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無學, 1327년 ~ 1405년)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승려이다. 속성은 박, 속명은 자초(自超), 법명은 무학이다.
18세에 소지선사 밑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용문산(龍門山) 혜명 국사로부터 불법을 배운 뒤 묘향산의 금강굴에서 수도하였다. 공민왕 때 원나라의 연경에 유학하여 인도의 지공 선사와 당시 원나라에 가 있던 혜근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고려에 돌아와서 오대산(五臺山) 등지를 순례하였다. 나옹을 만나 서산(西山) 영암사(靈巖寺)에서 수년을 머물다가 1356년(공민왕 5년) 돌아왔다.
1392년(조선 태조 1년) 조선 개국 후 왕사가 되고 회암사(會巖寺)에 있다가, 그 다음해에 수도를 옮기려는 태조 이성계를 따라 계룡산 및 한양을 돌아다니며 땅의 모양을 보고 마침내 한양으로 정하는 데 찬성하였다. 1397년 태조가 그의 장수를 기원하는 탑을 회암사 북쪽에 세워주었다. 만년에는 금강산 금장암에 들어가서 여생을 마쳤다.
무학대사(I) | |
출전: 김두규, 조선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궁리출판사 2000, 36-40 축약 생애 무학의 일대기에 대해서는 범해(梵海: 1820-1896) 선사가 지은 [동사열전]에 비교적 자세하게 나오나 기괴담에 치우쳐 정확한 사실은 아니다. 무학에 관한 야사나 설화 등이 비교적 많이 전해옴에도 불구하고, 무학 자신이 직접 쓴 글이나 그의 제자들이 무학에 대해 쓴 글이 오늘날 거의 전하지 않기 때문에 무학에 대한 것은 왕조실록에 단편적으로 언급된 것을 바탕으로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 무학에 대해서 가장 믿을 만한 문헌은 변계량이 쓴 비문이다. 무학이 입적한 뒤 5년후인 1410년 변계량이 왕명으로 비문을 지어 회암사에 세웠기 때문에 무학에 관한 가장 정확한 기록이다. 변계량의 비문을 참고하여 무학의 일대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름은 박자초(朴自超), 경상도 삼기군(三岐郡; 현 합천군) 사람으로 그 아버지 이름은인일(仁一), 어머니는 고성 채씨, 1327. 9월 20일 생, 18세 출가하여 묘향산 등지에서 수도하다가 1353년 중국 연경으로 유학. 중국에서 인도의 고승 지공선사에게게 사사. 1356년 귀국. 1376년 혜근(惠勤)이 회암사에 초청하여 수좌로 삼으려 함. 1392년 태조 이성계에 이해 왕사로 책봉됨. 1397년(태조6년) 무학의 부도탑을 회암사 북쪽에 만듦. 1398년 용문사에 머묾. 1403년 금강산 진불암에 머묾. 1405년(태종 5년) 입적. 1407년(태종 7년) 이화(李和)가 자초의 유골을 회암사에 봉안.' 무학의 사람됨에 대해서 변계량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자초는 성질이 질박하여 문채나게 꾸미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다. 스스로 봉양하는 것을 박하게 하고, 남은 것은 곧 남에게 베풀어 희사하였다.(...)또 그가 사람을 접하는데 공손하며, 남을 사랑함이 정성스러움은 지극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힘써서 억지로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대체로 그의 천성이 그러하였던 것이다." 무학이 언제 누구를 통해 풍수를 공부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고려 때 비보풍수가 유행하였고 대부분의 사찰들이 비보사찰이었을 볼 때 무학의 풍수공부 역시 당연한 것이었으리라는 추측이다.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그 다음해인 1393년에 1월 10일 왕사로 무학을 임명한다. 한달 후 이성계는 "땅을 보아 도읍을 세우려 할 때(相土建都)" 무학에게 함께 갈 것을 명하지만 무학대사는 사양한다. 이때 이성계는 "예나 지금이나 서로간의 만남은 반드시 인연 따라 이루어진 것인데, 세상 사람들의 땅보는 솜씨가 어찌 대사의 도안(道眼)과 같겠느냐"하여 계룡산과 도읍지 후보지들을 수행하게 한다. 이후 무학대사는 종종 조선 풍수사에 언급이 되지만 그렇게 자세하게 알려진 바가 없음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대로이다. 국도 풍수 태조 이성계는 무학으로 하여금 신도선정에 항상 호종케 하였음은 앞에서 밝힌대로이다. 1393년 1월 10일 왕사로 임명된 무학은 열흘 후인 1월 21일 태조 이성계를 따라 회암사를 출발하여 2월 11일 계룡산 신도읍 예정지를 둘러본다. 신도읍지는 현재 육해공군 3군 본부가 들어서 있는 곳으로 충남 논산군 두남면 부남리 석계리 일대로 사방 10 km의 산야평야지대이다. 이때 태조가 무학에게 이곳에 대한 의견을 묻는 장면이 실록에 나타난다: "임금이 탄 가마가 새 도읍의 중심인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지세를 두루 살펴보았다. 그리고 왕사 무학에게 물으니 무학이 대답하기를 '능히 알 수 없습니다'라 하였다." 계룡산 신도읍지를 살피는데 관여한 사람으로 무학 이외에 대신 남은, 권중화, 성석린 그리고 직업풍수관료 이양달이었다. 여기서 무학은 별다른 역할을 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계룡산 신도안이 도읍지로 선정되어 그해 3월부터 공사가 진행되었으나 하륜의 신도안 도읍지 불가 상소로 공사는 중단되고 만다. 하륜은 이곳이 국역의 남쪽으로 치우쳐 있고, 동서북이 서로 떨어져 있으며, 이기론 풍수에서 꺼려하는 '수파장생쇠패입지(水破長生衰敗立至)'에 해당된다는 것이었다. 그후 조선의 도읍지로 한양과 개성 그리고 현 연세대, 신촌일대인 무악 세 곳이 등장하게되는데 무학이 개성과 무악에 대해서 언급한 글이 전혀 없다. 그가 도읍터 후보지로서 언급한 곳은 한양이다. 1394년 8월 태조가 도읍터를 한양으로 정하려 할 즈음 무학을 불러 그의 의견을 묻는다: "임금이 한양의 옛 궁궐터에 집터를 살피었다. 산세를 관망하다가 윤신달 등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떠냐?' 그가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 경내에서는 개성이 제일 좋고 여기가 그 다음입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북서쪽이 낮아서 물과 샘물이 마르는 것입니다.' 임금이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개성인들 어찌 부족한 점이 없겠는가? 이제 이곳의 형세를 보니, 왕도가 될 만한 곳이다. 더욱이 조운하는 배가 통하고 사방이 고르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다.' 임금이 또 왕사 무학에게 물었다. '어떠합니까?' 무학이 대답하기를 '여기는 사면이 높고, 아름답고. 중앙이 평평하니,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하소서.' 임금이 여러 재상들에게 분부하여 의논하게 하니, 모두 말하였다. '꼭 도읍을 옮기려면 이곳이 좋습니다.'” 무학은 계룡산과 한양 터를 살피는데 참가하였지만 함께 참가한 대신들이나 풍수 술사들과는 달리 별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 것이 없어 그의 풍수지리관이나 유파를 가늠할 수가 없다. 무학과 조선 도읍지 선정에 관련하여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서술한 책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들이 왕조실록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야사로서 참고사항으로만 간주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중환의 [택리지]이다. 택리지에서는 무학이 한양전도를 전적으로 혼자서 결정한 것처럼 묘사되어있다: "조선이 고려에서 선양을 받은 뒤 중 무학을 시켜 도읍을 정하도록 하였다. 무학이 백운대에서 맥을 따라 만경대에 이르고, 다시 서남쪽으로 비봉에 갔다가 한 개의 비석을 보니 '무학이 맥을 잘못 찾아서 여기에 온다(無學誤尋到此)'라는 여섯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곧 도선이 세운 것이었다. 무학은 드디어 길을 바꿔 만경대에서 정남쪽 맥을 따라 바로 백악산 밑에 도착하였다. 세 곳 맥이 합쳐져서 한 들로 된 것을 보고 드디어 궁성터를 정하였다." 그러나 한양도읍 과정에서 무학은 큰 역할을 하지 못하였음은 왕조실록의 도처에서 나타난다. 또한 택리지에서 무학이 북한산 비봉에서 '무학이 맥을 잘못 찾아서 여기에 온다'라는 비문을 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일찍이 '이것은 무학이 왕심하여 여기에 왔을 때의 비가 아니라 신라 진흥왕 순수비였음을 밝혔다'. 무학과 한양 정도와 관련하여 야사에 전해지는 것 가운데 자주 이야기되는 것이 정도전과의 주산논쟁이다. 차천로의 [오산설림초고]은 다음과 같이 이를 기록하고 있다: "태조는 크게 기뻐하여 스승의 예로써 대접하고 곧 도읍을 정할 땅에 대해 물었다. 무학은 점을 쳐 '인왕산을 진산으로, 백악과 남산을 좌우 청룡백호로 하십시오'라 하였다, 정도전이 이것을 어렵게 여기며 '옛부터 제왕은 모두 남면을 하여 다스렸지, 동향이란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하였다. 무학이 말하기를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200년이 지나서 내 말을 생각할 것입니다 |
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매일하우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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