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혜왕후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 1437년~1504년 음력 4월 27일)는 조선 덕종(德宗·추증왕)의 왕비이다. 시호는 인수휘숙명의소혜왕후(仁粹徽肅明懿昭惠王后)이며, 인수대비(仁粹大妃)로 잘 알려져 있다.
서원부원군 양절공 한확(西原府院君 襄節公 韓確)의 둘째 딸로,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여성을 위한 유교 서적인 《내훈(內訓)》의 저자로 유명하며, 불교 옹호론자로 불교 억압 정책에 강력한 반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서오릉 내에 위치한 경릉(敬陵)으로 남편 덕종과 쌍릉을 이루고 있다.
[편집] 생애
1437년에 태어났다. 소혜왕후의 큰 고모는 당시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후궁이었던 강혜장숙여비(康惠莊淑麗妃)였으며 작은 고모 역시 선덕제(宣德帝)의 후궁인 공신태비(恭愼太妃)였다. 또한 그녀의 언니는 세종의 둘째 서자인 계양군과 혼인하는 등 그녀의 가문은 양국의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었고 한확은 명나라와의 외교를 전담하던 당시의 외교관으로서 명나라의 총애를 바탕으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1450년에 수양대군의 큰아들인 도원군과 혼인했으며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양위(讓位)를 받아 즉위하고 아들인 도원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자 자신도 세자빈이 되어 월산군과 자을산군을 낳았으나 남편인 의경세자가 갑자기 요절하자 정빈(貞嬪)이란 이름을 받고(나중에 수빈(粹嬪)으로 고침) 궁궐을 떠나 생활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야심이 대단했던 그녀는 한명회의 넷째 딸(공혜왕후)과 자을산군을 혼인시켜 혼인관계를 맺고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예종(睿宗)이 승하한 후에 한명회의 강력한 추천과 시어머니인 정희왕후의 지지에 힘입어 당시 원자였던 예종과 안순왕후의 아들 제안대군 대신 성종이 즉위할 수 있었다.
성종이 보위에 오르자 정희왕후는 대왕대비가 되어 미성년이던 성종을 대신하여 조선 개국 이래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였고 예종의 계비인 안순왕후 역시 인혜왕대비(仁惠王大妃)로 책봉되었으며 소혜왕후는 아들인 성종이 즉위 후 친아버지인 의경세자를 의경대왕을 거쳐 덕종으로 추존하면서 덕종의 왕비인 그녀 역시 인수왕비를 거쳐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가 되었다.
소혜왕후와 안순왕후는 성종 즉위후 같은 왕대비로 책봉을 받았으나 정희왕후가 두 왕대비의 서열을 형제의 서차로 따져야 한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소혜왕후가 안순왕후의 윗동서이므로 왕실의 서열상으로는 인수왕대비(소혜왕후)가 인혜왕대비(안순왕후)의 윗전이 되었다.
인수대비의 성격은 강직했던 것으로 유명하였으며 성종의 정비(正妃)인 공혜왕후의 승하 이후 계비로 책봉된 중전 윤씨가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급기야는 성종의 용안에 손톱 자국을 내는 지경에 이르자 진노한 인수대비는 중전 윤씨를 폐서인하여 사가로 내쫓았으며 폐비 윤씨를 투기하였던 성종의 다른 후궁들과 함께 성종으로 하여금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리게 하였다. 그러한 까닭으로 인수대비는 당시 원자이자 폐비의 소생인 연산군의 왕위 계승에도 부정적이었으며 성종의 제2계비인 정현왕후의 소생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총애하였다.
1494년,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소혜왕후는 대왕대비가 되었다. 왕세자 시절 자신이 정현왕후의 아들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연산군은 즉위 이후 자신이 폐비 윤씨의 아들임을 알게 되고 급기야는 폐비 윤씨를 모함하여 사사(賜死)시킨 귀인 정씨(貴人 鄭氏)와 귀인 엄씨(貴人 嚴氏)를 마구 폭행하여 죽인 뒤, 그 시체를 찢어 젓갈로 만들었고 그 뒤에도 귀인 정씨의 아들인 안양군(安陽君)과 봉안군(鳳安君)을 강제로 대왕대비전으로 끌고가 인수대왕대비에게 술잔을 강제로 따르게 하였으며 그 뒤에도 '왜 나의 어머니를 죽였느냐'고 인수대왕대비에게 고함을 지르며 행패를 부렸다.
이후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하려하자 병상에 있던 인수대왕대비가 이를 꾸짖었으나 화가 치밀어오른 연산군은 인수대왕대비의 가슴을 밀쳤다. 이에 인수대왕대비는 얼마 후 그 충격으로 68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인수대왕대비가 승하한 뒤에도 연산군은 인수대왕대비의 장례를 간략하게 치르고 계모인 자순대비(정현왕후)에게도 행패를 부리는 등 패륜의 극치를 보이다 소혜왕후 승하 2년 뒤인 1506년에 박원종과 유순정 등에 의해서 폐위되었다.
[편집] 경릉
소혜왕후의 능은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내에 위치한 경릉(敬陵)으로 남편인 덕종과 같은 묘역에 묻혀있으며 조선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왕비가 우측(누워있는 시신 기준)에 안장된 능으로 조성되어 있다. 본디 왕릉을 쓸 때는 우측에 왕을, 좌측에 왕비를 안장한다. 살아있을 때는 좌측(앉아있는 사람 기준)이 상석이니 죽으면 그 반대라고 여겼던 것인데[출처 필요], 경릉은 부인인 소혜왕후가 상좌인 우측에 안장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승하할 당시의 신분 차이 때문인데, 덕종의 경우는 승하할 때 세자의 신분이었지만, 소혜왕후의 경우는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로서 승하했기 때문에 군신 관계에 따라 위가 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남편 덕종의 무덤에는 석물도 문인석만 서 있다. 무인석은 왕권의 상징이라 왕이 되지 못한 세자, 세자빈 이하의 무덤에는 세울 수 없다. 소혜왕후 능상의 석물은 무인석까지 갖추고 있다.
[편집]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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