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충청도)

[스크랩] 의자왕

장안봉(微山) 2013. 5. 14. 12:02

 

 

 

 

                                      의자왕                       義慈王

 

 

 

 

 

백제(百濟)의 제 31대 국왕으로 그가 출생한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며 66년에 죽었다. 재위(在位) 기간은 641년부터 660년까지 약 20년의 기간이었다. 그는 태자 때부터 어버이를 효성스럽게 섬기고 형제들과 우애가 깊어 당시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렸다.

 

 

 

 

 

 

 

 

재위 기간 초기에 개혁정치를 펼쳐 국정을 쇄신하고 고구려(高句麗)와 연합하여 신라(新羅)를 공격해서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러나 말년에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하고 백제가 멸망함으로써 백제의 마지막 왕이 된 비운(非運)의 군주이다.  

 

 

 

                                       의자왕 단                      義慈王 壇

 

 

 

충청남도와 부여군(扶餘郡)은 1995년 2월, 의자왕(義慈王)이 묻혀 있는 곳으로 알려진 중국 낙양시(洛陽市) 북망산(北忘山) 지역을 조사한 결과 왕릉(王陵) 발굴에 어려움이 있어 의자왕릉(義慈王陵) 추정지의 영토(靈土)를 봉안하여 왔고, 1920년 역시 같은 지역에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扶餘隆)의 묘지석(墓誌石)이 출토되어 중국 하남성 개봉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따라서 충청남도와 부여군은 봉안하여 온 의자왕 영토(靈土)와 부여융(扶餘隆)의 지석(誌石)을 부여 능산리 백제왕릉원에 안장하였다.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리며 성군(聖君) 소리를 들었고, 백제 멸망하기 불과 5년 전만 해도 신라(新羅)를 공격하여 30여 성(城)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전할 만큼 적극적인 정복사업을 벌이던 의자왕이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공격을 받고는 무기력하게 나라를 잃었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대로 음란(淫亂)과 향락(享樂)에 빠져 정사(政事)를 등한시하고 간신(奸臣)들에게 놀아났던 것인가.

 

 

 

                                        무왕(武王)의 맏아들로 태어나다

 

 

 

의자왕은 무왕(武王)의 맏아들이다. 서동요(薯童謠)로 널리 알려진 서동(薯童)과 선화공주(善化公主)의 유명한 로맨스를 기록한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서동(薯童)이 백제의 무왕(武王)이고, 선화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선화공주(善化公主)가 의자왕의 어머니인가 ? 의자왕이 즉위 초기, 정치적 입지가 취약했던 이유가 외가(外家)가 적국(敵國)인 신라(新羅)이었기 때문이고, 유난히 적극적으로 신라를 공격한 것이 그에 대한 반발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를 제외한 다른 기록에서는 진평왕의 딸로 천명(天明)과 덕만(德曼) 두 명의 이름만 기록했을 뿐, 선화공주의 존재에 대해 언급해 놓은 것은 찾아 볼 수 없다. 선화공주라는 인물은 존재했으나, 신라 진평왕의 딸이 아니라 익산(益山)지역의 유력한 호족(豪族)의 딸이 아니었을까 하는 주장이 존재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최근 발굴 조사 결과 서동요(薯童謠)의 전설은 근거 없음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의자왕이 태자(太子)에 책봉된 것은 632년(무왕 33)의 일이다. 정확한 출생년도가 전하지 않지만 아들의 나이로 추정해보건데, 30대 중반이 넘어서야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에 대한 내부 견제가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견제 속에서 무사히 왕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행실을 반듯하게 해 좋은 평판을 유지하였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삼국사기' 및 당나라 역사서 ' 구,신당서(舊,新唐書) '에 '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가 있어 그때 사람들이 해동(海東)의 증자(曾子)라고 일컬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즉위하기 전까지 자신을 최대한 낮추고 주변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당시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서 흠잡을 데 없는 평판을 얻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해동증자                    海東曾子

 

 

 

무왕(武王)의 아들로 태어나 632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이때 그의 아들 융(隆)은 17세였다. 641년 3월에 아버지 무왕(武王)이 승하하자 그 뒤를 이었고, 당(唐)으로부터 주국(周國) 대방군왕(大方君王) 백제왕으로 책봉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용맹하고 결단력도 있다는 평가와 함께 총명하고 우애가 깊어서 해동증자(海東曾子) 또는 해동증민(海東曾閔)이라는 찬사도 따라다녔다고 하고, 그의 아들 부여융(扶餘隆)의 묘지(墓誌)에도 의자왕을 가리켜 ' 과단성 있고 침착하고 사려 깊어서 그 명성이 높았다 '라고 평가되고 있다. 최근 일부 학자들은 의자왕을 개혁군주(改革君主)로 재평가하고 있다.   

 

 

 

 

 

 

동양 5성(五聖 .. 공자, 맹자, 안자, 자사, 증자))으로 꼽히는 증자(曾子)는 공자(孔子)의 제자로 부모에게 극진히 효도했던 인물이다. 효경(孝經)의 작자로도 전해지는 증자(曾子)는 도덕행위의 근본을 효(孝)와 신(信)에 두었고, 그의 사상은 유교(儒敎)사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백제의 부흥을 꿈꾸었지만, 망국(亡國)의 왕으로 전락한 의자왕이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린 것은 범상치 않은 일이다.

 

 

 

 

 

 

의자왕은 태자(太子) 시절에 뛰어난 품성과 왕자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가 있어 사람들이 해동의 증자(曾子)라고 일컬었다 '라고 기록될 정도이었다. 의자왕은 즉위하기 전까지 당시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서 좋은 평판을 얻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권을 놓고 내부 견제가 치열했을 상황에서 무난히 왕위에 오를 수있었던 것도 이렇듯 노련한 처신 덕분에 왕권을 쥐었다는 평가가 많다.

 

삼국사기에 앞서 중국에서 먼저 의자왕을 '해동증자'로 격찬하였다.당(唐)나라 역사서인 '구당서(舊唐書)' 및 '신당서(新唐書)'의 동이열전(東夷列傳)이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의자왕은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한다는 이유로 당나라 사람들로부터 해동증자(海東曾子) 즉, '동방의 증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삼국사기의 악의적 표현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金富軾)은 백제의 왕 특히 의자왕(義慈王)에 관해서는 상당히 악의적(악의적)으로 기술하였다. 그는 의자왕이 궁녀들과 술을 마신일까지 세밀히 기록하였다. 이러한 사소한 일들이 삼국사기에 기록될 정도로 중대한 사선일까 ? 그다지 대수롭지도 않은일을시시콜콜하게 다 기록해 놓은 것은 ' 백제는 어차피 멸망할 수 밖에 없다 '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김부식(金富軾)이 의자왕을 어떻게 묘사하든 나쁘게 묘사하려 했다면, 의자왕이 '해동증자'라고 불렸다는 사실을 '삼국사기'에 기록해 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 사실을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구당서(舊唐書) 및 신당서(新唐書)에 버젓이 기록되어 있는 내요을 '삼국사기'에 기록하지 않을 경우, '삼국사기'의 신뢰성은 땅에 추락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만큼은 좋든 싫든 의자왕의 장점을 인정할 수 밖에없었던 것이다. 중국 사료(史料)에 없는 내용을 '삼국사기'에 추가할 수는 있어도, 중국 사료에 있는 내용은 '삼국사기'에 안 넣을 수 없었던 것이다.          

 

 

 

 

                                          즉위,  권력기반을 확립하다

 

 

 

 

 

 

 

 

 

 

 

 

641년 왕위에 오른 의자왕은 즉위한 이듬해 어머니가 죽자 동생인 교기(翹岐)와 여동생 4명 등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하는, 전격적인 숙청(肅淸)을 단행하였다. 자세한 내막은 전하지 않지만 태자(太子) 책봉이 늦었던 원인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즉위를 반대하였거나, 그 원인이 되었던 인물들을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 해 의자왕은 국내를 순무(巡撫)하며 죄수의 정상을 기록하여 죽을 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용서해주는 등 민심(民心)을 수습하기도 하였다.  

 

 

 

                                                 의자왕의 정복전쟁

 

 

 

 

 

 

위와 같이 내부의 권력기반을 다진 뒤, 외부적으로 연이은 승전고를 울리면서 자신의 역량을 과시하였다. 그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新羅)를 공격하여 미후선 등 40여 성(城)을 함락시키고, 바로 다음달 윤충(尹忠)을 보내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인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여 성을 함락시키는 등 신라를 큰 곤경에 빠트렸다.

 

 

 

                                          대야성                        大耶城

 

 

 

대야성은 경상남도 합천군 남부지방에 있던 신라 때의 성(城)이다. 삼한시대에는 변한(弁韓)에 속한 땅으로, 여러 부족국가들이 형성되었는데, 후에 대가야(大伽耶)에 흡수되었다. 신라의 장군 이사부(伊斯夫)가 562년에 이 일대를 공략, 신라에 종속시키고 대량주(大良州)로 개칭하였다. 이 지역이 서쪽 백제와 접속지로서 군사적 요충지이었으므로,신라는 이곳에 도독부(都督府)를 두고 경계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642년에 백제 장군 윤충(尹忠)의 침공으로 함락되었다. 이에 큰 타격을 입은 신라는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대야성(大耶城)의 성주(城主)인 품석(品石)이 김춘추(金春秋)의 사위이고, 이 싸움의 와중에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가 죽었다는 데 있었다. 딸의 사망 소식을 들은 김춘추(金春秋  .. 태종 무열왕)는 기둥에 기대서서 종일토록 눈을 깜빡이지 않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지 못할 정도로 슬퍼하였다.

 

품석(品石)은 대야성의 성주로 있으면서 부하인 사지(舍知) 검일(黔日)의 처(妻)를 빼앗아 '검일'의 원한을 샀다. 642년 백제의 윤충(尹忠)이 거느린 백제군이 대야성을 공격해 오자 '검일(黔日)'이 적에 내응, 성내의 창고에 불을 질러 성(城)이 함락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항복하면 죽이지 않겠다는 '윤충'의 약속을 믿고, 먼저 군사를 성 밖으로 내보냈으나 복병(伏兵)에 의해서 전멸되자, 윤충의 약속이 거짓임을 알고 성내에서 처자(妻子)를 죽이고 자결하였다. 647년 김유신(金庾信)이 대야성 설욕전에서 얻은 백제의 포로 800명과 교환되어 그의 처자(妻子)의 백골(白骨)과 함께 신라에 환장(還葬)되었다.  

  

그러고는 '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멸하지 못하랴 '며, 백제 멸망에 온 힘을 쏟기로 결심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김춘추(金春秋)는 고구려, 왜(倭) 그리고 당(唐)나라를 직접 방문하여 목숨을 건 외교전(外交戰)을 벌인 끝에 결국 당나라와 군사연합을 맺는 데 성공하였다. 비록 당(唐)이 김춘추의 설득에 신라(新羅)와 군사 연합을 맺었지만, 이전까지 백제와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의자왕은 집권 초기 외교(外交)에도 탁월한 수완을 보인다. 즉위한 해부터 5년 동안 계속해서 당나라에 조공(朝貢)을 하며 관계를 다졌고, 왜(倭)와도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또한 고구려(高句麗)와도 힘을 합쳐 신라를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 

 

재위 3년인 643년에는 고구려와 화친(和親)하여 신라의 당항성(黨項城 .. 지금의 화성시)을 공격하였다. 당항성(黨項城)은 당나라의 해로(海路)를 연결해 주는 요충지이었다. 당항성이 공격 당하자 신라는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의자왕은 곧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관계가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등 국제관계에 민첩하게 대응하였다. 

 

 

 

 

 

 

645년에는 당태종(唐太宗)이 고구려(高句麗)를 정벌하려고 신라의 군사를 징벌한다는 말을 듣고 그 틈을 타서 신라의 일곱 성(城)을 빼앗았으며, 655년에는 고구려, 말갈(靺鞨)과 함께 신라의 30여 성(城)을 쳐부수는 등 군사적인 능력도 탁월하였다. 의자왕 집권 전반기 백제와 신라는곳곳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전쟁의 주도권은 분명 백제에게 있었다.      

 

 

 

                                               집권 15년을 넘기면서

 

 

 

그러나 의자왕(義慈王)은 집권 15년을 넘기면서 치세(治世)에 변화가 일어난다. 그해 태자궁(太子宮)을 수라히였는데 대단히 사치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이듬해 의자왕이 궁녀(宮女)들과 더불어 주색(酒色)에 빠져 마음껏 즐기고 술을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다는 기록도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657년(의자왕 17)에는 왕이 아들 ' 마흔한 명'을 좌평(佐平)으로 임명하고 각기 식읍(食邑)을 내려주기도 했다.  

 

이렇듯 의자왕의 치세(治世)가 흐트러진 이유에 대해서는, 은고(恩古)라는 여인이 의자왕을 마음과 함께 권력을 거머쥐면서 벌어진 전횡(專橫)이라는 주장도 있고, 권력 기반을 다진 의자왕이 외형적으로 안정된 왕권(王權)에 안심하여 긴장감이 풀어진 데에서 그 원인을 찾기도 한다. 한편 이 무렵의 기록들에서는 궁중의 훼나무가 사람처럼 울었다든가, 우물물이 핏빛으로 변했다든가, 하는 흉흉한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는데, 이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역사는 승자(勝者)의 기록인 법, 신라에게는 백제가 멸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들이 필요하였고, 특히 백제 말의 역사는 그렇게 각색(脚色)되었을 것이다.그러나 의자왕의 왕권강화(王權强化)에 귀족층들이 반발하고 이로 인해 백제의 지배층이 흔들리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대좌평 사택지적(砂宅智積)이 은퇴하고, 성충(成忠)이 투옥되고, 좌평 흥수(興首)가 귀양간 것이 모두 그 즈음의 일이다.    

  

 

                                            은고(恩古) ... 의자왕의 여인

 

 

 

은고(恩古)는 정작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전연 등장하지 않고, 다만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백제 멸망을 다룬 제명천황조(諸明天皇條) 6년 10월에 당(당)나라가 사로 잡아간 백제의 왕족, 대신(大臣)들을 열거한 기록에 의자왕과 그의 처(妻) 은고(恩古)라고 단 두 글자만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과연 은고(恩古)란 어떤 인물인가 ?

 

 

 

 

 

 

사실 역사에 이름 단 두 글자만 등장하는 여인이 대체 어떤 인물이었는 지를 파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백제 멸망의 미스테리와 관련하여 어떤 수수께끼의 열쇠를 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학계에서도 꽤 많은 관심을 갖고 주목해 온 인물이 은고(恩古)이기도 하다. 한때 학계에서는 '은고(恩古)'라는 인물을 '나라를 망친 요녀(妖女)'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당평제비(당平濟碑)에 등장하는 의자왕에 대하여 ' 밖으로는 곧은 신하를 버리고 안으로는 요망(妖妄)한 계집을 믿어 오직 충성되고 어진 사람들에게만 형벌이 미치며 ... '운운한 구절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같은 표현은 대개 한 나라를 무너뜨린 뒤 자신들이 그 나라를 침략하고 멸망시킨 것을 합리화하고 상대 국가를 깎아내리기 위한 상투적인 비하, 비난의 표현으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의자왕 16년 3월 ' 왕이 궁인(宮人)과 더불어 음황(淫荒), 탐락(耽樂)하여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충신 성충(成忠)이 임금에게 직언(直言)을 하다가 죽임을 당한 것도 바로 이때의 일이다.                                      

  

 

 

 

                                                   백제의 멸망

 

 

 

 

 

 

 

 

의자왕은 황산벌에서 계백(階伯)에게 5천의 군사를 주어 막게하였지만, 백제군의 10배나 되는 신라군의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계백과 그의 군사는 전멸하였다. 백강(白江) 어귀에서 당나가 군대릐 상륙을 저지하려던 백제군은 대패하였다. 마침내 7월11일에 신라군과 합류한 당나라 군사들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향해 육박하였다.

 

사비성 부근에서 결전이 벌여졌으나, 배제군 1만이 전사하며 대패하고, 수도인 사비성이 포위되자, 백제는 군사작전을 포기하고 대신 제사에 사용되는 소와 많은 음식들을 당나라 진영에 보내기도 하고, 백제의 태자(太子)가 직접 소정방(蘇定方)에게 나아가 철군해줄 것을 요청하는 등 외교전으로 선회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결국 의자왕은 태자 융(隆)과 함께 7월13일에 웅진성(熊津城)으로 피난하였으며, 사비성에는 둘째 아들 '태'가 남아서 왕을 자처하며 항전하다가 곧 항복하였다. 그 후 7월18일에 의자왕도 항복하였다.  중앙군의 전멸과 왕성이 무너지면서 거의 모든 왕족과 의자왕의 측근 최고 지배층들이 모두 포로가 되자 가망없다고 여기고 의자왕을 배신한 웅진성 방령 '예식'에 의해 항복이 진행되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삼국사기'는 의자왕이 태자 및 웅진방령군을 거느리고 스스로 웅진성을 나와 항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웅진도독부                   熊津都督府

 

 

 

660년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오도독부(五都督府)를 두었다. 그 후 오도독부제를 개편하여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최고통치부로 하고, 그 밑에 동명(東明), 지심(支尋), 노산(魯山), 고서(古西), 사반(沙泮), 대방(帶方), 분차(分嵯)의 7주(州)와 52현(縣)을 두어 백제왕자 '부여융 (扶餘隆) '을 도독으로 임명하여 백제의 유민들을 무마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신속한 백제고지 경략작전(經略作戰)에 따라 많은 백제의 옛땅이 신라에게 잠식되어 감에 따라 통치의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문무왕 17년인 677년 신라가 남은 영토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웅진도독부도 자연히 없어졌다. 

 

                                                 

 

 

 

                                                     의자왕의 최후

 

 

 

660년 음력 7월18일, 백제 최후의 임금 의자왕(義慈王)은 피신해 있던 웅진성(熊津城 .. 지금의 공주 공산성)에서 나와 당나라 군사에 항복하였다.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의하여 왕도 사비성(사비성 .. 부여)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웅진성에 들어 온지 불과 5일만의 항복이었다.

 

 

 

                                                      신하의 배반

 

 

 

나당연합군의 본격적인 공격도 없었고, 또 웅진성(熊津城 .. 지금의 공주)은 워낙 전략적 요충지이어서 더 버티어 낼 수 있었는데도 너무 쉽게 백기를 든 것이다. 더욱이 가까운 임존성(임존성 .. 예산)에는 백제가 망하고도 3년간이나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막아 낼 만큼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항복을 한 것이 이해하기 힘들다. 특히 의자왕은 멸망 5년 전 까지도 신라의 30여 성(城)을 빼앗는가 하면 신라의 존립(存立)을 위기로 몰아넣는 등 용맹함과 기개가 넘쳤던 왕이 아니던가.

 

 

학자들은 이에 대하여 두 가지 가설(假說)을 내 놓는다. 하나는 계백(階伯)장군마저 잃어버릴 만큼 전세(戰勢) 회복의 가능성이 없다고 체념해 버린것, 두 번째는 의자왕이 피신해 있던 웅진성의 방위사령관 이식(이식 .. 또는 예식(예식)으로 되어 있는 기록도 있음)의 배반설(背叛說)이다.  학자들은 구당서(舊唐書) '소정방편(蘇定方편)'의 기록에 ' 이식(이식)이 의자왕을 데려와서 항복하였다 '는 구절에 유의하고 있다. ' 데려왔다 '는 것은 의자왕은 오지 않으려 했는데 반 강제적으로 성사시켰다는 의미이다.

 

즉, 항복의 주체는 ' 이식(이식)'이라는 배반자(背叛者)이었고, 그래서 그는 당나라에 들어가 대장군(大將軍)까지 오르며 영화를 누렸음이 그것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식(이식)이 의자왕에게 항복하라고 하니, 의자왕이 칼로 자기 동맥을 끊으려 했다고 전해진다. 의자왕답게 자결(自決)을 시도한 것이다. 

 

 

                                                 당나라로 압송되다

 

 

 

사비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당군(唐軍)의 포로가 됨으로써 백제는 실질적으로 멸망하게 되었다. 백제 고토의 각지에서 부흥운동이 줄기차게 일어났지만, 백제의 운명은 의자왕의 항복(降服)으로 일단락되었다. 660년 8월2일 사비성에서 의자왕은 섬돌 아래에 꿇어 앉아 백제의 수많은 신하들과 당(唐)과 신라(新羅)의 군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라 태종 무열왕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 그리고 당나라의 소정방(蘇정方)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에게 술을 따라 바치는 치욕적인 항복의식(降服儀式)의 주인공이 되었다.

 

 

사비성에서 항복의식을 거행한 후 신라(新羅)는 의자왕을 바로 처형할 것을 요구했지만, 소정방(蘇定方)은 포로인 의자왕(義慈王)을 당나라 고종(高宗)에게 끌고 가서 바칠 생각으로 처형하지 않았다. 신라군으로부터 목숨을 건진 의자왕은 사비성에서 한 달 정도 있다가 660년 9월3일 12,807명의 백성들과 하께 당나라 군대의 포로가 되어 배를 타고 당(唐)으로 끌려갔다.

 

약 보름 동안의 항해를 거쳐 9월18일 중국 산동성 봉래에 도착한 의자왕은 육로(陸路)로 2,000여 리(里)의 길을 따라 당(唐) 고종(高宗)이 머물고 있던 낙양성(洛陽城)으로 향했다. 40여 일 동안 걸어서 낙양(洛陽)에 도착한 의자왕은 다시 한번 당(唐)고종(高宗)에게 포로로 바쳐지는 수모를 당하였다. 의자왕이 당(唐) 고종(高宗)에게 포로로 바쳐지는 장면은 '구당서(舊唐書)와 일본서기(日本書記)에 실려 있다. 

 

구당서(舊唐書)에는 ' 소정방(蘇定方)이 백제왕 부여의자(扶餘義慈)와 태자 등 58명을 측천문에서 포로로 바치자 꾸짖고는 사면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日本書記)의 기록은 당시 낙양(洛陽)에 와있던 왜(倭)의 사신 이길련박덕(伊吉連博德)이 직접 현장에서 보고 남긴 것으로 ' 11월1일 장군 소정방(蘇定方) 등이 백제왕 이하 태자 융(隆)과 여러 왕자 13인, 대좌평 사택천복, 국변성 이하 37인 등 50여 명을 끌고가서 조당(朝堂)에 바치고, 서둘러 천자(天子)에게 끌고 가니, 천자의 은칙으로 그 자리에서 풀어주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의자왕의 최후

 

 

 

660년 11울1일, 백제 원정을 마치고 개선한 소정방(蘇定方)은 낙양성의 황궁 정문인 측천문으로 의자왕을 끌고 가 고종(高宗)과 측천무후(則天武后)에게 전리품(戰利品)으로 바치고 백제 원정 결과를 보고하였다. 전쟁포로는 대개 죄를 물어 처형하거나 유배를 보내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이었다. 그러나 의자왕과 백제포로들은 처형되지 않았다. 당 고종(高宗)은 비록 죄를 물어 엄중히 꾸짖었지만 모두 사면하였다. 

 

의자왕 일행이 사면(赦面) 받은 것에는 소정방의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소정방은 자기가 사로잡은 포로들을 처형하지않고 모두 사면하도록 황제에게 늘 주청하여 허락을 받아냈다. 의자왕은 포로로 바쳐진 뒤 즉시 사면되었다. 그렇지만 며칠 만에 바로 병(病)으로 죽었다.

 

의자왕의 죽음은 나당연합군의 침공을 받아 사비도성이 함락되고 웅진성으로 피신했다가 자신의 신하(臣下)로 부터 배신을 당하여 포로가 되고, 당나라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겪었을 극심한 정신적 충격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게다가 그가 이미 60대를 넘어선 고령(高齡)의 몸으로 바닷길과 육로로 두 달여에 걸쳐 당나라로 끌려오는 동안에 피로가 누적되어서 생긴 병이 직접적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의자왕이 죽은 뒤 당(唐) 고종(高宗)은 백제의 신하들이 가서 곡(哭)을 할 수 있도록 하였고, 낙양 북쪽의 북망산(北忘山)에 장사를 지내고 비석도 세워주었다. 의자왕은 오(吳)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손호'와 남조 진(晉)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진숙보'의 무덤 곁에 묻혔다는 기록이 있으나 아직 찾지못하고 있다.  앞으로 의자왕의 묘지명이나 비석이 발견된다면 의자왕의 삶과 백제 멸망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백제의 멸망에 대하여는 신라 화랑 관창(官昌)의 무용담과 김유신의 활약을 강조하는 등 신라(新羅)의 입장에서 윤색되어 널리 알려져 왔다. 백제는 3000궁녀로 대표되는 사치와 방탕, 성충과 흥수 와 같은 충신의 간언(諫言)을 귀담아 듣지 않은 무능한 군주, 폭군 의자왕으 실정으로 인해 멸망하ㅒ다고 평가를 받아왔다. 이런 일반적인 평가는 사실 후대에 신라의 입장에서 멸망한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을 지나치게 깎아내린 부분도 있다. 그렇지만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여 백제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트린 무능한 군주라는 책임은 면할 수 없다.

 

 

국가의 사직을 지켜내지 못한 백제의 마지막 왕이라는오명(汚名)은 백제가 멸망한지 13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달라지지 않고 있고,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의자왕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실상 어느 시대,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망국(亡國)의 책임을 떠안은 모든 군주들에게 가해지는 비판과 다르지 않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한 나라를 지켜내지 못한 군주(君主)에 대한 평가는 가혹할 수 밖에 없다. 일각에서 의자왕에 대한 동정의 눈길을 보내기도 하지만 멸망한 나라의 군주를 성군(聖君)이라 칭송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의자왕은 앞으로도 백제 멸망의 장본인으로 역사의 지탄을 받는 군주로 남을 것이다.                 

 

  

 

 

                                          삼천궁녀               三千宮女

 

 

 

백제 멸망 당시 의자왕이 술과 여흥에 빠져 국사(國事)를 돌보지 않아 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상징적 존재로 낙화암(落花巖)에서 투신(投身)한 '3천 궁녀'가 거론되곤 하지만, 지도층의 분열과 학민자(虐民者)의 최후(最後)를 역사의 필연성으로 기술했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의자왕이 마지막까지 군대를 보내어 싸웠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술과 여흥예 빠졌다는 이야기는 없다.   

 

 

 

 

 

 

 

부여의 부소산(扶蘇山)은 높이는 106m로 산(山)이 아니고 조그마한 언덕이다. 이 언덕에서 바로보면 백마강(白馬江)이 굽이굽이 흐르고 옛 백제의 궁녀(宮女)들의 아름다운 절개가 떠오른다. 여기에 고란사(皐蘭寺)가 있는데, 언제 창건(創建)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고 전해 진다. 백제 제17대 아신왕(阿莘王) 때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다. 또는 낙화암에서 목숨을 던진 백제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고려(高麗) 초기에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낙화암                    落花巖

 

 

낙화암(落花岩)에 대하여 언급한 최초(最初)의 기록은 일연(一然)스님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태종춘추공조(太宗春秋公條)인데, ' 궁녀들이 왕포암(王浦巖)에 올라 물로 뛰어들어 타사암(墮死巖)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고 적혀 있다. 이후 고려시대에 낙화암(落花闇)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안정복의 '동사강목' 권2에는 '여러 비빈(諸姬)'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3천 궁녀를 맨 처음 언급한 글은 윤승한(尹昇漢)이 지은 소설 김유신(金庾信. 1941년)이고, 최초의 공식기록은 1962년에 펴낸 '국사대사전'이다.   

 

 

 

 

 

 

 

 

한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왕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이기는 어렵지만, 의자왕은 유독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백제를 멸망으로 이끌었던 비난을 한 몸에 받아왔다. 백제인의 시각에서 서술한 역사서가 전하지 않고, 백제와 적대관계이었던 신라(新羅)에 흡수 통합된 뒤 신라인의 시각에서 전하는 적장(敵將)의 모습이기에 부정적인 것을 불가피하더라도 그 왜곡(歪曲)의 정도가 유난히 심하다. 

 

 

 

                                          3천 궁녀                    三千宮女

 

 

 

의자왕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산천궁녀'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의자왕의 궁녀이었던 3,000명의 여인들이 사비성이 함락되자 낙화암(落花巖)에 몰려가 뛰어내리는 장면이 마치 꽃잎이 흩날리는 것 같았다는 전설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러나 당시 사비성(泗砒城 ..부여)의 인구가 5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또 조선시대에도 궁녀의 수가 최대 600명 정도였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사비성에 3,000명의 궁녀가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조선 중기의 시인이었던 민제인(閔濟仁)의 ' 백마강부 (白馬江賦)'라는 시에서 ' 궁녀 수 삼천 '이라는 말을 처음 찾을 수 있는데, 이는 문인(文人)들의 문학적 상징어(像徵語)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보기' 의자왕편을 따르면, 백제 멸망 당시 백제의 가구(家口) 숫자는 76만 호(戶)이었다. 1호(戶)당 인구를 넉넉히 잡아 5명으로 잡아도 백제의 총인구는 약380만 명이었다. 멸망 당시 궁녀의 숫자가 3,000명이었다면 인구 1,00명당 1명은 궁녀이었다는 말이 되는데, 상식적으로도 불가능하다.

 

멸망 당시 백제보다 영토나 인구 면에서 훨씬 더 컸던 조선에서도 '삼천궁녀'는 절대로 나오지 않았다. 실록에서 궁녀 숫자를 살펴 보면, 태종(太宗) 때인 15세기 초에는 ' 수십 명', 세종 때인 15세기 초중반에는 ' 100명 미만 ', 인조(仁祖) 때인 17세기 초중반에는 230명이었다. 국민적 지탄의 되면서까지 온갖반발을 무릅쓰고 궁녀(宮女)의 증원을 감행한 영조(英祖) 때의궁녀 수가 실학자 이익(李瀷)의 '성호사설'에 따르면 684명이었다. 이 기록은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깨지지 않았다.        

 

 

 

 

 

 

 

 

고대 동아시아에서 '삼천'이라는 숫자가 실제로 3,000을 가리키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만큼 많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런 표현을 사용할 따름이다. 서경(書經)은 고조선 시대에 해장하는 고대 중국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서경 '주서(周書)'편에서 주(周)나라 문왕(文王)은 ' 은나라 폭군 주왕(周王)은 신하 억만 명을 두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도 억만 개이다. 나는 신하 3천 명을 두고 있지만, 마음은 하나뿐이다 '라고 말하였다. 신하 억만 명이 제각기의 마음을 갖고 있는 은(殷)나라와 달리, 주(周)나라는 신하 3천 명이 한 마음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말이다. 즉 상대적으로 많다 또는 상대적으로 적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지, '삼천'이 실제 3,000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동양에서 3,000의 의미

 

 

 

당나라 시인 이백(이백)도 ' 삼천'을 추상적 의미로 사용하였다. 일례로, 그는 관직을 떠난 뒤에 이러한 시(시)를 지었다. 白髮三千丈  ..  백발 삼천 장은   /   緣愁似箇長  .. 수심으로 그리 길어졌다   /   不知明鏡裏  ..  모르겠다. 맑은 거울 속   /   何處得秋霜  ..  그 어디서 가을 서리 생기는가

 

 

이백(李白)이 강물( 시에서는 맑은 거울로 표현)에 비친 자신의 백발(가을 서리)를 보고서 한탄하며 지은 시(詩)이다. 이 시에서 그는 하얀 머리를 '백발삼천장'이라 비유하였다. 1장(丈)은 3미터이다. 시인이백(李白)의 머리카락이 실제로 삼천장(三千丈)이었다면... 많은 한국인들은 이백의 시(詩)에 과장법이 많다고 하지만, 이것은 이백(李白)만의 특징이 아니라 고대 동아시아 문인(文人)들의 공통점이었다.

 

손오공(孫悟空)이 주인공인 오승은(吳承恩)의 서유기(西遊記)에는 당나라 태종이 등장한다,. 서유기 속의 당태종은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까지 갔다가 극적으로 되살아났다. 서유기 제11회에 따르면, 살아서 돌아온당태종은 선정(善政)을 펴겠다는 다짐의 표시로 백성들에게 온갖 은전을 베풀었다. 그 은전 중 하나는 '노처녀 삼천궁녀(老處女 三千宮女) '를 풀어 준 것이다. 이것은 소설 속의 당태종이 그만큼 ' 많은 궁녀들'에게 은전을 베풀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법에 불과하다. 서유기의 작가 '오승은'은 '많은 궁녀'를 가장 잘 묘사하기 위하여 '삼천'이란 숫자를 생각한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三千'을 추상적 의미로 사용하였다. 태종 14년 6월8일자(1414년 6월24일)의 태종실록에 따르면, 태종 이방원의 최측근인 이숙번(李叔蕃)은 태종에게 ' 중국 천자에게는 궁녀가 3,000인데, 전하께서는 고작 궁녀 수십 명을 두고 그것을 많다고 하십니까 ?'라는 취지의 말을 하였다. 당시 명나라 황궁에는 삼천명의 궁녀가 없었다. 그저 관용적으로 사용했을 뿐이다. 이숙번(李叔蕃)은 그러한 중국인들의 화법을 차용했던 것이다.        

 

 

 

 

 

 

 

 

 

 

 

출처 : 김규봉 ... 사는 이야기
글쓴이 : 非山非野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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