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직
김종직(金宗直, 1431년 ~ 1492년)은 조선의 성리학자이다. 자는 계온(季溫)·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선산(善山, 일명 일선)이다.
[편집] 생애
1431년(세종 14년) 외가(外家) 밀양에서 김숙자의 막내로 출생하였으며, 1459년(세조 5) 문과에 급제하여 성종 초에 경연관·함양군수(咸陽郡守)·참교(參校)·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으며, 도승지·이조 참판·동지경연사·한성부윤·공조 참판·형조 판서·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영남학파의 종조(宗祖)로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성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아 제자들을 관직에 등용시킴으로써 훈구파와 심한 대립을 일으켰다.
[편집] 조의제문
그는 일찍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었는데, 그가 죽은 지 6년 후인 1498년(연산군 4년)에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이것을 성종실록 사초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1498년 연산군 4년 7월 13일 김일손의 공초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은 부분이 문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
“ |
노산(魯山)의 시체를 숲속에 던져버리고 한 달이 지나도 염습(斂襲)하는 자가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는데, 한 동자가 밤에 와서 시체를 짊어지고 달아났으니,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가 없다. |
” |
조의제문 내용은 항우에게 살해당하여 물에 던져진 회왕 즉, 의제(義帝)를 조상한다는 제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꼬는 내용으로, 살해당하여 물에 던져진 단종에 대한 묘사와 유사한 면이 있어 세조와 후인들의 정통성을 부정당하는 내용이었다.
또한 김종직은 유유의 찬탈을 따른 신하를 "유씨(劉氏)가 우리 임금이네 하면 저 푸른 하늘을 속일 수 있다고 하였겠지" 힐난하고, 이렇게 이어갔다.
“ | 요순의 훈풍을 높이도 끌어댔지만(高把堯舜薰)/선위를 받는 게 끝내는 역적이었네(受禪卒反賊)/역사는 글을 교묘하게 꾸며서(史氏巧其文)/거북 기린 용 봉황이 부응하였다고 유인하였네(諉以四靈應) | ” |
유유가 요순의 선위를 내세웠지만 실은 반역이며, 그에 따른 찬양도 모두 거짓이라고 한 것이다. 유자광은 이 부분을 세조와 훈구공신을 비방한 증거로 들이댔다. 섬뜩한 머리놀림이며 무서운 올가미치기였다.
이로 말미암아 김종직은 부관참시(관을 부수어 시체의 목을 벰)를 당하고 많은 문집이 소각되었으며, 그의 제자들이 모두 참화를 당하였다. 김종직은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수괴가 되고, 사초에서 「조의제문」을 언급한 김일손·권오복·권경유 등은 참형을 당하였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김종직에게 배운 적이 있고 과거를 보거나 벼슬을 할 때 지도와 자문을 받은 후학들은 대부분 '난언(亂言)'과 '붕당(朋黨)' 죄에 걸려 죽거나 유배를 갔다. 이로서 김종직은 '사림의 영수'란 칭호를 받게 되었다.[2]
그러나 1689년(숙종 15년) (領議政)에 증직(贈職)되고, 1708년(숙종 34년) 문간(文簡)에서 문충(文忠)으로 시호가 내려졌다. 시호(諡號)는 정2품 이상 대신에게만 내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밀양의 예림서원(禮林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등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점필재집(畢齋集), 유두유록(遊頭流錄),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이 있다. [2][3]
총재관으로서 《동국여지승람》 55권을 증수하였고 서화에도 뛰어났다.
[편집] 평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은 포은 정몽주와 야은 길재 문하로 후진을 양성하며 조선 유학의 맥을 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내용면에서는 길재(吉再) 및 아버지의 학통을 이어받아 학문 경향은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주안으로 하는 실제적 방면에 치중한 것이었다는 평이다. [3]
하지만 잘알려지지 않은 김종직에 대한 비평도 있다. 이것을 알려면 김종직이 사림(士林)의 영수이므로 사림에 대해서 알아야한다. 사림에 대해서 논하길 조선 후기 연암 박지원(朴趾源)은 『연암집(燕巖集)』에서 “학문을 강론하고 도(道)를 논하는 사람들을 사림(士林)이라 한다”라고 정의한 것처럼 학문하는 선비를 뜻했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태조~세종실록 등에 ‘사림에서 애석하게 여겼다(士林惜之)’ ‘사림이 비루하게 여겼다(士林鄙之)’ 같은 표현이 나오는 것처럼 ‘학문하는 재야의 양반 사대부’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들은 세조 때 등장한 부패한 훈구(勳舊) 공신 세력과 자신들을 구별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성종 무렵 사림은 훈구 공신에 반대하는 신진 정치세력을 뜻하는 정치적 용어로 바뀌게 되었다.
그런 정치적 사림의 선구 격이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이었다. 김종직은 성종 8년(1477) 과거에 응시하러 서울로 올라가는 자신의 문인(門人)들에게 ‘우리 당에는 뛰어난 선비가 많다(自多吾黨多奇士)’고 말한 것처럼 자주 ‘우리 당[吾黨]’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처럼 조선 초기시대에 살았던 김종직은 인정받는 요즘으로 말하면 '사림(士林)의 초대 당수'였다.
하지만 김종직은 세조 2년(1456) 회시(會試)에서 낙방했다가 세조 5년(1459) 식년문과에 급제해 세조 때 벼슬을 했다. 그 점 때문에 훗날‘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수양대군이 단종을 죽인 것을 비판했을 때 비판할 자격이 있었냐는 비평을 받기도 한다. 또한 스스로 자초한 일로 함양군수 시절 경내 누각에 걸린 유자광의 친필 액자를 불살라 버렸다고 전해지는데 이런 사소한 감정싸움이 참혹한 악연으로 이어져 제자가 죽거나 귀양가고 부관참시라는 혹독한 참화를 겪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 책임을 누가 지을 수 있었겠는가'하는 물음이 지금에 와서도 대두되고 있다. [4]
[편집] 가족 관계
- 부(父) : 김숙자
- 형(兄) : 김종석
[편집] 영남학파의 분류와 영향
영남 지방에는 조선조 이후로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어 여러 학맥이 생겨났다. 그 대표적인 것이 조선 초기의 김종직(金宗直, 1431년 ~ 1492년)을 영수로 하는 영학파(嶺學派)와 중기의 조식(曺植, 1501년 ~ 1572년)을 중심으로 하는 남명학파(南冥學派), 이황(李滉, 1501년 ~ 1570년)을 종주로 하는 퇴계학파(退溪學派), 그리고 장현광(張顯光, 1554년 ~ 1637년)을 주축으로 하는 여헌학파(旅軒學派) 등이 있었다.
영남학파의 학맥은 정몽주(鄭夢周)에서 비롯해 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 김종직의 부)를 거쳐 김종직에로 계승된다. 김종직은 도학과 문학으로 유명해 당대 유학의 조종이 되었다. 김종직은 문하에 많은 제자를 두었다.
저명한 학자로는 현풍의 김굉필(金宏弼)·곽승화(郭承華), 함양의 정여창(鄭汝昌)·유호인(兪好仁)·표연말(表沿沫), 경주의 손중돈(孫仲暾), 선산의 강백진(康伯珍), 성주의 김맹성(金孟性), 안동의 이종준(李宗準), 청도의 김일손(金馹孫), 밀양의 박한주(朴漢柱) 등으로 꼽는다.
당쟁은 붕당(朋黨)이 서로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이건창(李建昌)의 <당의통략>(黨議通略)에 나오는 '붕당지쟁'(朋黨之爭)의 준 말이기도 하다. 또한 붕당은 같은 스승의 제자들로 구성된 편당(偏黨)을 말하므로 붕당은 학연(學緣)과 혈연(血緣) 지연(地緣)으로 뭉친 학단(學團)이라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퇴계(退溪) 남명(南冥) 율곡(栗谷) 우계(牛溪) 학단 등이 있다.
처음에는 기호의 선배당(서인)과 영남의 후배당(동인)으로 갈렸고 이같은 붕당 초기의 동서분당기에는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년~1584년)같은 영향력 있는 학자가 우계(牛溪) 성혼(成渾:1535년~1598년),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년~1593년) 등의 서인과 정치노선을 함께 하면서 동인·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차 동인이 우세해지자 퇴계학파의 남인과 남명학파인 북인이 갈렸다. 퇴계 제자인 유성룡(柳成龍)이 임란 후 주화(主和)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데 비해 남명 제자인 정인홍(鄭仁弘)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 정인홍은 당파가 동서로 양분되자 다른 남명학파와 함께 동인편에 섰고 1589년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를 계기로 동인이 남북으로 분립될 때 북인에 가담하여 영수(領首)가 되었다.
그후 북인은 광해군 조에 기호의 화담(花潭) 학단과 연립정권을 세워 결속력이 약해 사분오열되어 싸우다가 인조반정으로 무너졌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차지한 서인은 북인들이 정권을 독차지했다가 망한 것을 교훈 삼아 소북 등 온건세력을 모아 관제야당인 남인을 만들었다.
숙종 조에 이르면 서인과 남인의 밀고 밀리는 서·남 당쟁이 심하게 일어나 국가가 망하게 생겼다. 숙종 초기 정권을 장악한 남인은 허적(許積)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서인과 대치하고 있었다. 남인에 대한 처벌 문제를 놓고 서인 내부적으로 강경론을 주장하는 측과 온건한 해결을 주장하는 측으로 나뉘었는데 강경이 노론이고 온건이 소론이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老論)과 윤증(尹拯)을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으로 나뉘어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극에 달한 것은 경종 때였다. 숙종 말 경종의 왕위계승을 지지했던 소론과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延礽君:영조)을 지지한 노론 사이에 나타난 정쟁이다. 결국 영조가 즉위하자 입장이 바뀌어 노론들은 소론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영조 때 노론의 4대신이 신원되는 등 소론이 정권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대립을 없애고 국가를 살리기 위해 왕권을 강화하고 4색당파를 고루 쓰자는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이 대두하게 되었다. 정조조에 가서는 4색당파보다는 사도세자를 동정하느냐 여부를 가지고 정국이 세자를 동정하는 홍봉한(洪鳳漢) 중심의 시파(時派)와 세자의 실덕(失德)을 지적하고 영조의 처사를 옳다고 보는 김구주(金龜柱) 중심의 벽파(僻派)로 갈렸다. 그러나 영조와 정조의 전체 시기로 볼 때는 노론 위주로 정국이 운영되어 갔다.
결국 학자들의 학맥에 따라 나눠지는 붕당정치로 조선 초기부터 혼란스럽게 만들었지만 정작 조선이 망한 것은 이런 붕당과 당쟁뿐 아니라 몇몇 노론가문의 외척세도정치에 의해서 였다. [5] '붕당정치(朋黨政治)' 대신 '사림정치(士林政治)'라는 개념으로 조선 중·후기의 정치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듯이 아직도 학자간의 평가는 달라지겠지만 영남학파에 대한 학맥간의 논쟁은 좀더 신중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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