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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충남 연기]충정공 약천 조계원(忠靖公 藥泉 趙啓遠)? 묘역-양주조씨

장안봉(微山) 2013. 5. 11. 09:02

충정공 약천 조계원(忠靖公 藥泉 趙啓遠)

 

1592(선조 25)∼1670(현종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자장(子長), 호는 약천(藥泉). 준수(俊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남(擥)이고, 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존성(存性)이며, 어머니는 이신충(李藎忠)의 딸이다. 신흠(申欽)의 사위로 숙부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뒤에 이항복(李恒福)의 문인이 되었다.

 

1616년(광해군 8) 진사시에 합격하고, 인조반정 후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1628년(인조 6)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언을 거쳐 형조좌랑이 되었다. 1631년 일시 파직당하였다가, 그 뒤 1636년 병자호란 때 유장(儒將)으로 천거되기도 하였다.

사헌부장령(司憲府將令), 옥당의 수찬(修撰)ㆍ교리(校理)를 거쳐 사간이 되었다. 이 때 김상헌(金尙憲)이 탄핵당하자 이를 힘써 구원하였다.

1641년 세자시강원보덕으로서 볼모로 심양(瀋陽)에 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청나라의 요구로 명나라의 진저우(錦州) 공격에 참가하게 되자 그를 시종, 모래주머니를 이용하여 성을 쌓는 기계(奇計)를 써서 세자 일행이 무사히 돌아오게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심양에서 돌아와 수원부사ㆍ홍청감사(洪淸監司)ㆍ동부승지ㆍ예조참의ㆍ강화유수ㆍ도승지ㆍ경상감사 등을 거쳤다. 1654년(효종 5)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경기감사ㆍ전라남도감사를 거쳐 1659년 함경감사, 형조와 공조 참판, 동지의금부사를 지냈다.

1662년(현종 3) 형조판서에 이르러 사직하고 보령에 은퇴하여 한가한 여생을 보냈다. 그뒤 조정으로부터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만년에 민전(民田)을 광점(廣占)하였다는 비판도 받았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조진석(趙晉錫)

 

1610(광해군 2)∼1654(효종 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여삼(汝三), 호는 용은(慵隱)ㆍ간죽(看竹). 남(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존성(存性)이고, 아버지는 형조판서 계원(啓遠)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신흠(申欽)의 딸이다. 신익성(申翊聖)의 사위이다.

 

1634년(인조 12) 성균관유생이 되고, 1640년 창릉참봉(昌陵參奉)을 거친 뒤 전설사별검(典設司別檢)ㆍ사옹원직장(司饔院直長)ㆍ의금부도사를 역임하고 임실현감으로 부임하여 많은 치적을 올렸다.

1649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651년(효종 2) 병조좌랑을 거쳐 정언으로 있을 때 당시의 시폐(時弊), 특히 내수사(內需司)의 모속자(冒屬者) 등으로 인한 국가재정의 득실에 관하여 상소하였던 바, 그 비판이 적절하다는 칭송이 많았다.

이어 겸춘추관기사관으로서 인조실록청낭청에 임명되었으며, 1652년에는 공산현감ㆍ황주판관으로 나갔다가 다시 정언으로 돌아왔다.

이어 병조정랑ㆍ지평을 역임하고, 1654년 장령으로 있으면서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의 신원(伸寃)을 상소하였다가 대사헌 이시해(李時楷) 등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병사하니 나라에서 관작을 복구하였다. 글씨에도 능하여 김제군의 금산사(金山寺)에 있는 소요당대사비(逍遙堂大師碑)를 썼다.

 조진석 묘 전경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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