(意識)을 엿볼 수 있게 하는데, 남근(男根)을 노출시키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난 생식본능(生殖本능)에 따른 자손번영과 인간의 양물(陽物)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한편 기록에 보이는 남근숭배(男根崇拜) 신앙의 예는 고구려(高句麗)에 보인다. 즉 10월이 되면 나무로 다듬은 남근(男根)을 두고 제사를 지내는데 이 때 이 남근(男根)을 신좌(神坐) 위에 놓는다고 한다. 남근신앙의 형태는 현대에도 이어져 오고 있다. 삼척 해신당(海神堂)에는 마을 제사를 지내면서 만드는 사람이 자신의 실물(實物)크기로 남근을 깎아 모신느데, 이것은 억울하게 죽은 처녀(처녀)의 영혼인 해신(海神)을 위로하고 풍어(豊魚)와 다산(多産)을 염원하는 행사이다. 

 

 

 

                                                               신라의 성문화   

 

 

 

그렇다면 안압지에서 출토된 남근(男根) 역시 신앙(信仰)으로 볼 것인지가 문제이다. 안압지는 통일신라시대에 있어서 왕자(王子)가 거처하는 동궁(東宮)이 있었던 곳이고, 한편으로는 임해전(臨海殿)이 마련되어 임금이 정사(政事)를 논하고 신하들에게 향연을 베풀던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이곳에서 출토된 남근(男根)은 일단 신분이 높은 여성이거나 그들에게 속해 있던 여성들 가운데 누군가 사용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용도는 무엇인지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신라인들의 성생활문화는 대체적으로 개방되었던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고(古)신라시대인 4~5세기대의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흙으로 적당히 빚어 만든 토우(土偶) 가운데 남녀의 성기(性器)가 과장되게 표현되거나 다양한 형태의 성행위를 하고 있는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 대체로 2~3cm 정도이고 커보았자 10cm 미만인데, 토기항아리나 고배 뚜껑에 장식처럼 붙어있다.

 

 

이러한 토우(土偶)가 장식된 유물이 함께 묻힌 무덤의 주이농 역시 보통사람들의 무덤이 결코 아닌 것이다. 즉 지위가 높은 사람이거나 신분이 있는 사람의 무덤임이 분명한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고(古)신라시대 상류층의 성문화(性文化)에 대한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고(古)신라에서는 왕족의 근친혼(近親婚)도 행해졌고, 부인이 외간남자와 잠자리하다 발각되어도 관대하였던 것이 처용설화(處容說話)에서 보이는 데, 이 모든것이 어떻게 보면 성개방(性開放) 풍조의 결과라고 여겨지고 있다.     

 

 

 

 

 

 

 

 

 

 

                                               내실 자위용                      內室 自慰用

 

 

 

 

그렇다면 안압지에서 출토된 남근(男根)의 용도는과연 부엇일까 ? 물로 가설(假說)이고 추정(推定)일 뿐이지만 ... 앞서 말한 성행의 토우(土偶)가 6세기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학계는 주장한다. 즉, 신라는 당시 삼국(三國) 가운데 고급 종교인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고구려나 백제보다 무려 2세기 늦은 6세기에 들어와 법흥왕(法興王)이 국가의 종교로 공인하는 데 이후 아직까지 신라토기나 출토된 유물에 앞서 말한 성기(性器)나 성행위(性行爲)의 토우(土偶)가 장식된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한다.

 

 

신라는 불교가 공인되기 전까지 토속적인 다신신앙(多神信仰)이 성행하였겠지만, 일단 불교를 받아들이고 나서는 불교 사상적인 측면에서 금욕(禁慾) 등 사회규범이 생활문화를 지배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성문화(性文化)가 형성되어 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통일신라시대에 마련된 안압지에서 출토된 남근(男根)은 분명 실용적(實用的)인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6세기를 풍미했던 ' 미실의 애정행각 '에서 볼 수 있듯이, 고(古) 신라시대에만 해도 비교적 개방되었던 성문화(性文化)가 폐쇄적으로 변하자 엄밀히가 행해지거나 아니면 자위행위(自慰行爲)로 만족을찾아야 했던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가지 이유를 더하면, 소나무를 가지고 다듬어 만든 남근(男根)에서 볼 수 있다. 즉 음경(陰莖) 부분에 옹이를 이용해서 3개의 돌기(突起)가 마련된 것이다. 단순한 성기숭배신앙(性器崇拜信仰)에서 보나면 돌기(돌기)까지 마련할 필요가 없을 것이지만, 자위(自慰)로 최대한 만족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왕녀(王女) 누군가가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어느 궁녀(宮女)가 사용한것인지 확인할 길은 없어 이 문제는 영원한 미스테리로 남을 것이다.        

 

 

 

 

 

 

                                            최고의 목선                       最古의 木船

 

 

 

 

 

 

 

 

 

이 목선(木船)은 1975년 4월 16일 뻘 속에 뒤집힌 상태로 발견되었다. 천년을 넘게 뻘 속에 묻혀있었기 때문에 꼭 스펀지처럼 물렁하였다. 이 때문에 나무배를 경주박물관으로 옮기는 일이 매우 난감하였다. 재질이 연약해져 장비를 사용할 수 없었고, 오로지 사람들이 달려들어 연못 밖으로 들어내는 방법밖에 달리 없었다.  100여 일 동안 습기를 채우고 준비작업을 한 후 옮겨 즉시 보존처리를 시작해 9년여의 시간이 걸려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이 목선(木船)은 우리나라 목선(木船) 중 가장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삼국시대 선박(船舶) 중 유일한 것이다. 오랫동안 쌓인 뻘 속에 묻혔다가 발굴된 이 목선(木船)은 배의 크기는 전체 길이 5.9m, 선미(船尾) 너비 1.5m,  선수(船首) 너비 0.6m,  높이 0.35m  저판두께 13.5~18.5m의 크기이다. 

 

 

이 배는 좌현재, 우현재, 중앙저판의 3쪽으로 구성되고 있으며, 좌현재는 'L'형, 우현재는 역(逆) 'L'형으로 나무를 깎아 만든 것으로서 통나무배를 2개로 쪼개고 그 중간에 저판재를 하나 더 넣은 것이라고 한다. 배의 재질은 3쪽 모두 소나무(赤松)이고 함께 출토된 노(櫓)도 동일한 것이다. 또 토막의 통나무 속을 파내고 바닥에 고리를 파서 장쇠로 연결하였으며, 두께가 두껍고 부력(浮力)이 좋아 호수가에서 사용된 뱃놀이용 배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35 기와류

 

 

 

 

 

 

 

 

 

 

 

 

 

 

                                            수막새                  圓瓦當

 

 

 

 

수막새는 원와당(圓瓦當)이라고도 하며, 목조건축 지부의 기왓골 끝에 사용되었던 기와이다. 수막새는 기왓골 끝에 사용되었던 것이므로 보통의 기와, 즉 암키와와 수키와에 비해서는 그 수량이 현저히 적다. 수막새의 사용은 중국의 전국시대에 만들어진 반원(半圓) 수막새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고구려지역에서도 이러한 반원수막새가 출토된 적이 있다.   

 

 

 

 

 

 

 

 

 

 

 

 

 

와당(瓦當)의 무늬는 주로 연화문(蓮華文)이다. 삼국시대의 단순하고 소박한 단판(單瓣)연화문 양식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세판(細瓣), 복판(複瓣), 중판(重瓣) 등 여러 양식이 있다. 이 가운데 중판(중판) 양식은 연꽃잎의 장식성(裝飾性)을 극대화시킨 통일신라시대에  가장 성행하였던 독자적인 와당형(瓦當形)이라고 할 수 있는데, 월지(月池) 출토 수막새의 대부분이 이 양식에 속하고 있다. 수막새에는 연꽃무늬 이외에도 여러가지 특수무늬가 사용되었는데, 여기에는 보상화무늬, 보상화당초무늬, 봉황무늬, 사자무늬, 기린무늬, 가릉빈가 무늬등이 있다. 아래의 사진들이 월지에서 출토된 특수무늬 수막새들이다.

 

 

 

 

 

 

 

 

 

 

 

 

 

 

 

 

 

 

 

 

                                          암막새                     平瓦當

 

 

 

 

 

 

암막새는 암키와의 끝에 방방형(長方形)의 드림새(垂板)가 부착되어 있는 무늬가 새겨진 기와이다. 때로는 당초와(唐草瓦) 또는 여막사(女莫斯) 등으로 불린다. 목조기와집의 추녀 끝인 기왓고의 맨 끝에 얹어져 흘러내리는 눈과 빗물의 낙수(落水)를 돕고 있다.

 

 

 

 

 

 

 

 

 

 

암막새는 여러 가지 무늬를 깊게 새긴 흙으로 구워 난든 제작틀(瓦範)에서 찍어 내어,암키와의 앞 끝과 그 뒷면을 서로 접합하여 경사(傾斜)가 많은 가마에 넣어 1,000도 내외의 높은 온도로 구워서 만든 것으로 시대와 지역에 따라 유형에 많은 변화가 있었고 무늬도 매우 다양하다. 무늬를 새기게 되는 드림새 자체가 너비가 좁은 장방형의 공간성 때문에 덩굴풀을 의장화한 당초문(唐草文)이 초기부터 주류를 이루어 장식되고 있다. 이밖에도 벽사와 길상(吉祥)을 위한 봉황, 난새, 기린, 용 따위 금수무늬(禽獸文)가 폭 넓게 채용되면서 훨씬 다양하게 변천되어  왔다.  

 

 

 

 

 

                                   보상화문전                    寶相華文塼

 

 

 

 

 

전(塼)이란 궁궐 안의 인도(人道)나 건무의 바닥에 깔았거나, 장식용으로 부착했던 것들을 말한다. 전(전)의 형태에는 장방형, 삼각형, 방형의 세 가지가 있으며, 무늬가 새겨진 것과 없는 것의 두 종류로 구별된다. 주된 무늬는 쌍록보상화문(雙鹿寶相華文)이며, 이밖에 연화문과 초화문(草花文)이 있다. 

 

 

 

 

 

 

 

 

 

 

이 방형전(方形塼)은 이곳 안압지(雁鴨池)에서 출토된 것으로 ' 조로2년 (調露二年  .. 680년) '의 명문(銘文)이 있는 보상화문전이다. 이러한 전(塼)은 안압지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며, 그 중에는 녹유(綠釉)를 입힌 것도 있다.

 

 

전(塼)의 표면에는 크게 네가지의 문양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중앙의 국화문(菊花文)과 그 주위의 당초문(唐草文) 그리고 보상화(寶相華), 그리고 전(塼) 네 귀의 팔메트문양 등이 그것이다. 보상화(寶相華)는 중앙 4개의 여의두형(如意頭形)을 중심으로 장식 문양이 첨가된 꽃잎을 조각하였고, 네 귀의 팔메트 문양은 네 장이 합쳐져서 완형을 이루고 있다. 전(塼)을 계속해서 깔았을 때 서로 이가 어긋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전(塼) 두께의 반을 한쪽은 내밀릭, 한쪽은 그만큼 들어가게 만들었다. 정교하고 세련미가 넘치는 최고 수준의 신라전(新羅塼)이며, 신라미술 연구의 기본이 되는 작품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귀면와                    鬼面瓦

 

 

 

 

두 눈을 부릅뜨고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있는 무서운 표정의 귀면와(鬼面瓦)는 귀신의 칩입을 막아주는 상징물로 건물에 장식되었다.  수키와 등에 얹히는 마루용 귀면와(鬼面瓦)는 하단의 가운데 부분이 원형으로 페여 있다. 그리고 사래용 귀면와는 아랫부분이 편평하다.

 

 

출토된 150여 점이 모두 완숙한 귀면(鬼面) 모양을 보여주고 있으며 의장도 화려하다. 이 귀면와들은 무서운 형태로 표현하려고 뿔과 송곳니 등을 강조하였으나 일본(日本)의 귀면와(鬼面瓦)에 비하여 오히려 해학적(諧謔的)인 표정을  지니고 있다. 이 가운데 녹색, 황갈색의 유약(釉藥)이 칠해져 있는 것이 40여 매 되어 당시 동궁(東宮)의 장엄하고 화려하였던 모습을 엿볼 수있다.

 

 

 

 

 

 

 

 

 

 

귀면와(鬼面瓦)는 도깨비 얼굴을 새겨 장식한 사래 끝에 붙이는 기와로 흔히 도깨비기와라고도 한다. 옛날 사람들은 나쁜 귀신을 쫒는 것은 영악(靈惡)한 귀신이라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귀면와(鬼面瓦)를 사래 끝에 만들어 달았다. 마을의 재앙(災殃)을 막아준다고 믿은 장승이 귀면(鬼面)인 것도 귀신에게 벽사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지방에 따라서는 도깨비탈(鬼形面)을 문에 걸어서, 잡귀(雜鬼)나 마마의 침범을 막는 풍속이 있었다.

 

 

 

 

 

 

 

 

기와 표면에 눈, 코, 입을 중점적으로 강조해서 무서운 표정을 나타냈고, 눈썹 사이에 구멍을 뚫어서 사래 끝에 못을 박게 만들었다. 귀면와는 양옆과 윗면에 넓은 주연대(周緣帶)에는 인동무늬, 당초무늬, 연주무늬 등이 조각되기도 한다.

 

아래는 넓고 위는 약간 좁으며, 둥근 방패 모양의 넓적한 기와 표면에는 눈, 코, 입을 중점적으로 강조해서 무서운  표정을 나타냈다. 눈썹 사이에 구멍을 뚫어서 사래 끝에 못을 박게 만들었다. 입에는 날카로운 어금니가 양쪽에 돋아 있고, 머리에는 뿔이 2개가 나 있다. 거친 수염과 머리카락이 더 무서워 보인다. 양쪽 옆과 윗면에는 넓은 주연대(周緣帶)가 튀어 나와 있다. 

 

 

 

 

 

 

 

 

 

 

 

 

 

 

출처 : 김규봉 ... 사는 이야기
글쓴이 : 非山非野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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