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향기)

[스크랩] 전남 장성 홍길동생가

장안봉(微山) 2012. 12. 22. 10:39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에 홍길동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그렇다면 홍길동은 실존했던 인물이 된다.


 허균의 소설 ‘홍길동은’ 조선 인조때 1623-1649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 홍길동은 1440년 세종 20년에 태어나 1510년 까지 생존 하였던 인물로 추정하고 있다.


 아버지는 홍상식, 어머니는 관기였던 옥영향, 그러니까 진찌 홍길동은 서자였다.아버지의 정실인 문씨 소생으로 두명의 이복형이 있었다.


 중국 및 일본의 문헌에도 홍길동의 일생이 기록되어 있다는데 종합해 보면 첩의 자식이라 과거 시험을 볼수 없자 집을 떠나 의적활동을 하다가 도술을 부렸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다가 해외로 탈출하였다는 내용은 소설 속의 홍길동과 비슷한 삶을 살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예종,성종,연산군,중종,선조조 실록에도 홍길동이란 이름이 강도 또는 도적으로 100여회 이상 기록되어 있다.


 홍길동과 같은 도당으로 여겨져 옥사한 엄귀순은 당상 무관으로 한해 추수하는 곡식이 3,4천석으로 이를 만큼 부유했다는 점을 보면 임꺽정과 같은 비천한 신분이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엄귀순의 행적이 실록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소설에서와 같이 당상관의 가문이였다면 기록이 있었을 것이므로 그 정도의 고위층과 관련이 있지는 않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홍길동의 행적은 처음에는 충주일대에서 활약했다.버젓이 당상관의 차림으로 무리를 이끌고 관아에 들어갔으며 그 기세에 눌려 지방 관아 들이 깍듯이 존대하였다고 한다.

 산속에 들어가 근거지를 두고 활동한 흔적은 없으며 지방의 권농이나 이정  유향소의 좌수,별감등도 알아 볼 정도였고 그 위세를 일반 사람들도 모를는 사람이 없을 정도 였다고 한다.


 실록에 홍길동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영의정 한치영,좌의정 성준,우의정  이극균이 ‘홍길동을    잡아 이보다 기쁜 일이 없다’라는 연산군6년 (1500년)의 기록이다.

 홍길동은 정 3품 당상관인 첨지중추부사를 자칭하여 무리를 이끌고 주로 관아에 들어가 기탄 없이 행동하였다고 한다. 이에 조정에서는 홍길동에게 강상죄를 적용하였다. 홍길동의 이러한 행동은 지방관리와 유향소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1501년 까지 관련자를 잡아 국문하고 홍길동의 죄를 도운 지방관리 엄귀순을 국문하였으나 승복하지 않고 옥사하였다고 한다.또 이에 관련된 권농,이정,과 같은 지방관리들을 변방으로 귀양 보냈다.

 그러나 정작 홍길동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탈옥했을 수도 있다고 한다.


 허균의 홍길동전은 조선시대 불합리한 서얼 차별과 백성에 대한 가혹한 수탈, 국방에 대한 부실등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국왕이 두려워 해야 할 것은  오로지 백성이라 역설하였다.

 허균은 백성을 현실에 순응하는 항민, 불만에 쌓인 원민, 사회를 바꾸기 위해 직접나서는 호민으로 나누었으며 홍길동을 호민을 대표로 형상화하여 홍길동전을 지었다.

 한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조선시대 3대 도적으로 장길산,임꺽정과 함께 홍길동을 논하면서 이들의 이름이 장사꾼이 맹세하는 구호에 까지 들어와 있다고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영남대학교 박홍규 교수는 그의 저서 ‘의적 정의를 훔치다’에서 이들이 설사 실제로는 의롭지 않았다 하더라도 민중들은 이들을 통해 부정한 체제에 대한 저항을 꿈꾸었기에 의적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생명력을 얻을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기라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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