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재 이언적 先生
1491(성종 22)∼1553(명종 8)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 관향은 여강(驪江). 성종 22년 경주 양좌촌(慶州 良佐村)에서 태어났다. 생원(生員) 번(蕃)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주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鷄川君) 소(昭)의 딸이다.
연산(燕山) 8년에 구사재(舅四宰) 손중돈(孫仲暾)에게 취학(就學)하여 성리학을 익히고 늘 산사( 山寺)에 거처하면서 독서(讀書)에 열중(熱中)하였다.
중종(中宗) 9년(1514) 문과에 급제, 천관랑(天官郞)을 비롯한 인동현감(仁同 縣監)·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밀양부사( 密陽府使) 등을 거쳐 동 25년(1530) 사간(司諫)에 이르렀다.
당시 김안로(金安老)의 거용(擧用)에 극력 반대하다가 심언광(沈彦光) 등의 모략(謀略)으로 물러났다. 동 32년 김안로(金安老) 일파가 쫓겨난 뒤 종부시 첨정(宗簿寺僉正)과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다.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있을 때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성(名聲)이 자자(藉藉)하였다.
수천언(數千言)의 상소(上疏)를 올려 국가 대본(國家大本)과 정치 강령(政治綱領)을 논하여 왕의 찬탄을 받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특가(特加)되어 예조참판(禮曹參判)과 우참찬(右參贊)을 역임하고 인종(仁宗) 1년(1545) 의정부 좌찬성(議政府 左贊成)이 되었다.
이듬 해 권신(權臣)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사서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壁書事件)으로 모함(謀陷)하여 강계(江界)에 천적(遷謫)되었다. 적소(謫所)에서 그의 절필(絶筆)인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29권을 집필중(執筆中) 완성하지 못하고 63세를 일기로써 타계(他界)하였는데,
1568년 선조 즉위시(宣祖 卽位時) 시임(時任) 좌의정 이명(左議政 李蓂)의 초계 주청(初啓奏請)으로 신원 복권(伸寃 復權)되어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追贈)되고 다음 해 문원(文元)이라 증시(贈諡)되었다.
선조 6년,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에 제향되고, 광해군(光海君) 2년(1610) 문묘(文廟)에 종향(從享)되었다. 그의 주리(主理) 학설은 퇴계(退溪)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으며,
28세 때에 선배학자(先輩學者)인 손숙동(孫叔暾)과 망기당(忘機堂) 조한보(曺漢輔)와의 수삼차(數三次)에 걸친 무극(無極)·태극(太極)에 관하여 벌린 논쟁(論爭)에 뛰어 든 것은 조선 초유(初有)의 대논쟁(大論爭)이라 한다.
후에 율곡(栗谷)은 선생을 한훤당(寒暄堂)· 일두(一두)· 정암(靜庵)과 함께 동방 사현(東方 四賢)으로 추모(追慕)하였다.
저서로서는 봉선잡의(奉先雜儀)·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진수팔규(進修八規)·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속 대학혹문(續 大學或問)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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