逍遙山 紫鳳形(소요산 자봉형)과 원효대사
◎ 소요산 소개
소요산(해발 536m)은 경기도 동두천시와 포천시 신북면의 경계에 있으며 主峰(주봉)은 義湘臺(의상대)이며 요즈음은 지하철이 소요산까지 연결되어 주말이면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산세가 수려하고 아름다워서 경기의 小金剛(소금강)이라고도 하며 1981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화담 서경덕, 봉래 양사언, 매월당 김시습이 자주 소요 하였다고 “소요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 逍遙(소요)란?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니는 것을 말 한다.
소요산은 645년 신라의 元曉大師(원효대사)가 開山(개산)하여 自在庵(자재암)을 세우고 수도에 정진하고 있을 때,
아내인 요석공주가 아들인 설총을 데려와 같이 예불을 올렸다는 별궁터도 있으며 소요산을 소개 할 때 원효대사와 요석공주를 제외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 元曉大師(원효대사) 출생
元曉대사는(617∼686년) 신라시대의 고승으로 성은 薛氏(설씨)이며 원효는
법명이고 아명은 誓幢(서당)이다.
이름 그대로 민족의 첫새벽을 열어간 원효는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경북 경산군 자인 지방인 압량군 불지촌(현 경북 경산군 압량면 신월동)에서 태어났다.
원효의 어머니가 일찍 流星(유성)이 품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元曉(원효)를 잉태하여 해산할 때가 되자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원효대사가 파계한 것은 그의 나이 40세 무렵이었는데 어느 날 서라벌
거리에서 誰許沒柯斧(수허몰가부) 我斫支天柱(아작지천주) 라는 노래를 부르
고 다녔다.
해석하면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 주려나,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박으리” 라는 뜻이다.
※ 원효대사는 瑤石公主(요석공주)에게 자루 없는 도끼인 玉門(옥문 : 陰門 음문)을 빌려달라고 하여 하늘을 떠받칠 기둥, 즉 자신의 ‘물건’으로 薛聰(설총)을 잉태하게 한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지만 太宗武烈王(태종무열왕)
만은 이 노래를 알아듣고 말했다.
“아마도 이 스님은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
라에 큰 賢人(현인)이 있으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있으랴”
◎ 瑤石公主(요석공주)
당시에 瑤石宮(요석궁)에는 백제와의 전투에서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가
된 둘째 딸 요석공주가 있었다.
원효는 워낙 박식하고 뛰어난 고승이라 무열왕도 자주 조언을 구하는
까닭에 인연도 있었고 공주 역시 그를 좋아하는 눈치였다.
그러든 어느 날, 무열왕은 궁리를 보내어 원효를 데려오게 하였다.
때마침 원효는 문천교를 지나고 있었는데 일부러 물 가운데 떨어져 옷을 적시니 요석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벗어 말리게 하였다.
원효는 젖은 옷을 말린다는 핑계로 대궐에서 3일 동안 공주와 함께 지
내면서 파계를 하였으나,
인간 원효에게는 정말 속세에서 한번뿐인 꿈같은 나날이었다
그 후 요석공주에게 태기가 있었고 10달이 지난 후 신라 10현인 중 한
분인 薛聰(설총)을 낳았다
※ 원효가 파계를 감행했던 瑤石宮(요석궁)은 경주시 교동 59-2번지인데 지금 그 자리에는 조선 말엽 부호였던 최氏 가문에서 저택을 짓고 “요석궁”이라는 이름의 고급 음식점을 만들었다.
그 후 요석궁의 전통한국요리가 알려지게 되자 고종 황제의 아들인 이강 왕자를 비롯하여 일본관리 및 미국대사 등 많은 이들이 음식을 즐기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 원효는 自在庵(자재암)에서 觀音菩薩(관음보살)과 친견하다.
원효가 소요산 庵子(암자)에서 혼자 수도할 때 비바람이 부는 어느 날 밤에 낯선 젊은 여자가 찾아와 하룻밤을 묵고 갈 것을 청했다.
원효는 비 내리는 밤이므로 그 여인을 되돌려보 낼 수가 없어 하룻밤 묵어가도록 허락했지만,
침침한 등불에 비친 그 여인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워 눈을 감아도 이 여인의 모습이 떠올라 원효는 精進(정진)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따뜻한 방에서 몸이 풀린 여인은 자리에 일어나 앉아 원효에게요염한 눈길을 보내고 접근해왔다.
원효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밖으로 뛰쳐나가 새벽녘에 간밤에 비가 내려 물이 불어난 계곡에 옷을 벗고 목욕을 하였다.
마침 그때 우연히 앞을 바라보니 아침 햇살에 비친 그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이 갑자기 보여 원효는 가까이 오지 말도록 나무랐다.
그 여인은 "제가 스님을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님이 저를 色眼(색안)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까?"하고 대꾸하였다.
원효는 이 말을 듣고 난 뒤 눈이 캄캄해지고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없었지만 잠시 후 정신을 차려 자신을 되돌아보니 광명을 찾은 듯 그의 눈에는 주위 사물이 밝게 보였다.
원효는 "나는 이제 깨달았다" 하면서 물속에서 나와 옷을 벗은 채로 여인 앞으로 지나갔다.
그때 그 여인은 더 이상 요염한 여자가 아니라 금빛 찬란한 後光(후광)을 띈 觀音菩薩(관음보살)이 되어 폭포 위로 사라졌다.
관음보살이 원효의 불심을 시험하기 위해 잠시 인간으로 現身(현신)한 것이다.
그리고 이 절 이름을 自在庵(자재암)이라고 부른 이유는 아무거리낌 없이 마음과 뜻을 다스릴 수 있었다는 원효의 깨달음에서 비롯되었다.
작성자: 정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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