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스크랩] 양명학;이상호(한국국학진흥원)

장안봉(微山) 2013. 5. 12. 05:59

지난 2009. 10. 16 ~ 17. 양 이틀간 한국양명학회주관으로 강화청소년수련관에서 위 학술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세상과 소통하기' 제하의 회의자료 책자에서 양명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자료가 있어 자료를 올립니다.

양명학 - 모든 사람이 성인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다

■ 유학과 주자학

양명학은 명나라 중기 왕수인(王守仁, 호 陽明, 1472~1528)에 의해 성립된 학문으로, 특히 송대 주희(朱熹,1130~1200)에 의해서 집대성 된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형성되었다. 주자학과 양명학은 모두 공자와 맹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유학의 가르침을 잇고 있는 학문체계로, 유학의 다양한 변천과정에 속하는 학문이다.


유학이라는 학문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은 ‘성인됨’이다. 학문의 목적이 어떠한 사실을 정학하게 알고 이해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양을 토해 본인이 스스로 ‘성인이 되는 것’에 있는 것이다. 주자학 역시 학문의 목적인 ‘성인됨’이며, 주자학 이론의 체계 역시 이것을 설명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즉 주자학은 ‘사람이 왜 반드시 성인이 되어야 하는지?’, ‘성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은 있는지?’, 그리고 성인이 되고 또 될 수 있다면 ‘어떻게 해야 성인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묻고, 그에 대해서 이론적인 체계를 세워서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주자학에서는 세상이 움직이는 궁극적 이치(天理)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이러한 이치에 따라야 하며, 사람도 예외가 아니라고 강제했다. 사람도 역시 우주의 일원이며, 따라서 세상이 움직이는 이치에 따르는 것이 바로 ‘사람의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주자학에서는 이러한 세상의 이치를 알고 사람의 이치를 알고 난후, 그에 따라서 행동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렇게 사는 것이 ‘사람에게 주어진 이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은 이 이치에 따라 살아야 하며, 그렇게 살지 않는다면 더 이상 ‘사람’으로 규정하기가 어려워진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살 듯, 사람도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자학에서는 이러한 사람의 이치를 완전하게 성취한 사람을 성인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람은 반드시 성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설명되고 있다. ‘왜 반드시 성인이 되어야 하는’에 대한 주자학은 이론 구성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주어진 ‘이치’란 무엇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루면 성인이 되는가? 이 지점에서 주자학자들은 ‘맹자’의 이론을 차용한다. 맹자에 따르면 사람은 때어나면서부터 선한 본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바로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이유이다. 이것을 맹자는 사람의 ‘본성’이라고 말했으며, 따라서 사람의 본성은 ‘선한 도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자학자들은 이러한 맹자의 입장을 받아들여 모든 사람은 하늘이 사람에게 준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사람의 이치’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사람은 이러한 도덕 본성을 자신의 삶에서 그대로 성취해야 하며, 그것이 바로 ‘사람의 길’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람은 이미 ‘사람의 본성’으로 ‘선한 도덕’을 부여받고 있으며, 따라서 본성에 따라 살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성인이 될 수 있다. ‘성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주자학의 대답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이처럼 주자학은 사람이 ‘성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와 ‘성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설명한다.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 해야 성인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여기에 대해 주자학은 ‘수양’, 또는 ‘공부’라는 대답을 내어 놓는다. 그리고 구체적인 수양(공부)의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하늘의 이치’를 알고 또 다른 하나는 도덕행위의 근거가 되는 마음 그 자체를 선하게 하는 공부이다. 전자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옛날 성현들이 남긴 ‘경전’을 읽고 그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을 제시하고, 후자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경(敬)이나 성의(誠意)와 같은 마음공부를 제시한다. 주자학에서는 이처럼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독서 공부와 마음공부를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주자학을 집대성했던 주희는 바로 이러한 입장에서 옛 성현들께서 남긴 경전들을 새롭게 해석하고, 그에 따른 이론체계를 정립함으로써 주자학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주희의 이러한 학문은 그가 살았을 당시에는 ‘거짓학문’이라는 오명을 쓰고 금지되었지만, 그가 죽은 지 2년만에 주자학은 복권이 된다. 그리고 원나라가 남송을 멸망시키고 1313년 과거제도를 부활시키면서, 과거의 모범답안으로 ‘사서집주’를 선택함으로써 관학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명나라에 오면서 이러한 입장은 좀 더 고착화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관직을 위해서건 아니면 개인의 도덕적 성취를 위해서건 당시 대부분의 학자들은 주자학을 공부대상으로 삼았다.

■ 주자학 비판과 양명학의 성립

앞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명나라는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면서, 주자학을 관학으로 받아들였다. 통치이념과 나라의 국기를 주자학으로 설정하고, 주자학 지식인들을 관리로 선발하였던 것이다. 동시에 나라에서 직접 <성리대전>을 출간하여, 주자학 공부를 독려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명나라 중기로 가면서 나라는 황실과 환관, 그리고 훈척들로 인한 혼란이 극에 달하게 된다. 특히 환관들의 득세와 그에 따른 폐해가 극심했던 것이다. 송나라의 멸망 원인이 정승제도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명나라 왕조는 육조를 직접 관할하는 관직 체제를 만들었다. 그리고 황명의 출납을 황제 근처에 있는 환관들에게 맡겼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환관들은 자연스럽게 권력의 핵심에 서게되고, 필요한 경우 전횡을 일삼기도 했다. 특히 황실과 환관은 하나가 되어 백성들의 토지를 겸병하였고, 이것을 본 각 지역의 번왕들이 각 지역에서 토지를 겸병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농민들은 급격한 세금부담을 견디지 못하여 유민으로 전락하고, 결국은 농민 반란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명나라 중기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혼란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던 이유이다.


이러한 와중에서 사회적으로 명나라 중기는 당시의 신분체제가 무너지는 계기들이 발생한다. 명나라 중기 이후 중국의 남쪽 해안지대를 중심으로 상품경제가 발전하면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의 나타났던 것이다. 전문 수공업 도시가 만들어졌고 임금 노동자도 출현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자본가가 전문 임금 기술자를 고용하여 생산하는 자본주의적 경영방식이 도입되고, 상당한 기술을 가진 노동자들은 임금에 따라 고용주를 자유롭게 선택하는 경우도 많아졌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더 이상 예외와 법도를 통해 고용주가 피고용인을 억누를 수 없는 상황을 낳았고, 이 과정에서 개인을 중시하는 사회적 인식이 만들어지게 된다.


양명학은 바로 이와 같은 배경속에서 탄생한다. 개인이 중시되면서 더 이상 주자학적 사유구조가 일반론으로 작용할 수 없는 사회적 배경이 형성되었고, 통치자들의 부도덕함으로 인해 농민반란이 급격하게 번졌던 정치․경제적 배경은 주자학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로 이어졌던 것이다. 특히 양명학을 정립했던 왕수인은 혼란한 당시 상황이 주자학으로 인해 초래되었다고 보았다. 성인됨을 목적으로 했던 주자학이 과거 시험이나 치기 위한 공부로 전락하면서 이와 같은 결과를 낳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는 단순히 주자학을 잘못 공부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지라한 독서 공부를 통해 성인이 되려 했던 주자학 이론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왕수인을 통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주자학을 공부하는 이상 이러한 결과는 필연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왕수인은 본래 공자와 맹자의 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으며, 이 과정에서 맹자의 사상을 중심으로 주자학을 비판하고 새로운 해석을 내어 놓게 된다. 양명학은 바로 이렇게 만들어진다.


■ 양명학의 이론체계

맹자 이론의 중심은 ‘사람은 누구나 선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당시 사상체계에서는 대단히 혁신적이었다. 문제는 그러한 본성이 사람의 마음 속에 ‘단서’로만 들어 있어서 그것을 확충하는 ‘수양’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맹자는 이러한 수양도 주어진 본성에 따라서 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가능한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은 ‘성인이 되어야 할 이유’와 ‘성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되면서 맹자에게 있어서 ‘성인이 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작업이 아니게 된다. 특히 맹자는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선함과 악함을 스스로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인 ‘양지(良知)’를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따라서 행동하기만 하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요순임금과 같은 대성인도 실제로는 이러한 본성에 따라서 행동한 결과라는 맹자의 입장은 ‘누구나 쉽게 성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고 있는 것이었다.


양수인은 바로 이와 같은 맹자의 이론체계를 좀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되며서 주자학이 맹자가 말한 본성의 선함보다는 ‘수양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더 강조한 것에 비해, 완수인은 ‘본성의 선함’을 상대적으로 더 강조한다. 특히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과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능력인 양지와 양능은 맹자 이론의 중심축이자 양명학의 중심축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사람의 마음 그 자체를 신뢰할 수 있는 선악 판단의 기준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마음 속에 그대로 이루어내는 공부론을 강조하게 된다. 그 내용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양지(陽知) 앞에서 말한 것처럼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선함과 악함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말이다. 주자학 이론체계 내에서 이 양지는 그렇게 중요한 용어로 부각되어 있지 않지만, 양명학에서는 가장 중심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양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 양지에 따라서 살기만 하면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양명학에서 말하고자 하는 중심 요지이다.


심즉리(心卽理) 이 말을 그대로 번역하면 ‘마음이 곧 이치이다’라는 말로, 사람의 마음이 곧 모든 도덕 행위의 준칙이자 기준이라는 의미이다. 물론 여기에서 사욕에 물든 마음이 이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앞에서 본 양지의 개념에 딸서 이루어진 것으로, 양지를 가진 모든 마음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으며, 따라서 ‘마음은 곧 이치’가 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양지를 마음에 가지고 태어나고, 따라서 그 마음이 모든 도덕적 행위의 준칙이자 기준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의 마음’은 사욕에 의해 악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강하다고 생각하여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성’만을 이치로 설정하고 있는 주자학과 이론적 차이가 나는 부분입니다.


치양지(致陽知) 이 개념 역시 기본적으로 양지라는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양지를 가지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되지는 않는다. 마음이 곧 모든 도덕 행위의 준칙이 될 수는 있지만, 사육에 물든 마음이 그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양명학에서는 사함이 가지고 있는 양지가 온전하게 마음에서 작용할 수 있도록 마음 전체에 ‘양지를 이루라’고 요구한다. 이 말은 특히 ‘마음 공부’를 강조한 것으로, 주자학에서 ‘독서 공부’를 강조한 것에 대한 비판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주자학에서는 ‘앎을 이루는 방법’으로 ‘독서공부’를 강조하지만, 양명학에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양지만 이루면 된다고 말함으로써 중심을 마음공부에 두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양명학은 주자학과 다른 공부방법론을 강조하는 쪽으로 이행하게 된다.


이처럼 양명학은 주자학에 비해 성인됨으로 가는 길이 대단히 ‘간이’하다. 이미 성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이루기만 하면 성인이 되기 때문이다. 주자학에서 각각의 개별적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할지를 일일이 공부하고 난 이후에 ‘도덕적 이치’에 도달할 수 있다고 설정한 것과는 차이가 있는 대목이다. 양명학 역시 성됨을 목적으로 하는 유학이지만, 그것에 이르는 방법에서는 주자학과 이처럼 큰 이론 차이를 드러낸다.




강화 양명학의 태동 - 정제두의 학문하는 자세와 그의 철학


■ 양명학의 조선 전래와 비판

조선으로 양명학이 전래된 시기는 대단히 빨랐던 것으로 보인다. 양명학을 창시했던 왕수인의 어록집인 <전습록>은 이미 그가 살아있을 때부터 편집되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왕수인 사후 채 20여 년도 되지 않아서 조선에 유입되었을 정도이다. 당시 조선 최고의 주자학자였던 이황도 이미 편집된 <전습록>을 보고 그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개진했었으나, 얼마나 빨리 명나라에서 발간된 책이 조선으로 유입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임진왜란에 참여했던 명나라 장수들 가눙데에도 양명학자들이 있어서, 그들이 당시 영의정이었던 류성룡에게 양명학을 받아들일 것을 권했던 기록도 있다.


그러나 조선에서 양명학은 이처럼 빠른 유입에도 불구하고, 거의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우선 조선 사회가 형성된 배경과 특징에 기인하는 측면이 크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조선은 주자학적 이념으로 건립된 나라이다. 나라는 이성계에 의해 세워졌지만, 나라의 제도와 이념, 예제 등은 정도전이나 권근과 같은 주자학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이념은 내용의 변화와 강조의 차이만 있을 뿐 형식은 조선 국망때까지 유지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 왕실에서는 왕세자 때부터 주자학적 소양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용한 일이었으며, 관료 역시 반드시 주자학적 소양에 대한 테스트를 가장 중시하여 선발하였다.


이처럼 조선은 ‘하나의 사상’으로 통일된 나라였고, 결정권을 가진 기득권은 철저하게 주자학적 소양을 가진 사람들로만 구성되었다. 이러한 사회의 학자들과 기득권 세력들은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형성된 양명학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특히 <소학>부터 <대학>에 이르는 체계적인 학문체계와 독서공부를 통해 사욕을 없애는 공부를 지속해왔던 조선 주자학자들에게 선한 본성만을 가조하는 학문이 달가울 리 없었던 것이다. 독서를 통한 수양에 대한 특히 강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양명학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였던 것이다.


이와 더불은 조선에서 주자학이 뿌리 내리지 못했던 직접적인 이유는 조선 최고의 주자학자인 이황의 양명학 비판 때문이다. 이황은 당시 유입된 <전습록> 상편의 내용만을 보고 양명학에 대한 강환 비판적 입장을 견지한다. 그는 양며학이 ‘선불교’와 다르지 않다는 비판을 제기하는데, 이것은 주자학자들에게 있어서 ‘이단 학문’의 대명사였다. 이러한 비판은 이후 조선 주자학자들이 양명학을 바라보는 일반론으로 자리를 잡았고, 향후 이러한 인식은 더욱 고착화 된다. 조선 사회에 양명학은 ‘금기’의 대상이었고, 이 학문을 한다는 것은 늘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처벌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는 것이다. 조선 사회에서 양명학이 발달되지 못했던 가장 근본적 이유이다.


이처럼 조선에서 양명학은 철저하게 ‘이단’으로 규정되었고, 양명학을 하는 것 자체가 금기였다. 이 때문에 양명학 관련 저술이 있으면 문집 편집과정에서 빠지기도 했고, 양명학과 관련성을 부정하기 위해 강한 비판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이들은 중국의 양명학 비판서들을 수입하여, 이것을 기반으로 강하게 양명학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 양명학파가 형성되고 유지되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의미가 있는 것이다.


■ 정제두의 양명학 수용

조선시대 관료들이 가지고 있는 주자학 일변도의 이념과 정책은 양명학에 대한 강한 비판으로 드러났고, 따라서 조선사회에서 스스로 양명학을 선택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국 양명사에서는 정제두(鄭齊斗, 霞谷, 1649~1763)라는 걸출한 학자가 있었고, 이를 통해 양명학을 중심으로 하는 학파까지 형성이 되었다. 특히 정제두의 철학은 전체 양명학사에서도 뚜렷하게 한 획을 그을 정도로 중요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정제두는 기호 소론 계열의 학자로, 명문집안 출신이다. 그는 현종 때 우의정을 지냈던 정유성(鄭維城)의 손자이며, 그의 종형인 정제현은 영조의 부마이기도 하다. 또한 그가 17세에 맞이한 파평 윤씨 부인은 서인의 거두 윤선거(尹宣擧)의 종질로, 윤홍거의 딸이자 양명학적 세계관을 가지고 살았던 최명길의 형 최래길의 외손녀이기도 하다. 이처럼 정체두는 명문가 출신으로서 당시 최고의 학자들을 사사하기도 하였다. 10세 때부터 송시열과 송준길의 문인이었던 이상익에게 배웠으며, 이후 박세채를 스승으로 삼았다.


하지만 정제두는 이러한 출신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어느 때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주자학을 버리고 양명학을 선택한다. 어린시절 정제두는 주자학에 입문했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과거시험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런데 초시에 합격한 이후 정제두는 어머니께 허락을 구하여 학문에만 전념한다. 추측건대 이 때부터 그는 비교적 자유로운 학문체계를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제두는 양명학을 선택하게 되는데, 이렇게 된 데에는 정치적인 이유와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다.


학맥으로 보면 정제두는 기호 소론계열에 속한다. 그런데 정제두가 32세 되던 해 기호 소론계열은 정치적으로 중앙 정치에서 밀려나게 되는 사건을 겪게 된다. 1680년 기호 계열이 기득원을 굳이기 위해 남인을 몰아내었던 ‘경신대출척’사건이 일어나고 이 과정에서 기호 계열은 남인 숙청을 둘러싸고 강경파인 노론과 온건파인 소론으로 나누어 졌다. 여기에서 소론은 정권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이후 거의 정권을 잡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실제로 강화학파의 인물들은 바로 이렇게 축출된 기호 소론 계열에서 나오게 된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외에도 정제두는 개인적으로도 젊은 시절 크게 생명의 위기를 넘겼던 것으로 보인다. 34세 되던 해 정제두는 심한 질병으로 인해 죽음을 앞 둔 상태였다. 당시 그는 스승이었던 박세채에게는 마지막 인사의 편지를 남기고 있으며, 가족들에게도 자신이 죽은 이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한 유훈을 남기고 있다. 어떠한 병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목숨을 위협할 정도의 질병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처럼 정제두는 젊은 시절 정치적인 좌절과 개인적인 한계를 분명히 느끼면서, 이 과정에서 실질적인 학문에 대한 강한 열망이 싹텄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시험을 위한 형식적 공부에서 벗어나, 실제로 마음을 수양하고 성인됨을 추구할 수 있는 학문세계로 빠져 들어갈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정제두가 양명학을 수용하고 선택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환경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만큼 양명학은 정제두에게 절실한 학문이었으며, 주자학에서 만족시켜 주지 못했던 ‘진실된 학문’의 영역을 보여 주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때문에 정제두는 자신으 스승 박세채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양명학의 진실성을 설파하면서 그 학문세계를 추구한다. 이 과정에서 정제두는 양명학을 ‘선불교’로 밀어 붙이는 스승의 입장에 대해 조목조목 대답하고, ‘진실된 이치’를 찾아 가는 학문임을 논증했다. 또한 당시 학문적 동지였던 민이승이나 최석정 등의 인물과도 편지로 여러차례 양명학이 가지고 있는 ‘진실성’을 강조하면서, 평생 ‘참된 마음으로 하는 학문’을 닦아 갔다. 이러한 그의 학문하는 자세가 바로 강화학파의 태두가 되었으며,  한국 양명학의 정수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 정제두 양명학의 특징과 위치

그렇다면 정제두 양명학의 특징과 그가 차지하고 있는 학술사에서의 위치는 어떠할까? 정제두의 학문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이미 앞에서도 설명되었듯이, 주자학적 사유 구조 속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학문 체계를 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정제두의 학문은 과거를 통해 출세를 지향하는 것도 아니고, 남에게 지식을 드러내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정제두는 성인의 뜻을 따라 그 실질적인 것을 얻기 위해서 학문을 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스스로 성인됨을 이루어 가려고 했던 것이다. 정제두 학문이 가지고 있는 ‘진실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정제두는 민이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만약 그것이 참으로 옳다는 것을 확실히 알기만 한다면 학문을 논하다가 죄를 입어도 한 될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참다운 지식에 대한 열정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정제두는 성인됨을 추구하는 학문의 도는 ‘자신 안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지 밖의 사물이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음에 보편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하늘이 내려 준 선한 본성에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제두가 양명학을 선택했던 이유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정제두가 추구했던 것은 ‘진실된 이치’와 ‘진실된 마음’이다. 정제두는 양명학에서 주장했던 ‘마음이 곧 이치’라는 사실을 받아 들인다. 그런데 정제두는 이러한 이치에 대해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일밙거 리 속에서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리를 찾을 것을 강하게 권고한다. 그것이야 말로 진실된 리며, 그것을 통해 마음이 곧 이치인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치’에 대한 정제두의 입장은 당시 주자학에서 찾는 이치가 ‘사물의 이치’를 쫏는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에서 나온 것으로, 형식적이며 고정화 된 의리와 명분에 대한 배척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나아가 정제두는 양명학이 빠질 수 있는 폐단에 대해서 분명하게 지적한다. ‘마음이 곧 이치’라는 말ㅇ르 잘못해석하면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정제두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실질적 리’에 근거한 ‘마음’만을 강조하면서, 그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수양’을 강조한다. 사람은 진리의 주체이자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조재이지만, 모두가 그것을 실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제두는 이 점을 정확히 각ㄴ파하여 급진적인 양명학파에서는 중시하지 않았던 ‘공부’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를 위해 유학의 근본 정신인 인(仁)함을 기르는 마음공부를 강조하고, 나아가 마음공부의 일환으로 경전을 읽는 것까지 중시한다. 중국 양명학과는 차별적인 부분이다.


특히 정제두는 양명학만 옳고 주자학만 잘못되었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양명학이 욕망에 제멋대로 휘말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으며, 주자학은 마음과 이치를 하나로 이해하지 않고 나누어 보는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들의 차이가 머리카락 하나 정도의 차이일 뿐 서로 합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주자학이 수 만가지 갈래의 길에서 궁극적인 이치를 찾아 들어가는 어려움은 있겠지만, 그 자체가 잘못된 학문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융합의 정신은 각 학문이 가지고 있는 장점과 단점을 통해 정제두만의 양명학(하곡학)을 만들어 가는 계기로 작용한다.


이처럼 정제두의 학문은 중국의 양명학과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양명학 가운데에서도 객관적인 수양론을 강조하는 유파들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이러한 차별점을 통해 조선의 양명학이 비록 번성하지 못했지만, 이론적으로는 전체 양명학사에서 뚜렷한 궤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강화 양명학의 전개 - ‘진실된 마음’으로 살았던 사람들


■ 강화 양명학의 전승

양명학이 강화도를 중심으로 전승된 이유는 조선 양명학의 거두인 정제두가 1709년 61세 되던 해 서울을 등지고 묘막이 있는 강화도 하일리로 거처를 옮겼기 때문이다. 이후 강화도에는 정권에서 멀어졌던 기호 소론 계열의 전주이씨 덕천군파 후예들도 이거하였고, 이들은 자연스럽게 정제두로부터 양명학을 배웠다. 이렇게 되면서 강화 양명학파는 정제두의 후예들과 그의 인척이자 문인이었던 심육형제와 윤순형제, 신대우 부자, 그리고 전주이씨 집안 등이 학맥과 흔맥으로 결합되어 이어진다.


강화학파에서 정제두의 학문을 이은 가장 대표적인 집안은 바로 전주 이씨 집안이다. 이들 역시 기호 소론으로 경신대출척 이후 노론에 의해 밀려나면서 벼슬기에 오르지 않고 강화도로 이거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이광려와 이광신, 그리고 이광명과 이광사가 정제주에게 직접 양명학을 배웠고, 이 흐름은 이충익과 이긍익, 이영익에게로 이어졌다. 이들의 학문은 이후 이상학의 아들인 이건창과 이건승, 그리고 조카인 이건방에게 이어지면서 한말까지 강화학맥이 연결된다. 그리고 한말 대표적 양명학자인 정인보가 이건방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일제강점기에도 그들의 철학적 정신과 삶의 자세는 계속해서 유지된다.


다른 맥은 강화도 하일리에서 정제두에게 직접 배웠던 신대우로부터 시작한다. 신대우의 집안 역시 소론으로, 신대우의 학문은 그의 아들인 신진과 신작, 신현에게로 이어진다. 그리고 신대우의 족질인 이면백과 이시원, 그리고 정제두의 증손자인 정술인에게로 그 학맥이 이어지게 된다. 물론 이들 학맥은 별개로 형성되어 내려온 것이 아니라, 전주이씨 집안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계속해서 전해진다. 이 때문에 서로 혼맥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이다.


이처럼 강화 양명학파의 학맥은 강화도를 중심으로 천착되어 이루어졌으며, 내부적인 가학의 형태로 전수되었다. 이들은 진실된 마음에 따른 학문의 자세를 견지하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다양한 학문적 시도들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강화 양명학인들은 관심이 시문(詩文)으로부터 국사와 국어연구, 문자학이나 경학연구 및 농학이나 수학끼 넓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 강화 양명학의 학문적 특징과 전개

강화학인들은 정제두의 학문적 입장과 그 실질적 내용을 잇고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강화학인들이 양명학을 표방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모습에 대해 정인보는 내적으로는 모두 양명학을 표방하고 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던 것으로 정리하기도 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들을 하나의 학파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 모두를 관통하는 하나의 입장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학계에서는 ‘진실된 마음의 추구’로 이해하고 있다. 강화학인들에게서 이것은 ‘실질적인 것’, ‘올바른 것’, ‘진실된 것’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드러나고 있다.


강화학인들의 학문정신은 ‘진실된 마음의 추구’라는 측면에서 강하게 발현된다. 정제두의 수제자라고 할 수 있는 이광사는 강화학의 중심을 ‘내적으로 자신을 진실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이러한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내적 충실성’이라는 것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선한 본성에 따라서 ‘자신을 진실되게 하는 것’이지, 억지로 하려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입장은 정제두에게서 직접 배웠던 신대우나 윤순 등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마음의 능력’을 잘 발현시킬 수 있는 수양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후 이덕윤이나 이영익, 그리고 한말에 강화학을 이어갔던 이건창과 이건방에게서도 이 같은 입장은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이와 같은 ‘진실된 마음’을 추구했던 특징들은 강화학인들로 하여금 과거를 지향하고, ‘자기를 닦는 공부’에 더욱 천착하게 한다. 물론 정치적 진출의 활로가 막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 스스로도 ‘남을 다스리기 위한 공부’보다는 ‘도덕수양’에 중심을 둔 실질적인 학문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와 같은 모습은 특히 강한 도록의식으로 드러난다. 이건창의 조부였던 이시원은 자기 동생인 이지원과 함께 프랑스군의 강화도 침탈에 대응하여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 도덕적 순수성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진실된 마음의 추구’는 ‘진실된 이치’에 따른다고 생각하여, 그 ‘진실’의 개념을 확장한다. 이렇게 되면서 강화학인들은 특히 ‘실용’과 ‘실제’, ‘사실’, ‘현실’ 등을 중시하는 학문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이것은 우선 ‘거짓된 마음’을 배척하고 자기 자신을 ‘진실되게 하는 것’을 중시하는 동시에, 그것을 바탕으로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현실의 삶’에서 적용시키려는 노력들을 진행한다. 흔히 실학의 중심 가치로 이해되어 온 ‘실사구시’의 정신이 강화학인들에게도 드러났던 이유이다.


이와 같은 ‘진실된 이치’에 대한 추구는 강화학인들로 하여금 다양한 활동들을 가능하게 하였다. 우선 ‘진실된 이치’를 ‘사실’로 이해했던 이긍익은 현재 한국 역사학계에서 매우 큰 업적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연려실기술>을 저술한다. 이 책은 기존 역사 기술방법에서 탈피하여 역사적 사실관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기사본말체’를 선택하고, 400여 종이 넘는 각종 자료에 기반하여 저술함으로써, 역사서가 갖는 사실성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 기술에 대한 의식은 이충익이 지은 <군자지과>나 이시원이 지은 <국조문헌>과 같은 책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으며, 이 두 책은 이후 이건창이 지은 <당의통략>으로 집약되었다. 이러한 책들은 모두 사실에 기반하여 정확인 원인을 파악하고 그것에 따라 대책을 제시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동시에 ‘진실된 이치’를 추구했던 이들의 정신은 이광사를 통해 정음연구와 같은 결과로 드러나기도 했다. 이광사는 조선이 중국과 다른 음운체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국의 성조를 따르는 것에 개탄하면서 ‘현실성 있는 우리의 음운체계’의 필요성을 개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에게 가장 알맞은 음운체계는 세종대왕의 한글창제라고 생각하여, 우리 설률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것’을 추구했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강화학인들의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학문 기풍은 문학과 문장을 통해서도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특히 이건창은 한말 3대 문장가로 알려질 정도로 뛰어난 문장을 구사했다. 그는 문장론을 지어서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지를 밝힌 글에서 사실을 정확하게 전할 수 있는 실질적인 글쓰기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그의 문장능력은 청나라 한림학사들에게서도 극찬을 받을 정도였다. 또한 대표적인 현대 시조시인으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솔직한 글쓰기’를 중시하였다.


나아가 강화학인들은 ‘현실에 필요한 학문’에도 힘을 썼다. 정제두의 후손이었던 정후일은 수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정문승은 농사에 관한 책을 짓기도 했다. 현실에서 쓰임새 있는 학문을 강조한 결과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들이 ‘실학’과 관련되어 해석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이들은 ‘실사구시’의 정신을 중시하였으며, 그것은 현실에 필요한 다양한 학문 영역을 개척했던 것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이처럼 강화학인들은 ‘진실된 마음’과 그것을 가능케 했던 ‘진실된 이치’를 학문의 중심모토로 삼고 있었다. 이러한 학문의 중심모토는 그들로 하여금 ‘사실적이고 실질적인 것’을 추구하며, ‘현실에 필요한 학문’을 만드는 데 노력하게 하였다. 강화학인들에게서 다양한 학문 영역들이 드러나고 있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다양한 학문 영역을 관통하고 있는 정신은 역시 ‘진실된 마음’에 따른 도덕적 실현과 ‘진실된 이치’를 기반으로 한 학문추구라고 말할 수 있다.


■ 한말 양명학의 부흥

서양과 일본의 한국 침탈이 본격화 되던 시기 강화 양명학은 근대화의 중요한 이론적 토대로 작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은 일제 강점시기 독립운동을 위한 이론적 기반으로도 작용한다. 공부나 수양보다는 행위를 강조했던 양명학의 특징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마주하면서 중요한 이론적 기능들을 수행했던 것이다.


이러한 기능의 중심에는 정인보가 있다. 정인보는 강화학파의 정맥을 잇는 이건방의 제자로, 한말 언론인이자 교육자, 그리고 학자였다. 또한 현대 시조시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일제 강점기 일본의 정책에 대항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정인보의 이처럼 다양한 활동들 속에는 이러한 행동들을 가능케 했던 이론적 기반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양명학이다. 정인보가 강화학파의 일원으로 이해되는 이유이다.


정인보가 강조했던 것도 바로 모든 강화학인들이 강조했던 ‘진실된 마음’이다. 정인보는 조선 망국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주자학’을 지목하면서, ‘진실된 마음’에 근거하지 않았던 조선의 주자학자들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다. 조선 500년의 역사가 ‘허위와 거짓의 역사’라는 통렬한 비판은 여기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적 입장은 양명학이라는 새로운 대안의 제기로 이어졌다. 양명학의 본질을 ‘진실된 마음’과 그것에 따른 ‘진실된 행동’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행동을 애초부터 하나로 이해하고 있었던 양명학적 사유체계가 정인보에게 대단히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정인보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진실된 마음’은 하늘이 준 선한 본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면서, 이러한 마음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행동할 것을 강권한다. 특히 정인보는 하늘이 사람에 준 ‘진실된 마음’에 따르면 이웃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고, 나라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어, 이웃이나 나라를 위해서 하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그것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고 강조한다. 아웃과 국망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으로, 이러한 ‘안타까운 마음’은 그대로 행위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인보가 양명학을 강조하고, 양명학을 통해 새로운 운동의 이론적 기반을 만들어 내려고 했던 이유이다.


특히 정인보는 일제강점을 당하여, 행동하는 양심을 필요로 했다. 국망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마음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들을 통해 나라의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에서 정인보는 양명학에 대한 세밀한 연구를 통해 동아일보에 66회에 걸쳐 <양명학 연론>을 게재하고, 이를 통해 양명학적 소양에 충실한 행동하는 운동가를 만들려고 했다. 특히 이 글은 중국 양명학과 한국 양명학에 대한 본격적 연구의 첫출발이 되는 기념비적 저작으로, 양명학 불모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얼마나 깊이 있게 양명학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처럼 강화 양명학은 각 시대와 조우하면서 그 시대정신을 이끌 수 있는 노력들을 수반하였으며, 절실하고 진실된 상태에서 참된 행동을 염두에 둔 수양을 하였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을 현실과 깊이 있게 나누면서 스스로 행동을 했던 것이다. 강화 양명학의 핵심 정신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글쓴이 이상호(한국국학진흥원)


출처 : 구름산의 易 安 齋
글쓴이 : 황인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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