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향기)

[스크랩] 김정희 [金正喜, 1786~1856]

장안봉(微山) 2012. 12. 22. 10:31

 

김정희 [, 1786~1856] 
조선 후기의 서화가·문신·문인·금석학자.
본관 경주
완당·추사·예당·시암·과파·노과
별칭 자 원춘
활동분야 정치, 예술
출생지 충남 예산
주요저서 《실사구시설》《완당집》《금석과안록》 《완당척독》
주요작품 《묵죽도》《묵란도》

본관 경주. 자 원춘(). 호 완당()·추사()·예당()·시암()·과파()·노과(). 충청남도 예산에서 출생하였다.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충청우도암행어사·성균관대사성()·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24세 때 연경()에 가서 당대의 거유() 완원(옹방강()·조강() 등과 교유, 경학(금석학()·서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예술은 시·서·화를 일치시킨 고답적인 이념미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나라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하였다. 1840년(헌종 6)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풀려나왔고, 1851년(철종 2) 헌종의 묘천() 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학문에서는 실사구시()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그는 함흥 황초령()에 있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고석()하고, 1816년에는 북한산 비봉에 있는 석비가 조선 건국시 무학대사가 세운 것이 아니라 진흥왕 순수비이며, ‘진흥’이란 칭호도 왕의 생전에 사용한 것임을 밝혔다. 또한 《실사구시설》을 저술하여 근거 없는 지식이나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여서는 안 됨을 주장하였으며, 종교에 대한 관심도 많아 베이징[]으로부터의 귀국길에는 불경 400여 권과 불상 등을 가져와서 마곡사()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70세에는 과천 관악산 기슭에 있는 선고묘() 옆에 가옥을 지어 수도에 힘쓰고 이듬해에 광주() 봉은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다음 귀가하여 세상을 떴다. 문집에 《완당집()》, 저서에 《금석과안록()》 《완당척독()》 등이 있고, 작품에 《묵죽도()》 《묵란도()》 등이 있다.


김정희묘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799-2. 충남문화재자료 제188호. 조선시대.

추사고택
추사고택
             
 

1976년 1월 8일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며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의 고택이다. 원래는 99칸집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면적 265㎡ 가량이며 안채와 사랑채·문간채·사당채가 있다. 동쪽에 사랑채를, 서쪽에 안채를 배치하되 안채 대청의 방향은 다른 고택들과는 달리 동향이고 사랑채는 남향이다. 안채는 6칸 대청과 2칸의 안방과 건넌방이 있고 부엌과 안대문·협문·광 등을 갖춘 ㅁ자형의 집이다. 이러한 ㅁ자형 가옥은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에 분포된 이른바 대갓집 형태이다.

안방 및 건넌방 밖에는 각각 툇마루가 있고 부엌의 천장은 다락으로 되어 있다. 사랑채는 ㄱ자로 되어 별당채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지붕은 긴 홑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지형에 따라 기단의 높낮이가 생긴 곳에서는 맞배지붕으로 층을 지게 처리하였다. 사랑채의 함실 부분에도 맞배지붕에 이어붙인 지붕이 기능적으로 처리되어 있다.

고 택은 영조의 부마이며 선생의 증조부인 김한신(金漢藎)이 건립한 18세기 중엽의 건축물로서 당시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이다. 후손이 세거(世居)해 오다가 1968년 타인에게 매도된 것을 충청남도에서 1976년 문화재로 지정하고 동년 4월 25일 매수하였다. 집 안에 있는 김정희의 영정과 도장, 염주, 붓과 벼루 등은 일괄 보물 제547호로 지정되어 보관되고 있으며, 고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그가 어려서 공부했던 절 화암사가 있다.

고택의 오른쪽 담장에 달린 쪽문을 나서면 대대로 마셔온 석정(石井)이 있고, 거기서 100m쯤 가면 김정희묘(문화재자료 188)가 있다. 방마다 모사품이기는 하나 선생의 유묵이 걸려 있다.




추사적거지
추사 김정희 적거비
 

2002년 4월 17일 제주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되었다.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안성리 마을의 대정읍성 동문자리 바로 안쪽에 있다. 옛 대정현의 돌하르방과 김정희의 글씨 및 그림 복제품을 전시해 놓은 추사기념관이 있고, 김정희가 머물러 살던 초가 4동을 옛 모습대로 복원해놓았다. 김정희는 이곳에 머물면서 추사체를 완성하고 《완당세한도 阮堂歲寒圖》(국보 188)를 비롯한 많은 서화를 그렸으며, 제주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는 등 많은 공적을 남겼다.

김정희는 영조의 사위였던 김한신(金漢藎)의 증손으로, 1840년(헌종 6) 55세 되던 해에 동지부사로 임명되어 중국행을 앞두고 안동김씨 세력과의 권력싸움에서 밀려나 이곳으로 유배되었다. 유배 초기에 포교 송계순의 집에 머물다가 몇 년 뒤 현재의 적거지로 지정된 강도순의 집으로 이사하였다. 이 집은 1948년 제주도 4·3사건 때 불타버리고 빈터만 남았다가 1984년 강도순 증손의 고증에 따라 다시 지은 것이다.

초가는 주인댁이 살았던 안거리(안채), 사랑채인 밖거리(바깥채), 한쪽 모퉁이에 있는 모거리(별채), 제주도 특유의 화장실인 통시와 대문간, 방앗간, 정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념관 쪽으로 정낭이 하나 더 있는데, 이 집의 본래 정낭은 방앗간과 모거리 사이의 대문간에 있는 것이다. 김정희는 밖거리에서 마을 청년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으며, 모거리에 기거하며 추사체를 완성하고 《완당세한도》를 비롯한 여러 점의 서화를 남겼다.


남제주 유물관


   
제목 : 남제주 유물관
사진크기 : 800*521 (   원본사진보기)
출처 : ⓒ encyber.com
설명 : 제주 남제주군 대정읍 안성리. 추사 김정희의 적거지이다.
관련항목 : 대정읍



다산초당 현판

   
제목 : 정다산유적 다산초당 현판
사진크기 : 800*533 (   원본사진보기)
출처 : ⓒ encyber.com
설명 : 전남 강진 도암면.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다.
관련항목 : 정다산유적, 김정희


추사체 [] 

김정희는 20세 전후 이미 백가()의 서를 통달하였다. 13경()에 전력하였고 특히 주역()에 깊었다고 한다. 금석() ·도서() ·시문() ·전례()의 학()에 그 근원을 캐지 않은 것이 없고 더욱이 서법()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그는 한례()의 필법을 연구, 해서에 응용하여 소위 추사체를 창출했다. 예법()은 서법의 조가()로서 서도에 뜻을 두려면 예를 모르고서는 안 되며 또 예법은 가슴 속에 청고 ·고아한 뜻이 없이는 쓸 수 없다. 청고 ·고아한 뜻은 문자향() ·서권기()가 없이는 능히 손가락 끝에 나타내지 못한다. 평범한 해서와는 비할 바도 아니며 먼저 문자향 ·서권기를 가슴 속에 갖춤으로써 예법의 장본()이 되며 사예()의 신결()이 된다고 하였다.

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기라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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