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사대명필( 朝鮮朝 四大名筆)
※ (주) 조선전기의 명필가
♧ 四大名筆 조선초기에서 중기 사이에 배출된 4인의 명필.
安平大君 李瑢, 자암(自庵) 김구(金絿=광산김씨), 봉래(蓬萊) 양사언
(楊士彦), 석봉(石峯) 한호(韓濩)이다.
안평대군은 조맹부체(趙孟홰體)를 체득하여 활달하고 넉넉한 품(品)을 따를 이가 없었고 종왕(鍾王) 의 서체를 익혀 인수체(仁壽體)라는 독창적인 서체를 개척하였으며, 양사언은 진 체(晉體)의 대가로 해서(楷書) · 행서(行書) · 초서(草書)에 모두 뛰어났고, 한호는 왕희지(王羲之) · 안진경(顔眞卿)의 서법을 익혀 각 체에 모두 뛰어나, 후기의 대가인 김정희와 쌍벽을 이루었다.
◆ 안평대군(安平大君) 조선전기의 왕족 · 서예가
호 : 비해당 · 낭간거사 · 매죽현
본명 : 용
별칭 : 자 청지
활동분야 : 정치
이름 瑢 · 자 淸之. 호 비해당(匪懈堂) · 랑간거사(琅?居士) 매죽헌(梅竹軒). 세종의 셋째 아들. 1428년(세종10년) 안평대군에 봉해졌고. 1430년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쌓았다. 문종 때 조정의 배후에서 실력자구실을 하며, 둘째형 수양대군의 세력과 은연히 맞서 있었다. 그러나 1453년(단종 1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꾸며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일 때 반역을 도모했다 하여 강화도로 귀양 갔다. 그 뒤 교동도(喬桐島)로 유배되고, 그 곳에서 사사(賜死) 되었다. 시문(詩文) · 그림 · 가야금 등에 능하고 특히 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명필로 꼽혔다. 영조 때 복호(復號)되어 장소(章昭)라는 시호가 내렸다. 유필로 세종대왕영릉신도비(世宗大王英陵神道碑)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전한다.
◆ 양사언(楊士彦) 조선전기의 문인 · 서예가.
본관 : 청주(淸州)
호 : 봉래(蓬萊) · 완구(玩邱) · 창해(滄海) · 해객(海客).
별칭 : 자 응빈(應빈)
주요저서 : 《봉래시집(蓬萊詩集)》
본관 淸州. 자 응빈. 호 蓬萊 · 玩邱 · 滄海 · 海客. 1546년(명종1년)
式年文科에 병고로 급제. 大同丞을 거쳐 삼등현감(三登縣監) · 평창군수(平昌郡守) · 강능부사(江陵府使) · 함흥부사 · 철원군수 · 회양(淮陽)군수를 지내는 등 지방관을 자청했다. 자연을 줄겨, 회양군수 때 金剛山
만폭동(萬瀑洞) 바위에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8자를
새겼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안변(安邊)군수로 재임 중 지릉(智陵)의 화재사건에 책임을 지고 귀양갔다 가, 2년뒤 풀려나오는 길에 병사했다. 詩와 글씨에 모두 능하였는데, 특히 초서(草書)와 큰 글자를 잘 써서 安平大君 · 김구(金絿) · 한호(韓濩) 등과 함께 조선전기의 4대 서예가로 불렸다. 작품집에 봉래시집(蓬萊詩集)이 있고, 작품중에는 많이 알려진 “태산이 높다하여 하늘아래 뫼이로다…등이 있다.
◆ 한호(韓濩) 조선중기의 서예가.
본관 : 삼화(三和)
호 : 석봉(石峯) · 淸沙
별칭 : 자 景洪
활동분야 : 서예
출생지 : 황해도 개성
본관 三和, 자 景洪, 호 石峯 · 淸沙. 개성출생, 王羲之 · 顔眞卿의 필법을 익혀 해(楷) · 行 · 草등 각 서체에 모두 뛰어났다.
1567년(명종2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천거로 1599년 사어(司禦)가 되었으며, 가평군수를 거쳐 1604년(선조37년) 흡곡현령(?谷縣令) · 존숭도감 서사관(尊崇都監 書寫官)을 지냈다. 그 동안 명나라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거나 외국사신을 맞을 때 연석(宴席)에 나가 정묘한 필지로 명성을 떨쳤으며, 한국서예가에서 金正喜와 쌍벽을 이룬다.
그의 필적으로 《석봉서법》《석봉천자문》등이 모간(模刊)되었고.
친필은 별로 남은 것이 없으나 그가 쓴 비문(碑文) 은 많이 남아있다.
글씨로는 《허엽신도비(許曄神道碑)》(개성) 기자묘비(箕子廟碑) (평양)
《김광계비(金光啓碑)》 (양주) 《행주승전비(幸州勝戰碑)》《선죽교비(善竹橋碑)》 《좌상유홍묘표(左相兪弘墓表)》 등이 있다.
◆ 三大名筆 조선시대에 글씨가 특출하였던 세 사람의 書家 石峯 韓濩,
蓬萊 楊士彦, 秋史 金正喜를 일컫는다. 한석봉은 개성출생으로, 王羲之
顔眞卿의 필법을 익혀 楷 · 行 · 草등 각 서체에 모두 뛰어났다.
1567년(명종22년) 진사에 합격하고, 가평군수를 거쳐 1604년(선조37년) 흡곡현령(?谷縣令) · 尊崇都監書寫官을 지냈다. 그동안 명나라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거나 외국사신을 맞을 때 연희석에 나가 정묘한 필치로 명성을 떨쳤다.
그의 필적으로 《석봉서법》 《석봉천자문》등이 모간 되었다. 작품은 별로 남아 있지 않으나 碑文은 많이 남아 있다.
글씨로
《許曄神道碑》[용안] 《徐敬德神道碑》[개성] 《箕子廟碑》[평양]
《金光啓碑》[양주] 《左相兪弘墓表》등이 있다.
양사언은 1546년(명종1년) 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大同丞을 거쳐
三登縣監 · 平昌郡守 · 江陵府使 · 함흥부사 · 철원군수 · 淮陽(회양)군수를 지내는 등 지방관을 지냈다. 자연을 즐겨, 회양군수 때 金剛山 萬瀑洞 바위에 ‘蓬萊楓嶽元化洞天’ 8字를 새겼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김정희는 1819년(순조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
講院說書) · 충청우도암행어사 ·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 이조참판등을 역임하였다. 24세 때 연경(燕京)에 가서 당대의 巨儒 阮元 · 옹방강(翁方綱) · 曹江등과 교유, 經學 · 金石學 · 書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시서화를 일치시킨 고답적인 이념 미를 고도로 구현한 淸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하였다. 독특한 秋史體를 대성시 켰으며, 특히 예서 · 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작품에 《묵죽도(墨竹圖)》 《묵란도(墨蘭圖)》등이 있다.
◆ 김정희【金正喜】조선후기의 서화가 · 문신 · 문인 · 금석학자.
本貫 : 慶州
호 : 완당 · 추사 · 예당 · 시암 · 과파 · 노과
별칭 : 자 원춘
활동분야 : 정치 예술.
출 생 지 : 충남 예산
주요저서 : 《실사구시설》 《완당집》 《금석과안록》 《완당척독》
주요작품 : 《묵죽도》 《묵란도》
본관경주, 자 元春, 호 阮堂 · 秋史 · 禮堂 · 詩庵 · 果坡 · 老果.
충남 예산 출생, 1809년(순조9년) 생원이되고, 1819년(순조19년) 문과에 급제하여 世子侍講院說書 · 충청우도 암행어사 · 成均館大司成 · 이조참판등을 역임 했다. 24세때 燕京에 가서 당대의 巨儒 阮元 · 翁方綱 · 曹江등과 교유, 經學 · 金石學 · 書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 의 예술은 시 · 서활르 일치시킨 고답적인 이념미의 구현은로 발전을 보인 淸나라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하였다.
1840년(헌종6년) 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풀려나왔고, 1851년(철종2년) 헌종의 廟遷(묘천) 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학문에서는 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秋史體를 대성
시켰으며, 특히 예서 · 행서에 새강지를 이룩하였다.
그는 함흥 황초령(黃草嶺)에 있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巡狩碑)를 고석(考釋), 1816년에는 북한산 비봉에 있는 석비가 조선 건국시 무학대사가
세운 것이 아니라 진흥왕 순수비이며, ‘진흥’ 이란 칭호도 왕의 생전에 사용한 섯임을 밝혔다.
또한 《실사구시설》을 저술하여 근거 없는 지식이나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여서는 안됨을 주장하였으며, 종교에 대한 관심도 많아 베이징 [北京]
으로부터의 귀국길에는 불경 400여권과 불상등을 가져와서 마곡사(麻谷寺) 에 기중하기도 하였다.
70세에는 과천 관악산 기슭에 있는 선고묘(先考墓) 옆에 가옥을 지어 수도에 힘쓰고 이듬해에 廣州 奉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다음 귀가하여 세상을 떴다.
문집에 《완당집(阮堂集)》, 저서에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완당척독(阮堂尺牘)》 등이 있고, 작품에 《묵죽도(墨竹圖)》
《묵란도(墨蘭圖)》등이 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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