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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명대사(四溟大師)와 생가

장안봉(微山) 2012. 12. 22. 10:37

 

 

 

  사명대사(四溟大師)와 생가

이땅에 최초로 천주교의 십자가를 들여온 사람은 신부도 아니요, 천주교 신자도 아닌 임진난(壬辰亂) 구국의 승장(僧將)인 사명대사였다.

 

 

이법철(bubchul@hotmail.com)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입적한지 4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해마다 사명대사 추모제를 지내는 소수의 승려들과 선남선녀들은 양력 6월 10일 오전 10시부터, 서울 중구 장충단 공원에 모셔져 있는 사명대사 동상앞에서 추모제를 모신다. 사명대사 추모제는 호국정신을 기리며 계승하자는 것이다. 잡초에 묻히다시한 사명대사 동상 앞에, 2009년 대불총(大佛總:회장 박희도)이 추모제에 참여하면서 육군 군악대가 나와서 군악을 연주하기도 한다.

 

사명대사는 1544년 지금의 경남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에서 부친 임수성(任守成)의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본관(本貫)은 풍천(豊川), 속성(俗姓)은 임(任)씨, 속명(俗名)은 응규(應圭)이다. 법명(法名)은 유정(惟政), 자(字)는 이환(離幻), 호(號)는 사명(四溟) 송운(松雲), 탑호(塔號)는 종봉(鐘峰), 시호(諡號)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사명대사는 어린 시절 유학을 배웠다. 7세에 사략(史略)을 배우고, 12세 맹자(孟子)를 배웠다. 일찍이 부모를 사별하고 1556년 김천 직지사(直指寺)에서 출가위승(出家爲僧)의 첫길을 걸었으니 당시 13세 때였다. 1561년 문정왕후의 배려로 시작된 불교의 선과(禪科: 지금의 국가시험)에 장원급제 했다. 당시 나이는 18세였다.

 

임진난을 일으킨 일본의 통치자 ‘히데요시’가 죽고 새로운 통치자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집권하자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은 철병(撤兵)하였다. 그러나 피해국인 조선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 다시는 침략해오지 않는 강화조약을 맺기위해 사신을 보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정대신들은 아무도 사신역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일본에 가면 죽을 것 같아 두려웠던 것이다.

 

당시 왕과 조정대신들은 숙의 끝에 사명대사를 사신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첫째, 일본국은 불교를 숭상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승려인 사명대사를 죽이지 않을 것이고, 둘째, 죽임을 당해도 배불숭유(排佛崇儒)의 나라에서 중하나 죽는 것은 큰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계산에서였다. 사명대사는 왕과 조정대신의 속내를 환히 알면서도 일본행을 마다하지 않았다.

 

사명대사가 일본에 도착하자 일본의 고위관리는 물론, 고승들과 문인들이 대거 환영인파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사명대사를 향해 “설보화상(說寶和尙”을 연호했다. 설보화상이란 설보(說寶; 보배를 말하는), 화상(和尙: 스님)이라는 뜻이다. 사명대사가 무슨 보배를 말하여 일본 전국에 화제가 되었나?

 

임진난 때 일본군은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지휘하는 군(軍)과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지휘하는 군(軍)의 양군이 선봉부대로 침략해왔다. 어느날 사명대사가 조정의 내밀(內密)한 명을 받고 울산에 주둔한 가등청정을 만났다. 가등청정은 사명대사의 명성을 듣고 있던 차에 사명대사를 만나게 되어 시험해보고 싶었다.

 

일본군들에게 창칼을 뽑아 좌우로 도열하게 하고, 그 중간으로 사명대사를 걸어오게 했다. 일본군들은 창칼을 뽑아들고, 죽일듯이 사명대사를 무섭게 노려보게 했다. 그러나 사명대사는 추호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부하로부터 전혀 겁먹지 않는다는 보고를 접한 청정은 내심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며 경탄했다고 한다.

 

가등청정은 사나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거친 음성으로 사명대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조선의 보배는 무엇이오?” 사명대사는 곧바로 답했다. “장군의 목이 조선의 보배지요” 가등청정은 화를 내며, “내목이 왜 조선의 보배라는 말이오?

 

사명대사는 큰소리로 답했다. “장군의 목에 큰 상금이 걸려 온 조선 백성이 장군의 목을 노리고 있으니, 어찌 장군의 목이 조선의 보배가 아니겠소?” 일순 가등청정은 화가 나 칼을 잡았으나, 금방 미소를 보이며 손으로 자신의 목을 만지면서, 내 목이 조선의 보배인줄 모르고, 대사에게 조선의 보배를 물었구려. 내가 어리석었소.” 가등청정은 군막(軍幕)이 떠나가라 앙천대소(仰天大笑)했다. 사명대사도 큰소리로 웃었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의 내용을 들은 일본군들도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 내용, 설보(說寶)의 이야기는 조선에 출병한 전 일본군의 웃음을 자아냈고, 일본에까지 전해졌다. 히데요시도 배를 잡고 웃으면서 “청정이 졌다! 그 기백이 충천한 설보 화상이 보고싶구나.” 도꾸가와도 웃음을 터뜨렸다. 전 일본이 웃었다. 그 설보화상이 일본국에 도착했다니 조야(朝野)의 인사들이 다투워 사명대사의 사인이 있는 시한편을 받으려고 북새통을 이루었다.

 

일본 불교계의 고승들은 사명대사를 특별초청하여 법회를 열고, 사명대사는 법문을 통해 조일(朝日)은 다시는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역설하고, 일본 불교계가 앞장 서줄 것을 요청했다. 이때, 도꾸가와의 장남은 사명대사를 스승으로 모시는 예를 성대하게 마련했다.

 

마침내 사명대사는 첫째 불침략(不侵略)의 강화조약을 맺고, 둘째, 일본군에게 약탈당한 조선의 보물과, 포로로 잡혀간 동포 3500여명을 데리고 귀환하여 선조(宣祖)에게 복명하였으니 우리 역사에 사명대사만한 외교성과를 얻은 분이 또 있을까?

 

사명대사가 도꾸가와를 만나러 왕궁에 갔을 때, 서양의 천주교 신부를 처음 만났다. 사명대사와 신부는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며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 나누었다. 두 사람이 헤어질 때 사명대사는 자신의 목에 건 108염주를 신부에게 신표(信標)로 주었고, 신부는 자신의 목에 걸고 있는 은제(銀製) 십자가를 신표로 건네주었다. 사명대사는 신부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귀국길에 십자가를 소중히 가져왔다.

 

사명대사는 귀국했을 때 스승인 서산대사에게 천주교에 대해 보고 드리면서 은제 십자가를 서산대사에게 증정했다. 서산대사는 은제 십자가를 소중히 보관하다가 입적의 때가 오자 제자들에게 자신의 소지품 일체를 지금의 해남군 대흥사로 보관할 것을 유촉했다. 왕은 대흥사에 표충사(表忠祠)라는 어필을 내려 서산, 사명, 뇌묵의 임난의 구국 영웅들을 제향케 하고, 유물을 보존케 했다. 사명대사가 가져온 십자가도 이때 대흥사 유물관에 보관되었다.

 

1971년 봄, 필자는 처음 대흥사를 찾았다. 대웅전, 표충사에 참배하고 서산, 사명대사의 유물이 있는 유물관(遺物館)을 구경했다. 유물관은 50대 중반의 처사 한 사람이 지키는 소임을 맡고 있었다. 그는 표충사의 구석방에서 기거하며 표충사와 유물관을 지키면서 관람객들에게 유물의 내력에 대해 설명을 했고, 그다음은 자신이 구석방에서 붓글씨로 쓴 부적같은 붓글씨를 보여주며 소지하면 액운이 물러가고 재수가 있다면서 판매하여 용돈을 짭짤하게 벌고 있었다. 유물관을 지키는 처사에게 나이 젊은 여자가 가끔씩 맛있는 음식과 술병을 들고 찾아왔다. 젊은 여자가 올 때는 유물관이 무주공산(無主空山)이었다.

 

필자가 처음 유물관을 찾았을 때도 처사는 방안에서 그녀와 함께 있었다. 필자는 텅빈 유물관에서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가져왔다는 안내문이 있는 십자가를 보았다. 십자가는 족히 20cm는 되어 보였다. 필자는 십자가를 들어 응시하며 사명대사와 서산대사를 간절히 생각했었다.

 

필자는 대흥사에 오래 머물지 않고 행운유수(行雲流水)처럼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20여년이 흐른 후, 대흥사를 찾았다. 예전의 노승과 처사는 이미 이 세상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제행무상으로 낙루(落淚)하면서 표충사를 찾아 세 분 조사(祖師)인 서산, 사명, 뇌묵 스님의 진영앞의 향로에 향을 피우고, 삼배를 마치고 진영을 우러르니, 예전 조사들의 진영이 아니다.

 

최근에 급조된 실력 부족한 화공의 그림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확인해보니 도적이 표충사의 세 분 진영들을 모조리 훔쳐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유물관에는 초의스님의 친필 문집과 입상의 금불상, 비스듬히 앉아 있는 화관을 쓴 관음상도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은제 십자가도 사라져 버렸다.

 

십자가는 어디로 갔을까? 이땅에 사명대사의 손으로 들어왔고, 서산대사의 손에 소중히 간직되었던 십자가는 한국 천주교에 전해졌어야 했다. 그 십자가는 불교와 천주교와의 우의(友誼)의 표상이요, 천주교의 보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라진 것이다. 낙심한 필자는 훗날 소식을 들으니 유물관의 처사가 여인을 만날 때, 도적이 십자가를 훔쳐 화력좋은 불로 녹여서 은값으로 팔아먹고, 또 다른 유품을 훔치려다 들통이 나서 감옥에 갔다는 것이었다. 도적의 안목에는 천주교의 보물이 고작 은덩이로 밖에 안보였던 것같다.

 

사명대사는 해인사 홍제암에서 입적했다.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가져온 십자가가 도적의 손에 의해 불에 녹여 은덩이로 팔렸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통석해 하실 것이다. 사명대사에게 실망을 주는 자가 어찌 어찌 도적뿐일까?

 

장충단 공원에서 해마다 사명대사 동상앞에 필자를 비롯한 소수의 승려들과 선남선녀들이 추모제를 지내어도 조계종 총무원에서는 총무원장은 커녕 간부 한 명도 추모제에 참석하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시정할 일 아닌가?

 

불교계 일각에서는 공산주의 사상적으로 해석, 세미나를 열어 사명대사가 왕인 선조(宣祖)에 충성한 못된 호국불교를 했다고 비난을 퍼붓는 세상이다. 과연 종북좌파 사상은 구국의 사명대사도 반동분자일 뿐인가?

 

생가 :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기라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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