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실천의 근본, 성리학
성리학 하면 탁상공론이나 당파 싸움을 떠올리는 이도 있지만 성리학에 바탕한 강직하고 깨끗한 선비 문화는 한국의 값진 유산이다.
실제로 공자(孔子)가 체계를 세우고, 맹자(孟子)가 크게 일으켰으며 주자(朱子)가 집대성한 성리학은 인격의 완성과 덕치(德治)를 지향하는 바람직한 삶의 길잡이로 선비들은 일상에서 윤리를 실천하고 올곧은 정신을 갖기 위해 수양했는데, 이렇게 조선시대 생각과 실천의 근본이었던 성리학은 고려의 유학자, 안향(安珦)이 처음 전하였다.
안향, 그는 누구인가?
1243년, 흥주(지금의 경상북도 풍기) 죽계 상평리에서 태어난 안향은 어린 시절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고, 예법을 잘 지키는 바른 아이였다.
일찍이 학문의 길에 들어선 안향은 18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해 교서랑(校書郞)으로 벼슬길을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침범으로 삼별초의 난이 일어났던 시기로, 몽골의 침략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했던 고려 조정 안에서는 다시 개경으로 돌아오는 문제를 놓고 치열한 대립이 일어났다.
원종을 중심으로 한 문신들은 환도를 희망했고, 무신들은 몽골에 대한 굴복이라며 완강히 반대해 안향은 한동안 강화도에서 생활해야 했다.
이후 감찰어사, 상주판관을 거쳐 36세에 국자감(國子監, 고려의 국립교육기관)에 들어가 후진 양성에 힘쓴 안향은 1289년, 당시 세자였던 충선왕을 수행해 원나라의 수도 연경을 방문하게 되는데 이듬 해 귀국한 그의 손에는 특별한 필사본이 들려 있었다.
성리학 보급에 생을 바치다
주자의 글을 모두 모아 집대성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직접 필사해 돌아온 것인데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신하는 임금에게 충성하며, 예(禮)로 집안을 다스리고 신의(信義)로 사람을 대하고 스스로를 경(敬)으로 닦으며 모든 일을 정성스럽게 행(行)하는 성리학.
그 올바른 길은 30년에 걸친 몽골의 침공으로 민생의 고달픔이 극심하던 시절.
안향에게 한 줄기 서광처럼 다가왔다.
이때부터 안향은 수차례 원나라를 왕래하며 그곳의 학풍을 견학하고 박사 김무정을 중국에 보내 공자를 비롯한 그의 제자 72현의 상(像)을 그려오고, 제기와 악기, 경서와 역사 등을 구입하는 등 성리학 보급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펼쳤다.
또한 새로운 학문을 진흥하기 위해서는 인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자신의 집을 조정에 헌납해 당시의 국립대학격인 반궁(泮宮, 후에 조선의 성균관) 신축에 쓰게 하고, 왕에게 건의해 육품 이상은 은(銀)을, 칠품 이하는 등급에 따라 포(布)를 내게 하여 섬학전(贍學錢)이라는 육영재단을 설치했다.
이 같은 노력으로 1304년, 공자를 기리며 모시는 대성전(大成殿)이 개경 국학에 건립됐는데,만년에는 주자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호를 회헌(晦軒).
즉 주자의 호인 회암(晦庵)을 본떠 지을 만큼 성리학 전파에 온 힘을 쏟은 안향은 1306년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 성리학 역사의 출발점이 된 학자
안향을 말할 때 생전보다 사후에 더욱 그 공이 빛났다고 한다.
우선 국왕으로부터 선생으로 추앙을 받았고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을 비롯해 합호서원(충남 연기), 도동서원(전남 곡성), 임강서원(경기도 장단) 등 여러 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성균관 문묘를 비롯해 전국 230여 개의 향교 대성전에 위패를 봉안해 매년 춘추로 제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안향이 큰 존경을 받은 이유는 세도가문의 권력 남용, 관리의 부정부패, 양민 수탈 등 수많은 폐단에 젖은 고려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일어선 신흥 사대부들이 인간이 따라야할 올바른 가르침을 제시한 성리학에서 길을 찾았고 이를 토대로 ‘사대부의 나라’이자 ‘성리학의 왕국’인 조선을 개국했기 때문인데 한국 최초의 주자학자로 국내에 성리학을 전한 안향.
그가 있어 조선은 성리학을 뿌리삼아 500년간 찬란한 꽃을 피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