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도 놀란 ‘신사임당 포장술’ [한겨레] [뉴스 쏙] 2009-04-17
혼인 뒤 19년 친정살이·남편 꾸짖는 당찬 여성 / 조선후기 노론 유학자들 ‘현모양처 전형’ 몰아
5만원권 인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는 6월, 한국 여성 위인의 대명사인 신사임당이 들어간 5만원권 화폐가 선보인다. 인물도 정해졌고, 도안도 나왔지만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신사임당을 선정한 관점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에, 5만원권에 들어간 신사임당의 초상화도 문제가 많다는 비판이 나온다.
역사 대중화에 앞장서 온 사학자 이덕일씨가 신사임당이란 역사 인물에 대한 의견을 내놨다. 신사임당 시절의 실제와 달리 남성 중심적 생각으로 만들어진 현모양처로 그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문제 지적이다. 한국화가 우승우 화백은 신사임당 초상화를 둘러싼 미술적인 부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만들어진 현모양처, 신사임당
신사임당(1504~1551)에 관한 가장 기초적인 사료는 셋째 아들 율곡 이이가 쓴 ‘나의 어머니 일대기’(선비행장)이다. 부친 이원수의 행장을 쓰지 않은 이이가 모친의 행장을 쓴 것은 그만큼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이의 글을 보면 많은 의문이 생긴다. 아들이 그린 신사임당의 실제 모습은 현모양처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신사임당이 중종 17년(1522) 이원수와 혼인한 곳이 외가의 외가인 강릉이란 사실부터가 심상치 않다. 게다가 사임당은 혼인 3년 후에야 시어머니 홍씨를 처음 만났다. 혼인 직후 세상을 떠난 부친 신명화의 삼년상을 치르고 나서야 상경했던 것이다.
이 무렵 조선은 혼인 방식을 중국식 친영례(親迎禮)로 바꾸려는 왕실·사대부들과 오랜 혼인 전통을 유지하려는 민간 풍습이 충돌하며 진통을 겪고 있었다. ‘장가(장인집)간다’는 말처럼 신부의 집에서 식을 치르고 상당 기간 머물러 사는 것이 전통 혼례 풍습이었다. 반면 왕실·사대부들은 신부집에는 인사만 하고 당일 본가로 돌아오는 친영례로 바꾸려 했다. 세종 17년(1435) 파평군 윤평이 태종의 서녀 숙신옹주와 혼인할 때 최초로 친영례를 실시했다고 <세종실록>은 전하고 있다. 사임당 혼인 무렵의 임금인 중종이 재위 10년(1515) “혼인은 만세(萬世)의 시작인데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가는 것은 천도에 역행하는 것이니 어찌 옳겠는가?”라고 비판한 것은 혼인 방식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위의 압박이 심해지면서 중국식 친영례로 바꾸는 사대부가가 늘어났지만 사임당과 그 부모는 전통 혼례 방식을 고집한 것이다.
이이가 신사임당이 서울 시댁에 정착한 때라고 전하는 중종 36년(1541)은 혼인 19년 후였다. 서울에 정착한 이유도 “시어머니 홍씨가 이미 늙어 가사를 돌볼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어머니가 가사를 돌볼 수 있었다면 사임당은 서울로 올라오지 않았을 것이다. 사임당의 모친인 이씨도 혼인 후 16년 동안이나 친정에서 따로 살았다. 상경 후에도 사임당은 “자나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란 유명한 시구대로 친정을 그리워했다.
이이가 ‘나의 어머니 일대기’에서 “아버지께서 혹시 실수하는 일이 있으시면 반드시 옳은 도리로 간하셨다”고 적은 것처럼 신사임당은 여필종부보다는 때로는 남편도 꾸짖는 여인이었다. 신사임당의 꾸짖음은 이원수가 윤원형과 함께 사림을 탄압한 이기와 어울리는 것에 대한 훈계로 해석된다. 이 때문에 이원수는 이기와 발길을 끊었다지만, 그가 종5품 수운판관에 임명된 명종 5년(1550)에 이기는 영의정이었다는 점에서 의문이 있다. 이이가 부친의 행장은 쓰지 않은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신사임당은 서울에 올라온 지 10년 만인 1551년 마흔여덟에 세상을 떠났다. 이이는 사임당이 “어려서부터 경전에 통달했고 문장에 능했다”고 썼지만 글은 전해지지 않고 그림만 전한다. 이이는 “어머니의 그림을 모사한 병풍이나 족자가 세상에 많이 전해지고 있다”고 예술가 신사임당을 회상했다.
사임당은 어떻게 현모양처가 되었나?
신사임당에 대한 거의 유일한 1차 사료인 ‘나의 어머니 일대기’에서 현모양처로 그리지 않은 신사임당은 어떻게 현모양처의 전형이 되었을까? 이이의 제자인 사계 김장생이 편찬한 <율곡연보>는 이이가 다섯 살 때 사임당이 아프자 몰래 외할아버지 사당에 들어가 기도했다고 적었다. 외가 강릉에서 나고 자란 이이가 강한 외가 종속성을 갖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기록이다.
이후 김장생의 제자인 우암 송시열이 ‘사임당이 그린 난초에 발하다’라는 글에서 신사임당 모자를 “상곡군 집안만이 앞에서 홀로 빛나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비교하면서 현모양처의 이미지가 시작되는 것으로 보인다. 상곡군은 성리학의 집대성자인 송나라 정호를 뜻하는데, 그 모친 후씨가 정호 형제를 배출한 것이 신사임당과 같다는 발상이다. 중국과 조선의 성리학자 모자를 나란히 높여 성리학을 조선의 유일사상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끼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송시열의 제자인 노론 계열 유학자들이 다수 사임당 예찬에 가담했다. 김창협의 문인 신정하는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보고 “그린 분은 석담(이이)의 모부인인데 나는 선생과 모부인을 존경한다”라고 썼고, 송상기는 “선생은 백세의 스승이다. 세상에 그 스승을 섬기면서 그 스승의 모친께 불경한 자가 어찌 있겠는가?”라고 이이와 사임당을 동일시했다. 물론 이이의 글을 통해 사임당이 현모양처와는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눈을 감았다.
신사임당은 이렇게 조선 후기의 집권당 노론에 의해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혼인 19년 후에야 시댁에 정착한 데 대한 설명이 필요했다. 노산 이은상은 1960년대에 쓴 <사임당 편>에서 ‘남편을 큰 인물로 만들기 위해 10년 뒤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라고 강릉 지방 전설을 인용해 합리화했다. 물론 사임당을 현모양처로 만들기 위해 후대에 창작된 전설이다.
신사임당이 화폐 인물로 선정된 이유에 대한 궁금증이 여전하다.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선정했다면 실제 사실과 맞지 않다. 또 아들이 화폐 인물인데 모친까지 선정해야 할 정도로 한국사에 인물이 없느냐는 의문도 생긴다. 여성예술가로서 선정했다면 그럴듯하지만 허난설헌·황진이 등 다른 예술가들은 왜 탈락했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현대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자아실현형 여성은 없는가란 의문도 생긴다. 여성 화폐 인물 선정이란 시대의 목소리에 부응하는 듯한 겉모습 뒤에 현모양처라는 전통 여성상에 이 시대의 여성을 묶어두려는 속의 잣대가 작용한 결과가 아니길 바라면서 이 문제에 대한 공론의 장이 다시 열리기를 기대한다.
이덕일/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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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돈에 또 일본풍 그림
오만원권 화폐 인물인 신사임당 초상화에 대한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필자는 한국화가의 한 사람으로서 문제를 제기해 보고자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해방 60년이 지난 한국 사회가 일본식 초상화의 영향에서 벗어난 우리 전통의 초상화가 실린 화폐를 가질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다. 일제 강점기 전통 미술이 큰 타격을 입는데 그 영향이 현재 화폐 속 인물들에게도 미쳤다. 미술사가인 고 오주석 선생이 <한국의 미 특강>에서 ‘지금 우리 화폐 속의 세종대왕과 이황·이이 선생 등의 초상은 모두 일본풍의 그림’이라고 비판한 것이 이런 현상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 초상화들은 모두 이당 김은호 계보의 화가들이 그렸는데, 이당은 1937년 조선 여성들이 금비녀를 모아 조선총독에게 헌납하는 모습 등을 그렸던 화가이다. 일본풍 그림을 이 땅에 크게 확산시킨 화가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당이 그린 신사임당 표준 영정을 배제했다면서 어떤 이유인지 그 제자에게 초상화 제작을 맡긴 것이다. 이종상 화백은 ‘이당의 초상화에서 얼굴 부분만 따온 것이고 머리와 복식은 고증을 받아 다시 작업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바탕은 이당의 그림이니 결과적으로 이당이 그린 영정이 되살아나는 모순이 발생했다.
일본 인물화는 장식성이 강하며 감각적 미감을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인물의 내면세계를 읽어내기 힘들다. 얼굴은 경직되어 표정이 없고 감정은 베일 속에 가려진 듯 알 수 없다. 짙은 화장으로 가리는 게 일본의 미감이기 때문이다. 조선식 초상화는 있는 그대로의 외모를 세밀하게 보여주면서 그 내면세계까지 묘사하는 특징이 있다. 이채 초상이 보여주듯 검버섯까지 그려 현대 의사들이 병명까지 알 수 있으며, 채제공 초상이 약간 사시인 눈까지 그대로 표현하듯 극사실주의 전통이 흐른다. 거기에 인물의 내면세계까지 표현해 인물이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면 맑고 담담한 색채가 감상자를 깊이 빠져들게 하다가도 어느 순간 뒤로 물러서게 하는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세밀한 외형과 정신세계를 함께 그려 놓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많은 화가들이 이십대부터 초상화에 두각을 나타낸 것은 초상화가 시력과 직결된 문제라는 것을 말해준다. 조선은 초상화에 관한 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도화서 화원은 중인 출신이지만 국왕 어진의 작품성이 인정되면 현감 직위까지 오를 수 있는 특혜를 주었다. 어진화사는 명성이 높아 초상화 주문도 잇따랐음은 물론이다. 조선의 어진화사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젊은 화가들이 많이 선정되었다. 국민 모두가 사용하는 화폐 인물을 그리는 화가 선정은 조선시대 어진화사 선정보다 투명하고 객관적인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런 절차가 생략되었기 때문에 뒷말이 많은 것이다. 한국은행은 지금이라도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우승우/한국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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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 가라사대
“신사임당 업적은 효성…내조…교육…”
한국은행은 2007년 11월 10만원권과 5만원권의 인물을 각각 백범 김구와 신사임당으로 결정하면서 신사임당으로 선정한 이유를 “우리 사회의 양성평등의식 제고와 여성의 사회참여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고, 문화 중시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며, 자녀의 재능을 살린 교육적 성취를 통하여 교육과 가정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등의 효과가 기대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은이 당시 낸 보도자료 중 참고 자료의 ‘인물 주요 업적’을 보면 ‘현모양처’ 측면을 중시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들이 나온다. 이 자료는 신사임당을 “사림파 집안에서 태어난 사임당은 각별한 훈도를 받아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고 자수와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으며, 남편 이원수를 격려하여 벼슬길로 나아가게 하고 항상 정도를 걷도록 내조하는 등 높은 덕과 인격을 쌓은 어진 아내의 소임을 다하였다. 또한 사랑과 엄격한 교육으로 네 아들과 세 딸을 모두 훌륭하게 길러냈는데…(중략) 영재교육에 남다른 성과를 보여주었다”고 설명한다.
한편 한은은 논란이 되고 있는 신사임당 화폐 초상의 원화는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승윤 발권정책팀장은 “이종상 화백이 그린 원화는 화폐를 만들기 위한 기초자료로 화폐에 들어간 도안은 이 원화를 고쳐 그린 것”이라고 설명하고 “원화를 공개할 필요도 없고 공개해 혼란스럽게 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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